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테라포밍 *
브랙이 생각하기에 박찬영이라는 인간은 정말 대단한 인간이었다.
단순히 잘생긴 얼굴을 뜻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는 강했고, 현명했으며, 항상 노력했다.
‘무엇보다 판단이 무척이나 빠르고 정확해…’
브랙은 팀 훈련을 하다 보면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신과 박찬영 사이에 존재하는 거대한 차이를.
“최근에는 우리가 제라드 교관님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찬영이 우리라는 체스 말을 사용해서 교관님과 수 싸움을 하는 느낌이었지…”
“…브랙, 너무 신경 쓰지는 말라고? 그가 시키는 대로만 해도 1위라는 타이틀은 챙겨올 수 있으니. 고작해야 4팀 중 1위에 불과하지만 말이야.”
“허나 압도적인 1등이잖나. 2등과의 훈련 단계가 2배 이상 벌어진. 배울 수 있으면 배워야 해.”
무엇보다 무서운 점은 박찬영이란 인간이 점점 더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처음 팀 훈련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이 정도까지 뛰어난 통솔력을 가지지는 않았다.
적어도 브랙은 그리 생각했다.
‘처음 팀훈련을 시작했을 때. 우리도 그랬지만 그도 실수를 많이 했었어. 하지만…’
박찬영은 점점 팀원을 잘 다루는 법을 깨닫기 시작했다.
최초, 박찬영이 지휘권을 가져간 것에 불만을 품은 팀원은 없었다.
어찌 되었든 박찬영이라는 훈련생은 뛰어난 실력과 올바른 인성으로 많은 이들의 호감을 샀으니까.
게다가 전투에서 일 인분을 하는 동시에 팀원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귀찮은 작업을 도맡아서 하고 싶어 하는 훈련생은 많이 없었다.
능력이 따라주지는 않지만, 허영심만이 넘치는 몇몇 인물들을 제외하고는.
그것은 브랙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단련된 몸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들, 당장 훈련에 따라가는 것도 꽤 고되었기에 더이상의 일은 사양했다.
브랙은 내심 자신이 아닌 박찬영이 지휘권을 가져가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자신의 휴식 시간이 조금이라도 보장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의 브랙은 그런 생각을 품었던 자신을 질책하고 있었다.
‘부끄럽군… 부끄러워… 도무지 고개를 들 수가 없어… 이미 압도적인 체력을 가진 찬영이 저리 노력하는데… 나란 놈은 고작 3위에 만족하고 안주하다니…’
브랙은 고개를 돌려 숙소 안을 둘러보았다.
박찬영과 크리스 베넷은 숙소에 없었다.
그렇기에 남아 있는 인물은 자동으로 나머지 2명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두 명은 브랙이 쳐다보고 있는 것조차 눈치 못 챈 채 잡담에 빠져 있었다.
“야. 근데 찬영이랑 크리스 베넷,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 맞지?”
“유명하잖아. 이미 서로 할 거 다 하지 않았을까?”
“크흐… 역시 잘생긴 놈은 지구나 이쪽이나 여자를 끼고 사네. 어휴… 그런데 나는 왜…”
“찬영 걔는 잘생긴 걸 제외하고도 좀 잘나긴 했어.”
“응. 솔직히 저 정도로 잘나면 부러운 마음도 안 들더라…”
잡담을 하는 두 명은 명백한 하위권 훈련생이었다.
그들은 타들어 가는 브랙의 속내처럼 성장에 대해 고민을 하는 것보다는 타인의 연애사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한편으로는 그들이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브랙이었지만, 그 스스로도 자신 또한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브랙의 뇌리에 이런 생각이 자꾸 맴돌았기 때문이다. 저들과 자신은 도대체 다른 것이 뭘까?…
최근 브랙은 초조함에 휩싸여 있었다.
내심 자신과 많은 수준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라 여기던 박찬영이 한 걸음씩 쑥쑥 내딛을 때면 더더욱.
그는 이미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서 상대를 견제하는 방법을 안다.
그는 이미 협공으로 강자의 빈틈을 억지로 만들어내는 방법을 안다.
그는 이미 팀원의 세세한 포지션까지 계산해 가며 전투를 이끄는 법을 안다.
그는 이미…
자신과 너무 멀어져 버렸다.
‘…더 노력하는 수밖에.’
브랙은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을 하자며 자신을 다잡았다.
끼익…
그때, 숙소의 방문이 열리면서 남녀 한 쌍이 걸어 들어왔다.
말할 필요도 없는 박찬영과 크리스 베넷이었다.
그 둘은 아무 일 없단 듯이 들어와 서로의 침대에 앉았지만, 마나 각성을 하며 동체 시력이 높아진 브랙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이 방문을 들어오기 전까지 손을 잡고 있다가 방으로 들어오면서 자연스레 손을 놓은 것을.
‘참… 보기 좋은 선남선녀군.’
하지만 약간 위가 쓰려오는 것은 브랙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
훈련생 대부분이 마나 각성을 끝내기 시작했다.
마나 각성 초반부에는 별 차이가 없었기에 본인들도 긴가민가 하는 듯 보였지만, 나는 시스템 창에서 [마나] 스텟이 확실하게 보였기 때문에 구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모든 훈련생 중 크리스가 가장 빠르게 마나 각성을 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스킬을 발동시킬 수 있을 정도로 마나가 쌓이기까지 했다.
“자. 이 돌멩이를 네 이 공간에 넣어봐.”
“이…이런 건가? 오! 됐어!”
크리스의 손에 쥐어져 있던 돌멩이가 갑자기 사라졌다.
그녀의 스킬이 발동한 것이다.
띠링!
=
[스킬 이름] 아공간
[레벨] 1 Lv
[속성] 기타
[타입] Active
[상세]
마나를 소모하여 손에 닿은 물건을 아공간에 보관합니다.
아공간에 들어간 물건은 시간이 흐르지 않습니다.
마나를 소모하여 아공간에 넣은 물건을 꺼냅니다.
본인에게 익숙한 물건일수록 몸에서 떨어진 곳에 꺼낼 수 있습니다.
현재 거리 한계 1M (Lv 1)
[재사용 대기시간] -
=
지금 당장 이 스킬의 설명만 읽으면 별로 좋아 보이는 스킬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스킬의 진가를 확실하게 알고 있다.
이게 3 Lv에 닿으면 어떤 효과가 추가되는지.
“이건 네 큰 무기가 될 거야. 시간이 날 때마다 연습하는 게 좋아.”
“그…그러려나? 지금 당장 사용법은 짐작이 안 가는데…”
크리스는 내 말에 손에 쥔 조약돌을 열심히 아공간에 넣었다 빼길 반복했다.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고 내 말을 믿고 따라주었다.
그런 크리스의 사소한 행동이 내게 기분 좋게 다가왔다.
“쓰다 보면 발전할 수도 있잖아?? 그 왜, 히어로 영화를 보면 능력이 진화하는 경우도 있고.”
“푸훗… 현실이랑 영화는 다르잖아!”
“글쎄,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현실보다 영화 같기는 하잖아?”
“…그러네.”
크리스는 멍한 얼굴로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익숙함이 이리도 무섭다고,
그녀는 몸이 다른 차원으로 전이 되고 마법 같은 능력이 생기는 것에 이제와서는 큰 이질감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다시 고개를 숙여 열심히 연습하는 크리스.
나는 그런 그녀로부터 고개를 살짝 떼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보자… 1명? 아, 2명이네. 2명 빼고 전부 마나 각성을 끝냈군.’
십수 개의 상태창이 내 눈을 스쳐 지나간다.
마나 각성을 마친 사람들을 확인하며 혹시 모를 스킬의 보유 여부까지 하나씩 체크했다.
이능을 발현할 확률은 매우 낮기에, 20명 중 크리스가 이능을 발현한 이상 다른 발현자가 나오기에는 확률상 상당히 낮긴 하지만…
혹시 모를 수도 있지 않은가?
‘뭐… 역시 없나. 하긴, 7년 뒤에는 50명의 훈련생 중 단 한 명도 발현하지 않았는데 뭐.’
그러나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이능을 발현시킨, 스킬을 보유한 사람이 한 명 추가로 발견되었다.
띠링!
=
[스킬 이름] 세뇌
[레벨] -
[속성] 지능
[타입] Buff
[상세]
아주아주 가벼운 암시를 겁니다.
이질감이 느껴지면 세뇌는 해제됩니다.
보유한 지능 수치에 따라 성공률이 달라집니다.
대상의 지능 수치가 높을수록 저항합니다.
중첩 가능합니다.
*마나 소모량이 상당히 높습니다.
[세뇌 유지시간] 00:30:00
[재사용 대기시간] -
=
세뇌?
말만 들으면 무척이나 사기일 것 같은 스킬이다.
하지만…
그 내용을 읽어봤을 때 그렇게까지 좋지는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레벨이 없다는 것이다.
이 스킬은 몇 년이 지나도 성장하지 않는다.
그것만으로 상당히 거대한 패널티였다.
‘카야의 파이어볼도, 크리스의 아공간도 전부 레벨이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전투에 도움이 될 것 같지가 않다.
‘아주아주 가벼운’ 암시는 전투를 하며 격렬히 움직이면 세뇌 정도는 손쉽게 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좋다.
나는 이 스킬의 주인공이 누군지 확인했다.
그리고…
“…왜 하필 쟤냐.”
“응? 누구? 왕 자건 말하는 거야? 쟤가 찬영한테 뭐 했어?”
“아무것도 아니야.”
스킬을 얻은 주인공은 바로 왕 자건이었다.
괜히 저 못생긴 얼굴을 보니 배에 주먹 한 방을 더 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
오랜만에 안젤리와 느긋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요즘 대부분의 시간을 테라포밍 속에서 보내다 보니 그녀가 그리워진 탓이다.
“근데 찬영. 얼굴이 갑자기 변했는데, 학교 지인들이 뭐라고 안 해?? 나는 시간을 좀 들이면서 바꿀 줄 알았거든.”
“지구에 지인이라고 할 사람은 너밖에 없어. 다들 나를 쳐다보긴 하는데 정작 내가 누군지는 모르는 눈치더라고.”
“아하…”
“그러고 보니 환불 금액은 잘 들어왔어?”
“앗! 응! 찬영이 예전에 학교에 갔었을 때 입금 확인했어. 까…까먹고 있었네…”
“사실 나도 까먹고 있었어. 방금까지.”
나는 안젤리가 오기 전까지 청소 업체를 계약 해지하지 않고 잘 이용해 왔다.
값도 의외로 부담이 안 갈 정도로 쌌고, 도무지 시간을 내서 이 넓은 집 구석을 청소할 의욕이 생기지 않았던 탓이다.
당연하지만, 안젤리와 같이 살 게 되면서 내가 고용한 청소 업체는 계약을 해지할 수밖에 없었다.
안젤리는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사용하는 물건도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었다.
괜히 의심스러운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외부인을 집에 들이지 않을 필요가 있었다.
내가 학교에 가 있는 틈을 타서 안젤리에게 대신 계약 해지를 부탁했고, 줄곧 까먹고 있다가 오늘에서야 물어본 것이었다.
약간의 위약금을 물기는 했지만 그리 비싸지 않았기에 흔쾌히 위약금을 부담했다.
“앞으로 청소는 내게 맡겨! …라고는 해도 요즘 정말 심심해서 주야장천 청소만 하고 있거든… 하지 말라고 해도 할 거야.”
“아기천사처럼 인터넷이나 해보는 건 어때? 노트북 한 대 사줄까?”
“괘…괜찮아! 매일 컴퓨터 앞에 붙어 있는 후배랑 달리 나는 별로 인터넷에 관심이 없거든.”
“…그래?”
“응… 사실 후배가 종일 저러는 걸 보니 좀 꺼려져서…”
요즘 아기천사는 웹서핑과 컴퓨터 게임에 푹 빠져 밥만 축내고 있었다.
그래서 아기천사를 볼 때마다 왠지 얄미워서 꿀밤을 한 대씩 먹여주곤 했다.
그때마다 억울한 듯 나를 쳐다보았지만, 본인도 자신이 식충이인 것은 아는지 크게 별말 하지 않았다.
안젤리는 집 안 청소, 빨래, 설거지, 그리고 집주인인 나에게 안마까지 해주는데…
선배가 고생하는 중인데 후배라는 놈이 놀고만 있다니!
“밉상이야 밉상.”
“하하하…”
“언젠가 한 번 크게 혼내줘야겠어.”
“그… 내가 찬영이랑 이쪽에 와서 푹 쉴 동안 아기 천사는 잠도 못 자고 인수인계하느라 바빴으니까.”
“안젤리가 지금 이러는 것도 일하는 중 아니야? 나를 지키는 일.”
“…그렇게 치면 내 후배도 지금 일하는 중인걸?”
“그런가?”
필사적으로 후배를 변호하려는 안젤리의 모습이 귀여워서 한번 넘어가 주기로 했다.
하지만 안젤리가 안 볼 때, 반드시 아기 천사를 괴롭힐 것을 다짐했다.
“그런데… 저기… 찬영?”
“응?”
“그…”
쿡쿡…
안젤리가 내 손등을 얇은 손가락 끝으로 찔러왔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무언가를 기대하는 얼굴을 하였다.
…사실 아기 천사가 바쁜 것은 내게 그닥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동안 몰래 안젤리와 스킨쉽을 할 수 있으니까.
안젤리도 그것을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직접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타이밍만 되면 이렇게 내게 키스를 졸라왔으니까.
- …츄웁…
안젤리의 혀에서는 새콤하고 향기로운, 구름나무 차 맛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