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40)화 (40/310)



〈 40화 〉지구

“그런데 과거의 백하민은 이런 적이 없었던 거야? SNS에 내 욕을 올린다든지, 이렇게 여친을 사귀어 본다든지.”

생각해 보면 조금 이상했다.
내게 한 SNS 욕설의 경우는 몸이 바뀌고 시간이 좀 흐른 어제저녁에 일어난 일이기에 나비효과로 인해 달라진 미래라고 치지만,
고다연을 소개받고 사귀기로  것은 월요일이다.
시간이 돌려지기 전에도 충분히 일어날 법한 사건이다.
천사들은 고다연과의 데이트에서 백하민이 하는 만행을 알고 있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어째서 백하민에게 경고해 주거나, 미리 막지 않았지?


“…시간을 돌리기 전, 찬영님이 몸이 바뀐 이틀 만에 백하민님의 평판이 전부 돌아섰어요. 몸이 바뀐 날이 토요일이었으니, 월요일에 대학에 온 백하민님은 단 하루도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못했죠…”

“뭐? 고작 이틀 만에?… …생각해 보니 시간을 돌리기 이전에는 SNS 계정이나 친구들의 연락처를 알고 있었지? 그럼 가능했겠네.”


“네… 그 말대로예요… 박찬영 님의 행동 원인은 어디까지나 ‘몸이 바뀐 원한’에 있으니 천계에 탓이라 볼  있지만, 이번  경우가 아주 달라요. 순수하게 백하민님 쪽의 잘못이라고요.”

아…
이러면 이해가 간다.
내 소문이 조금이라도  좋게 돌았다면 고다연쪽에서 사릴 것이 분명하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흠 하나 잡히지 않는 ‘완벽한 백하민’ 이니까.


천사들도 할 만큼 했을 것이다.
나름 조언도 해주고, 생각을 돌리려고 해보고, 길도 제시해 주고, 이렇게 대단한 시스템이란 것까지 만들어서 쥐여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본인이 스스로의 의지로 주어진 행운을 전부 걷어 차버리고 독주를 마시겠다는데, 그것까지 막아줄 이유는 천계에게 없었다.

“그냥 그쪽 담당자가 자신 커리어에 누가 될까 봐 저희한테 억지 부리고 있는 겁니다. 전혀 들어줄 필요 없어요!”

- 홀짝!

속이 타는지 차 한잔을 더 마시며 말하는 아기천사.
정말로 그쪽 담당자를 싫어하나 보다.


“알겠어.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 우리가 거절해도 그쪽에선 아무것도 못 하는 거잖아?”
“…그렇긴 하죠.”
“그런데 왜 그리 화를 심하게 내? 어차피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는데.”


“…그 담당자가 너무 뻔뻔하게 행동해서?…”
“웬 의문형?”

스스로 화를 내는 이유도  모르는 건가?
아니, 그렇다기엔 뭔가 숨기는 것이 있는 눈치다.
설마…

“너 혹시… 내가 백하민 그놈한테 욕설을 당한 것 때문에 화난 거야?”
“그…그건…!!”




표정이 정확히 정곡을 찔렸다는 얼굴이다.

으음…
담당자에게 화가 난 듯이 말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나 대신 화를 내주고 있었던 거라니.
내가 지금까지 본인을 여러 번 놀린 것은 잊은 걸까?
자신도 모르게 내게 정이 들었나 보다.

“…저도 봐버렸다고요!  욕설! 어떻게 사람이 사람에게 그렇게 심한 욕을  수 있는지… 찬영님은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너무하지 않나요?”


“…”

쓰담 쓰담.


가슴이 간질간질해졌기에 아기 천사의 머리를 쓰다듬고 말았다.
남녀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는 애매한 길이의 머리카락이 손바닥에 풍성하게 잡힌다.


쓰담 쓰담.


“…뭡니까 이 손은?”
“후후후! 둘이 그렇게 친해지니까 너무 보기 좋다! 봐봐, 찬영은 후배를 좋아한다니까?”
“…네에… 그러겠죠…”


아기천사쪽은 안젤리의 말을 전혀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러다가 천사의 고리 만지려 한다면 화내겠지?’

소유권이 일정 기간 인정이 되어야 한다고 하니, 만지더라도 상점 창에 등록은 안 될 것이다.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시도할 생각을 포기했다.


*




탁탁탁탁!


저녁을 먹은 뒤, 퀘스트로 나온 ‘조깅하기’를 클리어하기 위해 홀로 밖으로 나왔다.
이왕 달리는 김에 생각을 정리하기로 한다.

‘모욕죄라…’

초범, 게다가 단발성에 그친 온라인에서의 비대면 모욕.
실제로 내게 침을 뱉는 등의 모욕적인 ‘행동’이 아니었기에 실형이 나올 확률은 정말 낮았다.
행운이 따라줘서 실형을 받아 봐야 벌금 몇십만 원, 그게 아니라면 대부분이 기소유예를 받을 것이 뻔했다.


단순한 온라인 욕설이, 그것도 초범인 인물에게, 절도나 가벼운 성추행범들이 받는 벌금형을 동일시 취급하며 처벌하는 판·검사는 적다.
한국은 범죄자들에게 관대한 것이다.

게다가 벌금형을 받는다고 한들…
벌금형 정도는 본인만 입을 다물면 절대 지인들에게 알려지지 않는다.
고작해야 임용고시처럼 공무원을 할 때 불이익을 받는 정도일까?
그 새끼 대가리로 공무원을 합격하거나, 교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기에 의미 없는 패널티다.

탁탁탁탁!

단순한 SNS 욕설로 사람 한 명의 인생이 망가진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대한민국에서는 극히 드문 확률일 것이다.

 정도로는 부족하다.
이렇게 흐지부지 넘어가서야 열불이 터져서 견디질 못하겠다.
나는 내 방식대로 백하민에게 복수할 방법을 찾겠다.

탁탁탁…탁!

달리던 발을 멈추고 허공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기다렸어.”


“허억?! 내가 누군지 알아?”

“박찬영의 담당 하급 천사. 맞지?”


소리소문없이 생겨난 아기천사가 내 시선의 끝에 있었다.
남성의 티가  정도로 짧게 자른 머리의 아기천사.
내 담당의 아기천사는 중성적인 길이의 풍성한 머릿결을 가지고 있었으니 같은 아기 천사라도 구분하기 편했다.

“오오. 정답이야! 확실히 소문대로인  같네.”

그러고 보니 나는 천계에서 유명 인사라고 했었나?
 때문에 지구의 시간을 세 번이나 돌려야 했으니.


“그럼 내가 무슨 말을 하러 온 지도 알아?”

“고소하지 말아 달라고?”

“맞아! 당연히 네가 요구하는 조건은 내가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들어줄게. 어때, 생각 있어?”

예상한 그대로의 요구를 해 온다.
나는 이미 녀석에게 요구할 것을 생각해 놓았다.

어떻게 해야 놈에게 복수할 수 있을까?
놈의 인생이 망가지는 요구는 안 된다.
애초에 놈의 인생이 망가지지 않게 하기 위해 찾아온 천사인데, 그런 요구가 가능할 리 없다.

금전이나 지난번의 경우처럼 포션 같은 보상은 필요 없다.
그런 걸 받아서야 놈에게 향하는 복수가 안된다.
물질적인 보상을 받을 기회는  번 있었던 것에 비해서, ‘백하민’과 관련된 요구를 할 수 있는 기회는 현저하게 적을 것이 분명하니까.


한번 뜸을 들여 녀석의 집중력을 내게 주목시킨다.
그리고 단호하게 내뱉었다.
협상이나 의견을 조율할 생각 따위는 없다는 듯이.


“백하민과 싸울 수 있는 기회를 줘.”


“알겠어!”

“백하민 인생에 불이익은 없잖아?  중 하나가 얼마나 상처를 받든, 천계에서 치유해… 뭐?…”

“알겠다니까?”


“…고민도 없이 가능하다고 한 거야? 그 새끼의 허락을 받아야 할 텐데? 나랑 싸우겠다는.”


“응! 가능해!”

설득시키기 위해 열심히 준비했던 말들이 허사가 되는 것을 느껴가며 허탈하게 웃었다.
꽤나 어려운 요구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쉽게 허락한다고?
도대체 어떻게 백하민놈을 설득할 생각이지?


“그럼 세세한 조건은 어떻게 할래? 싸우는 시간 같은 것.”

“…시간으로 정하기보다는  중  명이 5초 이상 전투 불능이  때까지로 하지. 예를 들어 기절처럼.”


“음? 상관없겠지. 알겠어!”


좋아.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상대 쪽에서 의욕적으로 내 요구를 받아들였다.


“나 그럼 백하민 걔 설득하고 올게? 아, 방금 네 담당 천사한테 설명해 줬으니까  올 거야. 그럼 이따 봐.”

그 말과 함께 천사가 사라졌다.
여전히 천사란 놈들은 소리소문없이 생겼다 사라지네…

- and I↗ will always love you↗↗


“으악! 찬영님! 방금 들은 소식이 사실인가요?!”

백하민 담당 천사와 정반대로 정직하게 노래를 틀며 등장하는 내 담당의 아기천사.
나는 천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으으윽… 그것이 박찬영님의 선택이라면… 우우… 걔보다 실적을 뚜렷이 앞지를 기회였는데…”

“허락! 받아 왔어! 언제든 상관없대!”


백하민의 담당 천사는 허락을 구하러 간 지 30초도 안 되어서 허락을 받고 다시 왔다.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이렇게 빠르게 허락을 받아 왔는지 모르겠다.
그놈이 나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는데.
마나를 둘러 신체를 강화하면 그놈은 일방적으로 맞을 수밖에 없다.
아, 내가 마나를 사용할 수 있다는 건 모르려나?
하지만 시스템으로 스텟을 높일 수 있다는 건 알 텐데…?
그녀석에게도  소식을 전해 줄 담당 천사가 있으니…


“당연하지만… 나랑 그 새끼의 싸움이 끝나면 천계에서 다친 곳을 전부 치료해 주는 거로. 가능해?”


“당연하지! 후유증이 남으면 절대 안 되니까.”
“엄청 쉽죠.”


“아! 차라리 원룸만  작은 차원을 하나 만드는 게 어때? 혹시나, 정말 혹시나 ‘싸움’ 중에 사망자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 거기서는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니 사망자가 나와도 상관없잖아? 물론, 죽는 사람이 나오는 즉시 네가 요구한 ‘싸움’은 끝이지만.”


“아! 그게 좋겠네요! 참고로 작은 차원에서  죽는 이유는 박찬영님이 소설 속에서 죽어도 안 죽는 이유와 같아요!”

- 끄덕끄덕.


천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료 천사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래서? 날짜는 언제로 잡을 건데?”


“지금.”


“후후. 화끈하네. 좋아.  차원을 만들고 찬영과 백하민을 그쪽으로 옮겨줄게.”

스으윽

천사가 허공에 팔을 몇 번 휘젓는다.
그 행동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지러움에 정신이 휘청인다.
최근 줄곧 느껴왔던 익숙한 감각이다.
바로 소설 속에 들어갈 때의 그 감각.

“…”

눈을 뜨니 새하얀 공간에 와있다.
첫날 꿈이라고 착각했었던 몸이 바뀐  장소.
하얗고,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이다.


그러고 보니 그때와 상황이 비슷했다.
박찬영이 있고, 백하민이 있고, 아기천사가 있으니.
그러나 비슷하기만 할 뿐.
많은 것이 변했다.


눈앞에  키를 가진 건장한 남성이 보인다.
보기만 해도 증오스러운  죽이고 싶은 원수가.


“자. 이제 처맞을 시간이다. 개자식아.”


나는 으르렁거리듯이 나직하게 말을 내뱉었다.

“맞을 시간? 푸흐흐흐… 그래! 네가 맞을 시간이지! 이건 네 실수야! 나는 네가 열심히 단련해 놓은 근육이 있거든!”

“?…”


“반면에 너는 뒤룩뒤룩 찐 살과 평생 운동 한번 해본  없는 몸이지! 진심으로 나와 싸우겠다고  거야? 크크크크… 멍청한 새끼!  피떡이 될 준비나 해!!”


지금  새끼가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건가?

‘설마… 아까전에 백하민의 담당 천사가 이놈을 쉽게 설득할 수 있다고 한 이유가…?’

…나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푸하하하하하!!”


“당신… 설마 아직까지 박찬영님한테 시스템을 준 것 이야기  한 건가요?”

으쓱

“나는 백하민이 어떻게 되든 내 실적만 좋으면 되는걸? 어쨌든 고소 자체는 막았잖아? 그럼 그게  실적이지 뭐.”


“…지독해라…”


탁탁탁!!


“미친놈! 웃어? 실성  거냐!!”


백하민이 내게 달려든다.
180cm를 넘는 키에 전신은 근육질.
그것만으로 놈의 질주는 충분히 박력이 있었다.

전신에 마나를 불어 넣었다.
내게 달려오는 놈의 속도가 서서히 느릿해져 간다.


해도 달도 뜨지 않은 세계라 스킬의 보너스는 받지 않았지만…
지금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다.
이미 내게 주어진 힘은 충분하다.


‘싸움’이 끝나는 조건인 5초 이상 전투 불능.
내가 조금이라도 강하게 때린다면 바로 리타이어해 버릴 것이 분명하다.
누구든 복수를 단 한대만으로 끝내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 아껴먹듯 살살 때려라?

‘아니!’

몸이 자연스레 움직인다.
다리와 허리와 팔이 매우 안정적인 자세를 취한다.
내가 가진 어떤 주먹보다 가장 강력한 주먹을,
놈에게 박아 넣을 것이다.


일정권(一正拳).

“흐읍!”


“뒤져어어!!”


쿠웅-!!


“쁘허어어억?!”

마나가 깃든 주먹이 놈의 명치를 파고든다.
주먹은 교과서 같이 깔끔한 그림을 그리며 백하민의 배에 충격을 전달했다.
나무 기둥을 단 한 번의 주먹질로 패이게 만든 주먹이다.
내장이 뒤틀리는 고통을 받겠지.

“끄흐흐흡?! 흡…! 흡…!!”

털썩…!!


놈이 배를 부여잡으며 옆으로 날아갔다.
끅끅대는 것을 보니 숨이 뜻대로 안 쉬어지나보다.
나조차도 놀랄 정도로 깔끔하게 들어갔으니 당연한가.

놈은 쓰러져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이대로 5초만 지나도 ‘싸움’은 끝나겠지.
당연하지만 나는 그렇게 두고 볼 생각이 없다.


스윽…


주머니에 있던 물건을 꺼내었다.
주머니를 나온 내 손에 들려있는 것은 하나의 유리병이었다.
둥근 플라스크 모양의, 붉은색 액체가 담긴.


주르르륵!


붉은 액체를 놈의 입에 흘려 넣어 먹인다.
내가 조깅하기 전, 미리 챙겨둔 포션이다.
천사에게서 샘플로 받아 지구에 있던 바로 그 포션.


“마셔.”
“끄륿! 꿀꺽! 꿀꺽! 콜록콜록…!”

포션을 마신 백하민의 정신이 돌아온다.
단순한 배의 타박상 정도는 빠르게 치료한다는 건가…
좀 더 반죽음으로 만들어 놓고 써도 괜찮을 것 같다.

“이건… 무슨… 몸이?…”

배가 괜찮아진 것을 깨달은 백하민이 어리둥절하게 자신의 몸을 살핀다.
아랑곳하지 않고 상태창을 불러내었다.

“상태창”


왜 내가 일부러 ‘싸움’의 끝을 시간제한이 아닌, 5초 이상의 전투 불능으로 하자고 했을까?

다른 곳은  필요 없다.
이것만 확인하면 된다.


=
보유 카르마: 5,755
=

내게는 아직 57개의 하급 치유 포션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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