〈 77화 〉테라포밍 *
생각해보면 그러했다.
원작 속 마나 각성에 대한 설명을 읽어보면 ‘육신의 한계가 사라지고 자연히 그 신체에 마나가 쌓인다’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나는 선령일일 만요월월(仙令日日 灣謠月月)의 영향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마나가 늘어난 적이 없지…’
편의상 마나각성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마나각성은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몸이 되는 것이 아닌 마나를 자연히 쌓을 수 있는 몸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확실히 마나각성을 하지 않았다.
‘다들 빠르든 느리든 모두 각성을 끝마쳤는데 왜 나만 아직 각성을 하지 않았지?’
소설 속에 들어온 것에 대한 패널티?
아니, 그렇다기에는 지금껏 시스템 메세지에 언급은 하나도 없었다.
적어도 패널티가 존재했다면 관련된 언급은 조금이라도 있었겠지.
내 육체에 재능이란 것이 한 줌도 없기 때문에?
…이것도 아니다.
생각해 보면 이 육체는 ‘다른 차원을 구한 용사’의 피가 절반이나 흐르고 있다.
나는 선령일일 만요월월(仙令日日 灣謠月月)의 영향을 받기 훨씬 전부터 시각도, 청각도 무척이나 예민했다.
작은 키와 살집에 가려졌었지만 기본적인 골격도 좋았고, 근육도 정말 이상적으로 제 자리를 잡았다.
이 육체에 내재된 잠재력은 상당하다는 증거이리라.
오히려 마나에 대한 재능이 넘치는 것이 훨씬 정상일 것이다.
그렇다면 소거법으로 남은 결론은 하나다.
‘내 몸에 쌓인 탁기 탓이나 보네.’
스킬의 효과로 조금씩 빼내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아직 많이 쌓여있나 보다.
마나 각성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렇다면 조급하게 퀘스트의 보상으로 마나각성을 얻으려 할 필요는 없었다.
시간이 흘러 몸속의 탁기가 많이 줄어든다면, 저절로 마나각성이 일어날 테니까.
하지만…
- 꿀꺽.
‘힘·민첩·체력·지능·기교 숙련도 획득량 50% 증가라…’
그 시간 동안 내가 놓칠 저 숙련도들은?
고작 10%나 20% 정도가 아니다.
아주통 크게 50%다.
이건 좀… 참기 힘들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도 이 퀘스트는 받는 것이 좋아. 제라드는 날 신뢰하고 있으니 성공 확률도 굉장히 높고, 심지어 보상이 마나각성만 있는 것이 아니잖아?’
시스템도 시간만 지나면 얻을 보상을 주는 것은 하드모드 퀘스트의 보상치고 좀 짜다고 생각했는지, 디시빙(Deceiving)이라는 마법까지 얹혀 있었다.
여태껏 그렇듯 스킬의 상세 내용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기대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내가 얻게 될 최초의 ‘마법’ 스킬이니까.
“수락한다.”
띠링!
[*HARD MODE* 퀘스트가 수락되었습니다!]
주사위는 이미 굴려졌다.
이제 혁명의 시작을 기다리면 된다.
혁명이 막 시작했을 때, 제라드가 그 어느 때보다 내게 신경을 기울이지 못할 테니까…
기습하기 가장 알맞다.
…
“…정확한 때가 언제시라고요?”
“흐음… 아마 나흘 뒤가 될 것 같군.”
“…그렇군요.”
“자네도 훈련생들을 이끌 준비를 하도록. 아, 자네를 제외하고도 왕 자건 훈련생에게 보조를 맡겼으니 어렵지 않을 것이야. 그냥 그들을 이끌고 지정된 장소로 모이기만 하면 된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끼익… 쿵.
- 터벅터벅.
나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나흘 뒤라…
생각보다 혁명의 시작이 늦다.
시간이 촉박하다.
상태창을 불러내어 내게 남아있는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몽환의 구슬 사용 효과가 얼마 남지 않았다.
계산대로라면…
‘나흘 뒤 저녁, 효과가 끝난다…’
빠르게 행동하지 않으면 늦을 것이다.
나는 다시 한번 계획을 점검하며 시간을 보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날짜는 드디어 시작의 전날.
이미 해가 졌으니, 자고 일어나면 이 전투직 합숙소는 전례 없던 혼란에 휩싸일 것이 뻔하게 예상되었다.
날이 밝기 전에 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서둘러 크리스에게 찾아갔다.
“엇? 찬영!”
크리스는 언제나 그랬듯 나를 웃으며 반겨주었다.
그런 그녀의 손을 잡고, 말없이 인기척이 없는 곳으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 터벅터벅.
- 터벅터벅.
평소와 달리 내 진지한 기척을 알아챈 것인지 크리스 또한 진지한 얼굴을 했다.
어느 때와 같은 오늘이었다면 분명 부끄러운 일을 하러 가는 줄 알고 얼굴을 붉혔을 텐데…
내가 그녀를 알아가는 만큼 그녀 또한 나를 알아갔다.
서로 깊은 대화를 하지 않아도 표정과 몸짓만으로 서로의 생각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인연의 고리가 강하게 이어져 있다.
…그러니 미리 이야기해두어야 한다.
- 터벅터벅… 탁.
“크리스.”
“응.”
“내일이야.”
“내일이라면… 그 ‘혁명’이?…”
“응. 내가 지난번에 교관의 혁명이 일어나면 어쩌자고 했지?”
“우리 둘이서 일이 전부 끝날 때까지 같이 숨어있자고 했었지?”
“…그랬지. 하지만, 내게 해야 할 일이 생겼어.”
“해야 할 일?”
“그래. 아마 나는 너와 같이 움직이지 못할 것 같아. 일단 너 혼자서 숨어 있어 줄래?”
“…어…어째서? 해야 할 일이란 것이 뭔데? 설마… 그들과 대립 한다든지?! 안돼! 그런 위험한…!”
크리스는 무언가를 눈치 챈 듯 했다.
나는 아무런 단서를 흘리지 않았음에도.
이것이 그 유명한 여자의 직감이란 것일까?
아름다운 두 눈동자가 불안에 떨었다.
나에게는 그녀를 안심시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내일이 지나면 모든 것이 들통나겠지만…
나는 거짓말을 입에 담았다.
“하하. 아니야. 네가 크게 걱정 안 해도 되는 사소한 일이야. 그냥… 잠깐 시간이 필요한 일이라서.”
“그렇다면 내가 도와줄게! 찬영을 혼자 보낼 수는…!”
“괜찮아. 별일 없을 거야. 나는 강하잖아? 적어도 훈련생 중에서는 가장.”
“…찬영이 강한 건 잘 알아. 그렇지만…”
“정말로 별일 아니라니까?”
“그…그래?”
“그래. 헤어짐은 잠깐이야. 우리는 곧 다시 보게 될 거야.”
“…정말?”
“정말. 약속할 수 있어. 우리는 다시 볼 거야.”
“…알겠어. 찬영은 지금까지 거짓말 한번 하지 않았으니까. 믿을게.”
크리스는 확정하듯 말하는 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 ‘곧’이라는 것이 그녀의 생각보다 무척, 무척 길겠지만…
결국에는 7년 후에 만나게 되리라.
내 계획이 흔들림 없이 진행된다면.
나는 그런 그녀를 보내고 브랙에게 찾아갔다.
브랙은 어제와 똑같이 훈련장에서 개인 수련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참 언제봐도 노력을 하는 성실한 남자다.
그래서 이런 부탁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거지만.
“브랙. 너는 내일 일어날 사건과 무관해. 네가 크리스를 잠시만 챙겨줬으면 좋겠어.”
“후욱! 후욱! 음?… 찬영? …갑작스럽고 뜬금없는 말이군. 크리스라면… 자네의 애인인 베넷 양을 말하는 건가? 게다가 내일 일어날 사건이라니?”
“내일 좀 큰 사건이 일어날 거야. 어쩌면 크리스가 위험할지도 모르고. 나 대신 네가 좀 지켜 봐줘.”
“…표정을 보니 놀리는 건 아니군. 알겠다. 허나 이 역할은 본래 연인이 해줘야 알맞은 일. 내일부터는 자네가 직접 해야 하는 역할인 것을 잊지 말게.”
“…그래.”
나는 쓰게 웃으며 브랙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는 크리스와 달리 많은 말을 해줄 수 없었다.
이 정도만 해도 성실한 그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리라.
이것으로 어느 정도 안심이다.
…
새벽 특유의 차가운 공기가 코를 간질인다.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한다.
하지만 미약한 긴장 때문인지 잠이 찾아오지는 않았다.
이미 숙소 내부에 잠을 안 자고 있는 사람은 나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스윽…
허리를 들어 크리스가 누워있는 침대를 쳐다본다.
당연하지만 그녀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잠든 얼굴을 몇 분간 바라보다가, 곧 나도 누워 잠에 들었다.
그날 꿈은 꾸지 않았다.
…
크리스와 브랙은 어딘가에 숨어있었다.
그리고 왕 자건과 훈련생들은 매번 그랬듯이 구보를 하기 위해 공터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저 멀리 보이는 제라드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 터벅터벅.
제라드 주위에는 다섯 명의 남녀가 서 있었다.
전부 11구역에서 스쳐 지나가면서 봤던 전투직들이다.
나는 그들이 예전 제라드의 제자였고, 혁명에 동참하기로 한 이들이란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저 멀리서 봤을 때는 제라드와 무언가 중요한 대화를 하는 것처럼 보이던 이들이 다가오는 나를 발견하자 말을 멈춘 채 이쪽을 무척이나 경계했으니까.
이미 이들의 상태창은 다 외워 놓았다.
이들뿐만이 아니라 11구역 전투직 전부.
그러니 괜히 그들 앞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보일 필요는 없었다.
“…훈련생인가? 총… 크흠! 제라드님께는 무슨 볼일이지?”
“하하. 그만둬. 그 역시 우리와 뜻을 함께하기로 한 동료이니.”
“아하. 그렇습니까? 참, 실례가 많았군. …오늘따라 내가 좀 민감해서 말이지.”
“계획의 일정을 숨길 것 없다. 이 훈련생은 아직 새끼에 불과하지만, 용의 새끼야. 그는 이미 오늘이 길일인 것을 알고 있었어.”
“허… 꽤 총통님의 신뢰를 두텁게 받고 있나 보군요.”
“그렇지. 뭐… 젊다 보니 아직 감정으로부터 완벽히 자유로운 것은 아닌 것 같지만… 잘 키운다면 큰일에 쓸 수…”
그들은 나를 앞에 두고 잡담을 했다.
전투직들은 제라드의 말에 나를 향한 경계를 완전히 풀었다.
그들이 경계를 푼 것에는 내가 비무장이었다는 것도 큰 역할을 했으리라.
나는 칼은 물론이고, 가죽 갑옷조차 입지 않았으니까.
“한데… 박찬영 자네에게는 훈련생들의 통솔을 맡겼을 텐데. 무슨 볼일이 있어서 찾아왔지?”
“음… 제 착각일 수도 있지만… 보고드릴 일이 있어서 급하게 왔습니다.”
“보고?”
“네. 방금 우연히 훈련소 내부의 직원들이 모여 대화하는 것을 들었거든요. 대충 듣기로는, ‘오늘… …중앙 지휘소… …밀명… 당일… 일망타진… …평범을… 연기…’라고 했습니다… 너무 멀리서 들었고, 저를 보자마자 그들이 흩어졌기에 확신은 불가능하지만요.”
“…뭐라? 그게 사실인가?”
- 끄덕.
나는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을 들은 제라드를 포함한 여섯 명의 전투직들은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이건 아무리 봐도…
‘계획이 새어 나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
“…모두 이곳으로 집결까지 얼마나 시간이 필요하지?”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12구역 동지도 출발까지 1시간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젠장! 박찬영 훈련생, 그 말이 사실이 맞나?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적어도 ‘중앙 지휘소’와 ‘밀명’은 확실하게 들었습니다.”
“제기랄!”
- 퍼억!
제라드가 돌부리를 걷어찼다.
마나가 담긴 발길질에 돌이 부서져서 자갈이 되며 흩날렸다.
나는 흥분한 제라드에게 말을 이어 했다.
그가 냉정을 되찾으면 안 된다.
계속 몰아치듯 상황을 이끌어 가야만 했다.
“우선 그 훈련소 내부 직원에게 가서 제대로 들었는지 확인을 하시는 것이 어떨까요? 아직 확정된 이야기는 아니니까요.”
“그래야겠군! 다들 뭐하나! 어서 서둘러서…!”
“네…넵!”
내 말에 고개를 번쩍 든 제라드가 빠르게 등을 돌려 합숙소로 향하기 시작했고, 다섯 명의 전투직들도 제라드의 뒤를 따라 내게 등을 보이며 뛰어가기 시작했다.
모두들 흥분했고, 당황해 있었다.
그들의 의식은 전부 합숙소에 집중이 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내가 바라 마지않던 기회다.
- 탁!
기합은 없었다.
그저 다리에 마나를 최대로 실은 뒤, 도약했다.
제라드의 등을 향해.
- 푸욱!
“커…억?!”
인벤토리에서 꺼내어진 칼이 제라드의 등을 꿰뚫는다.
척추뼈의 반항은 마나를 실은 나의 완력에 가볍게 스러졌다.
칼날이 심장을 완전히 짓뭉개었다.
“…어?”
“초…총통님?”
볼 것도 없이 즉사다.
칼은 회수하지 않았다.
지금 내게 1초는 매우 소중했다.
적어도 칼 따위를 회수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는 제라드의 심장을 꿰뚫은 것을 느끼자마자 칼자루에서 손을 놓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다섯 명의 전투직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져야 한다.
- 탁탁탁!!
“…칼? 어디서…? 분명 없었는…”
“즉사, 즉사야. 총통님이 돌아가셨어!”
“…이런 시발! 뭐해! 잡아!!”
“젠장! 젠장, 젠장! 무슨!!”
- 탁탁탁!!
- 탁탁탁!!
그래도 전투의 경험은 풍부하다는 것일까.
제라드의 맥을 짚어본 놈들은 그가 죽었다는 것을 확신한 뒤,
갑작스러운 나의 배신에도 단박에 정신을 차리며 나를 뒤쫓기 시작했다.
괜찮다.
이미 나와 그들의 거리는 꽤 떨어져 있으니.
내가 달리는 방향은 숲 쪽이다.
어째서 전투직 합숙소가 아닌 숲이냐고?
아직 이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정보가 없는 다른 전투직들이 보기에는 내가 쉘터를 배신하고 제라드 교관을 찌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 온 지 2달도 안 된 애송이의 말을 믿어줄지, 아니면 같이 동고동락하며 생사를 함께한 11구역의 전투직 동료의 말을 믿어줄지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뻔한 결과다.
“놈을 잡아!!”
- 탁탁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