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테라포밍 *
“훈련생 사이의 다툼은 원래 징계 사유다. 하지만 너는 평소 뒤처진 훈련생을 챙기는 등 올바르게 행동했기에 한번 넘어가 주는 것이다. 알겠나?”
“일을 벌여서 죄송합니다. 교관님. 깊이 반성 중입니다.”
“…그래. 그럼 되었다. 받아라.”
- 처억.
“이건?…”
“프룸이라는 열매다. 먹으면 성장이 좀 더 빨라지지. 이걸 받은 것은 다른 훈련생들에게는 비밀로 하도록.”
“알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3일에 한 번 이곳으로 찾아와 프룸을 받아 가도록 해라.”
“네!”
덜컥! 끼이익… 쿵.
터벅터벅…
제라드에게 혼나기는커녕 프룸을 받아버렸다.
조금 깨질 각오로 저지른 일인데…
‘의외로 아주 개새끼는 아니군.’
따라오지 못하는 훈련생을 챙기지 않았기에 상당히 멋대로인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직접 대면하며 대화를 해보니 틀렸다.
제라드는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서 챙겨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내가 하위 훈련생들을 챙겨주는 것에 대해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이왕 과거로 왔으니 배반할 것이 확실한 제라드를 죽여야 할까?
그가 훈련소를 배반 하는 것은 정해진 미래다.
그러나 내가 죽이고 싶어 한들 그를 죽일 수는 없었다.
지금의 제라드는 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으니까.
‘일단 기회를 봐야겠네.’
왕 자건은 나와 같이 제라드에게 불리지 않았다.
왜냐면 그는 지금 양호실에 누워 있으니까.
내 배빵 한 번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버린 왕 자건은, 배가 시퍼렇게 멍이 든 채 아직 일어서지도 못하고 있었다.
마나를 많이 담지 않았다고 한들, 천권일각은 강력한 스킬이었기에 당연했다.
터벅터벅.
1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전부 내려오자, 크리스 베넷이 보였다.
내려오는 나를 발견한 그녀의 얼굴을 보니 죄책감으로 뒤덮여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여자는 내가 왕 자건과 싸운 것이 자기 때문인 줄 알고 있나 보다.
“차…찬영씨! 죄송해요… 저 때문에…”
사색이 된 얼굴로 크리스 베넷은 내게 고개 숙여가며 사과했다.
자신이 훈련에 따라가지 못했기에 찬영이 자신을 도왔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왕 자건과 싸움이 일어났으며,
다툼으로 인해 찬영이 교관님에게 불려갔으니,
찬영이 혼난 원인은 자신 때문이다.
이런 삼단 논법이 크리스 베넷의 머릿속에서 완성된 것처럼 보였다.
그리 말하면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긴 한데, 너무 자학이 심하게 들어가 있는 해석이다.
나는 크리스 베넷에게 상냥히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안심 시켜 주었다.
일단 그녀는 노란색 머리를 가진 지금도, 주황색 머리를 가진 7년 후도 전부 아름다웠으니까.
나는 아름다운 여자에겐 관대하다.
“아니에요. 사실 제 성격이 원래 그리 좋지는 않아서… 먼저 걸어온 시비를 도무지 무시 못 하겠더라고요.”
“그…그래도. 따지자면 원인은…!”
“괜찮다니까요. 그보다… 오늘 밤도 어제와 같이, 저녁을 먹고 나면…”
“흣!… 네…네에… 건물… 뒤편으로… 올게요…”
끄덕.
귓볼이 붉어진 채 고개를 숙이며 내게 기어가듯 대답하는 크리스 베넷.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건물 뒤에서 기다리겠다며 대답을 해 준 후 그녀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아직 오늘의 훈련이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
찌르륵— 찌륵-
벌레가 우는 소리가 귀에 들려온다.
지구나 이곳이나 벌레가 자신의 짝을 찾는 소리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그 사실이 조금 신기해졌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별 잡생각이 다 드는가 보다.
며칠 동안 연속으로 왔더니 훈련소 건물 뒤편의 풍경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해는 이미 져서 어두워져 있었고, 달과 별의 빛조차도 건물의 그림자에 가려져서 주위는 무척이나 어두웠다.
나는 별 영향 없이 앞을 구분할 수 있었지만.
…저벅… 저벅…
발걸음을 죽인 채 살금살금 이쪽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애초에 발소리의 주인이 몸무게가 무겁지 않은 탓인지 정말 작게 들려왔다.
달이 떠서 선령일일 만요월월(仙令日日 灣謠月月)의 오감 증폭이 강화되지 않았다면 못 들었을 정도로.
“저… 찬영씨?…”
“여기 있습니다.”
“앗! 넵.”
“조심히 오세요. 주위가 어두워서…”
“꺅!”
덥썩!
나는 넘어지려는 크리스 베넷의 어깨를 팔뚝으로 가볍게 붙잡아 주었다.
내 팔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몸은 가벼웠다.
밥은 제대로 먹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가…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얼굴을 붉히며 내게 감사 인사를 건네는 크리스 베넷.
이번에는 아까처럼 얼굴을 숙이지 않았다.
주변이 어두워서 자신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으리라 생각한 것 같다.
‘다 보이는데…’
나는 그녀가 왔으니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주머니를 뒤졌다.
요 며칠간 나와 크리스 베넷은 건물 뒤편에서 남들이 모르게 밀회를 하고 있었다.
그 목적이 뭐냐고?
이것이다.
나는 주머니에서 초록색의 울퉁불퉁한 열매 비슷한 것을 한 개 꺼내었다.
“…자. 드세요. 근육통을 줄여줄 겁니다. 피로도 좀… 회복될지도 모르고요.”
“고…고마워요… 원래 찬영씨 건데…”
- 아삭아삭!
크리스 베넷은 내가 건네준 그린 얌을 먹기 시작했다.
나는 매일 밤 그녀에게 체력 회복에 아주 약간 효과가 있는 그린 얌을 건네주었다.
당연히 내가 카르마 상점에서 구입한 것이다.
그녀는 모르고 있었지만.
그린 얌의 가격은 고작 15 카르마다.
내게 하루에 한 번 15 카르마 정도의 지출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3시간마다 50 카르마 가격의 프룸을 구매하는 것도 여유로운데 이정도야 뭘.
“그… 이건 교관님께 받은 것이라고 하셨죠?”
“네. 가장 우수한 성적을 낸 사람에게만 몰래 주는 약초라고 하더라고요.”
“매일 하나씩이요?”
“네. 매일 하나씩.”
크리스 베넷의 얼굴이 울상으로 일그러졌다.
자꾸 7년 후 광년이의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겹쳐진다.
그런데 지금의 순수한 그녀의 모습을 보니 새롭고 귀여워 코를 꼬집어 주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분명 빨개진 코를 붙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의문 어린 시선으로 날 올려다보겠지…
아… 참자.
“그…그으… 그럼 찬영씨는 지금까지 이거 안 먹었던 거에요? 제게 망설임 없이 주시길래 두 개 이상 받는 줄 알았는데!… 저…저 이제 이거 받을 수 없어요… 이렇게 민폐만 끼칠 수는…”
“하하! 저 그거 안 먹어도 근육통 하나 없습니다. 제 체질상 체력 회복이 빨라서.”
“아…아무리 그래도…”
“지금까지 그린 얌을 3개는 해치워 놓으시고 말씀하시면 설득력 없어요. 그거 먹고 나면 다음날 편해지죠?”
“…네. 근육통이 훨씬 덜해요…”
“그럼 망설이지 마시고 드세요.”
크리스 베넷은 손에 쥔 그린 얌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미 반쯤 먹어서 절반밖에 남지 않은 그것을.
“그…”
“절반 주셔도 안 먹을 겁니다. 전부 드세요.”
“!… 네…네에…”
크리스 베넷은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내 말에 정곡을 찔린 듯 놀라서 그린 얌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렇게 어두운데도 타인의 손에 힘이 들어간 것까지 전부 구분이 가능하다니, 강력한 스킬의 효과에 만족스러웠다.
- 아삭아삭!
남녀의 말소리로 잠깐 소란이 일었던 건물의 그림자 아래는 처음과 같이 고요해지며, 아삭거리는 소리만이 공기를 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남녀의 목소리가 벌레가 우는 소리를 덮었다.
“그… 찬영씨는…”
“네?”
“…아니에요.”
크리스 베넷은 내게 무언가를 질문하려다가 다시 삼켰다.
그녀의 귀는 살짝 붉어져 있었다.
첫날 대인기피증 증세를 보인 그녀에게는 비록 건전한 것이라고 한들, 남녀 둘이 밀회를 가지는 것 자체가 상당히 부담스럽게 다가왔나 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크리스 베넷의 빈 두 손을 보니 그린 얌을 다 먹은 듯했다.
그렇다면 오늘 일과는 전부 끝이다.
슬슬 지구로 나가서…
“찬영씨?”
“아. 네. 말씀하세요.”
“그… 그러고 보니 찬영씨는 첫날, 서로 이름을 소개한 이후부터 제 이름을 단 한 번도 부르지 않았네요? 그으… 호…혹시 까먹으신 건가요? 제 이름.”
“크리스 베넷. 확실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
망설임 없는 나의 대답에 예상이 틀렸음을 깨달은 크리스 베넷이 당황했다.
어째선지 얼굴이 살짝 빨개지며.
‘역시 조금 이상해 보였나?’
…내가 지금까지 크리스 베넷의 이름을 부르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아무리 외견이 완전히 다르다고 해도… 나에겐 광년이나, 광년이 교관이 훨씬 익숙하잖아? 그렇다고 지금의 그녀를 광년이라고 부를 수는 없고…’
그렇기에 나는 생각을 정리할 때도 7년 후의 그녀를 광년이라고 칭했고, 지금의 그녀를 크리스 베넷이라고 칭했다.
나는 두 명을 같은 사람인데도 다른 사람이라 생각했고, 또 동시에 혼동하고 있었다.
지금의 내 상태는 무어라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애매한 상태였다.
세상에는 아직 시간 여행자가 겪을 만한 상황을 단번에 설명이 가능한 단어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의 실제 이름을 부르려 할 때면, 조금 멈칫멈칫 했기에 지금까지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크리스 베넷에게는 이상하게 느껴졌나 보다.
“…베넷씨, 라고 부르면 될까요?”
“…”
“네?”
“그으… 괘…괜찮으시다면…”
“말씀하세요.”
“저…저는 개인적으로…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으로! 그… 베넷씨 보다는… 크… 크… ‘크리스’가 괜찮은 것 같은데…요…”
“크리스?”
움찔!
나의 되물음에 살짝 놀라 몸을 떠는 크리스 베넷.
아니, 크리스.
크리스는 어두움이 그녀에게 용기를 주었는지, 목덜미까지 새빨개진 얼굴로 내 쪽을 올려다보았다.
이건…
‘얼굴이 잘생겨진 것이 원인… 인가?’
아직 확정하지 못한다.
대인기피가 있던 그녀는 단순한 친구를 권유하는 것조차 부끄럼을 탈 테니까.
그렇기에 이것이 ‘좀 더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라는 신호인지, ‘당신에게 이성적인 호감이 있어요’라는 신호인지는 잘 구분이 안 되었다.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지금은 이곳에 온 지 2주도 흐르지 않았다.
적어도 내게 2달의 시간이 있으리라 여겨지는 지금.
천천히 그녀의 감정을 확인하면 된다.
“그건 지금부터 말 놓아도 된다는 신호지? 알겠어 크리스.”
움찔!
“흐읏! 그…! 네에…!”
“왜 나보고 반말을 하라고 해 놓고 너는 내게 존대해? 내게도 말 편하게 해.”
“으…응! 알겠어… 차, 차, 차, 찬영…!”
끄덕끄덕끄덕!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의 말에 따르는 크리스.
음… 크리스… 크리스라…
입에 달라붙으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아니면 좀 더 열심히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익숙해지던가.
- 피식.
“내 이름은 차,차,차,찬영이 아니라 찬영인데?”
“그…그렇네! 차으아녕!”
“…농담이야. 편하게 불러 크리스.”
움찔!
…그녀도 자신의 이름을 불리는 것에 익숙지 않은 듯했다.
내가 크리스의 이름을 부를 때면 깜짝 놀란 듯 몸이 떨려왔으니까.
‘그래… 그렇게 순수한 채로 자라렴 크리스… 7년 뒤에도 ‘마구섹스’나, ‘자지 냄새’ 같은 천박한 단어는 입에 담지 말고…’
저 조그마한 입에서 그런 단어가 튀어나온다니…
‘미래에 아빠랑 결혼할 거야!’라는 말을 입에 담던 딸내미가 훌쩍 커서는 ‘남자는 돈 버는 기계.’ 따위의 말을 뱉은 것만 같다.
살짝 어지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