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테라포밍
블랑이 떠나간 후.
나는 홀로 앉아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훈련생들도 충분히 눈치챌만한 모순이다.
오히려 50명이나 있는데 어째서 한 명도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의문스럽다.
광년이가 지금껏 보여준 행동이 너무 실감 나서?
정말로 제정신이 아니면 할만한 행동들이 아니었기에?
혼란스러운 이 세계에 적응하는 것만 해도 힘에 버거워서?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는 눈치를 챘다는 것이다.
블랑의 말대로라면 ‘게임’에서 광년이 자신이 이길 경우 리 샤오린의 눈알을 받아 가겠다고 했다 한다.
하지만 결국 브랙에게 규칙의 우선순위를 설명받으며 제재당했다.
…그것이 이상하다.
광년이가 브랙이 설명한 ‘임시 전투직과 훈련생 신분의 우선순위’에 대해 모르는 것이.
잠깐,
단순히 광년이가 교관이기 때문에 규칙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 절대 아니다.
지금껏 광년이가 보여준 미친년이라는 이미지대로라면 규칙 하나둘쯤은 까먹어도 충분히 이해가 갈 만하니까.
하지만 이 규칙은 다르다.
‘임시 전투직과 훈련생 신분 중 어느 것이 우선순위가 높은지’에 대한 규칙은, 광년이는 알고 있어야 했다.
반드시.
“광년이의 목에 있는 십수 개의 상처… 광년이는 자기 입으로 그 미친 ‘게임’을 십수 번이나 해왔다고 했어…”
정말로 십수 번이나 그런 ‘게임’을 하면서 리샤오린의 경우처럼 내기를 한 적이 없었을까?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하기는 어렵지… 그녀가 정말 미친년이라면.”
매번까지는 아니더라도, 열몇 번을 그런 ‘게임’을 하다 보면 한두 번은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훈련생의 신체 일부의 희생을 요구하는 내기가.
당연히 그때도 브랙에게 같은 말로 제지를 당했을 것이고, 그녀가 3개월을 주기로 기억을 몽땅 잃어버리는 알츠하이머가 아닌 이상에야 규칙을 알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이번에 브랙에게 똑같은 말로 제지를 당했다?
“이건… 지금까지 이런 내기가 없었다고 보기 보다는… 연기라고 보는 것이 훨씬 타당하겠지…”
이것뿐만이 아니다.
내가 그녀의 행동이 연기라고 확정한 것에는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녀가 미친년을 연기할만한 동기가 있다.
연기함으로써 따라오는 확실한 이득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리 샤오린과의 ‘게임’에서 증명이 되었다.
예전에 몇 번 말했다시피, 훈련생들의 요구 조건은 그렇게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개인 시간을 가지지 못 할 정도로 훈련의 강도가 강했으니까.
적어도 본인들이 생각하기에는.
그렇기에 교관들은 어떻게 대응을 하든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성적으로 훈련생들과 대화를 한순간…
그들의 의견을 수락하면 수락 하는 데로 훈련 강도 감소라는 손해를 보고,
그렇다고 묵살하면 그들은 더욱 뭉쳐서 강경하게 반발할 것이 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광년이가 한 행동 덕분에 훈련생들의 반항 의지 자체가 꺾였다.
의견조차 듣지 않고 자연스레 와해 되게끔 유도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우연일 확률?
그런 건 없다.
“게다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광년이 때문에 역으로 브랙이 훈련생들의 신뢰를 받고 있지?…”
나와 개인 훈련을 하기 위해 브랙이 빠지기 전.
훈련생들의 훈련을 주도하는 것은 브랙이었다.
그 덕에 강도가 강력한 훈련임에도 훈련생들은 ‘광년이가 시키는 것보다는 낫지…’라는 생각으로 훈련에 따라왔다.
…
이것까지 전부 계획한 것이라면 소름이 돋는다.
‘젠장. 원작에는 이런 얘기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고!’
차분히 광년이의 곁에서 행동을 관찰했다면 좀 더 빠르게 눈치챘겠지만,
나는 지금 훈련생들과 떨어져 생활하고 있다.
그래서 눈치채는 것이 늦었다.
‘그럼… 이 정보를 어떻게 써먹지?’
나는 딱히 이 정보를 훈련생들에게 알려서 혼란을 불러오고 싶지는 않았다.
이렇게 얌전히 원작 스토리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내 스스로를 성장시킬 수있으면 만족이다.
“하지만 완전히 못 써먹는 정보는 아니지.”
- 씨익.
나는 일어나서 광년이를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
광년이는 건물의 뒤편에서 찾을 수 있었다.
“교관님.”
“어? 박… 아니, 멧돼지?”
“예. 안녕하세요.”
“오… 가까이서 보니까 살 좀 빠진 티가 나네?”
박이라는 내 성씨까지 꺼내놓고 굳이 멧돼지로 고쳐 말하는 광년이.
저렇게 억지 별명을 밀거면 차라리 그냥 이름으로 불러줬으면 했다.
지난번에도 자연스럽게 내 이름을 부르기도 했고.
“뭔데. 왜 찾아왔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혹시 둘이서 잠깐 얘기 가능하실까요?”
“으엑?!”
슬쩍 주변을 둘러보아도 주변에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최대한 듣는 귀는 없애는 것이 좋겠지.
그런데 광년이 얘는 왜 갑자기 이렇게 놀래?
얼굴도 상당히 당황한 얼굴이다.
설마…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눈치를 챈 건가?
아직 내 본론을 눈치챌만한 단어는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는데?
“허억?!”
화들짝 놀란 목소리는 광년이가 낸 소리로 끝나지 않았다.
광년이의 뒤쪽, 조금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를 가진 남자가 놀란 소리를 내었다.
광년이의 몸에 정확하게 가려져 있어 내가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장소다.
나는 누군지 확인하려고 소리가 난 방향을 확인했다.
그리고선…
‘…블랑? 방금 내가 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블랑이 광년이에게 말을 거는 나를 보고 깜짝 놀라더니, 몸을 숨겼다.
벽 뒤에서 숨어가지곤 나를 향해 화이팅! 하는 포즈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물며 저 빛나는 눈빛은 어떤가.
…
누가 보아도 사랑 고백을 결심한 친구를 응원하는 눈빛이었다.
‘…이런 시발. 지금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저 새끼는?’
나는 내가 오해받고 있음을 깨닫고 살짝 얼굴을 구겼다.
블랑을 향해 네가 오해하고 있다는 뜻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지만…
‘아… 진짜… 자리를 비켜달라는 뜻이 아니었는데… 하… 차라리 잘됐나…”
블랑은 내 신호를 ‘고백하는 것을 보이는 건 부끄러우니 자리를 비켜줘’라고 이해해 버린 것처럼…
굳센 눈빛으로 나를 향해 고개를 몇 번 끄덕인 후 사라졌다.
저 새끼…
나중에 여자를 소개시켜 준다고 말한 건 취소다…
“어… 돼지야? 방금 돌아간 네 친구가…”
광년이는 블랑이 내 사인을 받고 돌아가는 것을 고개를 돌려 확인하지 않았다.
오직 청각만으로 블랑이 이곳을 보고 있다 사라진 것을 눈치챈 것이다.
나도 나름 청력이 좋아졌다고 자부했지만, 초인인 광년이에 비하면 턱도 없단 것을 깨달았다.
적어도 밤이 되어 스킬의 효과가 1.5배 늘어나야 비벼볼 만한 정도다.
그나저나 곤란한 표정의 광년이를 보니 얘도 블랑과 같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그 정도로 착각할만한 말을 했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제 친구가 이상한 착각을 한 것 같네요. 시시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자리를 옮기시죠.”
“…알겠어.”
저벅저벅
내 진지한 표정을 보고 광년이는 고개를 끄덕인 후 앞서 걸어갔다.
…
도착한 곳은 숙소 2층에 있는 회의실이었다.
주로 교관이나 훈련소 관련 인물들이 사용하는 곳인 것 같았다.
여러 서류나 훈련 일정 같은 종이가 쌓여 있는 것을 보면.
“자. 본론이 뭐야? 네 말대로 시시한 이야기가 아니길 빌게.”
천천히 걸으면서 방금 전의 당황을 다잡았는지, 광년이는 내게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어보았다.
나는 한 번에 본론을 꺼내 그녀를 몰아붙이기보다는 약간의 유도신문을 곁들이기로 했다.
“…그 목에 상처… 리 샤오린처럼 이전 기수의 훈련생과 한 ‘게임’의 흔적입니까?”
나는 광년이의 목의 상처를 보고 말했다.
이미 딱지가 떨어져서 어느 정도 새 살이 돋은 것처럼 보이는 상흔.
고작 일주일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상당히 빠른 회복력이다.
마나를 각성한 초인들은 회복력이 좋아지나 보다.
좋은 소식이었다.
지금 병실에 누워서 치료를 받고 있는 이강인 또한 마나 각성을 했으니까.
내 질문에 광년이가 자신의 목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스으윽…
“아, 목? 그렇지 뭐. 리 샤오린 같은 애송이는 매 기수마다 있었으니까.”
살짝 비웃으면서 말하는 광년이.
내가 그녀를 의심하고 있기 때문인 걸까?
나는 왠지 그 웃음이 연기로 지어낸 웃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그녀의 눈을 가져가려고 하셨습니까? 굳이그녀를 위협해야 할 이유는 없었을 텐데요…”
“잠깐, 내게 할 얘기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 왜 자꾸 질문만 하는 거야?”
“우선 교관님의 대답이 필요합니다.”
광년이는 잠시 내 말에 고민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아무런 의문점을 찾아내지 못한 듯, 곧 떨떠름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쪽은 목숨을 걸었는데, 상대는 저울에 아무것도 안 올려 놓으면 너무 시시하잖아? 지더라도 아무 패널티 없는 게임이라니, 누가 그런 지루한 게임을 하냐고.”
‘됐다!’
간단하게 내가 기다리던 말이 나왔다.
방금의 말에서 확신했다.
착각이 아니었다.
그녀가 연기를 하고 있을 것이라는 나의 추측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렇다면 이전 훈련생들과의 게임에서도 패널티를 요구했겠네요.”
“그게 왜…”
그녀는 심드렁하게 내 말에 대답하려다 말이 흐려졌다.
광년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점점 표정이 굳어지며, 동공이 파닥거리는 생선마냥 흔들리기 시작했다.
“…설마.”
“저 눈치채버렸습니다.”
“이런…개…씹…”
그녀의 눈을 보고 있자니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말한 ‘눈치챘다’는 이야기는 다른 것을 이야기 하고 있는 거라는 기대를.
내가 아직 명확한 본론을 꺼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쯤 오면 초등학생이라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법하지만, 그런 알량한 기적에라도 기대야 할 만큼 지금의 광년이는 초조해했다.
그녀에겐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그 기대는 꺾여줘야겠다.
“어째서 모르고 있었습니까? 예비 전투직과 훈련생들 중 우선순위는 훈련생에게 있다는 사실을. 교관님의 말씀대로 저번 기수에도 리 샤오린과 같은 ‘게임’이 벌어졌고, 또 패널티를 요구했다면 절대 모를 리 없었을 텐데요.”
“…”
- 뿌드득…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보니, 광년이가 손바닥을 대고 기대어 있던 책상의 모서리가 일그러져 있었다.
강력한 그녀의 악력에 의해 목제 가구가 버티지 못하고 짓물러진 것이다.
‘당황 했네.’
분노한 얼굴은 전혀 아니었다.
그저 예상치 못한 일격을 맞은 것처럼 낭패의 기색이 짙은 얼굴이었다.
그래.
마치 그녀와 침대에서 간단한 내기를 했던 밤, 내게 성감대를 모조리 들킨 것을 깨달았을 때처럼.
나는 내가 깨달은 사실을 하나도 남김없이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의 연기로 인해 교관 측이 얻는 이득까지 포함해서.
“…그러니 이런 결론이 나왔습니다. 지금까지 ‘미친년’을 연기하신 것이 맞으시죠?”
5분의 시간이 흘렀다.
기나긴 말이 이어지는 회의실 안에는 오로지 내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광년이가 반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반박하지 못했다고 해야 옳으리라.
나의 유도신문으로 인해 그녀 스스로의 입에서 이전 기수의 훈련생과의 게임에서 패널티를 요구했다고 말했다.
그러니 도무지 반박할 수 없을 수밖에.
내가 저 말을 꺼내도록 유도하지 않았다면…
광년이가 ‘십수 번 게임을 하면서 이번에 처음 패널티를 요구한 거야. 신기한 우연이지.’라고 잡아떼어버리면 할 말이 없어진다.
물론 유추한 사실을 훈련생들에게 퍼뜨린다며 협박을 하며 흔들면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그녀와 나의 관계가 험악해질 것은 안 봐도 뻔하지.
그건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나는 그녀와 좀 더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길 원했다.
‘떡 정이란 놈도 있는데…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