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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67)화 (67/310)



〈 67화 〉테라포밍 *

“…나 이제 중간 순위는 넘어가서 이거 안 줘도 되는데.”


- 아삭아삭


“그럼 이렇게 밤마다 둘이 만나는 시간도 사라지는데?”


“아앗? 그…그건…”

빨개진 얼굴로 곤란해하는 크리스는 귀여웠다.
우리 둘은 밤이 되면 몰래 건물 뒤편에서 밀회를 하는 일상에 이미 익숙해져 버렸다.
조용히 시간을 즐기다가 갈 때도 있었고, 가끔은 쓸데없는 잡담을 할 때도 있었다.
크리스는 이제 나와 함께 있는 이 시간을 편안해하는 것 같았다.

그녀와 나 사이의 기류 또한 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확실해져 갔다.
이건 이성과 이성 사이에 흐르는 달달한 공기였다.
크리스가 나를 의식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나는 그것을 한참 전에 깨닫고 있었고, 이런 식으로 티를 내기도 했다.
갑작스럽게 남자로서 다가가면 크리스가 당황해할 수도 있으니까.

“그건 싫어?”


- …끄덕.


 걸음 더 나아갈 용기가 부족한 크리스는 얌전히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녀에겐 고개를 끄덕이는 것조차  용기가 필요했으리라.
지금의 그녀는 룸메이트와도 잘 어울리지 못하는 소심한 성격이었으니까.

나는 이미 제라드에게 팀별 훈련을 할 때 크리스와 같은 조로 넣어달라고 말했다.
게다가 브랙까지 추가해서.
미래에 브랙과 크리스는 나름대로 전우애가 있다고   있을 정도로 친해 보였는데, 내가 크리스를 챙겨주면서 그 미래가 변했을 수도 있다.
굳이 미래에 영향이 갈 쓸데없는 변수를 만들 이유는 없었다.
나는 브랙과 크리스를 적어도 안면은 틀 정도의 사이로 만들고자 했다.

“다 먹었으면 이제 슬슬…”

“저…저기… 찬영?”

“응?”


“조금… 내 상담에 어울려줄래?”

밀회의 시간은 크리스의 요구로 인해 조금 길어졌다.
나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인 후, 크리스의 곁에서 그녀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


조금의 시간이 흘렀지만 재촉하지는 않았다.
크리스는 무언가를 결심한  내게 상담을 들어달라고 요구했지만…
정작 입을 열려니 용기가 조금 사그라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조용히 기다려 주면 된다.
내가 시간에 쫓기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이렇게 말없이 크리스를 보고 있는 것도 나름 재밌었다.

움찔움찔하며 용기를 쥐어 짜내려 노력하는 손끝도,
머뭇거림이 숨김없이 드러나는 얼굴도,
짙은 어둠 덕에 내게 눈치채이지 않을 거라 안심하며 나의 얼굴을 바쁘게 살피는 동공도,
전부 순수함이 돋보여 귀엽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첫날 이후 화장은 지워져서 자세히 봐야 보이곤 하는 희미한 주근깨가 드러났다.
한 달 가까이 지나면서 탈색을 한 머리의 뿌리도 조금 자라 주홍빛이 보인다.
이제는 눈앞의 크리스가 7년 후 광년이라는 것을 도무지 부정하지 못한다.


“아…”


너무 대놓고 봤을까?
크리스의 머리카락을 보던 나의 시선을 그녀가 눈치챈 듯하다.
이미 크리스의 눈이 어둠에 적응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흘렀기에 그런 듯 했다.


그녀는 별다른 반응은 하지 않았다.
대신, 그것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 크리스는 굳게 닫혀있던 조그마한 입을 열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머리카락. 내 머리카락은 원래 주황색이야.”


“멋 부린다고 탈색 한 거야?”

- 절레절레.

“…조금 달라. 그거 알아?  인생에서 가장 최초의 친구는 너야.”

“음… 나는 ‘친구’로 끝내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때가 아닌 것 같네. 계속 들을게.”

“흣!… 으…으응… 그래… 음…”

- 크흠!

내 말에 당황한 크리스는 헛기침 한 번으로 다시 한번 분위기를 잡고자 했다.

“나는… 그… 심각한 왕따였어. 혹시 찬영은 알고 있어? 아일랜드의 피가 섞인… 주황 머리에 주근깨를 가진 사람들을 부르는 멸칭을.”

“…진저(Ginger)를 말하는 거야?”

젠장.
이건 지금까지 생각이 닿지 못했다.
그녀가 지구에서 인종 차별을 당했다니…

동양인, 흑인, 진저(Ginger), 집시 같은 차별을 받는 인종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저 지식으로만…

실제로 언론에서 큰 문제로 조명받는 것은 대다수가 동양인과 흑인에 대한 차별이었다.
진저에 대한 차별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않았다.
대도시에서는 거의 차별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몇몇 인구가 많지 않은 미국의 시골에서는 진저(Ginger)를 향한 심각한 인종차별이 아직까지 성행 함에도 불구하고.

“응… 나는  시골에서 태어났거든… 그래서 좀… 많이 힘들었지.”

“너는 주근깨가 거의 보이지 않는데도?”


“…그 마을에서 아일랜드의 피가 섞인 가정은 우리 가족밖에 없어서…”

괴롭힘이 집중되었다는 건가…
어째서 그녀가 이런 소심한 성격이 되었는지 어느 정도 눈치챌 수 있었다.


“난 내가 괴롭힘당하는 원인이 머리카락이랑 주근깨 때문인  알았어. 그래서…”

“탈색이랑 화장을 했다? 피부와 머리색을 가리려고?…”

- 끄덕.

“…효과는 있었어?”

“…처음 며칠간은 그런 줄 알았어. 머리의 색을 바꾸니 모두 돌변하듯 나한테 잘해 줬으니까…”

“…”


‘처음 며칠간’이라…
과거형으로 말하는 그녀의 말에서 결과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나를 장난감처럼… 내가 없는 곳에서… 몰래 찍은 내 사진을… 비웃고… 그리고… 흐읍!”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지 크리스는 말끝을 맺지 못했다.
어둠을 꿰뚫고 바라본 나의 눈에 그녀의 눈가에 습기가 맺히는 것이 들어왔다.

‘후우…’


눈을 감고 한숨이 나오는 것을 눌러 참아야 했다.
나는 알고 있다.
그녀의 특성, 『자애』의 효과를 봤기 때문이다.

‘…사람을 쉽게 믿는다는 패널티가 달려 있었지?’

“…일주일 뒤 다시 괴롭히더라. 전보다 더… 그리고 다시 잘해주는 척을 하다가…  속이고…  잘해주다가… 또… 또… 몇 번이나…”

크리스가 고개를 하늘을 향해 치켜들었다.
새어 나오는 눈물을 막기 위해서다.
나는 가만히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참… 멍청하지… 흐윽!… 속는 걸 알면서도… 속아주고… 그냥… 내 자신이 싫고… 흡!”

스윽…


“으아?!…”

크리스가 내 품에 들어왔다.
내가 그녀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안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를 안심시키듯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말했다.


“이야기 계속해.”


“으…으?… 이건…”


“이러면 울어도 안보이잖아.”


“…”


눈물을 내게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는  품에 안기는 것을 제외하고도 수십 가지의 방법이 있었지만, 크리스는 이 방법이 제일 마음에 드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잔뜩 긴장되어 굳어진 몸이 풀어지며 내 가슴에 기대어 왔으니까.

- 투욱…


“…너 지금 나 꼬시고 있지.”

“응.”

“…찬영은 지구에서 연애 경험이 엄청 많았을 것 같아.”


“아니야. 나도 학생 때 괴롭힘을 당했는걸?”

가만히 내게 안겨있던 크리스의 몸이 움찔하며 떨린다.
나의 쇄골에 얼굴을 묻고 있기에 표정은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내 말에 깜짝 놀란 것 같다.

“차…찬영이? 믿기질 않는데?”

“정말인데.  세계에 오기 직전까지도 지구에 친구  명 없었어.”


실제로 지구에는  친구가 한 명도 없다.
어디까지나 나는 박찬영이니까.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스윽!


크리스가 안긴 상태로 살짝 내게서 떨어지며 내 얼굴을 마주 본다.
눈은 동그랗게 뜬 것이 내 말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눈치다.

“거짓말. 그치만 찬영은… 엄청 잘생겼잖아. 인기가 많을 것 같은데…?”

“그렇게 치면 크리스 너도 엄청 예쁜데 괴롭힘을 당했는걸?”

“예… 예쁘… 큼! 그래?… 으… 아무…튼! 내 경우는!… 아무리 멀쩡하게 생겼어도 몸에 흐르는 피 때문에…!”


“근데 계속 이렇게 얼굴을 보면서 얘기할 거야? 나 이 거리면 좀 참기 힘든데.”


나를 향하는 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중간에 끊고자 크리스에게 자극적인 말을 했다.
그녀의 부드러워 보이는 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약간 떨어졌다고 한들, 크리스는 여전히 내 품 안에 있다.
즉,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거리는 고작 15cm도  될 만큼 가까이 있다는 뜻이다.
서로의 숨결의 따뜻함이 느껴질 정도의 짧은 거리.
이대로 말없이 3초만 가만히 있으면 서로 입을 맞추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1초. 2초. 그리고,

“흣!”


- 포옥!

내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은 크리스가 새빨갛게 얼굴을 붉히며 내게 다시 안겨들었다.
그녀의 조막만 한 얼굴이 다시  쇄골에 닿는다.

‘음… 다시 안긴 것만 해도 충분히 합격점인가?’

무의식적으로 품에서 빠져나오면 된다는 선택지를 까먹은 것이 틀림없다.
그런 그녀가 귀여워서 나도 약간 풀어진 팔을 다시 그녀의 어깨에 둘러 감싸 안아주었다.


“…으응…”


“뭐야 그 소리는?”

“그… 갑자기 팔이 올라오길래 노… 놀라서… 그나저나! 찬영은 몸에서 좋은 냄새가 나. 특이해.”

“응?”

“이곳에는 샴푸도, 바디워시도 없이 비누만 있는데… 찬영한테는 좋은 냄새가 나서.”

나는 샴푸와 바디워시는 물론 전신 로션까지 전부 사용하니까 당연하다.
하지만 크리스가 인간의 체취와, 조향사가 연구하며 만들어낸 향료를 구분할 수 있을 리 없다.
심지어 훈련을 마치고 훈련소에서 목욕까지 한번 한 뒤다.
진하게 나는 것도 아닌데, 당황하지 않고 적당히 얼버무리면 된다.

“그래? 고마워.”


“나…나는 냄새 안 나지?”

“흐음…”


나는 크리스의 질문에 고개를 숙여 얼굴을 그녀의 어깨에 가져다 대 냄새를 맡으려 했다.
사실 진짜로 맡으려던 것은 아니고, 살짝 그녀를 놀리기 위해서.


“꺄…꺅! 하지 마! 맡지 마!”


- 버둥버둥.

“하하. 알겠어. 안 할게. 그러니까 이대로 가만히 있어.”

- 꽈악.

나는 내 품을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치는 크리스를 좀 더  껴안았다.
크리스는 내 말을 믿고 저항을 그만두었다.

“그…그럼 나는 찬영에게  번째 친구인 거야?”


“그렇지.”


안젤리와는 연인이고, 블랑과 이강인 같은 애들은 7년 뒤에 친구가 된 거니까.
아기천사는…  애매했다.


“흐으… 그…그렇구나…”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친구’로만 지내고 싶지는…”


“자…잠깐! 찬영은 학생 때 그런 일을 겪었는데도 엄청 저돌적이네…? 신기해.”

“음… 나는 나름  극복 했으니까.”

“…멋있다.”


“그거 콩깍지야.”

“쿡쿡. 그래?”


콩깍지라는 말이 한국에만 있는 것 같았기에 그녀에게 말의 의미가 잘 전달되었는지 살짝 걱정했지만,
다행히 크리스는 제대로 내 말을 알아들은 것 같았다.
내 품에서 살짝 몸을 떨며 가볍게 웃었으니까.

최근 나는 계속 크리스에게 적극적으로 호감을 보이고 있었다.
말만 안 하고 있을 뿐, 연인이 되고 싶다는 의지를 잔뜩 내보여 왔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크리스는 말을 돌리고는 했다.
전에는 부끄러워서 그런 줄 알았지만, 이제는 그것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혹시 무서워? 내가 이러는 것이.”


“아… 사실… 사람을 완전히 믿는 것에 약간… 트…트라우마가 생겨 버려서. 찬영이 그럴 사람이 아닌 걸 머리로는 알아도, 자꾸… 응… 무섭네…”


“그럼 네가 좋을 때까지 친구로 지낼래?”


움찔!


“…그…그래도 돼? 너무 나한테만 좋은 이야기 아니야?… 찬영은 그… 남자고… 애인과 하고 싶은 것도…”

“괜찮아.”


트라우마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알고도 도무지 어떻게 할 수 없기에 병으로 분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와 내가 정식으로 연인이  날은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니까.
나는 그날을 조금 앞당기기 위해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서양에서는 친구끼리 인사 삼아서 키스하지?”

“어?…어?… 그…그건 친구끼리도 하는 사람이 있긴 한데… 보통 가족끼리…”


“한다는 거구나.”

“그런 건 이…입을 맞추는 키스가 아니라 뺨에 가볍게 하는 키스(cheek kissing)야!…”


“엄청 친한 친구끼리는 입에도 하지 않을까?”

“적어도 내가 살던 곳에서는 안 그랬어…!”

“그럼 볼에다?”


볼에다만  수 있으면 만족이다.
애초에 내 목적이 볼 키스였으니까.
그냥 요구하면 거절할 것 같으니, 일부러 입술을 노리는 척한 것이었다.
서로 중간 점을 찾아 볼 키스로 합의 볼 수 있게끔.

하지만 크리스에게 볼 키스를 하려던 나의 계획은 조금 틀어졌다.


“…”


“크리스?”


“그… 내 개인적인 사정으로 대답을 미뤘고… 그걸로… 찬영이… 그… 차…참을 수 있다면…”


- 흐읍…!

“괘…괜찮아… 이…입술에 해도…”

마지막 가서는 벌레가 우는 소리에 묻힐 만큼 작은 소리로 말했지만, 나는 똑똑히 들을  있었다.

계획이 틀어졌음에서 오는 당황과 망설임은 없었다.
나는 크리스를 껴안고 있던 오른손을 풀어 그녀의 오른 볼에 가져다 대었다.
내게 찰싹 달라붙어 있던 그녀를 조금 떼어낸 뒤, 크리스의 고개를 적당한 위치로 조정했다.
고개만 숙이면 입술이 닿는 각도로.

- 스윽…

나를 수많은 감정이 섞인 눈으로 쳐다보는 크리스의 얼굴을 구경하며 고개를 천천히 숙인다.
서로의 얼굴이 가까워지고, 크리스의 아름다운 속눈썹이 닫히며 눈이 감긴다.

곧,
서로의 입술은 맞닿았다.

“으음…”

소리 없이 맞닿은  입술은, 다시 소리 없이 떨어졌다.
부드럽고 가벼운 키스였다.
으레 뺨 키스(cheek kissing)가 그러듯.

와락!

크리스가 다시 내게 안겼다.
 가슴에 자신의 이마를 묻었다.
그녀의 귓가는 새빨개져 있었다.
안 봐도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 머릿속에 그려졌다.

“자. 이렇게 고개를 돌려봐.”


“응?…”

스윽.


나는 내 가슴에 닿은 크리스의 얼굴을 약간 돌렸다.
그러자 크리스의 귀가  가슴에 닿았다.


“지금 내 심장 엄청 뛰고 있지?”

“…와아… 응…”


 가슴은 크리스와 키스를 하며 찾아온 설렘에 쿵쿵대며 뛰고 있었다.
그것을 크리스에게 들려주었다.

목적은 없었다.
그냥 내가 크리스에게 들려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녀는 미친 듯이 뛰는 내 심장 소리를 말없이 듣고 있었다.
그렇게 내게 안긴 채 몇 분 동안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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