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테라포밍
첫째날 팀 훈련이 끝났다.
이미 해는 기울었고, 모든 훈련생들은 자신의 팀원끼리 모여서 앉아 담소를 나누며 저녁 식사를 했었다.
다들 큰 문제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 팀만 빼고.
“그래서 이렇게 계속 나와, 이강인이랑 대화도 안 하시겠다?”
“…”
지금 이곳에는 듣는 귀가 없다.
우리 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일부러 나머지 팀원들에게 부탁했다.
잠깐 리 샤오린과 둘이 얘기 좀 하고 오겠다고.
블랑과 이강인은 나를 믿고 리 샤오린 문제를 맡겨주었고, 리 샤오린은 내가 대화를 하자며 불러내어도 불평 하나 없이 나를 따라왔다.
그렇게 나랑 리 샤오린이랑 말없이 걷기만 하다, 아무도 없는 곳에 도착해 대화를 시작한 것이 방금이다.
“네가 애새끼냐? 공 사 구분 못 해?”
찌릿!
내 말에 나를 째려보는 날카로운 눈초리.
하지만 나도 지지 않고 마주 노려보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잘못한 것은 명백히 리 샤오린이었기에.
우스운 것은 리 샤오린 본인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이란 것을.
훈련 내내 다른 팀원들의 눈치를 힐끗힐끗 살피는 것만 보아도 확실했다.
그녀 스스로도 고집을 부린 것을 후회하고 있겠지.
하지만 그녀의 성격상 쉽사리 자신의 태도를 손바닥 뒤집듯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내 말이 옳다는 것은 이성적으로는 이해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수긍하며 태도를 바꾸면 왠지 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에 계속 비협조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애새끼 같은 성격이다.
‘아오 귀찮은 년. 머리 쓰게 만드네.’
그래도 내가 꽤 좋아하는 상황이다.
정확히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쥐고 흔드는 방법’을 사용할 만한 상황이다.
“…뭐가.”
“뭐가? 지금 그걸 나한테 묻는 거냐? 네가 협조를 안 하고 있잖아. 이 다섯 명의 팀원 중 오직 너만.”
“…시키는 건 전부 했잖아. 왜 그러는데.”
“그럼 이렇게 분위기 좆창난 채로 지낼 거야? 아까 교관님이 말했잖아. 팀원 합을 맞추는 것에 정확히 한 달 주겠다고. 한 달 뒤에 어쩐다고 그랬어. 네가 말해봐.”
“…괴물들이랑 실전을 치룬다고 했지… 그리고 욕하지 마.”
“그럼 네가 욕 나오게 하지 말던가. 왜 알면서 자꾸 고집을 부려? 다른 팀들은 한 달 동안 조금이라도 합을 맞추기 위해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하는데, 너 때문에 우리 4명 다 피해를 봐야겠어?”
“…”
“설마 합 같은 건 맞추지 않아도 괴물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그리 자신감이 넘쳤나? 아니, 아닌 것 같은데. 그냥 솔직히 말해. 제대로 연습을 해도 1인분을 할 자신 없으니까, 쫄아붙은 것을 감추려고 화난 척 하는 거 아니야?”
“?… 그게 무슨 개소리…!”
“네가 그 ‘좆같은’ 마인드로 어떻게 인생을 굴리든 내 알 바는 아닌데, 적어도 우리에게 피해는 주지 말아야지. 안 그러냐?”
“욕하지 말라고!”
“이 씨발년아.”
“이이익!”
나는 언뜻 보면 굉장히 분노한 것처럼 보였으나, 그 실상은 전혀 화나지 않았다.
찌그러진 미간도, 가라앉은 목소리도, 고개를 내리고 눈을 치켜뜬 공격적인 눈빛도 모두 의도한 것이다.
리 샤오린도 감정적으로 되기 쉽도록.
당연하지만 리 샤오린은 괴물에게 쫄아서 그것을 감추려고 우리에게 협조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냥 예전에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은 나랑 이강인에게 삐져서 토라진 거지.
하지만 나는 일부러 오해한 척을 하며 리 샤오린을 몰아붙였다.
사람은 자신의 본심을 잘못 예측 당하면, 정곡을 찔린 것보다 더 많이 화가 난다.
특히 이렇게 틀린 사실을 확정 짓듯 말하면 더더욱.
가볍게 예시를 들어보자.
학창 시절에 어쩐지 그날따라 게임이 좀 질리고, 안 어울리게 공부가 마려운 날이 있지 않던가?
문제집이라도 보려고 하던 게임을 끄려고 한 순간, 어머니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 내 등짝을 때리며 크게 소리치신다.
‘게임 좀 그만하고 공부해!’
철썩!
…사람이라면 억울해한다.
방금 컴퓨터를 끄고 공부하려 했다고 말을 해도 전혀 소용이 없다.
어머니의 머릿속에서의 나는 게임을 하다 잔소리를 듣고, 마음에도 없던 공부 하려 했다는 핑계를 댄 아들일 뿐이니까.
심지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수단이 없으니 더더욱 억울하다.
바로 지금처럼.
“나…나는 그런 생각 안 했어! 네가 왜 멋대로 내 생각을!…”
“그럼 뭐였는데?”
“그…”
“이거 봐. 반박도 못 하면서. 내 말에 틀린 게 있어?”
리 샤오린도 차마 본인의 입으로는 2주 전에 나와 이강인이랑 싸운 것이 아직도 풀리지 않아 고집을 부리고 있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지.
그렇다면 그녀가 할 행동은 단 하나다.
“어쨌든 난 그딴 이유로 쫄아 붙은 것이 아니라고!”
“허, 증명할 방법도 없으면서 무슨 억지는.”
“…앞으로 증명하면 되잖아!”
“앞으로?”
“그래! 앞으로는 적극적으로 훈련에 참여하고, 합도 맞출 테니까, 방금 그 말 취소 해. 취소하라고!”
“…”
“취소해!!”
음.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억지로 눌러 참았다.
너무 쉽다.
“만약 방금 네 말이 사실이라면…”
“사실이야!”
“…내가 오해 했을 수도 있겠네.”
“‘오해했을 수도’가 아니라 명백한 착각이라고!”
“……알겠어.”
화를 내던 표정을 풀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을 수긍했다.
내 목적은 이미 이루어졌으니 그녀와 다툴 이유가 없다.
오해했음을 인정하는 내 모습에서 진실성을 느낀 리 샤오린도 어느 정도 냉정을 찾은 눈치다.
리 샤오린의 분노는 상당량 풀렸다.
누군가의 분노를 죽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 있다.
그중 내가 즐겨 사용하는 방법은…
이런 식으로 더 큰 분노를 만들어 내어 뒤집어씌운 다음, 그 커다란 분노의 원인을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큰 분노가 식으며 기존에 있던 분노까지 팍 식는다.
순식간에 냉정을 되찾는 것이다.
이처럼 리 샤오린도 2주 전에 다툰 일에 대해 더는 감정을 가지지 않았다.
내가 씌운 오해라는 분노가 식으며 같이 식어버린 것이다.
이제 나와 리 샤오린 사이는 친하진 않지만, 적어도 사이에 있던 앙금은 사라진 상태가 되었다.
이것으로 나랑 이강인에게 그녀가 가진 앙금을 없앴고, 또 리 샤오린의 협조를 얻어낸다는 두 가지 성과를 동시에 얻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하지. 평생 팀으로 같이 지낼 것도 아니고, 고작 2달하고 조금 같이 지내는 정도인데.’
“하지만 말로는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 지금 사과는 안 할 거다?”
“그럼 내가 이번 달 내내 협조를 잘하다가, 다음 달에 성공적으로 괴물을 죽이면 사과해.”
“그때가 되면 기꺼이.”
솔직히 이번 오해에 관한 것은 내가 시비를 건 것이 맞으니 사과를 못 해줄 마음도 없다.
하지만 사과를 받고 싶으면 나의 명령을 잘 들어야 할 것이다.
‘한 달 동안 가지고 놀 장난감이 생겼네.’
가끔 느끼는 것인데, 스스로가 너무 착해서 걱정이다.
내게 모욕을 준 여자에게 사과까지 해준다니…
안젤리도 분명 나의 선한 마음을 알고 있기에 나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이겠지.
분명하다.
*
치이익…
기름을 두르고 달군 프라이팬에 야채와 양념을 넣어 섞는다.
양념은 매운 맛 보다는 달콤함에 중점을 두었다.
아무래도 먹는 사람이 매움에 익숙한 한국인이 아니다 보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크게 부풀어 오른 야채들이 숨이 죽어가며 익기 시작했다.
이때, 겉이 살짝 노릇해질 정도로만 초벌을 해둔 닭갈비를 넣고 다시 볶는다.
초벌을 해 놓은 이유는 식당에 비해 집에서는 아무래도 화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닭갈비는 미리 양념에 재워뒀기 때문에 붉은빛을 띄고 있었다.
치직! 치직!
한 손으로 프라이팬을, 다른 한 손으로는 실리콘 주걱을 쥔 채 양념이 고루 퍼지게끔 섞어주었다.
마지막으로 미리 물에 불려 놓은 납작 당면을 넣은 채 조금만 더 볶아주면…
맛있게 요리된 닭갈비 완성이다.
슬쩍 삐져나온 양배추를 손으로 집어 먹어보니 맵지 않고 달콤했다.
물론 한국인 기준으로.
“저녁 다 됐어 안젤리!”
닭갈비를 그릇에 옮겨 담으며 말했다.
안젤리가 먹을 그릇과 내가 먹을 그릇에.
나는 요리를 할 줄 안다.
자취생활을 오래도록 해서 그러냐고?
아니다.
‘진짜’ 자취생들은 이런 거창한 닭갈비 같은 요리는 전혀 할 줄 모르고, 전자레인지로 계란찜 만드는 방법이나 설거짓거리 최소한으로 남긴 채 요리하는 방법밖에 모른다.
아니면 라면을 기깔나게 끓이는 방법이나.
내가 요리를 할 줄 아는 이유는 단순하다.
요리를 잘하는 남자가 여자에게 인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일부러 평소 연습 삼아 이런 ‘요리’라고 부를 만한 것들을 해 왔다.
여자를 집에 초대했을 때 멋들어지게 대접하면 꽤 호감도를 쌓을 수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우와! 맛있겠다! 그런데… 매…매워 보여… 이거 괜찮은 거야?…”
“하하! 색깔만 이런 거야. 먹어 보면 생각보다 달달 할걸?”
“얹혀사는 처지에서 반찬 투정까지 할 생각은 없으니 남기지 않고 먹긴 할 건데…”
안젤리는 경계하듯 닭갈비를 노려보았다.
그것만으로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킁킁대면서 냄새를 맡아보기 시작했다.
그녀가 저러는 이유는 간단했다.
맨 처음, 아무 생각 없이 내가 평소 먹던 맵기로 제육 볶음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안젤리는 붉은색 음식만 보면 저렇게 긴장을 하게 되었다.
덕분에 요즘 나까지 매운 음식을 못 먹고 있었다.
딱히 매운 음식을 즐기는 것은 아니었기에 상관없지만…
“킁킁! 음… 괜찮…나?…”
“지난번에는 미안했어. 그때 제육볶음 남기지. 기침까지 해 가면서 억지로 먹었어야 했어?”
“음식을 남길 수는 없어!”
안젤리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게도 음식을 남기지 말라 말하지는 않았지만, 본인 스스로는 음식을 남기는 것에 상당히 거부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어른들이 자주 말하던 ‘음식을 남기면 나중에 천국에 못 가!’가 사실이었나?…
잡담도 잠시, 우리는 곧 책상에 앉아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와?! 맛있어! 살짝 매운데, 맛있어!”
…맵다고?
이게?
내 입맛에는 달콤함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생각보다 안젤리의 혀는 민감하나 보다.
“음… 네게는 한식보다는 양식이 맞을지도 모르겠네. 한식은 매운 것이 대부분이라… 미안해. 내가 양식을 할 줄 몰라서.”
안타깝지만 나는 양식을 할 줄 모른다.
‘어째서 여자를 꼬시기 위한 요리인데 양식을 할 줄 모르지? 여자들은 무조건 파스타나 리조또 같은 양식을 선호하지 않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수다.
아무래도 여자를 초대해 놓고 겉멋이 철철 넘치는 양식을 대접하는 건…
너무 속 보이지 않는가?
사실상 ‘너에게 잘 보일 거야’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애인을 대접하기 위한 것이면 몰라도, 썸타는 여자를 대접하기에는 알맞지 않다.
내 속셈이 티가 나도 너무 나다 보니 상대 쪽에서도 거부감이 들 수 있거든.
하지만 한식은 아니다.
이렇게 거창한 음식이라도 ‘아, 평소에 자취하며 해 먹는 음식이나 보구나. 맛있다.’ 이러고 넘어가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또 거부감 없이 호감도를 그대로 쌓을 수 있다.
아무튼 그렇기에 나는 양식을 할 줄 모른다.
오믈렛 정도는 나도 아침으로 즐겨 먹었기에 할 줄 알았지만…
“으응. 아니야! 정말 괜찮아! 나야말로 찬영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미안한걸? 나는 돈도 안 냈는데 방도 받고, 밥도 얻어먹고 있잖아… 그렇다고 내가 요리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천계에서 과일만 먹고 자란 안젤리는 요리를 할 줄 몰랐다.
이렇게 내게 빚만을 지고 있던 것이 불편했던 안젤리는 천계에 찬영에게 지급할 생활비를 달라고 요청했지만, 어째선지 반려 당했다고 한다.
반려당한 이유는 내게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서…설거지라도 내가…”
“음… 내가 해도 상관없는데?”
“아니야! 내가 할게!”
아무리 그래도 접시를 깨뜨리지는 않겠지?
나는 안젤리에게 설거지를 맡기기로 했다.
“으… 다 먹었으면 설거지 부탁할게.”
“응! 맡겨줘!”
- 달그락달그락.
다행히 접시가 깨지는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안젤리가 그 정도로 얼빵하지는 않다는 건가?
사실 좀 걱정했다는 것은 그녀에게 비밀로 하기로 했다.
“으… 여전히 미안한 기분이야… 적어도 생활비라도 줬어야 하는데…”
“천계에서 못 준다니 어쩔 수 없잖아?”
“으으으…”
다행히 내 통장 사정은 매우 부유했기에 소량의 생활비 정도는 받지 못하더라도 전혀 상관없었다.
게다가 카드 사용 이력을 조회해보니 (전)박찬영이 쓰던 금액보다 지금이 돈이 덜 나가고 있었다.
나랑 안젤리 두 명이 사용하는 식비보다, (전)박찬영이 훨씬 더 많은 식비를 소모했기 때문이다.
식후 차를 마시며 안젤리와 잡담을 한 뒤, 방에 들어와 침대에서 자려는 그때.
똑똑똑.
“그… 찬영. 자?”
“안젤리? 아니, 아직 안 자.”
“그으… 안자면… 내가 안마라도 해줄까?”
늦은 밤 안젤리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