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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27)화 (27/310)



〈 27화 〉지구

껌뻑 껌뻑.

“어라?”

눈을 뜨니 내 방이다.
내게 익숙하던 자취방이 아닌, 혼자 살기에 쓸데없이 넓은 박찬영의 방.

머릿속은 복잡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깔끔했다.
그렇기에 이변이다.

나는 분명 천계에 올라가서.
안젤리를 만나고.
그녀를 따라 회의장으로 들어갔는데.
정신을 차리니 내 방이다.
마치 순간 이동을 한 것처럼.


“성공한  같네? 기억의 금제.”

옆에서 듣기 좋은 미성이 흘러나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작고 아름다운 얼굴이 보인다.
그림으로 그린듯한, 사진으로 찍은듯한, 조각상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미녀.
안젤리다.

바로 지근 거리에서 안젤리의 목소리가 들려왔음에도 어째선지 나는 깜짝 놀라지 않았다.
마치 무의식적으로 그녀가 여기에 있는 것을 알았던 것처럼.


“안젤리? 네가 왜 여기 있어?”
“음음! 주변에 악마는 없는 것 같고… 그럼… ‘사실 천계는 시스템에 간섭할 수 있어.’”
“뭐?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거야?”

안젤리의 말이 이해가 불가능했다.
마치 ‘하늘보리를 항공 연료로 사용한 가습기’, ‘수족관에서 전기를 충전하는 손 소독제’ 같은 뜬금없으면서도 엉뚱한 소리였다.
술을 잔뜩 먹었을 때나 할법한 맥락이 이해가  가는 말.
또다시 안젤리의 4차원 병이 도진 걸까?


“좋아! 인식의 금제도 제대로 된  같네!”
“…”

이쯤 되니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내가 겪은 일이 단순한 순간이동이 아니라는 것을.


그 밖에 안젤리는 내가 이해하지 못 하는 말을 몇 번을  하더니, 나의 어벙벙한 표정을 보고 완전히 만족하였다.


“끝났어?”
“응! 내 업무는 방금 걸로 끝! 갑자기 상황이 휙휙 바뀌어서 당황스러웠지??”
“뭐… 그렇지.”
“이제는 네 질문에 대답해   있어! 궁금한 것이 있으면 우선 물어볼래?”
“…”

방금까지는 당황했지만, 특성의 덕에 빠르게 감정을 추스른 후, 스스로를 제삼자의 시선으로 보면 너무 뻔한 클리셰였다.

나는 아마도 기억이 지워진 것 같다.
회의장에서 일어난 일과, 지구에 도착하기까지의 기억을 전부.
무엇보다 안젤리가 말한 ‘기억의 금제’라는 단어에서 확신을 얻기도 했고.

‘아. 그러고 보니 어째서 천계로 불려갔는지조차 기억이 안 나네?’

기억을 되짚어가며 점검을 해보니 빈자리가 하나둘씩 발견됐다.
분명 아기천사가 질색한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기는 한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반드시 한가지의 사실을 확인해 봐야 한다.

“첫 번째 질문을 할게. 다른 건 몰라도, 이 질문에는 솔직하게 대답해 줬으면 해. 그래 줄 수 있을까?”

“알겠어! 반드시 사실만 말할 것을 약속할게!”

“좋아. 나는… 나의 의지로 내 기억을 지운 거야? 아니, 적어도 기억을 지우는 일에 나의 동의가 있었어?”

“…와…와아… 상황 파악이 엄청 빠르네? 기억이 지워진 것을 깨달았구나? 나는 분명 어떻게 된 일인지부터 물을 줄 알았는데…”


“어쨌든. 대답은?”


안젤리의 대답을 재촉했다.
나는 이 질문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그렇기에 이 질문의 대답만큼은 사실대로 말해 달라고 한 것이다.

“응! 순수한 찬영의 의지였어! 기억의 금제는 물론, 우리가 권유하지도 않은 인식의 금제를 자발적으로 받겠다 나설 정도로!”

“인식의 금제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스스로의 기억을 지우길 선택했다고 이해해도 될까?”

“맞아!”


“정말이야? 그 말에 거짓은 없는 거지?”


“정말이라니까! 으으…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정말로 너의 의지였어!”

솔직히 증거를 보여주더라도 나는 의심할 수밖에 없다.
시간을 돌리고 기억을 지우는 천계가 과연 증거 하나 조작하지 못할까?
증거랍시고 내 스스로의 입에서 기억을 지우겠다는 말에 동의하는 영상을 보여주더라도 나는 완전히 믿지 못할 것이다.
내 뇌를 만지작거려서 나를 조종했을지 어떻게 아는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인간 하나를 최면 거는 것이, 시간을 돌리는 것보다 훨씬 쉬울  같은 이야기다.


그러나 거기까지 의심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치면 이 세상이 정말로 실제한 세상인지, 내가 기억하는 나의 삶이 조작된 것이 아닌지까지도 끝도 없이 의심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철학적인 인간과 거리가 멀었기에 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에 전혀 흥미가 없었다.

내게 중요한 것은 당장 존재하는 현재의 나.
그렇기에 나는 안젤리의 말을 믿기로 했다.

“믿을게.”
“응! 고마워!”

안젤리의 확답을 들은 뒤 줄곧 불안하던 속을 안심시킬 수 있었다.

강제가 아니라면 괜찮다.
기억이 지워졌다고 한들, 그때의 판단을 내린  또한 나다.
남들에게는 낯이 뜨거워져 절대로 말하지 않겠지만…
의외로 나는 나 자신을 신뢰한다.

‘과거의 내가 최선의 판단을 했겠지 뭐.’


내가 손해를 보는 거래를 했을 것이란 생각은 절대 들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든 악착같이 이득을 보려 하는 것이 내가 아는 나 자신이다.

“좋아. 그럼 가장 중요한 의문이 풀렸으니 다음 질문은 편하게 할게.”
“얼마든지!”
“우선…  지구에 있어도 괜찮은 거야? 아기천사는?”


지금껏 천계와 나의 연결고리는 안젤리가 아니라 아기천사가 도맡고 있었다.
나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안젤리의 성격상, 지금까지 나를 만나러 지구에 내려오지 않았다면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녀가 내려오지 못하는 이유가.


하지만 이제 와서 지구에 내려와 있다니?
원래대로라면 방금의 설명도 아기천사가 맡고 있어야 정상적이다.

“내 후배는 지금 천계에서 내가 하던 업무를 다른 천사에게 인수인계 중이야. 후후후… 그리고 내가 여기 있는 이유? 그건 말이지… 찬영이 천계에게 받기로 한 대가와 관련이 있습니다아!”


“내가 받기로  대가?”


“응! 찬영은 스스로의 기억을 지울 필요가 있음을 인정했고, 얌전히 동의하는 대신 천계에게 자신의 요구를 3가지 들어달라고 요청했어!”


“허! 3가지나?”

“기억을 지운 보상으로 3가지의 작은 소원은 과하지만, 찬영이 전부 합당한 이유를 대어가며 천사장님을 설득했기에 들어주기로 했지!”

오호라.
이거 참, 뜻밖의 이득이다.
발송인은 과거의 나.
수취인은 지금의 나.


과거의 내가 준비한 안배라…
깜짝 선물을 뜯어 보는 기분으로 고맙게 받기로 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나! 천계의 엘리트로 소문이 자자한 바로 내가 찬영을 지켜주기 위해 지구로 강림했단 말씀!”

“지켜준다? 무엇에게서 지켜준다는 거야?”

“음… 지금의 찬영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찬영은 천계에 올라간 순간 ‘천계의 부름을 받은 인간’이라는 꼬리표가 악마의 관심을  것을 깨닫고 있었어. 그래서 그에 대한 대비를 정당하게 요구했지.”


“악마… 그래. 천사가 있으면 악마도 있을 법하지. 그럴듯한 이유네.”

“그뿐만이 아니야. 지금까지 혼자서 찬영을 담당한 아기천사는 천계 측 실수에 대한 보상의 결정권이 없었잖아?”

“그렇지. 원인을 제거 못 하니 자잘한 실수가 계속 튀어나올 텐데, 그때마다 아기천사를 거쳐 가며 천계와 협상하면… 으… 서로 불편할 테지.”

“맞아. 그래서 어느 정도 실권을 가지고 있는 내가 후배와 함께 추가로 담당자가 된 거야. 찬영이 자신과 친분이 있는 나를 담당자로 배정해 달라고 요구했거든. 게다가 담당 인원이 2명이면 실수가 터지기 전에 미리 잡아낼 확률도 엄청 높아질 테고!”


“그야말로 내가 할법한 말들이네.”

“응!  높으신 분들 전부가 입을 꾹 닫고 찬영의 설득에 넘어갔다니까? 덕분에 나는 한동안 천계의 업무로부터 해방됐다 이 말이야! …사실 내가 한 실수가 문제가 되어서  사달이 난 건데, 사과하고 다녀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혼자 편하게 있다니… 마음이 그리 편하지는 않지만…”


“그리 신경 쓰지 마. 나 사실 엄청 까칠한 성격이다? 나랑 마음이 맞는 네가 아닌 다른 담당자였으면 고생  했을 거야. 오히려 다른 천사들도 너를 고마워 할걸?”

암.
남자가 내 담당자가 된다?
가만 안 두지.
무조건 FM대로, 내가 합법적으로 가능한 진상질은 모조리 부릴 것이다.

“음… 찬영 때문에 시간을 세 번이나 돌린 사건은 유명하니까… 다들 꺼려하긴 하더라. 오히려 나를 격려해 주는 눈치였어.”

“그렇지? 너무 마음 상해하지 마. 내 기억에는 없지만, 실수일 뿐이라며? 지금은 잘 처리 됐고.”


“응!… 고마워… 기운이 좀 나는 것 같네. 히히.”

풀죽은 모습도 귀엽다.
귀가 접힌 강아지를 보는 것 같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았기에 이대로 계속 보고 있으면 시간이 하염없이 흐를 것 같다.
정신 차려야지.

“크흠!”


다시 본론으로.
내가 천계에 요청한 것들은 겉보기에 합당하기 그지없다.
아무래도 나 자신을 믿은 것은 현명한 생각이었나 보다.

과거의 내 생각이 눈에 보이듯 읽힌다.


실수에 대한 재빠른 조치를 위한 추가 인력 투입?
원활한 협상을 위한 결정권 보유자의 수반?
악마의 공격에 대한 대비?

전부 핑계다.
사실은 안젤리랑 가까이 지내기 위해서 그런 것이 틀림없다.
그 무엇보다 장담할 수 있다.

“그럼 설마… 안젤리는 오늘부터 지구에 사는 거야??”

“응! 24시간 악마의 위협에서 찬영을 지켜줘야 하니까! 그…그런 의미에서 오늘부터 이 집에서 살기로 했는데… 위에서 찬영에게 미리 허락을 구하긴 했지만, 호…혹시 기억이 지워지면서 생각이 바뀌었다든지?…”


세상에…
나는 스스로의 계략에 전율이 일었다.
이 상황을 전부 계산하여 유도했다고?
도대체   앞을 내다본 거지!

살아오면서 본 모든 여자들과 비교할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천사와 한 지붕 아래에서 동거라니…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다.


그래서 방금 아기천사가 인수인계 중이라고 했구나.
안젤리와 아기천사가 외근을 하는 만큼, 그녀가 하던 업무를 누군가가 이어받아야 할 테니…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안젤리면 당연히 환영이야!”

“그래? 그렇지? 히히! 나도 기뻐! 앞으로  부탁해?”


“응! 혼자 살기엔 집이 쓸데없이 넓어서 빈방이 많거든? 좋아하는 곳으로 골라잡아! 원한다면 내 방이라도 비켜  수…”

“그…그런 민폐를 끼칠  없잖아! 가장 작은 방이면 충분하거든!”


“농담이야.  방의 옆방이 내 방 다음으로 큰 방이니 그곳을 사용하면 되겠다.”

방은 최대한 내 방의 근처에 잡아줘서 자주 얼굴을 마주치도록 했다.
안젤리는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 하나 없이 순수하네. 내게 흑심이 있을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건가?’

얼룩 하나 없는 새하얀 설원을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순수하던 소녀를 어른으로 만드는 것 또한 남자의 역할이 아니겠는가?

나의 고상한 취미  하나가,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캔버스 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발자취를 남기는 것이다.
쓰레기라고?
나 쓰레기 맞다.
앞으로의 일상이 기대되어서 몸이 근질거린다.


“사실, 내가 찬영을 담당하게 된 건 보상이라고 보기 힘들잖아? 악마로부터의 보호는 당연히 해줘야 하는 조치고…  번째부터가 진짜 보상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야!”


아니.
나는 안젤리를 얻은 것이 무엇보다 큰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이 생각은 뒤의 보상이 얼마나 대단하다고 한들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래도 기대가 되는 것이 하나 있다면…

“설마 새로운 특성을 준다든지?”


“아쉽지만 그건 아니야.  후배가 말했지만, 너에게 첫 번째 특성을 준 것도 정말 예외 중 예외였다고?”


“역시 그런가.”


거참 특성 한번 얻기 더럽게 빡세네.
사실 나도  기대는 하지 않았다.
특성의 유용함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
제정신이면 그런 것을 쉽게 넘겨주지 않겠지.

갑자기 안젤리가 나를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왜 갑자기 저런 눈빛을 보이지?
설마 내 새까만 흑심을 눈치챘나?
하지만 눈치를 보니 그런 것은 아닌  같다.


“으음… 찬영이 요구한  번째 보상은 특별한 ‘스킬’을 주는 것인데… 혹시 방금 말이 이해가 가?”
“응? 당연히 이해가 가지? 스킬을 받는  왜?”
“…휴. 다행히 이건 인식의 금제에 안 걸렸나 보네.”

으음?
저 말을 들으니 무언가 떠오를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의심스러운 것은 없었다.


“앗! 부작용은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너무 깊게 생각하지는 마, 찬영.”
“음… 알겠어.”

아마 내가 천계에서 받은 조치와 관련된 무언가인가 보다.
괜히 건드릴 필요는 없겠지.
이미 끝난 이야기니까.

“그나저나, 내가 받는 스킬이 뭔데?”


안젤리는 내게 대답하는 대신 자신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곧,  눈앞에 시스템  하나가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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