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시스템의 목적은 ‘박찬영’을 성장시키는 것이다.
단순히 무력적인 측면뿐만이 아닌, 정신적인 성숙을 포함해서.
그렇기에 천계는 ‘박찬영’이 단순히 먼치킨 적인 상황이 되지 않도록 여러 가지 제약을 두었다.
대표적인 예시가 상점창을 잠가두었고, 퀘스트와 완료 보상이란 규칙으로 ‘박찬영’이 성실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묶었다.
카르마를 모아 해금할 수 있는 수많은 시스템의 기능 또한 마찬가지다.
그 모든 것을 잠가 놓은 이유는 ‘박찬영’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 중에서 한가지, ‘박찬영’을 성장시키는 것에 방해되는 요소가 있다.
시스템의 목적과 전혀 맞물리지 않는 쓸데없는 기능.
나는 천계에서 그것의 문제점을 지적했을 것이고, 천사들을 설득해서 그 기능의 잠금을 해제했을 것이다.
왜 내가 겪은 일임에도 추측형으로 말하냐면, 천사들을 설득한 내 기억이 지워졌기 때문이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 내가 지적한 문제점일까?
바로 이것이다.
띠링!
[하얀 고래의 발자취로 진입합니다.]
=
[최초 진입 옵션을 선택해 주십시오.]
- 본신으로 진입 (선택 가능)
- 엑스트라로 진입 (선택 가능)
- 주·조연으로 진입
- 주인공으로 진입
=
엑스트라로 진입.
나는 이 기능의 잠금 해제를 요구했다.
“생각해 보면 너무 어이없잖아? 저 기능을 잠금 해제할 때까지 들어가는 모든 소설에 ‘이방인’이라는 패널티를 깔고 가야 한다니.”
테라포밍의 건만 해도 그렇다.
맨 처음, 소설의 주인공인 이강인은 이방인인 나를 의심했다.
만약 내가 대처를 잘못해서 그의 의심을 샀다면?
절대 상황이 순탄치 않게 흘러갔겠지.
그나마 첫 소설이 테라포밍이었기에 이런 나의 기지도 먹힌 것이다.
테라포밍의 서두는 100명의 현대인이 다 같이 소환되면서 시작했으니까.
오직 회귀자인 이강인만이 나의 난입을 깨닫고 의심한 것이다.
다른 평범한 소설이었다면?…
나 홀로 과거도, 신분증도, 지인도 없는 수상쩍기 그지없는 사람이 되었겠지.
모든 사람에게 의심받고, 경계 당하며, 심하면 잡혀서 심문까지 당할 수도 있다.
도무지 마음 놓고 훈련할 환경의 조성이 안 된다.
오히려 ‘박찬영’의 성장에 방해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잘 대처한 것처럼 나를 의심하는 사람들을 전부 설득했을 때, 내가 얻는 특별한 이득도 없다.
정말 설득을 잘해야 본전, 못하면 나락인 어처구니없는 패널티인 것이다.
“그걸 저 기능을 잠금 해제할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라? 미쳤냐?”
지구에서 안젤리에게 들었다.
저 쓸데없는 기능을 잠금 해제하는데 무려 20,000 카르마나 필요했다고 한다.
저걸 내 카르마를 주고 정직하게 잠금 해제하려 했다면…
…상상만으로 아찔해진다.
나는 항상 이 기능이 잠겨있음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과거의 나라면 당연히 천사들에게 설득을 시도했을 것이다.
결과는 이렇다.
그들은 내 설득에 납득한 동시에 기능의 잠금을 해제 시켜 주었다.
내가 가진 힘이 강력해져서 어떤 상황에서도 몸을 지킬 수 있으리라 판단될 때 까지는 웬만해서 ‘본신으로 진입’을 선택할 경우는 없을 것이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엑스트라로 진입’을 터치했다.
띠링!
[’엑스트라로 진입’이 선택되었습니다.]
주르르륵!
시스템 창에 수많은 프로필이 나온다.
나이와 이름과 사는 곳 정도가 적힌 프로필이다.
물론 남자들만 나왔다.
그들의 전신사진 또한 있었기에, 간단히 직업을 유추할 수 있었다.
가령 저렇게 농사짓기 편한 옷을 입은 사람은 농민이라든지.
‘이 중에서 고르면 되는 건가?’
소설의 엑스트라란 무엇일까?
아마 주·조연 이라는 항목이 따로 있는 것을 보니 엑스트라란 비중의 거의 없는, 또는 완전히 없는 인물을 말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테라포밍 속 나의 친구, 블랑 프랑수아처럼.
‘…이거 설마 귀족도 되려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귀족보다는 등장하지 않는 귀족이 훨씬 많다.
그렇다면 그들 또한 명백히 엑스트라의 카테고리에 포함이 될 것이다.
어쩌면 왕족까지도.
스르륵…
깔끔하고 멋들어진 옷을 입은 인물들은 간간히 발견되었다.
그러나 함부로 이들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귀족이 아닌 부유한 상가 가문의 자제일 수도 있지 않은가?
옷차림이 아닌 방법으로도 귀족을 구분해 낼 수 있었다.
귀족들은 다른 사람들의 이름보다 몇 배나 길었으니까.
그러나 어떤 귀족이 제일 높은 귀족인지는 잘 모르겠다.
소설의 엑스트라라는 것은 그 인물의 이름조차도 잘 나오지 않는다.
알려진 정보가 없다는 뜻이다.
왕족이나 공작 같은 고귀한 피는 확실하게 구분 할 수 있다.
분명 여러 개의 성씨 중 국가의 이름이 섞여 있을 테니까.
안타깝게도 발견할 수 없었지만…
“영향력이 너무 높은 사람들은 최소한 조연급이란 건가…”
괜찮다.
귀족도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아무리 방계의 귀족이라고 한들, 귀족인 이상 따라오는 이득이 훨씬 많다.
나는 나와 비슷한 나이의 남자를 선택했다.
띠링!
=
[엑스트라 선택 중…]
● 볼드윈 아무르 드 이시크님의 점수
작위(백작위/ 1,500) + 영향력(이름이 알려짐/ 350) + 나이(비슷함/ 0) + 경제력(매우 부유함/ 700) + 성격(망나니/ -80) + 평판(악명/ -120)……
총합 3,150점
● 박찬영님의 점수
외모(보기 드문 박색/ -150) + 무력(비범/ 200) + 경제력(부유함/ 150) + 사회적 위치(명문대 학생/ 100)……
총합 350점
=
띠링!
[선택하신 인물의 종합 점수를 뛰어넘지 못했으므로 빙의가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런 시발…
역시 쉽게 꿀을 빨게 둘 수는 없다는 건가.
아마 총합점수란 것을 뛰어넘어야 해당 인물로 빙의할 수 있나 보다.
저 귀족과 나의 점수 차이는 무려 10배에 가까웠다.
아마 다른 귀족들을 찾아 비교한다고 한들 고작 350점 가지고 내가 빙의가 가능한 수준의 귀족은 없을 것이다.
설령 있다고 한들, 죽기 바로 직전의 상황이라던가, 막대한 빚을 지고 있다던가 등등…
차라리 평민을 선택하는 것이 훨씬 나을 정도의 패널티가 줄줄이 달려 있을 것이 뻔했다.
“…그래. 내 주제에 뭔 귀족이냐. 그냥 원작의 사건이 일어나는 마을 근처의 시골 남자나 선택하자…”
나는 17살 정도의 원작 사건이 벌어지는 마을 근처 남자에게 다시 빙의를 시도했다.
정말 평범한 남자였다.
성씨도 없었고, 옷도 그냥 농민이 입을 법한 옷이었으니.
띠링!
=
[엑스트라 선택 중…]
● 러셀님의 점수
작위(신분증이 있음/ 50) + 영향력(지인이 있음/ 20) + 나이(조금 어림/ 10) + 경제력(모은 돈은 없지만, 빚도 없음/ 20) + 성격(성실함/ 30) + 평판(호의적/ 50)……
총합 220점
● 박찬영님의 점수
외모(보기 드문 박색/ -150) + 무력(비범/ 200) + 경제력(부유함/ 150) + 사회적 위치(명문대 학생/ 100)……
총합 350점
=
[러셀님으로 빙의가 가능합니다! 빙의하시겠습니까?]
…아슬아슬하게 빙의가 가능했다.
정말 내 점수가 낮기는 하구나…
하지만 외모도 얼마 안 가 뜯어고칠 것이고, 무력도 지금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늘어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중에는 귀족에게 빙의하는 것도 단순한 망상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빙의한다.”
내가 말을 마치자 눈앞이 서서히 어지러워졌다.
*
“찬영? 찬영!”
“어?”
“왜 갑자기 멍때려? 옷 다 챙겨 입었으면 출발하자고.”
척!
나는 어떤 집의 앞에 서 있었다.
허름하고 낡은 집이다.
내게 말을 건 남자의 말을 들어 유추해 보면 나의 집인 것 같다.
본인이 할 말을 마치고 앞서 걸어 나가는 한 명의 남자.
그의 어깨에는 농기구가 걸쳐져 있었다.
아마 머지않아 내가 따라붙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우선 멈춰 서서 생각을 정리하기로 했다.
‘…여기서 내 이름은 러셀이 아니군. 주변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는 건가?’
시스템창에서 확인했다시피 이 세계에서 나의 이름은 러셀이었다.
그러나 저 남자는 나를 러셀이 아닌 찬영이라고 불렀다.
스윽…
내 몸을 흩어보았다.
몸도 사진으로 봤던 ‘러셀’의 육체가 아닌, 내 육체 그대로다.
살이 많이 빠지긴 했지만, 여전히 뚱뚱하고 키가 작은 나의 육체.
‘시스템 창에서는 빙의라고 했지만… 이미 존재하는 인물에 내 영혼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인물을 나 자신이 대체 하는 건가 보네.’
테라포밍에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나의 복장은 변해 있었다.
현대식의 깔끔하고 마감이 잘 된 원단을 사용한 옷이 아닌, 투박하고 질긴 옷으로.
차라리 다행이었다.
현대식 옷을 입고 있으면 의심을 받기 딱 좋으니까.
나는 앞서 걸어 나가는 남자를 불러 세웠다.
“이봐.”
“어?”
“우리는 지금 농사를 지으러 가는 거지?”
“…당연하지?”
뭘 새삼스럽게 그런 걸 물어보냐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저 남자는 나와 친구 사이인 것 같다.
우선은 서로 나이대가 비슷해 보였다.
또한 그가 나에게 반말을 했고, 내가 그에게 반말했음에도 별로 화내지 않는 것을 보니 어느 정도 확실했다.
‘빙의한 대상의 기억은 안 주나 보네. 아쉽군…’
빙의가 완료된 지 몇 분가량 흘렀음에도 기미가 없는 것을 보니 기억을 안 주나보다.
하지만 그리 아쉬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상태창도 레벨업을 하며 기존의 기능이 강화되었듯이, 엑스트라 빙의 또한 레벨업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나는 입을 열어 남자를 불러세운 이유를 말했다.
“나 농사 그만두려고.”
“…뭐? 너 뭐 잘못 먹었냐?”
“진지하게 생각하고 말하는 거야.”
“그럼 도대체 뭐로 밥 벌어 먹게? 너 결혼은 꼭 할 거라면서!”
“용병.”
“허…”
안타깝지만 나는 이 남자와 친분을 유지할 생각은 없었다.
러셀이라는 자가 이 남자와 얼마나 친했든, 지금의 나는 찬영이니까.
그와 관계를 쌓으며 빼앗기는 시간이 아까웠다.
정이 쌓이기 전인 지금.
이 남자와의 관계를 끊어내고자 했다.
“칼도 없으면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싸우는 방법이나 알고 있어?”
“이제부터 연습해야지.”
“하… 무슨 그런 대책 없는… 게다가 그런 식으로 갑작스럽게 일을 그만둬 버리면 안 돼!”
“내가 농노는 아니잖아?”
“…물론 너는 나랑 다르게 자유 농민이긴 한데… 소작농이 말도 없이 그만두면 너 다시는 도날드 님에게 땅을 못 받을 거라고?”
“상관없어.”
다시 농사를 지을 것도 아닌데 땅을 못 받는 것이 뭐가 대수라고.
소작농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차고 넘칠 것이다.
수많은 소작농 중 한 명이 갑자기 탈주한다고 해도 밉보일 리 없다.
애초에 그 도날드라는 사람이 내 존재를 알기나 할까?
소작농의 중간 관리자가 도날드의 귀까지 들어가게 하는 일 없이 알아서 빈자리를 채워 넣을 것이다.
“모르겠다 정말… 나는 네 일탈에 어울려 주지 못해. 내겐 이것이 아니면 먹고살 방법이 없으니까. 행운을 빌어줄게.”
“그래. 고맙다.”
절레절레.
남자는 고개를 몇 번 젓더니 앞으로 걸어갔다.
성공적으로 나의 자유를 얻어내었다.
“이제 시작이네.”
이제부터 이 세계는 수련의 장소가 될 것이다.
주로 천권일각(千拳一脚)을.
테라포밍은 천권일각(千拳一脚)을 수련하기에는 너무 주변의 신경이 쓰인다.
애초에 개인 훈련 시간을 많이 주지도 않고.
지구도 마찬가지다.
차분하게 어딘가에 박혀 수련하기에는 대학 생활이라는 장애물이 있다.
게다가 하나의 단점이 더 있다.
그것은…
띠링!
[선령일일 만요월월(仙令日日 灣謠月月)의 영향으로 마나가 1 늘어납니다.]
“역시!”
지구는 사실상 이 스킬의 영향으로 마나를 늘릴 수가 없다.
농도가 낮은 탓인지 너무 느린 간격으로 마나가 올랐기 때문이다.
이곳, ‘하얀 고래의 발자취’ 세계관은 정통 판타지 세계답게 마나의 농도가 높은 것 같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마나가 오른 것을 보니!
이것이 내가 이 세계를 선택한 마지막 이유다.
이왕 훈련하는 김에 최대한의 효율을 뽑아야 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