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지구
“이야… 백하민도 만만치 않은 성격이지만, 저 박찬영이라는 인간은 다른 의미로 대단하네. 난 이번에 발령받은 거라 직접 보는 건 둘 다 처음인데.”
“저게 원래 박찬영님 성격일걸요?… 적어도 시간을 돌리기 전에는 저것보다 훨씬 지독했어요…”
“…저 강도가 나름 줄어든 거라고?”
“네. 저도 찬영님이랑 친해진 건 이번이 처음인데… 생각보다 악한 사람이 아니었길래 깜짝 놀랐어요.”
- 빠악!
때린다.
- 빠악!
다시 또 때린다.
- 빠아악!
“커헉!… 그…으만… 어억!”
퍼억!
뒹굴고 있는 놈을 걷어찼다.
뼈는 부러지지 않았겠지만, 전신이 심각한 타박상에 멍들었다.
다시 카르마로 포션을 구매한 다음 억지로 입을 열어 먹였다.
“푸흐흡! 싫… 푸흡!”
놈은 슬슬 이 붉은색 액체에 공포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트라우마 비슷한 것이려나?
당연하지만, 이 포션은 공짜가 아니었다.
내가 요 3일간 모아둔 카르마를 소모하고 있는 것이다.
‘상관없어.’
카르마는 무궁무진하게 사용할 수 있다.
내 키를 늘릴 수도 있고, 살을 줄여버릴 수도 있으며, 얼굴을 잘생기게 만들 수 있다.
심지어 초인이 가질법한 힘도. 마법 같은 스킬들도 쓸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망설임 없이 포션을 구매했다.
띠링!
“거절한다.”
리 샤오린과 마찰이 일어났을 때.
그때도 나는 손해를 볼 것을 감수하고 그녀와 맞서 싸우는 것을 택했다.
미래가 틀어져서 카르마를 손해 보더라도, 내 계획이 일그러지더라도, 성장에 방해가 되더라도 그것을 모조리 감수한 채 선택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다.
그 무엇보다 내가 우선이다.
‘단순히 육체의 강함과 외모를 말하는 것이 아니야!’
몸이 바뀌기 이전에는 그랬을지 모른다.
외모를 가꾸는 것과 신체를 단련하는 것에 치중했던 삶이었다.
극단적인 식단 조절을 하고, 미친 듯이 헬스장을 다니고, 들어본 적도 없는 재료가 들어간 크림을 피부에 발랐다.
감정을 단 하나도 내비치지 않은 채 가면을 쓰고 친구들을 대했다.
그 사람에게 내가 혐오감이 들든 들지 않든 내게 이득이 된다면 가리지 않고 친분을 쌓았다.
띠링!
“거절한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내 가치관이 완전히 무너졌다.
영원하리라 생각하며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무너졌고, 빼앗겼고, 나락으로 처박혔다.
저 새끼와 몸이 바뀌면서.
나는 더이상 물질적인 것들을 신봉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물질적인 것 ‘만’ 신봉하지 않는다.
이제는 나의 감정 또한 아주아주 중요하단 것을 깨달았다.
- 퍼억!
“끄으으윽…”
이 새끼 덕에.
띠링!
“거절한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다.
나는 이 새끼를 죽도록 패고 싶고, 그걸 위해서라면 5,700 카르마 정도는 코웃음 치며 포기할 수 있다.
내 결심은 손해가 10,000 카르마라도, 15,000 카르마라도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해 개자식아.”
띠링!
=
*HARD MODE*
[퀘스트]
내용: 관용
상세:
백하민을 용서하세요.
원수를 용서한다면 사람은 그 순간 성장합니다.
보상에 혹해 용서를 한 것이라고 한들, 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죠.
앞으로도 그를 원망하며 살아도, 또 다른 날에 복수를 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만, 단 한 순간이라도 그를 용서하세요.
원수를 용서하는 경험을 해보세요.
보상: 15,000 카르마.
제한 시간: 없음.
실패 조건: 백하민에게 포션을 사용한다.
실패 패널티: 없음.
포기 패널티: 없음.
=
[’관용’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거절한다.”
[’관용’ 퀘스트가 거절되었습니다!]
아까부터 시스템 AI가 자꾸 이 퀘스트 창을 띄우고 있다.
심지어 보상이 점점 증가한다.
처음에는 5,000 카르마였다가, 몇 번 거절하니 금세 15,000 카르마로 불어났다.
‘박찬영’을 인간으로서 성장시키는 것이 목적인 시스템 AI로서는 당연한 건가.
그러나 나는 이런 퀘스트를 받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직 내 화가 덜 풀렸기 때문이다.
포션 값으로 쓸 6,000 카르마.
그리고 퀘스트 보상 15,000 카르마를 더해 21,000 카르마…
그것이 백하민을 때리면서 잃게 될 손해다.
“이 정도로는 부족해.”
시스템 창과 협상을 하려는 뜻이 아니다.
나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21,000 카르마로 잠재우기에는 내 분노가 너무 뜨거웠다.
지금은 포션을 20개나 사용한 뒤라 처음에 비하면 많이 가라앉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잔잔한 분노는 남아 있었다.
아직은 이놈을 더 때리고 싶다.
- 퍼어억!
“끄흐윽… 으으… 그만… 그만…”
남은 카르마는 대략 4,000 카르마.
놈을 패는 와중 일반 퀘스트 ‘조깅하기’가 완료되었기에 조금 불어났다.
그렇기에 일반 퀘스트창은 현재 비어 있다.
‘…시스템 AI는 생각보다 똑똑하네.’
거절 자체가 불가능한 일반 퀘스트로 ‘관용’ 퀘스트를 주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백하민을 용서해야 한다.
하지만 그래서야 스스로 선택한 용서가 아니다.
의지를 묵살 당하고 용서를 강요받았기에 생기는 분노가 더해질 뿐이다.
그런 식의 강요는, 내가 인격적으로 성장하는 방법은 절대 못 된다.
띠링!
“거절한다.”
내 의지로 용서를 선택했으면 하는 바람에 AI는 하드모드 퀘스트를 계속해서 보내고 있다.
나는 계속해서 거절하고 있었다.
- 빠악!
“끄윽… 흑… 자모…자모해써…”
띠링!
“그러니까, 거절한다고 했…”
계속 나타나는 퀘스트창이 방해되어서 슬슬 완전히 알림을 꺼버릴까 했는데, 퀘스트의 보상이 내 눈에 들어왔다.
아주 시야를 확 끌어당기는 보상이.
‘뭐?’
=
*HARD MODE*
[퀘스트]
내용: 관용
상세:
원수를 용서하세요.
한순간이어도 괜찮습니다.
‘용서’를 경험하세요.
이후에 찾아가 복수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단 한 번을 참아 보세요.
이 퀘스트가 거절될 경우, [관용] 퀘스트는 더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보상: 아이템 정보 확인 Lv1 해금, 상태창 Lv2 해금, 인벤토리 Lv1 해금, 소설 진입 여유 공간 +1
제한 시간: 없음.
실패 조건: 백하민에게 포션을 사용한다.
실패 패널티: 없음.
포기 패널티: 없음.
=
[’관용’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이런 미친…’
카르마로 해금하려면 총 55,000 카르마가 필요한 기능들의 해금.
그것이 보상으로 나왔다.
입이 벌어져서 다물어지지 않는다.
나는 이성이 아닌, 감성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저 보상을 받게 된다면, 여기서 더 백하민을 패는 것보다 기쁠까?
…
…솔직히 말하면 그럴 것 같다.
지금까지 해금한 기능들은 대단히 유용하거나, 유용할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그렇다면 저 보상 하나하나가 전부 ‘하드모드 퀘스트’급의 유용함이라는 뜻인데…
상상만 해도 너무 좋다.
‘게다가 이미 포션 20개 분량, 100대도 넘게 때려서 화풀이도 어느 정도 된 것 같기는 하고…’
발밑에 기어 다니는 놈으로부터 피비린내와 지린내가 섞여 올라오고 있었다.
백하민은 이미 내게 굴복했다.
확실하게 위아래를 새겨 넣은 것이다.
“사려… 사려주세오… 제바… 끄으으…”
내가 최소한의 목적으로 했던 것은 충족되었다.
망가진 놈의 꼴에 더해서 55,000분량의 카르마 정도면…
가슴은 충분히 만족한다!
감성은 동의했으니 이제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자.
55,000 카르마에 이어 아직 쓰지 않은 카르마 4,000.
거의 6만에 달하는 카르마를 백하민따위를 몇 대 때리는 것에 써도 괜찮을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과한데…’
3초도 안 되어 결론이 나왔다.
이성과 감성이 모두 동의를 했다.
“…퀘스트를 수락한다.”
띠링!
[*HARD MODE* 퀘스트가 수락되었습니다!]
좋아.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앞으로도 이런 퀘스트 좀 많이 내줬으면 좋겠네.
나는 쭈그려 앉아, 쓰러져있는 백하민의 머리카락을 쥐고 머리를 들어 올렸다.
백하민이 전신의 고통을 무시하고 나를 쳐다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기에, 내가 직접 놈이 나를 볼 수 있게 도와준 거다.
놈의 뼈는 부러지지 않았지만, 관절이 뒤틀렸기에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여태껏 포션 20개 분량만큼 실험을 했던 덕에 ‘전투 불능’을 피하는 조건을 확실히 파악했다.
그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지 못한 백하민은 계속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끄으으… 흐으… 제바…”
“울지 말고 들어 봐. 좋은 소식이 있거든.”
“흐으…?”
“이제 ‘싸움’은 끝났어. 고통스러운 것도 끝이라는 거지.”
“그어…짓…마 아냐?”
“큭큭. 거짓말 아니야 새끼야. 그럼, 이제 끝내줄게.”
- 털썩!
“끄으…”
나는 놈의 머리채를 잡았던 손을 놓아 바닥에 머리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놈의 목 위에 발을 올렸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나는 경험을 해보기로 했다.
언젠가는 겪게 될 경험을.
뭐든 처음이 어렵다고 하지들 않던가?
이놈이 상대라면 망설임 없이 할 수 있을 것 같다.
‘너의 마지막 쓸모다. 백하민.’
약간의 거부감을 의식적으로 무시한 채, 나는 놈의 목에 올려둔 발에 무게를 실었다.
130kg을 넘는 무게에 마나를 먹은 압력 더해지며 놈의 목뼈를 짓누른다.
목뼈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끄…! 얽……”
- 뿌득…
“…자아! 백하민은 사망했어! 이제 이걸로 ‘싸움’은 끝! 다시 지구로 돌아갈게?”
“후우…”
띠링!
[*HARD MODE* 퀘스트, ‘관용’ 클리어!]
이렇게 나는 첫 번째 살인을 경험했다.
당연히 백하민을 정말로 죽인 것은 아니고, 그는 여전히 지구에 살아 있겠지만, 내 발끝에 느껴진 감각은 분명한 살인이었다.
약간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천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천권일각의 숙련도와, 살인의 경험, 여러 가지 기능 해금까지…
상상치 못한 이득이 많은 사건이었다.
…살인의 경험을 ‘이득’이라고 말하는 것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나는 소설 속에서든 지구에서든 그렇게 착하게 살 생각은 없다.
죽어도 죽지 않는 소설 속에서는 특히나.
눈이 어지러워지고, 체력이 완전히 회복되는 것이 느껴진다.
- 털썩!
“흐익! 흐아!!… 으아아아!…나 방금… 죽… 죽었…”
“음, 잠시만… 됐다! 이봐. 백하민! 트라우마 제거했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겁 먹지 마.”
“으… 아?… 어?… 나 살아있… 어떻게 된 거지?…”
공포와 눈물로 얼룩진 백하민의 얼굴에 약간 침착함이 감돈다.
그러나 곧, 나와 눈이 마주친 후 놈의 몸이 굳었다.
뼛속까지 내게 트라우마가 각인되어 눈만 마주치면 오줌을 싸재길 줄 알았는데, 단순히 얼어붙은 정도로 끝나다니…
“…으으… 바…박찬영…”
“트라우마 같은 것도 지울 수 있었나?”
“사실 많이 힘든 작업이야. 나도 힘을 꽤 많이 소모했다고? 뭐, 얻은 것이 훨씬 많지만! 흐흐…”
아니, 오히려 이 정도로 놈이 겁을 먹은 것만 해도 충분히 목적을 뛰어넘는 건가?
천사가 백하민의 일상생활에 영향이 갈 정도로 트라우마를 남겨둘 리 없었기에 예상은 했지만, 대단하긴 하다.
기억을 남겨둔 채 트라우마만 골라 지우는 것이 가능하다니.
“어쨌든 이걸로 고소는 하면 안 된다?”
“알겠어.”
천사와의 약속을 저버릴 생각은 없었다.
난 이미 충분히 만족했다.
“그럼, 나는 가볼게? 앞으로 볼일은 서로 간에 없는 것이 좋겠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길 빌게!”
“…그래.”
주변에 보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다.
다른 사람 눈에는 마치 허공에서 백하민이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
그리고 지금처럼 사라질 때도 눈에 띄고.
내게 인사를 마친 백하민과 그의 담당 천사는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럼 이제 슬슬 보상으로 받은 기능들을 살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