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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53)화 (53/310)



〈 53화 〉지구

중급 천사 안젤리는 중대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기존에 안젤리는 찬영과의 관계를 느긋하게 쌓아가려고 했었다.
인간의 기준으로.

불멸의 삶을 사는 신인 안젤리에게 지금의 관계 진척 속도는 엄청나게 빠른 축에 속했다.
심지어 남자 한번 사귀어 본 적 없는 숫처녀인 안젤리가 자발적으로 권유한 안마는…
그야말로 필생의 용기를 낸 과감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으으… 어떻게 하지? 여…여기서  과감하게 나가야 하나?… 아니 아무래도 그건…”

과거 자신이 저지른 과감한 행동에서 비롯한 매일 밤의 스킨쉽에도 아직까지 익숙해지지 않은 지금.
그녀는 더 빠르게 진도를 나가야 하나 깊은 고민에 잠겨 있었다.
안젤리가 조급해진 이유는 간단했다.


“며칠 뒤면 후배가 이곳으로 완전히 이사  텐데… 아으! 지금까지 완벽히 까먹고 있었어!”

잊고 있던 자신과 찬영 외의 제3의 인물의 존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평소 뛰어난 오성을 지닌 그녀도, 찾아온 첫사랑의 설렘에 시야가 좁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첫사랑.
정말로 첫사랑이다.
단순히 억지로 만들어낸 애정이 아닌, 정말 진심으로 찾아온 감정이었다.
안젤리가 그것을 깨달은 것은 고작 며칠 전이다.
처음 안마를 권유했을 때가 아니었다.
그때의 감정은…
안젤리가 생각하기로는 가짜였다.

아무튼 그녀의 후배가 찬영의 집에 살기 시작한다면 이 이상의 진도는 나가기 힘들었다.
이미 맺어진 후라면 후배가 보아도 괜찮다.
그러나 찬영과 맺어지는 ‘과정’을 누군가에게 보이는 것은 안젤리에게 차원이 다른 부끄러움을 선사했다.
이는 사람들이 지인에게 애인이 있는 것은 당당하게 말하지만, 썸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웬만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과 같았다.


이미 후배가 맡은 인수인계는 전부 끝났다.
이제 그녀들의 상사가 확실히 인수인계가 완료되었음을 확인하고, 인사 변경의 승인을 내리기만 하면 당장 내일이라도 이 집에 들어오는 것이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결단이 필요했다.


“끄으으으…”

그녀가 고민하든 하지 않든 시간은 정직하게 흘러가며 저녁이 지나고, 밤이 찾아왔다.
매번 하던 스킨쉽의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결국 안젤리는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찬영의 방문을 열었다.


똑똑똑!


“들어와.”


끼이익… 철컥.

이미  번이나 안마를 받았기에 미리 침대에 누워있어도 괜찮으련만, 찬영은 언제나 안젤리가 방문을 두들기면 문 앞에서 그녀가 방문을 열기를 기다려주었다.
언제나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안으로 안내해 주었다.
안젤리는 그런 찬영의 작은 배려가 좋았다.

“안젤리? 기분 좋은 일 있었어?”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안젤리는 자신도 모르게 올라간 입꼬리를 억누르려다, 찬영의 앞에서는 딱히 그럴 필요가 없음을 깨닫고 그냥 마음 편하게 웃어버렸다.


그녀는 평소 웃음 짓는 사람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아름답다고 생각해 왔다.
분명 찬영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안젤리 본인이 웃음을 지어서 조금이라도 더 아름답게 보인다면 막을 이유는 없었다.

안젤리와 찬영은 바로 안마를 시작하는 대신에 가벼운 잡담을 나누었다.
찬영과의 담소는 항상 즐거웠다.


‘담소가 즐겁기에 찬영이 좋은 걸까, 아니면 찬영이 좋기에 담소가 즐거운 걸까?’

전자라고 하기에는 찬영과 담소하지 않는 시간조차 즐거웠다.
후자라고 하기에는 첫 만남부터 찬영과의 담소는 즐거웠다.
이제 와서 둘의 구분이 하등 무슨 상관이랴,
지금 이 순간이 즐겁다면 된 것이다.

 흐름대로라면 어제와 같은 오늘이  것이다.
더 이상의 관계 진전은 크게 없겠지만, 두근거리는 스킨쉽은 만끽 할 수 있는.
안젤리는 아쉬움 반, 안도감 반을 느끼며 안마를 시작하려 했다.

“저기 안젤리?”

“응?”

그러나 오늘은 어제와 조금 달랐다.

“오늘은 내가 네게 안마를 해줘도 될까?”

이번에는 찬영이 안젤리에게 다가왔다.

*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오늘의 안젤리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렇기에 과감한 제안을 해보았다.
내가 그녀에게 안마를 해 줘도 괜찮겠냐고.

“어… 나를? 찬영이?”

“응. 내가 안젤리에게 안마를 해주고 싶어.”


조금이라도 망설이거나 말끝이 흐려진다면 흑심을 품은 것처럼 보인다.
나는 최대한 당당하고 명확하게 말을 내뱉었다.


내 말을 들은 안젤리는 숨을 한번 삼키더니, 살짝 귀가 붉어졌다.
…귀가 붉어져?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최소한 내가 이성이란 것을 자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아주아주 좋은 신호다.


“…부탁이라면… 좋아…”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기어가듯 말하는 안젤리.
나는 대답 대신에 그녀의 손을 잡고 침대로 이끌었다.
눕히는 대신에 앉혔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은 안젤리의 앞 방바닥에 마주 보고 앉았다.

“우선 발부터 마사지해 줄게?”

…끄덕.


내가 정한 첫 번째 목표는 안젤리의 발이었다.
발끝은 몸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외곽진 신체 부위다.
그렇기에 가장 터치에 대한 거부감이 덜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부드러운 자극을 받을 일이 없어 상당히 민감하다.
항상 몸을 지탱해야 하므로 강렬한 자극에만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스윽…

나는 부드럽게 안젤리의 발을 잡았다.
그녀의 발은 너무 작아서 내  손으로 쥘 수 있었다.
하지만 섬세하고 망가지기 쉬운 생크림 케이크를 다루는 것처럼,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쥐었다.
안젤리는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꿈을 꾸고 있는 듯한 표정이다.


꾸욱. 꾸욱.


“앗…!”

힘을 주지 않고 가볍게 발을 쥔 손을 밀어 올린다.
그 간지러운 자극에 안젤리는 약간 정신을 차린 듯했다.

나는 시선을 내려 안젤리의 발을 쳐다보았다.
정말로 안마를 해주겠답시고 힘을 주어 안젤리의 발을 지압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발을 매만지는 내 손길을 의식하게 해야 한다.
긴장을 풀어주듯 약하게 발바닥을 지압해 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


꾸욱. 꾹.


발을 부드럽게 마사지하는 것에 집중한 지 몇 분이 지나갔다.
작고 아름다운 발을 만지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나를 빠지게 만들었다.
없던 발 패티시까지 생길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안젤리가 몇 분 째 반응을 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안젤리의 얼굴을 확인했다.

“…”

“안젤리?”

“어? 어!”

안젤리는 멍하니 입을 연 채로 자신의 발을 매만지는 나의 손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내 부름에 눈의 초점이 돌아왔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안젤리의 얼굴에 홍조가 깃들었다.
단순히 귀가 붉어진 정도가 아니었다.
얼굴 전체가 새빨갛게 물들여져 있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저 얼굴을 보면 눈치가 더럽게 없는 사람이 아닌 이상에야 전부 깨닫는다.
안젤리는 이미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

“안젤리. 너 얼굴이 붉어.”


“앗?! 보…보면 안 돼!”


안젤리는 내 말에 화들짝 놀라 팔로 얼굴을 가렸다.
나는 말 없이 그런 그녀를 쳐다보았다.

잠깐의 시간 동안 말없이 고민했다.
하지만 결국 결정을 내렸다.
그녀에게서 나를 향한 감정을 끌어내기로.

스윽…

“흐?! 아?!”

와락.

나는 일어나서 침대에 앉아있는 안젤리를 끌어안았다.
안젤리의 얼굴이  가슴에 묻혔다.
이걸로 나와 직접적인 접촉을 하고 있으니 나를 의식하게  것이다.
그러나 안젤리는 나의 얼굴을 보지 않게 되니 덜 부끄러울 것이다.
때로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안기는 것보다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더 부끄러울 때가 있는 법이다.
지금이 정확히 그때였다.

“지…지…지금… 뭐…”

“들어줄게.”


“무…슨!”


“지금 말하면 돼.”

“…흐읏!…”


주어는 생략했다.
하지만 안젤리는 알아들었다.
나는 안젤리가 진정할 수 있도록 그녀의 머리를 상냥하게 쓸었다.
머리의 모양이 상하지 않도록 결을 따라 부드럽게.
내 품 안에서 굳어진 그녀의 몸이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풀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조용히 기다렸다.
그녀가 진정하고 입을  때까지.



스으윽… 스윽…

스윽…




스으윽…








“후우… 흐우… 차…찬영?…”


기나긴 10분이 흘러갔다.
안젤리는 심호흡을 하며 최대한 안정하려고 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막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입을 열어 말을 꺼내었다.


“응.”

“…그거 알아? 찬영은 내가 오래전부터 생각해온 이상형이랑 엄청 많이 들어맞는다?”

“이상형이라… 좀 신기하네.”

“나도 신기했어. 최초로 만난 인간이 이상형이라니… 처음에는 그냥 내 이상형인 인간이었기에, 내가 아직 겪어보지 못한 사랑이란 걸 한번 경험해 보고 싶었기에, 억지로 찬영이란 사람을 사랑해보려고 했어. 예전부터 사랑이란 것이 엄청 궁금했거든…”

“억지로?”

“응… 좋은 사람이 나타났으니, 반하기 위한 노력을 하면 분명 사랑을 경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실제로 시간을 돌리기 전, 찬영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고, 이걸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전부 과거형이네.”

“그건 사랑이 아니었으니까. 내 착각이었어. 지금까지의 그건 사랑이 아니야…”

“…”


“사랑은… 좀 더… 초조하고… 갈팡질팡하고… 닿고 싶지만…”


“다가서기 무서운?”

끄덕.


스으윽…


품 안의 안젤리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얇은 손이 내 허리를 두른다.
안젤리가 팔을 들어 나를 마주 안은 것이다.
우리 둘은 잠시동안 그렇게 서로 끌어안고 있었다.


“진짜 사랑이란 건… 정말… 두렵네… 나 무서워… 찬영에게 거절당한다면… 정말… 너무 무서워…”


꾸욱.

안젤리가 내게 두른 팔에 힘을 줘 나를 더욱더 세게 끌어안았다.
밀어내지 말아 달라는 것처럼.
이 작은 천사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대화의 끝에  입에서 나올 말을.

그러나 안젤리는 강했다.
안젤리는 겁먹은 자신에게 힘을 불어넣듯이, 크게 숨을 한번 들이쉬고 내게 말했다.


- 흐으읍!

“나는 찬영이 좋아. 여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의미로.”

“고백하자면  스스로의 감정을 깨달은 건 고작 며칠 전이야. 찬영에게 반했던 명확한 이유도 모르겠어.”

“찬영이 눈부실 정도로 노력하는 사람이라서? 내게 해줬던 자잘한 배려에 감동해서? 나랑 성격이 너무  맞아서 함께 있으면 즐거워서?…”


“…솔직히 전부 아닌 것 같아. 그야 저 장점들이 없었어도 찬영에게 반하지 않을 거란 확신을 못 하겠는걸.”

“저것을 반했던 이유로 친다면, 지금 나는 찬영이 내 머리만 쓰다듬어줘도 반하는 이유가 돼. 다들 가져다 붙인 이유가 될 뿐이야.”

“좋아해. 그냥… 좋아해. 이건 확신할  있어. 나는 찬영을 좋아해.”

“다른 사람이나 후배에 비해서 찬영은 나에게 훨씬 더 잘 대해 줬어. 그리고 지금, 찬영은 나를 품에 안아주었어.”


“이건  혼자만의 착각이야? 아니면… 그만큼 찬영에게 있어서 내가 특별하다는 뜻이야?”

안젤리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말을 멈추었다.
그녀는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려워하면서.
또는 기대하면서.


‘…’

천사는 신보다는 인간에 가까웠다.
정서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이다.

완전하지 않았다.
그들도 화를 냈고, 슬퍼하고, 당황하며, 사랑을 했다.
거짓말?
당연히 한다.
당장 백하민의 담당 천사는 실적을 위해 녀석을 속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가능할 것이다.
안젤리를 선(善)에서 한 발짝 떼어 놓는 것이.

언젠가 나는 이득만 합당하다면, 언제든지 쓰레기가 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직감했다.
그것이 바로 지금이라고.

“안젤리.”

“…응.”

나는 거짓을 입에 담았다.
내게 마음을 열어준 그녀의 가슴에…
상처를 입혔다.

“나는 이미 연인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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