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37)화 (37/310)



〈 37화 〉지구

 후배에 그 선배라고 할까?
안젤리 역시 내가 여러  반복해가며 사과하자 어렵지 않게 화를 풀었다.

다만, 천사가 화장실을 가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이제 다시는 착각 하지 마? 천사는 화장실 안 가니까!”

허리에 손을 올리고 경고하듯 내게 말하는 안젤리.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긍정했다.


“좋아! 용서해 줄게.”

용서는 내가 오해를 했음을 인정을  뒤에야 가까스로 받을 수 있었다.

달그락달그락…

부엌의 찬장 구석.
다행히 먼지 쌓인 커피포트를 찾아내는 것에 성공했다.
당연하지만 이 집 안에 티백은 없다.
근처 편의점에서 값싼 티백이라도 사러 가려는 그때, 안젤리가 나를 막아섰다.

“원래 내가 가지고 있던 차를 대접해 주려 했어. 앉아서 기다려 줄래?”

허공에서 찻잎 통을 한 개 꺼내 든 안젤리는 나를 부엌에서 밀어내었다.
잠시 뒤.
안젤리가 찻잔 두 잔을 든 채로 내게 왔다.

차의 색은 녹색의 베이스에 붉은 기가 잔잔히 맴도는 연갈색이었다.

- 후룩.

“이거 무슨 차야? 향이 신기하네.”


맛은 오미자처럼 새콤했고, 처음 맡아보는 은은한 향이 콧속에 스며들었다.
향은 강렬하지 않았다.
허나 무척이나 세련된 느낌이라 값이 꽤나 나갈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왠지 머리가 맑아지며 상쾌한 기분도 들기도 하고.

나는 평소에 차를 즐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정도 차면 시간을 내서 마실 가치가 있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음… 몸에 좋은 차? 어때. 마음에 들어?”


“평생 마셔 본 차들 중…”


띠링!

[‘구름나무 차’를 섭취하셨습니다! 30분 동안 집중력이 상승합니다. 30분 동안 스트레스를 받지 않습니다.]

“…제일 마음에 드네.”

차를 마시니 시스템 창이 튀어나왔다.
천사가 달여준 차이니 특별할 거란 것은 예상했다.
그러나 이 정도로 대단한 효과라니…


알림창에 수치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나는 집중력이 상승한다는 효과를 확실하게 체감하고 있었다.
마시기 전과 후의 차이가 생각보다 크다.


“그래? 후후! 다행이다! 많이 있으니까 조금 줄게! 다른 건 제약 때문에  주지만… …찻잎 정도는 괜찮겠지?”

안젤리가 찻잎이 담긴 통을 내밀었다.

그녀는 한동안 지구에 머물며 내 곁에 있다.
언제든지 차를 내어 줄  있는 뜻이다.
그럼에도 굳이 찻잎을 내게 주는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겠지.


“괜찮은 거야?”


“음… 괜찮아. 이 정도는 크게 영향이 가는 것도 아니고, 친구가 친구에게 주는 작은 선물일 뿐이니까!”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받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안젤리에게서 찻잎통을 받았다.
이렇게 내 상점 창에는 ‘구름나무 차’라는 판타지적인 물건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당장이라도 시스템 창을 열어 상세한 효과를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선물을 준 안젤리에게 실례였기에 먼저 감사 인사를 했다.

“고마워. 잘 마실게.  차, 구름나무라는 차나무로 만든 차야?”

게다가 그녀와 잡담을 하기로 한 이상,  선물 받은 차만큼 좋은 화제도 없다.
굳이 시스템 창에서 볼 필요 없이 그녀에게 물어보면 되지.

“아! 차 이름 알림창으로 나왔구나? 응! 이거  귀한 거다? 천계에 있는 에덴동산에서 자란 구름나무의 잎을…”


안젤리와의 잡담은 즐거웠다.

*

테라포밍의 첫 번째 챕터가 무사히 일단락되었다.
57화에 연중을 했다 보니 챕터라고 할만한 사건도 많이 있지는 않았지만,
손에 꼽을 만큼 큼지막한 사건이란 것은 변함없다.


죽음과 다를 바 없는 위기는 있었다.
그러나 정신적인 충격은 전혀 없었다.
스트레스도, 공포심도, 트라우마도 남지 않았다.
내 나름의 각오 덕이기도 하겠지만, 자연치유의 힘도 컸을 것이다.


후유증이 없었기에 바로 소설 속으로 들어가더라도 큰 상관은 없다.
다만, 현실에서 보내는 시간과 테라포밍에서 보내는 시간의 간극이 너무 비대해 지면 문제가 된다.
살이 급격하게 빠지는 것은 ‘지방 흡입 수술’이라는 변명이라도 있다.
그러나 15cm의 키가  며칠 만에 자라는 것은 아무리 그래도 너무 이질적이다.

반개월만에 15cm가 자라는 것도 충분히 이질적이겠지만, 내 생각대로라면 괜찮다.
그래도 가능하면 대학에 얼굴을 비추는 것이 좋겠지.

때마침 오늘은 월요일.
강의가 있는 날이다.



나 박찬영은 대학에서 눈에 띄는 존재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누구도 내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없었고,
메신저에 동기의 연락처도 없었으며,
심지어 단톡방에 초대를 받지 못하기까지 했다.

요 주말 동안 키가 5cm쯤 자라고, 살이 8kg쯤 빠졌다.
안젤리가 측정해 줬으니 정확하다.
하지만  변화를 눈치챌 만큼 친한 사람은 없다.
그들이 보는 나는 5cm 커 봐야 여전히 단신이고, 8kg이 빠져도 변하지 않는 고도 비만이다.


‘아니, 체감상 8kg보다 훨씬 더 많이 빠진 것 같은데?… 아! 자연치유의 덕에 근육이 많이 붙은 것이 아닐까? 근육의 밀집도를 생각해 보면 지방 자체는 생각보다  많이 빠졌을 수도…’

근육이 찢어졌다 재생되는 속도가 남들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빠른 만큼, 근육의 성장 속도도 남다를 것이다.
어쩌면  비대한 살덩어리 밑에는 선명한 복근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몸이 바뀌기 전이었다면 ‘고작 일주일 정도 훈련했다고 뭔 복근이냐. 그런  하는 사람은 100% 운동  번도  해본 사람이다. 아니면 스테로이드를 했거나.’라며 코웃음을 쳤겠지만, 이번에 겪은 훈련의 강도를 생각해 보면 결코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나는 진지하게 복근이 있을 가능성이 생각보다 크다고 판단했다.

‘복근이고 뭐고 체질량 지수부터 줄여야 티가 나겠지만.’

털썩!

사람이 어느 정도 들어찬 강의실에 홀로 빈자리를 찾아 앉는다.
지금 나는 아는 사람을 늘리면 안 됐다.
앞서 말한 대로 지구 기준으로 한 달도 안되어서 역변할테니까.

- 웅성웅성…


강의실에 훈남 훈녀 한 무리가 짝지어 들어온다.
누군가의 연애에 대해서라도 이야기 하는지, 목소리에 담긴 텐션이 상당히 높았다.

“…그렇게 좋은 여자애가 걔를 좋아한다고? 와…”
“그치?  어울리기도 하고…  솔직히 둘이  되면 좋을 듯?”
“근데  죽어도 CC(Campus Couple, 같은 대학 혹은 과 내부 사람들끼리 맺어진 커플)는 안 한다고 했잖아.”
“음… 그래도 이쁘니까 가능성 있지 않을까? 남자들은 예쁜 것이 최고면서.”
“…우리를 너무 쓰레기로 보는 거 아니야? 반박은  하겠지만…”
“야야. 혹시 나 좋다는 여자는 없냐? 그래도  얼굴 정도면 꽤 상위 티어인데.”
“아저씨는 제발 현실을 보세요…”

내가 잘 아는 얼굴들이었다.
이제는 이름과 나이밖에 기억나지 않았지만,
한때는 나와 친하게 지냈던 무리였다.


‘잡담을 했다는 기억만 있지, 그 내용은 거의 기억이 안 나네. 하긴, 사생활에 관련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으니 이것도 기억에서 지워진 건가.’

그들의 성격만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의외일까?
친구를 잃은 슬픔이나, 안타까움 같은 감정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한두 명도 아닌 수백 명에 가까운 인간관계의 소멸.
그 때문인지 요즘 인간관계에 대해 극심한 회의감이 찾아왔기에 예전처럼 사람을 가리지 않고 친하게 지낼 생각이 도무지 들지 않는다.
의욕이 사라졌다.
하물며 여자도 아닌 남자를 상대로는 특히나 더.


‘내가 기억 하기로는 몸이 바뀌기 전 마지막으로 어울렸던 무리가 쟤들인데…  새끼는 어디 있지?’

이들과 같이 다닐법한 그놈이 없다.
혹시 교통사고 당해서 죽었나?
제발 그랬기를 빈다.
장례식장에서 육개장 6그릇에 밥풀까지 싹싹 긁어서 먹을 수 있다.


‘아니야. 역시 내가 직접 족쳐야지. 아직은 살아있어라. 아직은…’

내 기도가 닿았는지,  문에서 익숙한 육체가 걸어 들어왔다.

커다란 키와 기다란 다리, 여자들이 환장하는 잔 근육(저  만든 몸을 ‘잔’ 근육이라고 말한다면 수십만 헬창들이 발작하겠지만, 여자들은 그리 부른다.), 학생의 수준에 딱 알맞은 과하지 않은 브랜드 옷, 떡 벌어진 어깨, 그리고 잘생긴…
잘생긴?…

미친! 쟤 얼굴이  저래?

“??… 백하민? 백하민 맞지? 그 안경은 도대체 뭐냐?”


인싸의 무리 중 한 명이 백하민을 발견하고 물어봤다.

그가 저놈을 알아본 게 용하다.
나조차도 저 새끼의 얼굴을 보고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다.
농담 아니라 나도 내가 저렇게 못생긴 줄 몰랐다.

내 원래 육체가 시력이 어마어마하게 나쁘다고 말했었나?


놈은 안경을 쓰고 왔다.
단순히 안경을 썼다는 것 외에 더 큰 문제가 있다.
보통의 사람들은 안경을 쓰더라도 웬만해서는 렌즈의 크기가 큼지막한, 안경알이 타원형을 그리는 패션 위주의 안경을 선택한다.

그러나 이놈은 달랐다.

알의 높이가 고작 손가락  개를 겹친 것만큼 작고 짧은 안경을 쓰고 왔다.
마치 어머니가 마음대로 골랐기에, 죽어도 쓰기 싫지만 억지로 써야 했던 중학생들이나 낄 법한 검은색 뿔테 안경.
그 안경이 훈훈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얼굴을 완전히 박살  버렸다.


게다가 안경알이 미치도록 두꺼워서 눈이 1/3로 작아진 듯한 착시 현상을 일으키기까지…
총체적 난국이다.

“어? 이건 그냥 눈이 안 좋길래…”

“와… 너 평소에 렌즈 끼는 건 알긴 했는데… …앞으로 절대 안경 쓰지 말고 그냥 계속 렌즈 껴라… 제발…”
“벌칙 게임  그런 거냐? 사각 뿔테 안경은 진짜 전설이다… 멀쩡하던 애를 바로 개찐따로 만들어 버리네.”
“푸하하! 개웃겨! 야 이거 언놈의 작품이냐? 누가  벌칙 게임으로 끌어들임?”
“내가 너한테 이런 말 할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너 존나 못생겼다. 푸흐흡!”


“이건… 귀한 장면이군요… 찍어서 전/후 사진 페북에 올리면 좋아요 10만 씹가능 할 듯.”


찰칵!

“앗?… 사…사진은 안 되는데…”

“응. 이미 올림.”
“와 개쩐다. 벌써 댓글 10개 달렸어.”
“굴욕짤 영구 박제 축하해 하민아!”

백하민은 자신을 둘러싼 친구들의 인싸력에 견디지 못하고 심하게 얼타고 있었다.
나의 인간관계에 대한 기억은 지식으로써 머릿속에 있지만, 그걸 사용하는 놈이 저 새끼니 당연한 결과지.



- 저게 인싸의 삶이냐… 역시 나는 저렇게  살겠다… 대단한 놈…
- 저건 인싸가 아니라 광대 수준이잖아. 큭큭큭!
- 푸흐흐… 이따가  보내서 물어봐야겠다.
- 오늘 강의는 다 들었네… 전말이 궁금해서 집중도 못할 듯.


지금까지 보고만 있던 주변 동기들이 백하민을 주제로 이야기꽃이 피어난다.
말하는 사람들은 전부 아는 얼굴들이다.
가끔 같이 밥을 먹거나, 메신저로 연락을 주고받던 사이들.
조금  친하지만 그렇다고 사이가 멀지는 않은 친구들이다.
그렇기에 저런 백하민을 놀리는 말도 서슴없이 할 수 있었던 거고.

‘이렇게 보니 나랑 안 친하던 사람이 없네.’


박찬영을 제외하곤.

그나저나 쟤는 거울도 안 보나?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머저리 같은 안경을 쓰고  거지?

생각해 보니 저놈은 생각이란 걸 깊게 하지 않으며 살긴 했다.
이름도 모르는 외부 청소 직원한테 현관 비밀번호를 알려주고 앉아 있었으니.

‘도대체 어떻게 저런 돌대가리로 나랑 같은 대학에 들어온 거야?’

천사가 넣어준 기억을 더듬어 보니, 정상적인 학습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고아나 장애인들을 위한 ‘특수교육대상자 특별전형’ 덕에 아슬아슬하게 턱걸이로 들어왔었다.


시발.
이런 건   닮고 지랄이야.
기분 나쁘게.


나는 이 전형으로 대입을 넣지 않았어도 넉넉히 들어 올 성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99%를 100%로 만드는 선택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기에 위 전형으로 들어왔다.

‘아… 성적…’


성적은… 그리 손해는 아닐지도?
첫날 몸이 바뀔  이미 알고 있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내가 열심히 쌓아 놓은 성적들은 모조리 저 새끼가 채 갔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제는 별로 상관없을 것 같다.
스펙을 쌓는 이유는 전부 취업을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내가 미래에 취준생이 될지는 의문스럽다.
시스템을 이용한다면 딱히 회사 생활을 하지 않더라도 수입이 들어올 구석이 많았기에.
좋은 기업에 들어가서 남들보다 많은 월급을 받는 것 보다, 일하지 않고 돈을 버는 것이 몇 배나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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