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테라포밍 *
팀별 훈련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3개의 팀은 우리 팀의 뒤를 이어서 차근차근 훈련의 단계를 밟아왔으며, 가장 먼저 합격점에 다다른 우리들은 남는 시간이 많았다.
제라드가 목표를 달성한 팀에게는 터치를 잘 안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각자의 개인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었다.
브랙은 이미 통과한 훈련의 복습이나, 자기 훈련에 매달렸다.
언제부턴가 나를 불타는 눈으로 쳐다보던 브랙은 쉴 틈이 없다는 듯이 저렇게 훈련에 목매고는 했다.
그것은 7년 뒤에서 내가 익숙하게 보던, 교관 브랙의 모습이었다.
내가 별 신경 쓰지 않은 2명의 팀원은 나무 그늘에 누워 쉬면서 잡담을 즐겼고,
나와 크리스는…
“흐읏… 핫…!”
며칠 연속으로 밤낮없이 서로의 몸을 탐했다.
물론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 숨어서.
이렇게 자주 둘이서만 사라지니 대부분은 눈치를 채는 것 같았지만…
훈련생들끼리 연애를 하는 사람이 우리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그리 아니꼽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나와 크리스는 거의 맨 처음부터 연애 중인 티를 팍팍 내었고.
- 으으… 포기해야겠지?
- 찔러 볼 틈도 안 주더라…
그저 나를 노리던 여자 훈련생들이 안타까운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남들이 보기에 나 박찬영은 잘생겼고, 능력도 있으며, 성격도 좋은…
이 이상 완벽할 수 없는 애인감으로 비치겠지.
‘실제로도 전부 맞는 말이잖아?’
크리스는 날이 가면 갈수록 섹스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섹스 도중 절정을 경험한 것도 옛날 일이고, 이제는 완전히 즐기는 단계에 도달했다.
내가 눈을 감고 넣어도 그녀의 질인 것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크리스의 몸에 익숙해졌을 때쯤.
드디어 ‘시험’의 날이 다가왔다.
“오늘은 예고했던 대로 시험의 날이다!”
미래와 마찬가지로 7년 전의 팀별 훈련에도 마지막 날에는 시험을 한다고 예고되어 있었다.
몬스터를 직접 상대해 보는 시험이.
“자진해서 먼저 나올 팀 없나? 없으면 내가 임의로…”
“저희가 먼저 나서고 싶습니다!”
“오호. 패기롭군! 좋다. 훈련 장소로 이동하지!”
“네! 가…감사합니다!!”
먼저 나서겠다고 한 팀을 본 제라드는 상당히 흡족해했다.
불리한 것을 알면서도 용기 있게 나선 훈련생이 기특했나 보다.
음…
당연하지만 첫 번째로 시험을 보겠다고 나선 팀은 우리 팀이 아니었다.
제라드의 패기롭다는 칭찬에 무척이나 기뻐한 훈련생은, 훈련소 전체 2등의 성적을 가진 왕 자건이다.
7년 후에서 브랙, 광년이와 겪은 시험에서 그랬듯, 첫 번째로 나서는 팀이 오히려 유리할 텐데 어째서 이번에는 나서지 않았느냐고?
그건 이번에는 첫 번째로 나서는 팀이 아무리 봐도 유리할 것 같지 않아서 그랬다.
그때의 판단이 내려진 가장 큰 근거는 브랙과 광년이가 교관으로서 뛰어난 자질을 보유했다는 것이다.
현명한 그들이라면 공정성을 위해서 대비를 할 것이 분명하니까.
하지만 제라드는?
…안타깝지는 그는 다른 것은 몰라도 도무지 교관에 대한 재능이 뛰어나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는 훈련 내내 높은 강도의 훈련에 따라오면 좋고, 아니면 그만이라는 자세를 고수했으니까.
절대 광년이와 브랙이 했던 것처럼 첫 번째 팀을 위한 안배를 해놨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렇기에 첫 번째로 나서는 것은 꺼려져. 이번 시험의 상대가 ‘오크’인 것을 확신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아무도 첫 번째로 하겠다고 나서지 않으면 제라드가 임의로 선정을 할 테니 1/4 확률로 우리가 걸리니…’
훈련생의 팀은 총 4개다.
게다가 우리가 압도적인 1등을 차지하고 있으니, 제라드가 첫 번째 시험을 볼 팀으로 우릴 주목할 확률이 가장 높다.
그것을 피하고자 내가 일부러 소문을 한가지 흘렸다.
제라드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왕 자건의 주변을 중점으로.
‘놈은 제라드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어. 그러니 제라드가 어련히 알아서 안배해놨을 것이라 믿을 거야.’
7년 후에 내가 블랑, 리 샤오린, 마다치 켄지, 이강인을 설득했던 것과 똑같은 내용으로 왕 자건을 설득했다.
그와 사이가 좋지 않은 내가 직접 말하면 의심을 살 테니…
왕 자건의 주변 인물에게 생각의 실마리를 하나씩 흘리는 방법으로.
즉, 그는 지금 ‘나는 다른 이들과 다르게 한 수 앞을 읽었다!’라고 생각하고 있으리라.
그러니 저리 자신감 넘치게 첫 번째로 하겠다고 나서지.
‘내가 놈의 생각을 유도했다는 것을 모른 채.’
왕 자건의 움직임은 나의 예상과 한치도 다르지 않았다.
자진해서 실험용 생쥐가 되어 시험장 앞으로 섰다.
- 꾸익!! 꿰에에엑!!
- 꾸륽 꾸륽…
‘다행히 시험 상대는 오크인가… 변하지 않았네.’
크리스처럼 아공간 스킬이 없는 제라드는 훈련장에 미리 오크 4마리를 준비시켜놨다.
그리고 그 오크들의 신장은…
모두 같았다.
‘역시 첫 번째로 나선다고 어드벤티지는 없는 건가?’
아니,
시작할 때가 되면 제라드가 나서서 왕 자건이 상대할 오크의 팔을 한 개쯤 부러뜨릴 수 있다.
조금 많이 과하긴 해도 아예 밸런스 조절이 없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왕 자건 또한 살짝 당황한 얼굴이었지만, 기대를 완전히 저버린 것은 아닌지 표정을 다시 바로 고쳤다.
하지만 곧바로 시험이 시작되면서 그것이 아닌 것이 밝혀졌다.
“시작해라!”
“어… 교…교관님? 이대로요?”
“음. 무언가 문제 있나, 왕 자건 훈련생?”
“…아닙니다.”
어드벤티지는 없었다.
왕 자건은 말 그대로 패널티만을 짊어진 채 시험을 시작해야 했다.
그의 말을 믿은 4명의 팀원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서.
- 꿰에에엑!!!
쿵쿵쿵!!
밧줄에서 풀려난 오크가 왕 자건의 팀원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
시작 전부터 팀의 리더를 향한 신뢰가 깨졌다.
게다가 상대에 대한 정보 하나 없이 치른 시험은 아무리 2위의 팀이라고 한들, 실패할 확률이 더 높았으리라.
왕 자건의 팀이 오크에게 패배한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
우리 팀은 어렵지 않게 시험을 통과했다.
팀원들이 오크에 겁을 먹기에는 내가 너무 든든했으니까.
솔직히 이제 와서는 전력으로 상대한다면 오크에게 밀리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오크의 기본 근력과 민첩은 무척이나 높았지만…
내게는 마나가 있다.
테라포밍에서 내가 보낸 시간만 4달이 넘어가는데, 아직도 오크 하나 맞상대를 하지 못하는 건 말도 안 된다.
심지어 내겐 시스템도 있는데.
나는 제라드에게 너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만 힘 조절을 해가며 팀원과 협력해 오크를 잡았다.
“1위 팀에 속하는 팀원은 내일까지 원하는 것을 생각해 각각 내게 보고하도록! 웬만한 요구는 들어주도록 하겠다!”
7년 뒤 미래에서는 10개의 팀 1위 보상으로 백원후(白猿猴)의 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주었다.
하지만 7년 전인 지금은 그런 귀한 장비를 훈련생에게 줄 만큼 남아돌지는 않나보다.
아니면 고작 4팀 중 1위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난이도가 낮아서 보상이 낮은 것일 수도 있고.
보상이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찬영? 옷이 찢어졌어.”
“어? 그러네. 아까 오크랑 정면에서 상대하다가 좀 찢어졌나 봐.”
크리스의 말에 내 상의를 쳐다보자, 가죽 갑옷의 틈 사이로 옆구리 쪽에 길게 찢어진 부분이 있었다.
옆구리에는 생채기 하나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내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나 보다.
“뭐, 됐어. 이정도야 별로 신경 쓰이지도 않고.”
“…”
“크리스?”
“…응! 그러네.”
나는 외투를 걸쳐 입으며 찢어진 부위를 가렸다.
그나저나 뜻밖에 소원권 하나가 내 눈앞에 떨어졌다.
소원권은 너무 거창하고, 요청권 정도가 적당하려나?
과한 요구는 들어주지 않을 테니까.
‘음… 이러면 몰래 하려고 했던 것을 허가를 받고 떳떳이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오히려 질 좋은 가죽 갑옷이나 칼보다는 이런 보상이 내게 좋았다.
당장 쓸 곳이 있거든.
*
똑똑똑!
“들어와라.”
“실례하겠습니다.”
끼익… 쿵.
이제는 너무 많이 들어와서 익숙해진 곳이다.
나는 문을 열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당연하다는 듯 제라드가 앉아있었다.
“그래. 3일이 지났군. 프룸? 아니면, 무언가를 요구하려고 왔나?”
“둘 다입니다.”
“한번 들어보지.”
나는 제라드에게 프룸을 건네받으면서 의자에 앉았다.
내가 할 요구사항은 길지 않았지만, 거절당할지도 몰랐다.
사람에 따라서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거든.
“지난번 제게 계획서를 보여주셨을 때, 내용을 보면 팀별 훈련 다음은 전투직 실습이라고 적혀있었습니다.”
“그렇지.”
“혹시 전투직 실습을 어느 구역으로 나가는지 알 수 있을까요?”
“흐음… …알려줘도 별 상관없겠지. 11구역이라네. 원래는 전통적으로 12구역으로 가지만, 지금 그곳에 약간 사정이 있어서.”
역시.
내 예상대로 12구역이 아닌 11구역에 실습을 나가는 것이 맞았다.
원작대로라면 이강인이 백원후 빅터에게 쫓긴 이유도 이 과거에 원인이 있으리라.
하지만 놈이 출몰하는 구역은 11구역.
그렇다면 7년 전, 적어도 11구역 근처로 이강인이 지나갈 일이 있던가…
높은 확률로 11구역으로 실습을 나가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추론이 가능했다.
“그렇다면… 혹시 제가 실습을 나가 있을 때, 잠깐 개인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요?”
“개인 시간?”
“네. 2~3시간이면 충분합니다. 최소한 11구역 정찰지대 내부에 있을 것을 약속드리며, 그것을 어긴다면 어떠한 벌이라도 받아들이겠습니다.”
“개인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따로 행동하겠다는 뜻인가?”
“네. 잠깐 남들에게 보여주기 어려운 볼일이 있어서요…”
“…그건 자네의 애인과 관련이 있나?”
“…네? 어… 그… 그건…”
“…후우… 훈련소 내부 규율에 따르면 탈영은 곧 사형이라네. 내 자네를 최대한 변호를 해주겠다만, 조금이라도 늦는다면 곱게 넘어가진 못할 거야.”
이런 시발.
제라드가 나를 오해 했다.
애인과의 성적인 시간을 갖기 위해 개인 시간을 달라는 것으로.
‘…근데 결국 허가는 받았으니 상관없지 않나?…’
하지만 나의 이미지가 망가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까지 무력과 지력을 겸비한 엘리트를 보던 눈으로 나를 쳐다보던 제라드가,
20대 초반 특유의 사랑에 눈앞이 가려진 아끼는 직장 후배를 보는 한심한 눈으로 변했다.
‘…그래. 대의를 위한 희생이다.’
나는 눈을 감고 그 오해를 받아들였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으앗? 자…잠깐만…!”
내일부터는 실습을 나가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을 마지막으로 밤중 크리스와 밀회를 가지기는 어려워지리라.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나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크리스와 열락의 시간을 가지려 했지만…
크리스가 달라붙으려는 나를 손으로 잠시 막아섰다.
“응?”
“그… 옷 좀 벗어 줘봐.”
“옷?”
“응. 오늘 옆쪽이 찢어진 그 상의.”
나는 크리스의 말에 의아해하면서 그녀에게 상의를 벗어 맡겼다.
당연히 내 윗몸은 알몸이 되었지만, 이제 와서 크리스가 부끄러워 할 리가 없다.
같이 배를 맞댄 것이 몇 번인데.
“흣… 그… 크흠…”
…아니, 크리스는 아직도 내 알몸을 보고 부끄러워했다.
도대체 얼마가 지나서야 익숙해질까?
나는 내 옷을 건네 받은 크리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크리스도 제라드에게 가서 무언가를 요구했다고 했지?
무엇을 받았는지 조금 궁금하긴 하다.
“크리스는 교관님한테 뭘 요구했어?”
“그건 말이지… 짜잔.”
“응?”
크리스가 손에 꺼내 든 것은 자수 세트였다.
바늘과 알록달록한 실이 조악한 나무 상자 안에 들어차 있었다.
이 세계에서도 저런 것이 있었나?
의식주도 부족한 세계관이다 보니 저런 공예품 같은 취미 생활용품은 구하기가 어려울 텐데…
“아! 교관님께 그 자수 세트를 요구해서 받은 거야?”
“응!”
“그건 왜… 설마!…”
“차…찬영의 옷을 꿰매 주려고… 오늘 괴물이랑 싸우느라 고생했으니까. 안 그래도 나 이런 자수가 취미였거든.”
곧 크리스는 손에 든 내 옷을 바늘로 꿰기 시작했다.
내게 무언가를 해줄 수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기쁘다는 얼굴로.
‘그러고보니 미래에서 광년이… 아니, 크리스는 자수를 할 줄 안다고 했었지…’
나는 그런 크리스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무언가 가슴이 간질간질해서 마구 머리를 쓰다듬고 싶은 기분이다.
“아얏!”
“괘…괜찮아?!”
“…주변이 어두워서 자꾸 바늘에 찔리네… 괜찮아! 헤헤…”
바늘에 몇 번이고 찔려가면서 기어코 바느질에 집중한다.
그저 입을 닫은 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몇 분 후.
내게 돌려준 옷의 상의에는 투박한 옷과 어울리지 않은 아름다운 꽃 한 송이가 그려져 있었다.
“…고마워. 어? 그런데 꽃잎의 색이…”
“…비슷해?…”
크리스가 수줍게 내 눈을 피하고는, 자신의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꽃잎의 깊숙한 뿌리 부분은 주황색이었지만, 가장자리는 노란빛이었다.
마치 지금의 크리스를 연상시키는 꽃이었다.
그녀의 머리는 두 달이란 시간이 지나면서, 탈색된 노란색 머리를 밀어내고 주황색인 그녀 본래의 색을 드러내고 있었기에.
…이 꽃은 크리스 자신이었다.
“응… 똑같아.”
“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