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천계
이루지 못한 것이 산처럼 쌓인 한 많은 삶.
안식을 얻다…
그래도 천국 정도면 성공한 인생 아닌가?
천국에 갈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사람이 차고 넘치는데.
당연하지만 진짜 죽은 건 아니다.
천국에서 볼일이 끝나면 다시 지상으로 내려갈 것이다.
이제는 관광하는 기분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천국에 올라온 것은 색다른 경험이니까.
“후아아아아… 찬영님이 눈치가 좋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은 지금이 처음이에요오… 진짜진짜진짜 다행이다…”
“뭐어. 그 정도면 아슬아슬하게 세이프려나? 찬영이 잘 대처했지. 고맙게도.”
그래서 천국을 직접 올라온 내가 말해주자면, 생각보다 천국은 별거 없다.
천국의 묘사는 간단하게 한 줄로 설명하겠다.
다른 엄청나게 중요한 얘기가 있으니까.
“아니 잠깐, 따지고 보면 이 일도 찬영님이 눈치가 좋아서 발생한 일이 아닌가요?… 으으…”
“애초에 내가 눈치챌 원인을 만들면 안 됐지… 미안해. 역시 이건 내 잘못인 것 같아…”
“아…아니에요! 선배님! 선배님은 아무 잘못 없어요! 다 제가 못나서…”
천국.
무지개 떠 있고, 구름 떠 있고, 커다란 건물 있으며, 날개 달린 (남자)천사들이 파리마냥 돌아다닌다.
끝.
그럼 중요한 얘기가 뭐냐고?
당연히 여자 얘기다.
눈앞의 내 취향의 한가운데에 적중하는 누님을 살펴보자.
우선 가장 눈에 띄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금발.
머리카락이 길면 그 끝이 갈라지며 상하기 쉽고, 또 윤기가 사라진다.
단발의 여성들의 머리에 유독 생기가 있어 보이는 이유다.
그러나 이 비단 같은 머릿결은 그렇지 않았다.
결은 결대로 엉키지 않고 살아있으며, 손에 머리칼을 쥐었다 놓으면 손바닥에 꽃향기가 남아있을 것 같은 압도적인 비주얼이다.
과연, 인간이 아닌 천사인 것을 실감하게 된다.
피부가 희다.
단순히 희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마치 가재들이 뛰노는 맑고 깨끗한 개울물을 보는 것 같은 피부.
스트레스와 피부 트러블과는 다른 세상,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은근 대담하게 앞섬을 노출한 상의의 틈 사이 보이는 가슴은…
내 빅데이터에 의하면 저건 D컵이다.
꽉 들어찬.
가슴의 모양을 잡아주는 브래지어가 없음에도 저렇게 아름다운 형태를 유지하는 가슴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내 보잘것없는 손에 저 가슴을 담는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분명히 믿을 수 없는 탄력을 보일 것이다.
솔직히 나는 얼굴의 미(美) 중, 80% 이상은 눈이 얼마나 예쁘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보통 사람들은 아무리 못생겨도 눈이 이쁘면 괜찮다는 평을 듣고,
아무리 예뻐도 눈이 못생겼으면 별로라는 평을 한다.
그래서 이분의 눈이 어떻게 생겼냐고?
5,700자 이상으로 구구절절하게 표현하고 싶지만, 참겠다.
그저 하늘을 그대로 담은 듯한 푸른색을 띤 빠져들 것 같은 눈이라고만 말하겠다.
금빛의 기다란 속눈썹과 작고 앙증맞아 손가락으로 쿡 눌러보고 싶어지는 코.
손으로 흩으면 생크림 케이크처럼 뭉개질 것 같이 부드러워 보이는 볼에는 미소를 지을 때마다 보조개가 드러났다.
나는 여자가 웃는 모습이 좋다.
특히 저렇게 단아한 입술을 가진 미인이 호선을 그리면 보는 나까지 기분이 좋아진다.
하다못해 팔다리의 길이, 굵기, 형태마저 무엇 하나 흠을 잡을 수 없었다.
사소한 것까지도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난 이분이 ‘천사가 아니라 사실은 미의 여신이었습니다’라고 해도 놀라지 않고 믿을 것 같다.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금발 벽안의 미녀.
그냥… 그냥…
한마디로 개쩔었다.
아까 지상에서 농담으로 생각한 요청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싶다.
제발 담당 천사 이 분으로 바꿔주세요…
“천사야.”
“네?”
“너 커서 이렇게 돼라.”
“헤헷! 찬영님도 선배님의 훌륭함을 눈치 채셨나 봐요? 저도 선배님이 저의 롤 모델이에요! 꼭 선배님처럼 훌륭한 천사가 될 거예요!”
“그래… 반드시 그래야 한다…”
“뭐…뭐야, 눈앞에서 그렇게 칭찬해대면 부끄러운데…”
스윽…
살짝 붉어진 얼굴로 머리를 귀 뒤로 넘긴다.
그 덕에 지금껏 머리로 가려진 가느다란 목선이 약간 드러났다.
새하얗고, 가냘픈.
저거 알고 하는 거지!
지금 나 유혹하는 거 맞지?!
눈나 나 쥬지가 이상해…
아니, 농담이 아니라 방금 목선 때문에 진짜 커졌다.
시발 눈치 채이면 좆되는 거 아니야?
나는 티가 나지 않게 허리를 앞으로 굽혀서 최대한 발기를 숨기고자 노력했다.
“아기천사한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엄청 믿음직스럽고, 똑똑하신 선배 한 분이 계신다고.”
깜빡깜빡!
내 말을 들은 천사의 눈망울이 나를 향해 깜빡거리더니, 곧이어 보기 좋은 웃음으로 바뀌었다.
“아하하핫! 엄청 웃겨! 찬영은 매번 그 말로 나랑 대화를 시작하는구나?”
“매번?… 저를 알고 있나요? 제 생각에는 초면인 것 같은데…”
내가 이름을 알려주기 전에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은 놀랍지 않다.
아기천사의 상담을 받으며 내 이야기를 들었을 테니까.
그러나 그녀는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그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내가 그녀를 한번 본 뒤 잊었을 리는 없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예쁜 여자에 대해서는 절대로, 절대로 잊지 않으니까.
“허억! 설마 나를 잊어버린 거야? 찬영! 실망이야… 흑흑…”
갑자기 그녀가 깜짝 놀란 몸짓을 하며, 고개를 돌리는 동시에 손등을 눈에 대어 우는 척을 했다.
우는 것이 아니라 우는 척이다.
깜짝 놀란 몸짓도 너무 과장되어서 연기인 것이 확실하게 티 났다.
아기천사가 연기를 못하는 건 그 선배에게도 원인이 있나 보다.
‘…왜 저런 삐그덕 거리는 몸짓 하나하나가 전부 귀여울까?’
음…
귀여운 건 귀여운거고…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는 거지?
“어… 그… 죄송합니다?…”
“푸훗… 푸하하! 그리 어색하게 받지 마! 내가 이상해 보이잖아?”
찰싹!
아담한 손이 내 어깨를 아프지 않게 치고 지나간다.
후…
안타깝다.
그녀는 세계를 뒤흔들 미모를 가졌지만, 그에 어울리는 청초한 성격은 가지지 못했나 보다.
방금의 행동과 말로 그녀의 성격을 유추해보자면… 그녀는 약간 사차원이었다.
그래도 괜찮다.
극도의 얼빠인 나는 예쁘기만 하면 별난 성격 정도는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
그녀 정도의 외모면 차원을 위태롭게 만들어도 용서할 수 있다.
“으으… 표정을 보니 여기서 더 놀리면 정말로 머리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오해하겠네… 알겠어. 궁금해하던 것 말해줄게!”
내가 궁금해하던 것?
“응! 내 후배한테 들었겠지만… 찬영 때문에 시간을 돌린 적이 있다고 했지?”
아.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녀가 나를 왜 알고 있는지.
시간을 돌리기 전, 나는 지금 백하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 새끼를 족치기 위해 SNS 테러, 대학교 내 정치 등 수많은 시도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몇 번 성공해 시간을 돌렸고.
내겐 기억이 없지만, 아기 천사는 시간을 돌리기 전의 기억을 전부 가지고 있었다.
아기천사의 선배인 그녀가 기억이 없으리라 생각하긴 힘들었다.
그리고 시간을 돌릴 정도의 일이면 분명 그 원인이 되는 내가 이 천계에 한 번 이상 올라온 적이 있었겠지.
정말로 나를 만난 적이 있구나.
과거? 미래? 아무튼 시간을 돌리기 전에.
“와. 한마디만 했는데 전부 깨달은 거야? 하긴, 이래야 내가 아는 찬영이지.”
“저랑… 과거에 친했습니까?”
“친하냐고오? 글쎄에에… 음…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해도…
나는 기억이 없으니 잘 모른다.
하지만 그녀와 나는 친하게 지냈을 가능성이 무척이나 높다.
그녀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나였다면 분명 그녀와 친해지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 했을 테니까.
“모르겠어? 힌트… 줄까? …적어도 이런 장난 할 정도의 사이였다? 에잇!”
와락!
“!!”
깨달았을 때는 내 품에 그녀가 안겨있었다.
내 키가 작아 그녀가 내게 안겨있다기보다는 내가 그녀에게 안겨있는 모양새였지만, 내게 안겨 온 것은 확실히 그녀였다.
몸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살결과 살결이 닿는 부분이 부드럽다.
너무나 달콤한 향기가 난다.
나는 전혀, 정말로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표정 관리가 완벽히 깨지고 말았다.
“아…”
곧 그녀가 내게서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아쉬운 마음에 탄식을 뱉고 말았다.
포옹은 1초가 약간 넘는 순간에 불과했지만, 너무나 강렬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아하하핫! 이상한 얼굴! 찬영의 당황한 표정은 진짜 보기 힘든데, 이것만으로 시간을 돌릴 가치가 있다니까?”
“그럴 리가 없잖아요… 으으… 그 현명하던 선배님은 어디 가고 이런 얼빵한… 이래서 찬영님을 선배님이랑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거라고요… 왜 선배님은 찬영님 앞에만 서면 이렇게…”
“엄청 반가워서 그래! 나도 후배 앞에서는 편하게 대하잖아?”
“몇십 년을 함께 손발 맞춰온 후배보다, 일수로만 따지자면 며칠 안 지낸 사람을 더 좋아하면 제가 무슨 심정일까요!”
“그…그렇지 않아! 나는 둘 다 똑같이 좋아해!”
“그걸 믿으라고 하는 소린가요?…”
아무래도 내 생각보다 그녀와 나의 사이는 좋았나 보다.
방금 건 손에 꼽을 정도로 친한 이성 친구가 아닌 이상, 할 수 없는 장난이다.
사람과의 관계 중 내가 주도권을 빼앗긴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상상치 못한 의표를 찔린 덕에 완벽히 당했다.
그것도 아주 기분 좋게.
“그러고 보니 저는 천사님의 이름을 모르네요. 실례가 안 된다면 이름을 물어도 될까요?”
“…아! 설마 우리 아직 통성명도 안 했었어? 우와… 새…생각해보면 찬영 입장에서는 이름도 모르는 초면의 상대가 친한 척 하며 안긴 건가? 내가 너무 신냈네… 으으…”
“선배님은 그걸 지금 눈치채신 건가요… 하아…”
이 사람이 정말 아기천사에게 조언을 해줬던 선배가 맞나?
내 머릿속을 전부 꿰뚫었기에 분명 똑똑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쪼…쪽팔려…”
머리를 감싸고 쪼그려 앉아 있는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었다.
“으으… 나는 찬영의 담당 천사의 파트너인 안젤리야. 미안, 당황했지? 너무 반가워서 그랬어…”
“반갑습니다. 안젤리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꾸벅.
“어?… 어라? 어라아?… 어… 잘… 잘 부탁해…”
안젤리에게 편하게 말을 놔도 그녀는 반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일부러 극존칭을 사용했다.
나를 당황하게 한 것을 약하게 복수하기 위해서.
그녀의 기억 속, 나는 편하게 말을 주고받는 친한 상대였을 것이다.
그렇게 일방적인 친밀감을 보낸 상대가 본인에게 거리감을 느끼며 극존칭 대우를 하자 약간 충격받은 눈치다.
“어… 어떡하지?… 후배야… 분명 지난번과 지지난번에는 내 이름을 안 뒤부터 편하게 반말을 했는데… 왜 이번에는?…”
“…아까 선배님 스스로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찬영님은 선배님이 초면이라고요?… 그렇게 스스럼없이 장난치면 당연히 부담스럽죠…”
“역시 그렇지?! 으아… 망했어… 딱 5분만 시간 돌릴까?”
“천사장님이 그런 이유로 시간을 돌리겠다는 걸 허가해 줄 리가 없잖아요!”
“알아… 나도 그냥 해본 말이야…”
표정이 휙휙 바뀌는 게 보는 맛이 있다.
어떤 표정을 하더라도 아름답기에 더욱.
장난은 여기까지 하기로 했다.
안젤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기껏 그녀가 내게 품은 호감이 줄어들 수도 있으니까.
“안젤리? 이렇게 말하는 게 더 편한 거야?
“앗! 그…그렇긴 한데… 억지로 할 필요는…”
“나야 편하게 얘기하면 좋지 뭐.”
“…그래?”
풀 죽어 있던 안젤리의 얼굴에 화색이 깃든다.
그녀는 나와 대화를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방금의 사건 때문에 내게 쉽게 말을 건네지 못하는 듯했다.
방금처럼 과도하게 친한 척을 하면 내가 싫어할까 봐 명백히 조심하고 있는 것이겠지.
이렇게 나의 눈치 보고 있는 안젤리를 감상하는 것도 좋았지만, 안절부절못하는 그녀를 위해 내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주기로 했다.
“아기천사와 너는 선후배 관계인 거야?”
“앗! 으응! 사수와 부사수, 선배와 후배, 파트너와 파트너… 그런 관계야!”
“그럼 서로 가끔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 다시 한번 잘 부탁해.”
“나야말로 내 후배 잘 부탁해! 가끔 잔 실수가 있긴 해도… 귀엽지 않아? 히히”
안젤리는 내가 말을 걸어줘서 기쁜지, 해맑게 웃음 지으며 아기천사의 빵빵한 볼을 잡아 늘였다.
아기천사가 그리 싫어하지 않는 것을 보니 서로 간 자주 했던 애정표현의 일종인 것 같았다.
“스…슨부에늼!…”
그러나 내 눈에는 아기천사가 보이지 않았다.
장난을 치며 순수하게 웃는 안젤리가 미치도록 귀여웠다.
핸드폰이 있었다면 쪽팔림과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네가 웃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도 괜찮냐고 허락을 구해버렸을 정도다.
“응! 귀여워! 엄청 귀엽다!!”
“봐봐! 네가 말한 것과 달리 너를 좋아하잖아? 평소에 장난이 많은 건 찬영의 짓궂은 애정 표현인 거야. 방금 귀엽단 말에 얼마나 진심이 듬뿍 담겨있는지 너도 알았지?”
“그으으… 즈브그 흔 믈이 으닌 긋 긑은드…”
해석하자면 ‘저보고 한 말이 아닌 것 같은데…’다.
볼이 잡혀 아기 천사의 말이 늘어진 것이 다행이다.
덕분에 안젤리가 알아듣지 못했으니까.
터벅터벅.
아.
미녀와 친분을 쌓는 것에 비하면 별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지금 우리는 안젤리의 안내를 받으며 회의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처음 천계에 도착해 긴장해 있는 내 앞에 안젤리가 나타났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표정을 굳힌 내게 불이익은 없을 거라며 안심시켜주었다.
그 덕에 지금 나는 크게 걱정을 하고 있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내가 뭘 잘못한 것도 아니다.
아기 천사가 전력을 다해 막은 덕에 발언도 입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단순히 추측뿐인데, 그 정도 가지고 벌을 받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것도 천국에서.
‘무엇보다…’
대화가 통하는 상대면, 스스로가 호구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오히려 내가 호구를 잡았으면 잡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