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테라포밍
점심 식사 이후.
점심밥보다 훨씬 달콤한 1시간의 휴식이 나를 반겼다.
굳이 식사 시간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지구로 귀환하면 마음껏 쉴 수 있지 않으냐고?
물론 그렇긴 하다.
하지만…
‘한번 나태함이 몸에 익숙해지면, 그걸 뜯어고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데…’
몇 년 전…
육체적인 힘겨움과 다른 의미의 시련이 떠오르며 온몸에 소름이라도 돋은 듯 떨린다.
그 경험을 한 번 더 하라고?
차라리 이 지옥 훈련 기간을 두배로 늘리겠다.
나에게 있어 나태란, 마치 한번 금연에 성공한 사람이 다시 담배를 입에 대는 것과 같은 위험하기 그지없는 행동이다.
난 그 무서움을 알고 있기에 스스로에게 엄격한 잣대를 대곤 한다.
무엇보다 중간중간 너무 많은 휴식을 가지면 훈련이 안 된다.
피하지도 못할 훈련인데, 얻어가는 것이 하나라도 많으면 더 좋지 않겠는가?
너무 버티기 힘들 때만 지구로, 그것도 30분을 넘지 않을 정도로 짧은 휴식만 취하고 왔다.
단순히 신체가 지친 정도는 특성의 덕에 30분이면 전부 회복하고도 남으니까.
그 이상 쉬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나태함이다.
“상태창.”
띠링!
=
[이름] 박찬영
[직업] -
[힘] 9 [민첩] 9
[체력] 7 [지능] 5
[기교] 1 → 2[매력] -22
[마나] 6 → 7
[특성] 『자연치유』
선령일일 만요월월(仙令日日 灣謠月月) 버프, 매력 제외 모든 스텟 +3 (00:00:04)
보유 카르마: 6,480
=
브랙은 나와 같은 훈련을 해놓고도 체력이 남아도는 것 같았다.
어제도, 그제도 그랬듯이 점심 식사 후 식후 운동 삼아 훈련소에 얼굴을 비추러 다녀온다고 했다.
그렇기에 상태창을 불러내는 것에 망설임은 없었다.
드디어 보유 카르마가 5,000을 넘겼다.
또한 5,000 카르마를 쓰더라도 돌발 상황을 대비할만한 여유분은 남아있다.
웬만한 사태는 ‘하급 포션’을 14개나 살 수 있을 정도의 카르마면 충분할 것이다.
하드모드 퀘스트를 해금할 때가 온 것이다.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 상점창을 조작했다.
=
[기능]
이름: 하드모드 퀘스트
레벨: -
효과: 높은 난이도의, 높은 보상을 가진 퀘스트가 랜덤으로 출현합니다.
상세: 노멀 퀘스트와 별개로 하드모드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하드모드 퀘스트는 클리어하는데 많은 시간, 노력, 행운이 필요합니다. 실패 또는 중도 포기 시 패널티가 있으나, 발생했을 때를 한정해 퀘스트를 거부할 수 있습니다.
가격: 5,000카르마
[구매하기]
=
이제 와서 망설일 생각은 없었다.
곧바로 구매하기 버튼을 눌러 기능을 잠금 해제했다.
띠링!
[기능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이후, *HARD MODE* 퀘스트가 랜덤으로 출현합니다!]
내가 이 퀘스트를 망설이지 않고 해금한 이유는 한 가지 더 있다.
곧 발생할 이 소설의 첫 번째 챕터의 사건에서 반드시 한 개 이상의 하드 모드 퀘스트가 발생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기 천사의 말로는 시스템에 AI가 있다고 했다.
내 주변에서 큰 사건이 생길 때야말로, 내게 하드 모드 퀘스트를 내주기 딱 좋은 조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직 사건이 발생하기까지는 며칠이 남았다.
그 사이에 하드모드 퀘스트가 발생하면 좋겠지만, 그럴 확률은 낮겠지.
하지만 이런 나의 예상은 멋지게 빗나갔다.
띠링!
=
*HARD MODE*
[퀘스트]
내용: 총각 딱지 떼기.
상세:
상대가 이성이라면,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합의한 상대에게 순결을 바치세요!
동정(Virginity)을 버리세요!
(단, 강간의 경우는 서로 합의가 되지 않은 성관계이기 때문에 퀘스트가 클리어되지 않습니다.)
첫 번째 *HARD MODE* 퀘스트는 이 퀘스트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예외적으로 이 *HARD MODE* 퀘스트는 거부가 불가능합니다!
대신, 제한 시간과 패널티가 없죠!
보상: 영구적으로 일반 퀘스트 완료 보상 25% 증가.
제한 시간: 없음.
실패 조건: 없음.
실패 패널티: 클리어 전까지 이 퀘스트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포기 패널티: 이 퀘스트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
[*HARD MODE* 퀘스트가 수락되었습니다!]
“이게 뭔…”
강제로 수락되는 퀘스트라고?
이런 시발.
내가 알기로는 퀘스트가 클리어되기 전까지, 그다음 퀘스트는 나오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즉, 나는 이 퀘스트를 챕터가 시작되기 전까지 클리어하지 못하면…
하드모드 퀘스트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하나 날리게 된다!
“젠장, 일단 퀘스트 내용부터 확인해야… 어?”
그런데 내용을 읽으니 상황이 심상치 않다.
단순히 누군가와 ‘섹스를 해라’라는 퀘스트 내용이면 성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다를 떼라니?
내겐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난 이미 아다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신적인 부분은 물론이고, 육체적인 부분까지 모두.
“뭐야… 이거 어떻게 되는 거야?”
띠링!
[*HARD MODE* 퀘스트, ‘총각 딱지 떼기’ 클리어!]
[클리어 보상 ‘영구적으로 일반 퀘스트 완료 보상 25% 증가’를 획득하였습니다!]
“??…”
퀘스트가 스르륵 나오더니, 자기 혼자 수락해 버리고, 또 덥석 클리어가 완료되었다.
게다가 보상으로 던져 준 것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이다.
일반 퀘스트의 완료 보상을 25%나 증가 시켜 준다고?…
“허… 이미 5,000 카르마 값은 하고도 남았네…”
그런데 아무래도 좀 꺼림직하다.
난 이미 동정이 아니니 퀘스트가 자동으로 클리어가 된 것이 납득이 가기도 하면서,
동시에 버그 아닌가 하는 의심 또한 생긴다.
내가 이 시스템을 만든 천계가 그리 꼼꼼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의 인디 게임처럼 버그가 넘치는 것이 바로 이 시스템이다.
“천사야. 듣고 있어? 잠깐 나와봐.”
- and I↗ will always love you↗↗
“부르셨나요 찬영님??”
오직 내 귀에만 들리는 노래와 함께 등장한 아기 천사.
왠지 오랜만에 보는 느낌이라 반가웠지만,
천사에게 빠르게 본론을 꺼내었다.
“…이런 일이 있었는데, 이거 문제 되지는 않아?”
“음… 괜찮을 것 같네요. 아마 시스템 AI가 클리어 처리한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다행이다.
나는 또 내가 모르는 오류가 생겼을 까봐 불안했었거든.
“그러고 보니 그 인수인계라는 건 거의 끝났어?”
“예! 거의 마무리가 되어가요! 저도 곧 선배님과 함께 찬영님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될 것 같아요!”
“으음… 그래?”
“…평소에는 표정 관리를 그렇게 잘하시면서, 왜 제가 간다니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표정을 지으시나요?…”
“네 착각이야.”
“씨잉… 선배님한테는 안 그러시면서 왜 저만…”
너를 놀리는 것이 재밌어서 그런다고 하면 화내겠지?
일부러 표정 연기까지 해 가며 놀리는 맛이 있다.
무엇보다 이렇게 놀리다가도 사과만 하면 쉽게 용서해 준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내가 쓰레기 같네.
“찬영님은 좀 더 자신에게 주어진 행운에 감사해야 해요! 저랑 선배님 같은 엘리트가 두 명이나 붙어서 케어해 주니까요!”
“뭐? 엘리트? 누구랑 누가?”
“저 말이에요!! 저! 저랑 선배님이요!”
그게… 맞는… 거야?…
나는 세계에 존재하면 안 되는 문장을 들은 것처럼 얼굴이 굳어졌다.
“…진심이야?”
“애초에 저랑 선배님이 일류가 아니었다면 시스템을 만드는 중요한 일을 상부에서 맡겼을 리가 없잖아요! 저랑 선배님은 천계에서 일 잘하기로 유명한 페어라고요!”
“음… 천국이란 의외로 극심한 인재난에 시달리고 있구나…”
“이이이익!!”
아기천사는 화를 참지 못하고 분통을 터뜨렸다.
아…
저걸 보고 있으니, 그만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더 놀려버리고 만다.
“첫날에 날 만났을 때 어리바리했던 것 기억 안 나? 넌 이미 그때 첫인상이 깊숙이 박혀 들어갔어.”
“그…그건… 그때 너무 정신 없었어서!… 미리 준비해 놓은 예상 리스트를 완벽히 벗어나는 몸을 바꿔주는 소원에,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서로 기억을 보충해 주되, 천계의 인권 법률에 접촉되지 않게끔 분류해서 넣어주고, 거기다 제 스케줄 상 원래 해야 하는 일까지…”
주절주절주절…
아기 천사는 당황해서 변명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나는 말을 끊지 않고 묵묵히 천사의 말을 들어주었다.
당황해서 허둥지둥 변명하는 모습이 꽤 흥미진진했기에.
“…그랬던 거라고요! 아시겠어요? 무…물론 그때의 제가 실수를 많이 한 것은 맞지만, 그건 평소의 제 모습이 아니에요!”
스스로를 엘리트라고 주장하는 아기 천사.
반박할 수 있는 것이 한둘이 아니다.
안젤리도 후배는 잔 실수가 잦다고 말했고…
무엇보다 내가 지금 이 녀석을 가지고 노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래? 그럼 앞으로는 일류다운 모습 보여줄 거야?”
“당연하죠!”
“좋아! 그럼 앞으로 실수가 나오면 전부 스스로가 책임지는 거지? 믿는다?”
“네! 맡겨만 주세요! ……어? 그건 좀 다른 이야기지 않나요?…”
좋아.
이걸로 앞으로 실수가 더 나오면 천계에서 보상은 보상대로 뜯고, 아기 천사에게 빚도 지울 수 있게 됐다.
엘리트 천사 만세다.
“으엥? 저기… 방금 한 말 뭔가 좀 이상하지…”
“잠깐잠깐, 나 물어볼게 있어.”
“어… 네… 물어보세요.”
물리기는 허락하지 않는다.
실제로 물어볼 것도 있긴 하고.
내게 있어서 나름 중요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천계에 올라갔을 때 여성 천사는 없고 죄다 남자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거야?”
“아하! 그거 말씀이시군요! 음… 찬영님은 직접 천계도 다녀오신 분이니 말씀드려도 괜찮…겠죠?”
“…그걸 나한테 물으면…”
크흠!
“제가 지난번에 아직 제게는 이름과 성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했었잖아요? 하급 천사는 중급으로 승급할 때 자신의 이름과 성별을 직접 선택할 수 있어요.”
“너는 아직 하급 천사고, 안젤리는 중급 천사인 거야?”
“네! 선배님을 포함한 중급 이상의 천사들은 전부 자신의 이름과 성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에요.”
“뭐야. 그럼 다들 스스로 남자를 선택한 거? 왜 그렇게까지 성비가 불균등해져?”
사실 나도 남자로 살 건지, 여자로 살 건지 물어본다면 고민할 것도 없이 남자를 선택할 것이다.
그래야 여자랑 뒹굴 수 있으니까.
여자를 좋아하는 나지만, 그렇다고 스스로가 여자가 되는 것은 기필코 사양하겠다.
“음… 남자와 달리 여자들은 그… …주기적으로 컨디션이 흐트러지잖아요? 그것도 며칠씩이나…”
“천사들도 월경이 있다는 뜻이야?”
“읏! 일부러 돌려 말한 건데! 한 번에 알아들으셨으면 되묻지 마세요!”
오.
이건 매우 흥미로운 정보다.
‘월경 같은 생리 현상이 있다는 건… 천사들도 성기가 있으며, 여성 천사의 경우 임신까지 가능하다는 뜻이군. …인간과 천사는 종족이 달라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물리적으로 천사와 섹스를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나중에 안젤리랑 좋은 관계가 된 뒤, 같은 침대에 누웠더니 ‘천사들은 성령으로 잉태해서 생식기가 없어!’ 같은 사태가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김칫국을 너무 많이 마시는 것 같지만…
“안젤리는 왜 성별을 여자로 결정 한 거야? 나야 안젤리가 여자인 것이 훨씬 좋지만, 그녀 스스로는 불편한 점이 많을 것 같은데.”
“선배님은 발키리가 되고 싶어 하거든요. 아! 발키리가 뭐냐면…”
“전투의 처녀들, 이었나?”
“맞아요! 신이 가진 가장 날카로운 칼날, 피를 마시고 자라는 전쟁터의 백색 꽃, 차원 변방을 둘러싼 뚫리지 않는 울타리 등등…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우는 숭고한 영혼들! 하아… 너무 멋있지 않나요?”
아기 천사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선망하듯 읊조렸다.
안젤리의 영향을 받아 발키리에 동경을 가진 것이 분명했다.
음…
전투하는 ‘처녀’들이라…
설마 비처녀가 되면 발키리가 못 되는 건 아니겠지?
차마 이 의문을 아기 천사에게 물어보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속보일 테니까.
“너는 선배처럼 되기를 원해왔었지? 그럼 이미 성별을 정해놨겠네?”
“예! 저도 여성을 선택해서 선배와 같은 길을 걸을 거예요! 약속했거든요! 선배가 먼저 발키리가 된 뒤, 제가 뒤따라서 발키리가 되기로!”
오호라?
즉, 이 눈앞의 가지고 놀기 딱 좋은 천사가 나중에는 안젤리 같은 미인이 된다는 뜻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