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25)화 (25/310)



〈 25화 〉천계

“아까 네 후배한테 조언을 해준 것도 안젤리 너야? 나름대로 머리 굴린 건데, 다 들켰나 보네.”


“쿡쿡! 찬영은 항상 그런 잔꾀가 많으니까! 그래서 재미있단 말이야? 원래 몸의 주인이던 박찬영 말고, 네가 우리가 만든 시스템을 가져가서 좋아!”


“…크흠… 좋게 봐주니 고마워. 최근 나도 생각보다 괜찮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몸이 바뀐 것이.”


“헉! 그러고 보니 몸이 바뀐  너한테 별로 좋은 얘기가 아니었지?  그대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니까… 미안해… 내가 배려가 없었네…”

“하하! 아니야. 나도 이제 와선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대부분이니까. 주로 안젤리 네가 열심히 만들어  이 시스템 덕에.”

“마…마음에 들어? 그치? 엄청 열심히 만들었다?”

“쓰면서 확실하게 느꼈지. 네 후배한테 귀띔으로 들었는데, 제작하는 과정이 전혀 평탄치 않았다던데?”

“맞아 맞아! 정말, 말도  한다니까! 무슨 일이 있었냐면…”

나는 최대한 집중해서 대화를 이끌어나갔다.
목표는 오로지 안젤리와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다.

어떻게 하면 끊김 없이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을까?
간단하다.
상대방의 말 중, 새로운 정보를 잡아낸  그것을 이용해 새로운 화재를 이끌어나가는 것을 반복하면 된다.
예를 들어 방금 안젤리가  ‘우리가 만든 시스템’이라는 말에서 ‘시스템을 만드는 과정’같이

이렇게 한 번의 끊김도 없이 대화를 이어나가다 보면 저절로 ‘마음이 맞는다’라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돌려지기 전에도 이런 식으로 안젤리와 친해졌을 것이 분명하다.


특히 상대방이 노력한 것, 시간을 쏟아가며 이룬 것을 칭찬하면 그 효과는 극대화된다.

공부가 특기인 사람에겐 ‘어! 내 친구도 그 자격증 시험 봤는데! 올해 유독 시험이 어려웠다고 엄청 앓는 소리 하더라고. 와… 나는 다들 어렵지 않게 따는 한국사 자격증 취득에도 애먹고 있는데, 대단하네!’라며 가벼운 칭찬을.

운동선수에겐 ‘그 운동 종목은 트레이닝할 때 주로 어떤 종류를 하나요?? 역시 하체? …오! 대퇴직근이라면, 허벅지 쪽 근육이 맞죠? 예상이 맞았나 보네요! 사실 요즘 저도 헬스장 가서 하체 단련만 죽어라 하고 있거든요. 실례가 안 된다면 조언 좀 구해도 될까요?’라며 상대의 전문지식을 뽐낼 기회를.

 쓰는데 지친 작가에게는 ‘작가님 재밌어요!’라는 선플을… 이건 아닌가?
어쨌든.


중요한 건 칭찬을 하는 도중에도 나와의 공통점을 찾아 엮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상대방이 자세하게 알고 있는 전문 분야를 흥미 있다는 듯이 들어주면 그것만으로 호감이 팍팍 쌓인다.

지금처럼.


“…어떻게 하겠어? 고치라는데 고쳐야지… 그렇게 95% 이상 완성된 시스템을 이거 변경해라, 저거 바꿔라, 7번이나 뜯어고친 끝에 하는 말이 뭐였는지 알아?”
“뭐였는데??”
“그냥 처음에 만든 거로 하자더라고! 믿을 수 없지 않아? 나랑 후배가 몇 달간 밤새워가며 일한 결과물이 쓰레기통에 박혔을 때의 상실감은…! 으으…”
“…세상에… 내가 천국을 욕하자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그분은 유달리 까다로운 것 같네…”

절레절레…

나는 질색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직접적으로 그녀의 상사를 욕하면 혹시라도 불쾌해 할까 봐, 표정으로 욕을 대신했다.

 왜, 내가 나의 동생이나 형·누나를 욕하는 건 괜찮지만, 남들이 욕하는 것은 불쾌하지 않은가?
설령 내가 먼저 욕하기 시작했더라도 미묘하게 불편한 것은 마찬가지다.
굳이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지 않아도, 표정으로 욕을 하면 충분한 호응이 된다.

“정말! 해도 너무했어!”


끄덕끄덕!

과연 표정만으로 나의 의도가 충분히 전해졌는지, 안젤리는 흥분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매번 느끼는 건데… 찬영님이 이렇게 친화력이 좋은 분이셨나요?…”
“아니, 나도 이런 적은 거의 없지! 그냥 안젤리와 마음이 잘 맞는  같아.”


솔직히 평범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비위를 맞출  있긴 하다.
그러나 안젤리가 우리의 대화를 똑똑히 듣고 있다.

첫 만남부터 내게 친밀감을 팍팍 느끼고 있는 안젤리다.
여기서 더 친해지기 위해서…
안젤리 본인만이 나를 특별하게 여기는 것이 아닌, 나 또한 안젤리를 특별하게 여기고 있음을 어필했다.

뭐, 지금 당장은 특별하게 여긴다고 한들 고작 ‘마음이 잘 맞는 친구’ 정도 겠지만…
작고 작은 호감이 쌓여서 애정이 되는 것이다.
남녀 사이의 영원한 우정?
그딴건 없다.


“그치? 신기해! 누군가와 이렇게 빠르게 친해진 적은 처음이야! 천사들이랑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왠지 모르게 안젤리와의 잡담은 재밌는 느낌?”
“맞아 맞아! 뭔가 찬영과의 대화는 즐거워! 으, 이 느낌이 그리웠어… 찬영이랑은 대화할 기회가 엄청 적었단 말이야…”


신나하는 안젤리를 보자 집중해서 대화를 유도한 보람이 있는 듯 해 가슴이 뿌듯해진다.

머리가 좋은 것과 별개로 천사들은 다들 순수한  같다.
적어도 내가 만나본 천사들은 그랬다.


“…찬영님… 왜 선배님에게는 평소의 저를 대하듯 하지 않으신 건가요? 저는 맨날 괴롭히고, 놀리고, 화나게 만들면서! 제게도 방금처럼 친절하게 대해 주세요!”
“에이, 아까 내가 말했잖아! 찬영이 너한테 장난을 치는 건 애정표현이라니까? 그렇지 찬영?”
“하하핫!”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은 웃음으로 넘겼다.
미안하지만 나의 친절함은 여자 한정이다.
아기 천사의 평등한 대우를 해달라는 요구는…
미래에 안젤리처럼 입이 벌어질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 천사가 되는 날 고려해주도록 하겠다.


“곧 회의장 도착이야! 찬영은 인간이니까 고상한 예법은 신경 쓸 필요 없어. 상식상의 행동을 한다면! 찬영은 똑똑하니까 무슨 뜻인지 알지?”

“응. 곤란하게 만들지 않을게. 안내 고마웠어 안젤리.”

“내 일인데 뭘. 헤헤. 들어가면 딱 봐도 높아 보이는 천사들이 질문을 할 거야. 결과가 나쁘더라도 찬영을 해치기 위한 게 아니니까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는 말아줘… 찬영을 천계로 부른 이유는 찬영을 지키기 위함이니까.”

“혹시 안젤리도 같이 들어가?”


“나도 관계자이니 같이 들어갈 거야. 물론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하지만… 그래도 지켜보고 있을게. 힘내!”


나를 보고 작게 웃는 안젤리.

솔직히 말하자면 안젤리와 내가 연인이  확률은 어마어마하게 낮을 것이다.
그녀는 천사고 나는 인간이다.
신분과 종족의 격차 이전에 그녀와 나 사이의 물리적인 거리가 너무나 멀다.


지상과 천계.
 그대로 ‘차원’이 다른 수준이다.
오늘이 지나면 만나는 건 고사하고 대화조차 나눌 기회가 거의 없겠지.
아까 그녀가 스스로 말하기를 나와 대화할 기회가 적다고도 했고.


하지만 만나지 못한다고 한들, 나와 안젤리 사이에는 아기천사라는 고리가 있다.
또한 아기천사가 놀러 오듯 지상에 나타나는 걸 보면…
천계와 지상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오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떡각이 1%라도 있는 한,  전력을 다해 시도할 것이다.
실패하면 목숨이 날아가는 것도 아닌데, 시도 안 하면 병신이다.

탁!


안젤리가 움직이던 발을 멈추었다.
딱 봐도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방의 앞에서.

“여기가 회의장이야. 내가 먼저 들어갈게.”


끼이이익…


안젤리는 내 키의 세 배가 넘는 거대한 크기의 문을 힘들이지 않고 열었다.
그녀가 강한 건지, 문에 마법적 조치가 되어 있는 건지 몰랐지만, 내게 깊게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안젤리가 망설이지 않고 걸어 들어갔기 때문이다.

“저도 선배님 곁에 있을게요. 따라 들어오시면 돼요.”

이어서 아기천사가 그녀의 뒤를 따라가자, 나도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터벅. 터벅.


회의장 내부는 밝았다.
중심에 거대한 원형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고, 그 주위를 빼곡한 의자가 둘러쌌다.
저 외각의 빼곡한 의자들이 객석인가보다.


“천사장님. 인간 박찬영이 도착했습니다.”

안젤리가 공손히 나를 소개했다.
그녀가 말한 ‘딱 봐도 높아 보이는 천사들’을 향해.

건물 밖에서 봤던 남자 천사들과 안젤리들은 모두 한 쌍의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안에 있는 인물들은 모두  쌍 이상을 가지고 있었고, 안젤리가 ‘천사장’이라고 부른 인물은 4쌍의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확실히 8장의 거대한 날개를 달고 있으니 겁나게 높아 보인다.
어렴풋이 휘광 같은 것도 보이는 것 같고.


‘근데 왜 다 고추밭이냐. 젠장.’


고위 천사라길래 혹시 여자면 안젤리보다 예쁘려나, 기대 좀 했더니 아주 대차게 배신당했다.
맨 앞의 천사도 남자. 두 번째 천사도 남자. 남자. 남자…
거의 남자밖에 없었다.

남자와 여자의 성비가 9:1의 수준이었다.
젠장.
‘천사’ 하면 균형의 수호자잖아?
그럼 성비의 균형도 맞춰야 하지 않나?


그러고 보니 건물 밖에서도 안젤리를 제외하고는 여자 천사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파리처럼 날아다니는 것들은 전부 남자 천사였지.
나는 천계에서도 남자 천사들만 외근직 돌리고, 여자 천사들은 내근직으로 꿀 빠는  알았지만…
그게 아니라 그냥 여자 천사 자체가 적나 보다.

평소에 여성 할당제는 병신같은 소리라고 생각해 온 나다.
그런데 이곳에는  필요할 것 같다.
주로 내 안구 건강을 위해.

‘천사들도 체취가 있겠지? 안젤리는 좋은 향이 나던데.’


남자만 가득 들어찬 이 밀폐된 방.
착각이겠지만, 내 코에 홀아비 냄새가 맴돌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이나 천사나 고추들은 다 똑같지 뭐.

천사들에게 건넨 안젤리의 공손한 말은 무시당했다.
단아한 안젤리의 목소리가 울리기에는 회의장 안이 지나치게 소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역시 기억을 지워야 해! 변수를 놔둘 수는 없어!”


“너무 강경책이지 않은가? 기억의 금제는 원칙상 본인의 동의가 필요해.”

“그렇게 안이하게 처리할 안건이 아니야! 적다고 한들, 확실히 존재하는 확률의 무게를 생각해!”


“발언의 금제 정도면 적당하지 않나? 지상의 간섭을 최소로 줄이며, 인간의 의사를 묵살하지 않는 최선의 조치지.”


“놈들이 인간을 납치해서 기억을 읽어 낸다면? 이미 늦었어! 천계에 올라온 인간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는 건 시간 문제! 그것만으로 흥미를 느낄 놈들이 많아. 네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없을 텐데?”

“으음… 아니,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못했었군…”

그들은 회의장에 들어온 나를 신경조차 쓰지 않고 격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내게 위험한 일은 없을 거라더니, 기억을 지운다는  살벌한 이야기가 오갔다.
그때, 3쌍의 날개를 가진 나이들어 보이는 천사와 눈이 마주쳤다.

“음? 당사자가 왔구먼.”
“쳇. 후딱 잡아서 기억을 지우고 풀어주자고. 괜히 마음 아프게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나?”
“그래. 괜히 나쁜 짓 하는  같아 마음이 불편하군. 기억을 지우는 것은 금방이니 어서…”

“잠깐, 허허… 아직 결정된 것이 아니지 않나? 다들 성급하게 굴지 않는 게 어떤가?”


아주 지들끼리 다 해먹고 있었다.
적어도 내게 지금 무슨 일이 발생한 건지 간단히 설명이라도 해줄 줄 알았는데, 그조차 없었다.


“우선 인간의 의사를 듣는 것이 중요하다네.”
“필요 없다니까! 일일이 동의를 구하기에는 시안이 너무나 중요!…”

“죄송한데, 저와 관련된 일이니 제게도 발언권을 주실 수 있습니까?”

이대로 얌전히 기다리면 며칠이고 날 세워둔 채 회의할 기세였기에 끼어들기로 했다.


“음! 일단 그가 할 말이 있다고 하니 듣는 것이 어떠한가?”
“…어차피 기억을 지운다고 하면 울며 빌거나, 화낼 것이 분명한데…”
“펜릐엘.”
“알았다고. 나라고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 기껏 총대 멨더니… 젠장, 마음대로 해.”

이름이 특이하네…
펜릐엘이라 불린 신경질적인 천사는 표정이 아주 불만스러워 보였다.
또한 작은 목소리로 ‘다들 속으로는 강제적인 기억 금제에 동의해 놓고는…’, ‘착한 척하느라 나서지 못하는 걸 기껏 내가 앞장섰더니…’, ‘나만 나쁜  됐잖아…’ 라며 툴툴대었다.


저 말은 사실이다.
펜릐엘의 ‘강제 기억 소거’ 의견에 명확하게 반대 의사를 밝히는 천사는 눈앞의 늙어 보이는 천사가 유일했다.
이 늙은 천사를 제외하고는 암묵적으로 펜릐엘의 의견을 동의하고 있었다.
펜릐엘이 입을 열 때마다, 다른 천사들은 거들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으니까.

“그럼… 일단, 제게 문제가 어떤 문제가 발생했는지 알아야겠습니다. 그것부터 알아야 제가 명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으니까요.”


“…자세히는 말하지 못하지만, 자네의 생명을 넘어서… 자칫하면 차원 전체가 위험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다네.”

“이봐, 어차피 기억의 금제를 걸거나, 발언의 금제를 걸 텐데 그냥 속 시원하게 말해 주는 것이 어때? 계속 이런 식으로 돌려 말하면 시간이 얼마나 필요할지 모르잖아?”

“확실히…”


늙은 천사는 펜릐엘의 말에 고민에 잠겼다.
그것도 잠시,
 천사의 입이 열렸다.


“알겠네.  회의장을 나갈 때까지, 또는 1시간이 지나기 전까지 내게 걸려있던 발언의 금제를 일시적으로 해제하도록 하지. 이를 허가 해 주겠는가?”


“동의.”
“동의한다.”
“예. 동의합니다.”


늙은 천사는 발언의 금제라는 것이 확실히 해제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선지  번 허공을 향해 입을 뻐끔대었다.
곧 확신이 든 천사가 내게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