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테라포밍
“오랜만이네요. 베넷 씨.”
“이 미친년이? 너는 위아래도 없냐? 스승 이름을 그리 막 불러도 되는 거야?”
“후후! 저 이미 선배들한테 들어서 다 알고 있거든요? 그 말투나 행동은 전부 연… 꺄악!”
퍼억!
이곳에 지원 온 전투직 중 한 명이 광년이와 대화를 하다가 옆구리를 한 대 맞았다.
당연히 광년이가 때린 것이다.
과연 여자도 남자도 평등하게 때리는 광년이 답다.
저렇게 눈망울이 순진해 보이는 여자의 옆구리를 망설임 없이 때려버리다니…
광년이에게 면박을 당한 여자가 식은땀을 흘리며 내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뭐야?
왜 나를 쳐다봐?
“아앗… 그렇네요. 여길 보고 있는 훈련생이… 크흠! 죄송합니다.”
“알면 제발 좀 그 주둥아리!! 어? 어어?!”
“으으… 죄…죄송…”
“이래서 내가 눈치 없는 애들을…!”
- 주절주절주절…
들어봐도 별 내용이 아닌 것 같은데, 뭔 대화를 저리 재밌게 나누는지 모르겠다.
톰이라는 어린 직원이 데려온 지원군은 무려 열다섯 명이나 되었다.
최소한의 병력을 제외한 모든 인원을 끌고 온 거란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반군들이 떠나고 난 뒤였지만…
‘너무 늦었어. 올 거면 딱 5분만 더 일찍 오지! 그러면 그 새끼들 죄다 족치는 건데.’
“왜 이렇게 느려 터졌어? 올 거면 딱 5분만 더 일찍 오지! 그 씹쌔들 죄다 목을 딸 수 있었는데!”
…깜짝이야.
내가 떠올린 생각이 광년이 입에서 비슷하게 흘러나오길래 놀랐다.
…
어?
이거 위험한 것 아닌가?
저 미친년이랑 나랑 생각이 겹쳤다는 뜻이잖아?
설마 근묵자흑이라고, 새하얀 백지 같던 나의 심성이 저 시꺼면 광년이에게 물들여 버렸나?
이래선 안 된다.
순수하고 깨끗했던 시절로 돌아가야 할 텐데…
띠링!
[*HARD MODE* 퀘스트, ‘인명 피해 저지’ 클리어!]
[클리어 보상 ‘스킬, 천권일각(千拳一脚) Lv 0’을 획득하였습니다!]
도망친 반군들이 쉘터의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간 걸까?
퀘스트가 완료되었다.
와…
결국 성공하긴 했구나.
하드모드 퀘스트.
솔직히 실패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했는데, 이강인이 잘 버텨줘서 다행이다.
행운도 좀 따른 것 같고.
‘엇?’
그때,
내 머릿속에서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패시브가 아닌, 이론의 이해가 반드시 필요한 무술 스킬의 첫 습득.
내 것이 아니었던 기억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한다.
마치 몸이 바뀐 첫날, 아기 천사가 내게 박찬영의 기억을 넣어준 것처럼.
천권일각의 철학, 천권일각의 특징, 천권일각의 기술 등등…
수많은 정보들이 물밀 듯이 내 머릿속을 채워간다.
“아…”
띠링!
=
[스킬 이름] 천권일각(千拳一脚)
[레벨] 0 Lv
[속성] 물리
[타입] Active
[상세]
천 개의 권법과 한 개의 각법으로 이루어진 잊혀진 무술입니다.
마나가 있어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스킬의 레벨, 기술의 난해함, 신체의 스텟, 마나를 담은 정도에 따라 위력이 천차만별로 변합니다.
스킬 레벨이 올라갈수록 더 많은 권법이 해금됩니다.
일정 스킬 레벨에 도달하면 각법이 진화합니다.
- 현재 해금된 기술 (0 Lv)
▶ 사념각 (邪念脚) - 1단계
▶ 일정권 (一正拳)
[재사용 대기시간] -
=
보통 무협지나 판타지 소설에 특별히 좋은 무공이 나올 때면 공통점이 하나 있다.
항상 무신(武神)이니, 천마(天魔)니, 역천(逆天)이니, 파천(破天)이니 딱 봐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수식어가 덕지덕지 붙어있지 않던가?
그래서 나는 이 천권일각(千拳一脚)이라는 무술은 그렇게 뛰어난 무술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한자만 보아도 딱 알 수 있듯이, 천 가지 주먹질과 한가지 발차기를 하는 방법을 담은…
초반에 쓰다가 버리기 딱 좋은 무술인 줄 알았다.
…그러나 나는 하드모드 퀘스트의 보상을 너무 얕보고 있었나 보다.
생각해 보면, 내가 받은 퀘스트 또한 한 번이라도 삐끗하면 그대로 실패해버릴 정도로 악랄한 난이도였다.
단 한 명의 훈련생이라도 납치되면 퀘스트가 바로 실패했으니까.
심지어 우리를 노리는 상대는 정직하게 정면으로 싸운다면, 50명 전체가 한꺼번에 덤벼도 승리를 장담하지 못할 정도로 강하다.
목숨이 위험하지도, 제한 시간도, 실패 패널티도 없는 첫번째 하드모드 퀘스트 보상은…
일반 퀘스트 보상의 25% 증가였다.
그렇다면 이 퀘스트의 보상이 더 좋은 게 당연할 텐데, 너무나도 구린 천권일각(千拳一脚)이라는 네이밍 센스에 가려져 잊고 있었다.
‘너무 기분 좋은 반전인데?’
이 스킬은 평생 쓸만한 스킬이다.
천권일각.
스킬 레벨이 한 개 오르면 권법 한 개가 개방된다.
천 개의 권법을 전부 배우게 되면…
반신의 자격을 얻게 된다고 한다.
뭐…
스킬 Lv 1000 같은 수치는 가능할 것 같지는 않지만, 일단 무술 자체에 반신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 웬만한 무공들은 뛰어넘는 것 아니겠는가?
스킬의 마스터 레벨이 적어도 1000까지는 뚫려있다는 뜻이고.
‘당장 권법을 시험해 보고 싶은데…’
광년이와 브랙이 무사한 것을 확인했기에 이곳에 내가 있어도 할 일은 없다.
게다가 여기 있으면 지혈을 마친 브랙과 광년이에게 입 아프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야 할 것 같고…
‘좋아. 도망치자.’
터벅터벅.
나는 조용히 소란스러운 장소를 빠져나와 공터로 향했다.
며칠 전, 딱밤식이 거행되느라 나무 기둥이 박혀져 있는 그 공터로.
“빈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는 것보다는 나무 기둥을 목표로 하는 것이 좀 더 이미지를 잡기 쉽겠지?”
스윽…
공터에 도착한 뒤, 나무 기둥의 앞에 섰다.
손목을 천천히 풀며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 후우…
퍽!
마나를 담지 않고 오로지 근력만으로 주먹을 내질러보았다.
땅속에 1M나 박힌 기둥은 나의 주먹에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마나를 담아서…’
퍼억-!
나무 기둥이 꽤 흔들렸다.
나무껍질 또한 내 주먹에 약간 짓뭉개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태까지는 이것이 나의 최대 전력이자, 내가 가진 가장 강력한 일격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 흐읍!
숨을 크게 한번들이 쉬고.
오른팔, 허리, 허벅지, 종아리를 거쳐 발끝까지 마나를 싣는다.
일정권(一正拳)이 내게 알려준 것은 고차원적인 마나의 응용법이 아니었다.
그 기술의 이름 그대로 주먹을 바르게(正) 쓰는 법을 알려주었다.
올바른 자세에서, 올바른 각도로, 올바르게 힘을 싣는다.
그것이 일정권(一正拳)의 전부였다.
당연히 발동하는 데 예비 자세는 필요 없었다.
마나를 담은 채 주먹을 내지르면 된다.
이미 내 몸은 ‘올바른 자세’를 완벽히 익히고 있으니.
이건 커다란 이점이다.
몸의 중심이 무너진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큰 위력을 낼 수 있다는 뜻이다.
기둥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쿠웅—!!
빈 공터에 큰 소리가 퍼졌다.
내 발바닥을 진동이 간지럽혔다.
땅에 박혀있던 나무 기둥이 흙을 약간 밀어내며 진동이 울렸기 때문이다.
충격을 받은 나무 기둥은 조금 기울어져 있었다.
그 정도로 강력한 힘이었다.
“와…”
나무 기둥에 박힌 흔적도 무시무시했다.
나의 주먹의 모양대로 우그러져 1cm 정도 파여 있었다.
“이게 되네…”
농담이 아니라 만화에서 본 것 같은 장면이다.
어벙벙하게 내 주먹이 남긴 흔적을 바라보았다.
가장 어이가 없는 것은…
“이거 마나 소모가 말도 안 되게 적잖아?…"
방금의 일정권(一正拳)은 가장 최소한의 마나 만을 사용해 펼친 것이다.
이렇게만 사용한다면 적어도 30번은 넉넉히 쓸 수 있다.
내가 배운 액티브 스킬은 이것 하나지만, 이 기술이 마나를 정말 적게 잡아먹는 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스킬 설명에 마나를 때려 넣으면 넣을수록 강해진다고 했으니, 마나를 전부 때려 넣어 이 기둥을 때린다면 부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몰랐다.
“이 기둥을 부쉈다간 해명하기도 귀찮으니 그건 참아야겠네…”
아쉽게도 사념각(邪念脚)은 상대가 있어야 펼칠 수 있는 기술이다.
지금은 일정권(一正拳)의 위력을 확인한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
“어서와! 찬영!”
“근데 안젤리, 지구에 있는 네 기준으로 치면 내게 30분마다 한 번씩 인사하는 거 아니야??”
“응 그렇지?”
“안 피곤해?”
“그냥 인사 하는 건데 피곤할 리가 없잖아. 헤헤.”
우리 안젤리는 마음씨도 착하지, 얼굴도 아름답지, 얼굴도 예쁘지, 얼굴도 매력 있지, 얼굴이 보기 좋기까지 하다.
나의 집 안에 있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어째선지 마음 한구석이 든든해진다.
“아.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정신이 없어서 집안 소개도 생략했던 것 같네? 이참에 해줄게.”
이 집안은 쓸데없이 넓으니 알려줄 필요가 있다.
아무리 그래도 집 안에서 길을 잃진 않겠지만, 안 쓰는 방이 많았기에 설명은 필요하다.
나는 안젤리를 이끌고 집안을 돌아다녔다.
터벅터벅.
“…다음으로 저기가 창고. 무슨 물건이 있는지는 나도 잘 몰라.”
“그래? 나중에 시간 될 때 정리 할게!”
“어? 그렇게까지 안해 줘도 되는데?…”
“사실… 가만히 있으면 너무 심심하니까… 찬영도 지구 올 때면 항상 자거나 쉬기만 하고, 나랑 잘 얘기도 안 해줬잖아?”
안젤리가 나를 서운한 눈으로 쳐다봤다.
윽…
지구에 올 때마다 잠깐 얘기한 거로는 부족했나 보네.
“오늘은 실컷 얘기할 수 있어. 이따가 차나 마시면서 얘기나 좀 하자.”
“와! 좋아!”
“그럼 집 안내를 계속하자면… 저쪽이 목욕탕이고, 이쪽이 화장실이야. 목욕탕하고 화장실이 따로 있는 거 신기하지 않아?”
“그…글쎄에? 천사는 화장실 안 가서 잘 모르겠는데?…”
천사는 화장실을 안 간다고?
내가 알기로는 아닐 텐데?
나는 그녀의 말에 놀라 안젤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내 눈을 피하는 그녀를 보고선 깨달았다.
‘얘 거짓말하고 있네.’
안젤리는 거짓말을 지독하게 못 한다.
눈치를 못 채는 것이 어렵다.
“천사는 밥 먹어?”
“먹어!”
“그런데 화장실은 안가?”
“으…응! 안가!”
으음…
절대 인정을 할 생각이 아닌 듯했다.
매너 있는 남자라면 여기서 모르는 척 넘어가겠지만, 장난기가 동했다.
난 왜 천사만 보면 놀리고 싶어질까?
“그러고 보니 내가 천계에 올라갔을 때 말이야.”
“응?”
“분명 복도를 걸으면서 화장실을 본 것 같은데… 천사들이 화장실을 안 가면 천계에 화장실이 있을 이유가 없지 않아?”
“그…그건… 그… 그러니까…”
내가 천사도 화장실을 가는 것을 알고 있는 이유다.
안젤리는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못했는지 심하게 당황했다.
“그… 으으…”
…
눈물까지 맺혀가며 글썽거리는 안젤리가 안쓰러워 살길을 터 주기로 했다.
진짜 울리면 내가 너무 쓰레기가 되잖아.
“으음… 아! 혹시 나같이 천계를 방문한 사람을 위해 만들어 놓은 거야?”
“…! 맞아! 그거야! 천사는 화장실을 안 가지만, 인간은 가니까! 일종의 배려 같은 거지!”
“아하! 역시 천사들이네. 몇백 년에 한번 갈까 말까 하는 인간들을 위해 화장실까지 만들어 두다니!”
끄덕끄덕!
아무리 봐도 얘는 똑똑한 천사 같지는 않다.
뭐? 안젤리랑 아기 천사가 천계에서 유명한 엘리트 듀오라고?
절대 안속을 것이다.
“뭐… 이건 그냥 말해주는 건데, 너한테 준 방구석의 작은 문. 그거 열면 방에 달려 있는 작은 화장실이 있으니까 참고해.”
“으응?! 참고하라니, 무슨 의미야? 나랑 전혀 상관없는, 완전 쓸데없는 정보인데!!”
“매번 방에서 거실까지 세안하러 오기 귀찮잖아? 편하게 그 방에 있는 화장실 써.”
“아! 아하! 세안! 응! 알겠어!”
“아! 방음은 잘 되니까 걱정하지 말고. 절대 하나도 안 들려!”
“……찬영 지금 나 놀리고 있지?”
아 이걸 들키네.
안젤리는 아기천사보다는 똑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