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지구
“무…어?…”
나의 말을 들은 안젤리의 목소리가 떨린다.
나는 그녀를 품에서 떼어놓았다.
역시 예상대로 그녀의 눈은 지진이 난 듯 흔들리고 있었다.
방금 나의 입에서 나온 말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게 무슨… 찬영은 연인이 없잖…”
“소설 속 차원의 사람들도 전부 실존하는,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했지?”
“…”
나의 말에 안젤리의 얼굴이 굳어졌다.
내가 한 말에 담긴 뜻을 이해한 얼굴이다.
‘연인은 지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소설 속 세상에 있다.’라는 뜻을.
당연하지만 이 말은 거짓말이다.
천사들은 소설 속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 아기천사가 나의 퀘스트 이력을 보려고 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자신들이 만든 차원 속 일을 전부 알 수 있다면 나의 퀘스트 완료 이력을 체크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냥 과거를 쓱 흩어보면 되는데.
그렇기에 이런 거짓말이 가능한 것이다.
정말로 천사가 과거를 흩어본다고 해도 크게 거리낄 것은 없다.
뭐…
원나잇 상대긴 해도 일단 광년이와 잔 것은 사실이다.
말만 잘하면서 관계를 포장한다면 광년이를 나의 연인으로 둔갑시키는 것은 손쉽다.
한데 어째서 이런 거짓말을 하냐고?
거창한 대의가 있어서도, 어마어마한 보상을 받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냥…
그냥 나의 추악한 이기심 때문이다.
너무 추악하기 그지없어서 남에게 도저히 말 못할 정도의 이유다.
“…그럼… 나는… 하하… 결국… 그러네… 응…”
“…”
“미안…음… 사실… 좀 기대 했… 었거든… 흡! 찬영도 분명… 나랑… 같은… 흑…!”
푸른 빛의 아름다운 눈에서 물기가 맺힌다.
울먹임이 멈추지 않아 결국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안젤리는 최대한 눈을 크게 치켜뜨고 눈물을 참으려 했다.
하지만 이미 맺혀있던 눈물은 떨어졌다.
새하얀 볼을 타고 곡선을 그리면서…
…젠장, 더는 못 보겠네.
쓰레기 짓을 하더라도 최대한 빨리 끝내야겠다.
“안젤리. 내 연인이 되어줘.”
“흣?…”
“나도 네게 호감이 있어. 남자로서 여자를 좋아한다는 의미로.”
안젤리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이야기의 흐름이 내가 안젤리를 거절하는듯한 흐름이었기에.
“찬영에게는 연인… 이… 있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여 안젤리의 말에 긍정했다.
“그럼 어떻게? 아!… 설마… 둘의 사이가 지금 안 좋다든지? 곧 헤어지는 거야?”
안젤리의 눈에 희망이 깃든다.
하지만 나는 그런 안젤리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 아마 헤어질 일은 없을 것 같아.”
“어?… 그러면 어떻게 내가 찬영의 연인이 돼? 찬영은 이미 연인이… 있… 는데.”
“안젤리.”
“응?”
“나 지금 너한테 키스할 거야.”
“…어?”
절대 기습적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천천히.
느긋하고 부드럽게 다가갔다.
곧이어 서로의 이마가 맞닿는다.
투욱…
안젤리의 눈동자 속에 내 눈동자가 비친다.
그녀의 눈은 혼란으로 젖어있었다.
우리는 잠시 그렇게 눈을 마주했다.
스으윽.
“아…!”
나는 왼손을 들어 그녀의 볼에 가져다 대었다.
따스하면서 부드러운 볼이 손바닥에 닿는다.
다시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안젤리가 내게 가진 호의의 크기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오른손을 들어 그녀의 뒷머리에 가져다 대었다.
키스를 편안하게 할 수 있도록 받쳐주기 위함이다.
하지만 손에 과도하게 힘을 주지는 않았다.
언제든지 그녀가 내 키스를 피할 수 있도록.
아주 천천히 나와 안젤리 사이의 거리가 줄어든다.
조금씩, 조금씩, 줄어들다 마침내.
“으음…”
츕
5초 남짓의 짧은 키스였다.
혀는 물론이고 입술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않은 버드키스.
그럼에도 안젤리와의 입맞춤은 기분이 좋았다.
“하아… 키스…해 버렸…네…”
“응. 연인이 있는데, 키스해 버렸어.”
“아… 연인…”
“참고로 이게 내 첫 키스야.”
“그…그래?…”
몸이 바뀌기 전에 한 키스는 논외로 치고.
광년이와 할 때는 키스를 하지 않았으니 처음이 맞다.
안젤리는 나의 말에 어쩐지 기쁜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런 그녀가 귀여워 다시 고개를 숙여 짧게 입을 맞추었다.
“음…”
이번 키스는 짧았다.
입이 맞닿은 시간은 고작 1초를 넘긴 정도였다.
“후아…”
안젤리의 표정은 녹아있었다.
어지간히 키스가 마음에 든 것 같은 눈치였다.
아닌 척 살짝 고개를 치켜드는 것이 키스를 조르고 있는 것 같았다.
“찬영은 나를… 좋아하는 거야?…”
“좋아해.”
“흐읏… 그럼… 한 번만 더…”
츕…
“흐… 좀 더 길게…”
“내게는 연인이 있는데 괜찮아?”
“…딱 오늘까지만… 오늘만 이러는 거니까… 내일부터는 그냥 차인 여자로서 어리광부리지 않을 거니까…”
츄웁…
“내가 내일 너한테 요구할 건데. 키스하자고. 거절할 수 있어?”
“…그러면 안 돼…”
“그러면 네가 내일 거절해.”
“…그러지 마… 제발… 지금 이러는 것도… 안되는 거야… 원래는…”
“이러는 것?”
츕
“이거?”
“…응.”
안젤리는 단 한 번도 내 입술을 피하지 않았다.
아주 약간 고개만 틀어도 키스를 막을 수 있었지만, 내가 입을 맞춰 올 때마다 나를 받아들여 주었다.
오히려 몇 번 키스를 경험하더니, 내 얼굴이 다가갈 때면 살짝 고개를 들어서 내게 키스하기 쉽게 만들어 주기까지 했다.
“이제 아까 한 말이 이해됐어?”
“…”
“내 연인이 되어줘.”
“…”
“물론 나는 지금 연인이랑 헤어질 생각이 없어.”
“…안돼… 역시… 이건 아닌 것 같… 흐읍.”
춥
나는 안젤리에게 제안했다.
양다리를 걸치자고.
그리고 그것을 눈감아 달라고.
무려 천사에게 불륜을 요구한 것이다.
내가 안젤리에게 거짓말을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금 당장 연인은 없지만, 언젠가는 만들 것이다.
한 명이 아닌 여럿을.
이왕 이런 시스템을 얻었으면 소설 속에 나오는 수많은 매력 넘치는 주·조연 여자들을 만나봐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방금의 안젤리의 고백에 덥석 수락해 버리면 그 가능성이 막히고 만다.
천사인 그녀가 내가 바람을 피우는 것을 두 눈 뜨고 허락할 리 없다.
그렇기에 생각했다.
완벽하지 않은 천사.
실수를 하는 천사.
천사인 안젤리를 선(善)에서 한 발짝 떼어 놓기 위해.
스스로가 불륜이라는 죄를 저지르게 하게끔.
나중에 내가 새로운 여자를 만나더라도,
스스로가 떳떳하지 못한 안젤리가 불평하지 못하게…
족쇄를 채워 놓는 것이다.
“프하… 아니야… 찬영… 제발… 차라리…”
“차라리?”
“나를 그냥 깔끔하게 차 줘… 그렇다면 포기할게… 해볼게… 힘들겠지만, 그래도… 난 천사니까…”
“안돼.”
안젤리의 저항은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이미 승자가 정해진 게임이다.
그녀는 내 뜻에 따를 수밖에 없다.
눈물이 말라붙은 안젤리의 눈가에 다시 습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자신이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지 도무지 모르는 눈치다.
이성과 감성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이성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알지만, 감성으로는 그렇게라도 나와 연결이 되었으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나… 흐윽!… 엄청 이기적인 말… 흡! 한 번만, 딱 한 번만 할게… 차라리 내가 좋으면… 큽! 지금 연인이랑 헤어지고 나랑 만나면 안 될까? 부탁이야… 흐윽!…”
안젤리는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닦으며 자포자기했다.
지금까지 도무지 말하지 못했던 가슴속 깊은 곳에 숨겨둔 속마음까지 내게 꺼내어 말했다.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된다.
솔직히 내가 하는 행동이 안젤리를 위한 것도 있다고 포장 못 할 말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적어도 내가 그러면 안 되었다.
결국, 이 쓰레기 같은 이유로 쓰레기 같은 선택을 한 것은 나다.
선택의 결과로 이미 안젤리는 상처 입었다.
여기서 선택을 되돌려서 모든 것을 허사로 만든다?
그래서야 애매하게 재활용 가능한 쓰레기인 ‘척’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역겹기 그지없다.
“…내 연인은 나를 사랑해.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과 똑같이.”
“내가… 찬영을 사랑하는 만큼… 이라… 그럼 포기는 안 하겠네…”
“응. 안 할 거야.”
“흐흑… 그럼 역시… 나는…”
“어차피 안젤리 너와 내 연인은 다른 차원에 있으니 만날 일이 없잖아? 여긴 지구니까.”
“…”
“…표정을 보니 나중에 소설 속 인물도 지구로 데려올 수 있나 보네. 그런데 그렇다고 한들 상관없잖아. 넌 천사니까.”
“그건…”
“천사는 자신의 모습을 타인의 눈에 안 보이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 맞지?”
“…그래도…”
“그쪽 차원과 지구는 시간이 별개로 흐르잖아. 내가 두 명을 동시에 사랑한다고 한 명과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들지는 않아.”
“그쪽 연인이 혹시라도 알게 되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알게 된다면 내가 먼저 사과할 거야. 내 잘못에 대한 결과도 받아들일 거고. 그만큼 나는 너를 원해.”
“흐윽… 제발… 그런 말 하지 마… 흔들지 마… 나… 점점 더…”
안젤리에게 결정하기를 강요하는 것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통보하듯 말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더 편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내가 그 짐을 덜어주고자 했다.
우습게도 나는 안젤리가 행복하길 바랐다.
“마지막으로 입을 맞출 거야. 지금처럼 가벼운 키스가 아니라, 연인끼리 하는 키스를. 피하면 더는 너를 괴롭히지 않을게. 포기할게. 하지만 피하지 않는다면…”
“…”
“넌 내 연인이야.”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안젤리는 피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볼에 손을 대었다.
안젤리는 눈을 감았다.
나는 그녀의 얼굴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안젤리는 입술을 열어 받아들였다.
츄릅-
혀가 안젤리의 입속을 파고든다.
가지런한 잇몸을 살짝 더듬다가, 어찌할 줄 모르고 굳어있는 혓바닥을 찾아내 얽혀든다.
본격적으로 타액과 타액이 오가기 시작했다.
“에흐… 흡!”
안젤리가 숨을 쉬어야 할 타이밍을 못 잡는 것 같기에 이를 배려해 아주 약간 떨어졌다.
내가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숨을 몰아쉬는 안젤리.
나는 감은 눈을 뜬 그녀를 향해 살짝 웃어준 뒤, 다시 입을 맞추었다.
아직 부족했다.
“읍… 하음!”
츕! 츄릅-
뜨거운 그녀의 체온과 나의 체온이 섞여 둘의 혓바닥 온도가 비슷해졌을 무렵.
나는 입술을 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째선지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와락!
끌어안겼다.
이전과 달리 내게 안기는 안젤리를 안아줄 수 있었다.
안젤리는 나의 품 안에 들어왔다.
“사랑해.”
“응.”
“사랑해.”
“나도.”
“사랑해. 찬영. 사랑해.”
그녀는 간신히 억누르던 무언가가 터져 나오듯 내게 언어를 쏟아부었다.
가슴께가 젖어온다.
나는 안젤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가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훌쩍…”
어느 정도 울음이 그쳤을 때.
나는 그녀에게 살짝 무게를 실어 뒤로 눕혔다.
그녀가 줄곧 앉아있던 곳은 침대의 가장자리.
그대로 누우면 바로 침대인 것이다.
“앗?…”
털썩.
나도 그녀를 따라 쓰러지듯 곁에 누웠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그녀를 다시 껴안았다.
“안젤리.”
“으… 차…찬영?…”
살짝 당황한 목소리였다.
이 방 안의 분위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눈치챈 모양이다.
나는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발키리는 순결한 천사만 될 수 있는 거야?”
“…아니. 발키리랑 순결이랑은 전혀 관련 없어… 그런데… 왜 그걸…”
“물어보냐고?”
“…”
“싫어?”
“…”
안젤리는 내가 무엇이 싫냐고 물어본 지는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아무리…그래도 이건 좀 너무 빠른 게 아닐까… 하고… 조금 천천히 진도를 나가더라도…”
“곧 네 후배가 우리 집에 오지? 그때가 되면 한동안 스킨쉽도 못할 텐데… 괜찮아?”
“그…그거랑…! 이거랑… 무슨…!”
쪽.
“흐앗?”
나는 붉어진 안젤리의 목덜미에 키스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평상시라면 간지러울 뿐이겠지만, 이렇게 둘이 침대에 누워 껴안고 있으면 이것만으로 충분한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으아… 안… 되는… 데…”
안젤리의 목소리는 점점 더 작아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