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44)화 (44/310)



〈 44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이게 신분증인가?”

집 안에서 손바닥 크기의 목패를 발견했다.
신분증은 챙겨야 한다.
기타 차원 이동을 하곤 하는 다른 소설을 읽으면  흔한 신분증 하나 없어서 노예로 시작하는 주인공이 얼마나 많던가?
최대한 막을 수 있다면 막아야 하는 미래다.

목패에는 글자가  가지 적혀 있었다.
처음 보는 글이었지만정확하게 읽을 수 있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방금까지도 모르는 언어를 사용했는데 뭘.

자유민이지만 농사꾼인 러셀이 글자를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하긴 어려웠다.
글자를 읽을  있는 것은 시스템의 배려 덕인 것 같다.

“박찬영.”

목패에 적힌 이름은 내 이름이었다.
이름 외에도 소속된 마을, 직업, 그리고…

‘와… 외모의 특이사항에 단신이나 뚱뚱한 것이 안 적혀서 다행이네.’

만일 나중에 가서 외모가 현격히 바뀌어, 신분증의 내용을 고쳐야 할 필요가 발생했으면 꽤나 골치 아팠을 것이었다.
신분증의 내용을 쉽게 갱신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다행히 신분증에는 내가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졌다는 정보만 적혀 있었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한 특이사항이 되기 때문이다.

성공적으로 신분증을 손에 얻은 나는 그것을 주머니에 넣은 뒤,  안을 뒤져가며 쓸만한 것이 없는지 살피기 시작했다.

뒤적뒤적…

“역시 돈으로 보이는  없네…”

봉급을 돈 대신에 식료품으로 받는 것 같았다.
커다란 오크통에 절반이나 차 있는 곡물들을 보니.
그 밖에도 딱딱한 빵과 말린 과일  보관 식품도 발견되었다.
처음 진입할 때  인물에게 모은 돈은 없다는 글을 보고 얼추 예상은 했다.

‘그래도  급하면 이것들을 모조리 팔아 치우면 급전은 되겠네.’

이렇게 작은 마을에  번에 이놈들을 사줄 사람이 과연 있을지부터 고민해야겠지만…
나름대로 주인공이 있던 용병단이 들릴 정도의 마을인데, 잡화 상점 하나 없겠는가?

나는 자물쇠가 없는 집의 문을 단단히 닫은 뒤.
작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분위기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

끼이익…

기름칠이 안 된 문이 내 힘에 밀려 비명을 지르며 열린다.
나는 건물의 밖으로 걸어 나오며 혼잣말을 했다.

“특이사항은 없네.”

내가 아는 ‘하얀 고래의 발자취’ 세계관과 전혀 틀리지 않았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가구 수가 100명도 안 되는 작은 마을.
나는 여관과 잡화점을 동시에 운영하는 곳을 발견한 뒤, 돈으로 바꿀  있는 대부분의 것들을 팔아치우고 나오는 후였다.
나를 알고 있는 듯한 잡화점 주인과 짧은 잡담이 있었지만, 중요한 정보는 없었기에 기억에서 지웠다.

잡철이 들어간 농기구는  돈이 되었다.
건조식품 또한 양이 많아서 쏠쏠했고.
무엇보다 물건을 팔며 이 세계의 화폐 단위와 금전 감각을 어느 정도 아는 것에 성공했다.

“쿠퍼 실버 골드는 판타지 소설의국룰이긴 하지.”

1 실버 32 쿠퍼가 들어 있는 돈주머니를 매만지며 말했다.

식량은 가지고 있는 전부를 팔았다.
밥 같은 것은 지구에서 먹으면 되기 때문이다.

잠은 지구에서 자면 된다.
더럽고 불편한 이곳의 잠자리에 비해 지구의 침대는 너무나 편안하다.

용변 해결과 청결 유지도 지구에서 하면 된다.
이제 거리낄 것은 없다.
순수하게 훈련에 집중할 수 있다.

터벅터벅.

나는 마을근처의 숲으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상태창.”

띠링!

=
[이름] 박찬영
[직업] -
[힘] 10 → 14 [민첩] 10 → 13
[체력] 8 → 13 [지능] 5 → 6
[기교] 5 → 10  [매력] -21 → -19
[마나] 29 → 71

[특성] 『자연치유』

선령일일 만요월월(仙令日日 灣謠月月) 버프, 매력 제외 모든 스텟 +6 (00:00:05)

보유 카르마: 6,275
=

어쩐지 오랜만에 보는  같은 느낌이 든다면 착각이다.
나는 틈틈이 내 성장의 정도를 확인했으니까.

스텟은 10이 되기 전까지는 쑥쑥 올랐지만…
10부터는 상당히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마나를 제외하고는.

“엄청 빠르게 늘긴 느네…”

단순히 다른 스텟과 비교 해 보면 71이라는 스텟 자체는 상당히 높다.
하지만 마나라는 스텟 자체가 다른 스텟에 비해 빠르게 늘어나는 것 같으니 그렇게 이질적이지는 않았다.

마나 스텟을 개방한 이후 다른 사람들의 상태 창에서 보유 마나량을 확인 할 수 있게 되었다.
당연히 테라포밍 소설 속 동기들이나, 교관들의 마나 보유량을 확인해 보았다.

동기들은 이강인을 제외하고는 마나 각성을 한 사람은 아직 없었고,
교관들은…

“아마. 광년이가 7년쯤 테라포밍 세계관에 있었지? 광년이의 보유 마나 스텟이 대략 150을 넘어섰으니까…”

그걸 고려해도 선령일일 만요월월(仙令日日 灣謠月月)스킬을 얻은  일주일 정도 만에 71이라는 수치는 어마어마하다.
아마 다른 스텟들처럼 보유 마나 스텟이 점점 높아질수록 성장의 주기가 느려지겠지만…
그래도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인 것은 변함이 없다.

“역시…  스킬을 레벨업  건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네.”

과거 나의 선택에 만족했다.

터벅터벅…

어느새 나는 숲의 초입에 도착했다.
그럼 이제 내가 할 것은 무엇일까.

바로 나무를 두드리며 천권일각(千拳一脚)의 수련 시작?
아니다.

“이제 급하게 카르마를 쓸 곳도 없으니, 전부 상점창의 스킬 패시브를 구입하는데 써야지!”

지구에서 쉽게 배울 수 있는 여러 무술들.
천권일각(千拳一脚)처럼 마나를 소모하는 스킬은 아니기에  주력이 되지는 못한다.
게다가 하나하나 따져보자면 성능은 전혀 보잘것없기도 하다.
그러나…
이 패시브들이 수십 가지 모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심지어 레벨업의 가능성도 있기에 성능이 상승할지도 모른다.

천권일각(千拳一脚)의 훈련을 하다 보면 어찌어찌해서 사놓은 스킬의 숙련도가 1~2%라도 오를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하루 이틀 수련할 것도 아니고 평생에 걸쳐 수련을 할 텐데, 언젠가는 이득이 되는 날이  것이다.

“무엇보다 가격이 어마어마하게 싸고 말이지.”

스킬의레벨이 낮아서 그런지 가격들이 낮은것도 많았다.

띠링!

망설이지 않고 상점창을 열어 스킬을 구매하기 시작했다.

띠링!
띠링!
띠링!
.
.

단순한 몸놀림에 관련된 패시브 스킬에 이어,
주먹을 쓰는 것과 관련된 패시브 스킬.
달리기와 관련된 패시브 스킬.
방어와 관련된 패시브 스킬.
스킬. 스킬. 스킬…

=
보유 카르마: 325
=

“역시 검도나 합기도 같은 무술의 스킬은 0Lv이라도 값이 나가네…”

아무래도 엄청난 개수를 자랑하는 스킬을 전부 구매하지는 못했다.
값이 싼 싸구려 스킬 같은 경우는 전부 구입을 했으나, 점점 값이 비싸졌기에 우선순위를 나누어서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눈뜨고 봐줄 만한 몸놀림 0Lv’ 같은 경우만 해도 1,000 카르마나 했으니까.

모든 패시브를 사기에는 카르마가 부족 했다.
창과 방패, 투석 같은 스킬을 구매하기보다는 수련의 주축이 되는 몸놀림과 주먹, 다리 관련된 스킬을 우선적으로 구매했다.
다행히 내가 필수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스킬들은 아슬아슬하게 전부  수 있었다.

“후우… 이제 시작인가?”

준비는 끝났다.
이제 정말 수련을 시작하면 된다.

터벅터벅…

나는 내가 수련하는 소리가 마을에 들리지는 않지만, 너무 깊지는 않은 숲의 초입을 향해 이동했다.



……



콰앙!

- 쿠웅!

콰아앙!

- 쿠웅!!

무려  마나의 1/3이나 머금은  주먹이 나무를 때린다.
일정권(一正拳)으로 때린 것이기 때문에 위력이 대폭 증가했다.

콰앙!

여태까지 가격한 나무처럼 이 나무도 나의 주먹에 거대한 자국이 났다.
마치 자르지 않은 김밥의 옆구리를 한입 베어 먹은 듯 파인 모양.
나무는 스스로의 무게를 더는 버티지 못하였다.

끼기긱… 기긱…

쿠웅!!

거대한 소리와 함께 나무가 옆으로 쓰러졌다.
이 나무를 마지막으로 어느 정도 인위적인 공터가 완성되었다.
물론 나무의 뿌리들은 전혀 제거되지 않아 여기저기 그루터기들이 널려 있었지만…

“저건 나중에 나무가 완전히 말라 죽은 뒤 불을 내서 태우면 되겠지…”

지금 당장 훈련하는 것에 크게 방해되지는 않을 것 같다.

이미 내 마나는 거의  떨어졌다.
하지만 괜찮다.
일정권(一正拳)의 연습은 마나가 없어도 자세를 몸에 익히면서 할 수 있었으니까.

“흐읍”

*

24시간을 지구에서 보내고, 24시간을 테라포밍에서 보내며, 24시간을 하얀 고래의 발자취에서 보냈다.
그렇게 남들은 하루를 쓸 때 나 홀로 삼일을 사용하며 보내기를 며칠일까…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시발 잠시만. 나 어차피 백하민 그 새끼에게 잠시동안은 복수 생각이 안들만큼 엿먹여 주기도 했고, 대학교도 언제든 그만둬도 되는데… 왜 내가 지금까지 눈치를 보고 있었지?”

테라포밍 세계 또한 마나 각성과 변이에 의한 이능의 원인을 명백하게 밝혀내지 못했다.
그렇기에 내 몸에  일이 일어나도 수상하게 쳐다보지는 않을 것이다.
가령 갑자기 키가 큰다든지, 살이 어마어마하게 빠진다든지…
불을 뿜거나 몸이 단단해지는 것보단 납득 하기가 쉽지 않겠는가?

지금까지는 백하민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는 대학이라는 최소한의 연결고리가 필요했다.
그러나 최근 그놈에게 마구잡이로 화풀이를 해서 그런지 지금 당장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변한 나를 보고 수군대면?
깔끔하게 무시하거나, 정 아니꼬우면 휴학해 버리면 된다.
 반년 뒤면 전부 나를 잊겠지.

띠링!

나는 상점창을 열어 ‘키 크는 약’을 구매했다.
무려 6개나.
그리고 망설이지 않고 전부 먹어버렸다.

지난번 ‘키 크는 약’을 먹은 지 반개월, 지금의  키는 8cm가 자라서 163cm쯤이다.
나머지 반개월 뒤에는 6cm가 마저 자라겠지.
그러나 지금 6개의 키 크는 물약을 마셔버렸다.
12cm가 추가로 자라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뒤.
나는 181cm가 된다.

“이제 살만 빼면 되겠네.”

뭔가 저질러 버린 느낌도 있지만…
나도 키가 찔끔찔끔 커가는 것에 지겨웠기 때문일까?
지르고 보니 속이 시원하긴 하다.

*

오전의 지옥 훈련이 끝난 뒤, 점심시간.
브랙은 오늘도 나를 들고 훈련소로 와서 다른 사람들과 얼굴을 익히도록 도와주었다.

“으… 죽을  같아…”

“네가 지금 브랙 교관님이랑 하는 것이 지옥 훈련이라고 했나?”

“어… 진짜 삭신이  쑤신다… 블랑 너희 쪽은 괜찮고?”

“…아하하. 광년이 교관님 말하는 거지? 뭐… 네 예상대로 우리 쪽도 그닥 괜찮지는 않아.”

블랑 프랑수아는 피곤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그가 말하길 광년이는 평소 훈련할 때 장난을 치지는 않는다고 한다.
교관이라는 직업에 대한 나름의 프라이드인가?
하지만…
훈련이 전부 끝난 후라던지, 식사 시간에 훈련생들을 자주 괴롭힌다고 한다.

나는 블랑의 표정이 안쓰러워져 입을 열었다.
그를 조금 위로해 주고자.

“…고생이 많다. 리 샤오린 때 훈련생 모두 알았겠지. 광년이 걔는 정말 또라이라고.”

“맞아… 결국 리 샤오린의 눈을 파지는 못했지만… 상상만 해도  끔찍하긴 했어.”

“눈을 판다고? 광년이가  샤오린의 눈을 파려고 했어?”

“응? 내가 말 안 해줬었나? 아! 그냥 ‘게임’의 내용만 설명했었구나! 그 이후는 말을 안 했고.”

“무슨 일인데?”

나는 얌전히 블랑의 설명을 들었다.



그러니까, 게임에서 진 대가로 광년이는 리 샤오린의 눈을 파려고 했고…
브랙은 광년이를 말렸다?
그 ‘예비 전투직’이라는 것보다 ‘훈련생’의 신분을 우선으로 치기 때문에 광년이는 리 샤오린을 해치지 못했고?

‘그게뭔 개소리야. 대놓고 모순이 있는데?’

블랑은 스스로의 말에서 모순을 눈치채지 못한 눈치였다.

그걸 광년이가…
어?…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모순을 잡아챘다면.
어떻게 상황이 굴러가야 그 모순이 납득 갈만한 상황이 나오는지를 생각 해본다면.
한가지 결론에 닿는다.

‘이런 씨이발… 광년이 그년 지금까지 한 미친 짓이 전부 연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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