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테라포밍
“교관님.”
“어.”
“단검 좀 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왜, 누구 찌를 놈 있어? 아니면 자살?”
아니 선택지가 왜 저리 살벌해?
그런데 광년이의 눈을 보니 단검 같은 무기를 훈련생에게 함부로 빌려줬다가 위 같은 일이 발생한 적이 있었던 눈치다.
나는 어색한 눈으로 광년이를 쳐다보았다.
“…머리가 너무 길어서 좀 자르게요.”
“머리? 스스로 자르게? …자를 때 된 것 같기는 하네.”
“잘 자를 자신 있습니다.”
“그냥 빌려줄 수는 없고, 이 자리에서 자르고 반납해.”
“교관님 방에서 자르면 떨어진 머리카락 치우기도 귀찮고, 옷에도 제 머리카락이 들어가잖아요.”
“그럼? 그냥 널 믿고 손에 단검 쥐여서 보내줘라?”
“그래도 되고요.”
“…지랄. 목욕탕으로 가자고. 나는 입구에서 기다릴 테니, 안에서 자르고 나와.”
“감사합니다.”
언뜻 보면 광년이는 저 말투 때문에 까칠하고 융통성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지금 당장 방금의 사건만 보아도 나의 개인 사정을 위해 자신의 휴식 시간을 소모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순수하게 그녀에게 감사를 보내었다.
정작 내 감사 인사를 받은 광년이는 그리 기뻐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계획대로 되어서 다행이다.
그녀가 목욕탕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더라면 내가 먼저 꺼내려 했는데, 절묘한 우연인지 그녀의 입에서 먼저 목욕탕으로 가자는 말이 나왔다.
옷을 벗거나 머리카락을 치우기 편하다는 이유로 목욕탕이란 장소를 선택한 것은 핑계다.
그저 이 시간에 목욕탕에 아무도 없으니 내가 머리를 자르는 것을 볼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어차피 서로 배도 맞댄 사이니 알몸을 봐도 상관 없지 않냐면서 따라 들어오겠다고 안 해서 다행이네…’
적어도 내가 갑작스레 자해를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신뢰는 있나 보다.
나와 광년이는 걸음을 옮겨 목욕탕의 입구에 도착했다.
척.
그녀는 내게 단검을 건네주었다.
칼날을 손으로 잡아서 손잡이를 내게 향하는 배려를 보여주면서.
‘진짜 얘가 상냥한 건 도무지 적응이 안 되네…’
팔을 뻗어 무늬 하나 없이 투박한 단검을 조심스럽게 집어 든다.
건네받은 단검은 무겁지 않았다.
나는 이미 팀별 훈련에 익숙해지며 롱소드의 무게가 손에 익었으니까.
“…들어가. 청소 전부 하고 나오고.”
“네.”
- 끼이익… 쿵!
목욕탕에는 나 혼자밖에 없었다.
나는 목욕탕 구석 깊숙이 들어가서, 야외에 있는 물탱크와 연결된 수도꼭지를 열었다.
- 콸콸콸콸!!
물이 커다란 소음을 내며 바닥에 쏟아진다.
광년이는 초인이니 귀가 좋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소음을 만들어 주의를 분산시킬 필요가 있다.
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죽여서 나직하게 말했다.
“…상태창…”
띠링!
내가 미쳤다고 스스로 머리를 자르겠나?
그것도 거울도 없는 이런 장소에서?
돈을 지불하고 전문 기술을 보유한 미용사에게 내 머리를 맡길 것이다.
나는 상태창을 조작해 지구로 돌아갔다.
*
나의 로망이 담긴 머리 스타일은 머리를 위로 올려 이마를 드러내는 것이다.
보기에도 시원시원했고, 자신감이 넘쳐 보이기 때문에 첫인상에 많은 호감도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몸이 바뀌기 이전에는 저 머리를 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나의 두개골 형태가 단두형 두상(귀와 눈 사이의 거리가 가까운 두상. 단순히 말해 두개골이 짧은 두상.)이었기 때문이다.
유전자 특성상 단두형 두상이 많은 동양인은 위 머리 스타일이 어울리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야말로 축복받은 두상을 가진 자만이 어울리는 스타일인 것이다.
SNS에서 이마를 드러낸 것이 어울리는 남자들을 볼 때면 부러워하곤 했었다.
하지만 나는 시스템으로 인해 장두형 두상(단두형 두상의 반대. 주로 서양인에게 많이 발견할 수 있다.)을 가지게 되었다.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서.
그렇기에 당장이라도 머리를 세우고 싶었지만…
“젠장… 테라포밍에는 왁스도, 스프레이도 없잖아… 어떻게 머리를 세운 채로 유지한 것이냐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다.
그렇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적당히 깔끔하게 자른 머리를 옆으로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엄청나게 잘 어울렸다.
머리 스타일은 두상이 절반은 먹고 갔으니까.
“내가 어떻게든 찾아낸다. 테라포밍에서 왁스를 대체할 만한 물건을.”
과거 시골에서는 소의 침으로 머리를 세웠다고 하지 않던가?
그처럼 테라포밍에서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물건이 발견될 때까지만 이 머리를 유지하기로 했다.
“상태창.”
띠링!
=
[소설 진입]
테라포밍 - 57화 연재 중단. 작가 필명: 서울새
현재 상태: 연재 중
하얀 고래의 발자취 - 51화 연재 중단. 작가 필명: 파맛첵스
현재 상태: 연재 중
=
띠링!
[테라포밍으로 진입합니다.]
…
- 콸콸콸!!
귓가에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온다.
다시 테라포밍으로 들어왔다.
나는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가, 5분 정도 흐른 뒤 목욕탕을 나왔다.
- 끼이익… 쿵!
“…와. 사람이 확 바뀌네? 같은 사람 맞아?…”
“감사합니다. 아, 목욕탕 쓰레기통이 다 차 있어서 제가 비우고 올게요. 건물 뒤쪽에 쓰레기 처리장이 있었죠?”
“응? 직원이 하는 일이라 굳이 안 그래도 되긴 하는데, 직접 하겠다는데 말릴 이유는 없지. 마음대로 해.”
“여기 단검 반납하겠습니다.”
- 척.
나는 광년이에게 단검을 받았을 때처럼 날을 손으로 잡고 손잡이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광년이는 내 머리를 몇 번 쳐다보더니 얼떨떨한 얼굴로 단검을 받았다.
확 바뀌어버린 내 이미지에 도무지 적응이 안 되는 것 같았다.
“어 그래. 난 돌아간다?”
“네.”
나는 광년이가 떠나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목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쓰레기통은 목욕탕 구석에 있었다.
나는 그것을 집어 들고 건물 뒤쪽으로 움직였다.
내가 쓰레기통을 치우는 것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나의 과한 걱정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만약에 내가 목욕탕에서 머리를 자른 것을 알고 있는 광년이가 우연히 목욕탕의 쓰레기통 안을 보았고, 그 쓰레기통에 내 머리카락이 없는 것을 깨달으면…
괜한 의심을 살 수 있다.
정말 낮은 확률에 불과하지만, 잠깐 고생하는 정도로 그 확률을 없앨 수 있다면야 안 할 이유가 없다.
마음 같아서는 확실하게 미용실에서 떨어진 내 머리카락을 챙겨 오고 싶었지만…
지구에서 이곳으로 머리카락을 가지고 올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쓰레기 처리장까지는 뒤지지 않겠지. 광년이가 그럴 이유도 없고.”
쓰레기통을 비우고 다시 목욕탕에 돌려놓은 뒤, 숙소로 돌아가 휴식을 했다.
잘린 나의 머리를 보고 호들갑 떠는 이강인과 블랑을 상대하면서.
*
- 꿀꺽
훈련생이 침을 삼켰다.
얼굴은 명백히 긴장으로 굳어져 있었다.
- 께에에엨!! 께에엨!!
망설임은 잠시, 결심한 얼굴로 칼을 휘두른다.
묶여있던 고블린 제라드를 향해서.
서걱!
- 끄에에에엙!! 끄에엨!! 께르르릌!!!
칼은 고블린의 가슴께를 베고 지나갔다.
상처는 그렇게 깊지 않았다.
그 사실에 훈련생은 당황해했다.
원인 모를 거부감에 무의식적으로 물러난 탓인지, 훈련생의 생각보다 얕게 베인 눈치였다.
“잘했다.”
브랙은 훈련생을 칭찬했다.
거부감을 이겨내고 살아있는 생명체를 베어낸 것만으로도 합격점이었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시작이 이렇게 수월하다면 그 뒤에 있는 사람들의 부담감도 훨씬 덜해질 테니까.
우리는 익숙해지는 법을 훈련하고 있었다.
몬스터들의 살을 베거나, 죽이는 것에 대해.
전투직으로 가야 하는 이상 반드시 익숙해져야 하는 관문인 것이다.
- 끄에에엙!!!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심장으로부터 상당히 가까운 장소였다.
그렇기에 상처에 비해 피가 상당히 많이 나오고 있었다.
아마 저렇게 손발이 묶인 채로 놔두기만 하더라도 곧이어 과다출혈로 죽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야 너무 아깝지 않던가?
자고로 목숨은 소중히 써야 한다.
나와 생각이 비슷했는지, 광년이는 고블린 제라드가 죽기 전에 다음 훈련생에게 칼질을 시켰다.
두 명, 세 명, 네 명, 고블린이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서걱!
- 끄르륽!!! 끄륽!!
서걱!
- 께르륽!! 끄에에엙!
서걱!
- 께륽…! 그르르륵…!
서걱!
- 켉… 큵…
서걱!
- …
못하겠다며 울부짖고, 그런 훈련생을 광년이가 때리고, 브랙이 말리고, 이를 악물며 칼자루를 움켜쥐면서 어찌어찌 6명의 훈련생이 전부 칼질을 했을 때.
미약하게 이어지던 고블린의 숨통이 끊어졌다.
고블린의 사체는 꽤 잔혹했다.
무려 여섯 번의 치명적인 칼날에 난도질당했으니까.
눈에서 빛이 사라진 고블린에게는 몸에 들어가 있는 피보다 몸 밖으로 나온 피가 몇 배나 더 많아 보였다.
트라우마로 남을만한 끔찍한 시체는 우리의 눈에 오래도록 보이지 않았다.
광년이가 고블린 시체에 손을 대자 감쪽같이 사라졌던 것이다.
‘광년이의 스킬인가…’
묶여있던 고블린 사체가 널브러진 자리에는 오로지 피의 웅덩이만이 남아 그곳에 시체가 있었음을 암시해줄 뿐이었다.
“이…이제 끝인가요?…”
일곱 번째로 순서를 기다리던 여자 훈련생이 광년이에게 말했다.
‘칼질을 할 고블린이 죽었으니 저는 하지 않아도 되죠?’라고 물어보는 눈이었다.
그런 그녀의 기대는 무너졌다.
광년이의 손에서 묶여있던 고블린 한 마리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 께에에엨!!
“자, 제라드는 죽었으니… 얘는 제라드2야.”
“히익!…”
새로 꺼내진 고블린은 아주 쌩쌩했다.
당연하지만 고블린을 향한 칼질 연습은 계속되었다.
‘볼 때마다 좋아 보이네 저 스킬은…’
나는 광년이의 스킬창을 다시 한번 확인해보기 위해 열었다.
띠링!
=
[스킬 이름] 아공간
[레벨] Lv 3
[속성] 기타
[타입] Active
[상세]
마나를 소모하여 손에 닿은 물건을 아공간에 보관합니다.
아공간에 들어간 물건은 시간이 흐르지 않습니다.
마나를 소모하여 아공간에 넣은 물건을 꺼냅니다.
본인에게 익숙한 물건일수록 몸에서 떨어진 곳에 꺼낼 수 있습니다.
현재 거리 한계 5M (Lv 3)
- Lv 2
이제 완벽히 제압된 생명체를 아공간에 넣을 수 있습니다.
생명체는 아공간 속에서도 시간이 멈추지 않습니다.
- Lv 3
이제 스킬을 본인에게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본체는 아공간 안에 3초 이상 머물지 못합니다.
한번 자신의 몸을 아공간에 넣으면, 15초 동안 본체를 아공간에 넣지 못합니다.
[재사용 대기시간] -
=
아공간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는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그 공간의 크기가 작더라도 충분히 유틸성이 높은 스킬이다.
이 세계의 이능 각성자들 중 최상위 티어에 군림할 정도로 유용할 것이다.
이능 각성자를 전부 세어봐야 많지 않겠지만.
아무튼 그만큼 이 스킬이 탐난다는 뜻이다.
특히 광년이의 전투 센스와 연계가 된다면…
브랙에 비해 부족한 기본 스텟 정도는 충분히 극복한다.
3Lv에 추가된 옵션은 게임에서나 볼 수 있는 15초의 재사용 대기시간을 가진 5M 점멸 스킬이나 다름없다.
기습적인 공격은 물론이고 치명적인 공격을 15초마다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좀 더 고차원적으로 사용한다면 30cm 정도만 몸을 이동 시켜 수 싸움에서 큰 이득을 보던가.
‘…저거 어떻게 배우는 방법은 없으려나?’
어쩌면 이 소설을 완결한다면 상점창에 나올지도 모르겠다.
서걱!
- 끄에에에엙!!
“다음!”
고민에 잠긴 사이 내 차례가 다가왔다.
고블린은 이미 두 번 베어져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잠깐 묶여 있는 고블린과 눈싸움을 한 뒤, 칼을 뽑았다.
터벅! 터벅!
퍼억!
- 끏!… 륿!… 큵…!
나는 고블린에게 다가가 목에 칼을 박아넣었다.
칼은 정확하게 내가 목표로 한 곳에 틀어박혔다.
멈춰있는 목표물을 빗맞힐 정도로 내 실력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칼끝은 목을 파고들다가 고블린의 목뼈에 막혀서 멈추었다.
보통이라면 여기서 칼을 빼내겠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목에 박혀있는 칼자루 끝을 다른 한 손의 손바닥으로 강하게 친다.
콰드득!
- 게륽…
목뼈가 부서지는 감촉이 칼자루를 잡은 손바닥을 간지럽힌다.
짧은 단말마를 마지막으로 고블린은 숨을 거두었다.
절반이 훨씬 넘게 잘린 고블린의 목이 칼 위에 덜렁거린다.
“호오… 화끈하네?”
“감사합니다.”
쑤욱.
툭… 투룩…
박혀있던 칼을 빼내니 커다란 고블린의 머리가 버티지 못하고 목 가죽을 찢으며 바닥에 뒹군다.
나는 미리 배운 대로 피에 젖은 칼날을 손질하며 나의 자리로 돌아갔다.
친하지 않은 주변 훈련생들의 시선이 모였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나의 이득을 위해 행동한 것이다.
지금의 내게 무언가를 죽이는 경험은 많이 해보면 해볼수록 좋다.
익숙해지면 실전에서 조금이라도 망설임이 생길 확률이 줄어들기에.
게다가 내게 위협 하나 없이 이런 귀한 경험을 할 기회라니?
감사히 내 최선을 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