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지구
“야. 네 선배라는 분, 천사지? 그 천사랑 내가 대화 하는 것이 빠르지 않을까? 좀 불러와 봐.”
“앗! 절대 안 돼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찬영님 만큼은 절대로 못 만나게 할 거예요! 큰일이 난다고요!”
갑자기 천사가 나를 무척 경계하는 눈으로 쳐다봤다.
웬 경계?
그리고…
나랑 그 천사가 만나면 큰일이 난다고?
“뭐야. 나랑 네 선배 상성이 안 좋아? 서로 마주치면 엄청 싸우는 양극 같은 성격이야?”
“으… 그 반대인데… 아무튼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뭐, 저리 반대하는데 강요하기도 뭐하다.
“그럼 준비한 보상은? 설마 없는 건 아니겠지?”
없다고 하기만 해봐라.
나는 천계가 질색할 만큼 진상부릴 준비가 충분히 되어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의 걱정은 기우로 끝났다.
“후우후우… 있습니다. 보상. 그렇게 노래를 부르시는 보상, 드릴게요!”
아직 분노가 덜 가라앉았는지, 내게 씩씩대면서 말을 했다.
볼 한번 꼬집어 보겠다고 하면 화낼 게 분명하니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오…
화난 건 화난 거고, 일은 일이란 건가?
역시 착하지만 쓸모없는…
내가 아는 천사였다.
“화 좀 가라앉혀. 나도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인 행동이었다고. 악의로 한 짓은 아니잖아? 어떻게, 마실 거라도 줘?”
“후우… 예. 좀 주시겠어요? 전 분명 천사인데, 왜 이렇게 속이 탈까요…”
덜컹!
나는 냉장고를 열어서 안에 있는 마실 거리를 꺼내려 했다.
하지만 냉장고는 비어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여기 내 집이 아니었지? 미안하다. 마실 게 없는 것 같은데? 차가운 수돗물이라도 줘?”
“이 인간이…!”
자신을 놀리는 줄 안 천사는 다시 분노했고, 나는 다시 달래주었다.
물론 화는 금방 풀렸다.
천사가 이래서 좋다.
본성이 착한지 사과만 꾸준히 하면 화를 금방금방 풀거든.
절대 나는 천사를 호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튼 그렇다.
그나저나 청소 직원이 마실 것까지 채워주지는 않나 보네.
하긴, 거기까지 바라는 것은 너무 과하다.
이미 면도기 같은 일회용품을 챙겨주는 정도로 충분히 밥값을 한다.
청소업체의 고용 비용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만.
“잡담은 그만하고, 본론으로 돌아가자고. 생각해온 보상이란 것이 뭔데?”
“’잡담’ 인가요…”
찌릿!
“후우… 아무튼. 이게 저희가 준비해온 보상이에요.”
천사는 허공에 아주 작은 웜홀을 열어, 그 안을 뒤적였다.
소설, ‘테라포밍’에 있는 지구와 연결된 웜홀의 축소판처럼 보였다.
손을 웜홀에 넣었다 뺀 천사의 손에는 작은 물건이 들려있었다.
둥근 플라스크 모양의 유리병.
그리고 그 안에 든 붉은 색의 액체.
판타지 소설 짬밥, 게임 짬밥 좀 먹은 사람이면 그 정체를 쉽게 예측 가능했다.
“포션?”
“예. 포션이에요.”
천사는 내게 포션 한 개를 넘겨줬다.
포션이라…
어느 판타지 세계관에서도 ‘예비 생명’이라고 불리는 대단한 물건인 건 알긴 하지만…
“분명 유용하겠지만… 내게는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은데? 이거 아직 소설 속으로 못 가져 가잖아. 지구에서는 쓸 일도 없는 포션을, 그것도 고작 1개는 전혀 수지에 안 맞는데…”
다칠 일이 많은 소설 속에서 받는다면 쓸모가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아직 지구의 물건을 소설 속으로 물건을 가져가는 기능을 해금하지 못했다.
한동안 이 포션은 지구에서밖에 쓰지 못한단 것이다.
뭐…
지구에서도 누구나 상상 가능한 사용 방법이 있긴 하다.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다친 재벌 관계 인물에게 거액을 받고 파는 것.
그런 인물을 찾는 것부터가 문제이긴 하지만, 70억 인구 중 고작 이 정도 조건의 인물이 없을 거라 생각하기 힘들다.
그런데 그건 멍청한 짓이다.
그렇게 할 거였으면 진작에 ‘키 크는 약’을 팔아서 돈을 벌었지.
물론 돈은 좋다.
꽁돈을 거부할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나도 돈 겁나게 좋아한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 조급하게 굴 필요가 전혀 없다.
지금 아무리 거액을 받고 포션과 키 크는 약을 팔아도, 5년 뒤쯤이면 나는 그 정도의 돈은 푼돈으로 여길 정도로 부자가 되어있을 것이다.
오만이 아니라, 논리적인 추론이다.
미래에 돈을 벌고자 한다면 벌 방법이 무궁무진하다.
굳이 수상쩍고 판타지적인 요소가 있는 포션과 키 크는 약이 아니라,
3 카르마 짜리 흰 티를 겁나게 팔아도 원가가 없으니 매출이 곧 순이익이고.
지구와 소설 속에 물건을 가지고 가는 것이 가능해지면…
소설 속에서 금덩이를 가져오면 된다.
내게 중요한 것은 현금이 아니다.
아마 시간이 흐르면, 온갖 재화보다 카르마가 훨씬 가치가 높아지는 특이점이 올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게 돈은 필요하지만, 결코 목적이 되지 못한다.
나는 이 포션을 지구에서 파는 근시안적인 행동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음… 역시 어쩔 수 없이 설명이 필요할 것 같네요. 약간 스포일러 해드릴게요.”
“스포일러?”
천사는 곤란하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뭘 말하려고 하길래 저리 뜸을 들일까?
“상점 창이요, 조금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으셨어요?”
상점 창이 이상하다?
짐작 가는 것이 없었기에 잠자코 이어질 천사의 말을 기다렸다.
“좀 더 정확히는… 상점 창에 물품이 너무 없지 않나요?”
“아!”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이해했다.
분명 좀 이상하긴 했다.
내가 생각한 시스템의 상점 창이란, 지금처럼 생활용품이나 편의용품이 아닌…
‘마법서, 영약, 몬스터의 가죽, 마법이 부여된 칼같은 판타지적인 물건을 기대했지.’
그러나 현실은 지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물건밖에 없었다.
스킬 상점의 항목에도 마법과 관련된 건 찾을 수 없고, 단순히 몸을 쓰는 법이나 병기를 다루는 스킬들밖에 없었다.
나는 내가 보유한 카르마가 부족해서 그런 줄 알았지만, 다른 이유가 있었나?
“상점 창도 다른 시스템 기능들처럼 구매 가능한 물품들이 잠겨 있는 거예요. 그래서 지구에서 구할 수 있는 물건이 대부분인 거였죠.”
“아하… 그럼 상점 창의 해금도 카르마를 써서 해야 해?”
“아니요. 상점 창의 해금은 좀 다른 방식이에요. 두 가지 방식이 있어요. 첫 번째는 소설을 완결하는 거예요.”
“소설의 완결?”
“네. 소설도 여러 세계관이 있잖아요? 판타지, 무협, SF, 퓨전 등등… 거기서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을 처음부터 다 살 수 있게끔 하면 오버 밸런스잖아요. 그래서야 (전)박찬영님이 인간적으로 성장할 ‘시련’이 안 돼요.”
“…확실히.”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무궁무진하다.
특히 SF…
과학이 극도로 발전한 미래의 세계관 속 물건 하나만 잘 구매하면, 백 개의 스킬보다 훨씬 더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저희는 소설 한 개를 완결하면, 그 세계관 속 물건들을 해금되게끔 조치했어요. 예를 들어, 판타지 세계를 완결지으면 드래곤 하트를, 무협 세계를 완결지으면 수천 가지의 영약이 해금되죠.”
“그럼 상점 창의 해금에는 엄청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사실상 초반부에는 거의 못쓰겠네…”
“제가 해금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씀드렸죠?”
다른 하나의 방법이라…
나는 어렵지 않게 그 방법을 예측할 수 있었다.
주어진 단서가 너무 많았다.
첫 번째로, 내게 보상으로 준 포션.
그러나 포션 한 개는 보상으로 받기에는 너무나 박하다.
두 번째로 내가 보상을 받기 위해 설명을 들어야 하는 이유.
천사가 꺼리면서까지 이 이야기를 해준 것 자체가 단서가 되었다.
“내가 획득한 물건은 해금 되나 보네? 이 포션처럼.”
띠링!
나는 상점 창을 열어 구매 가능한 목록을 확인했다.
=
[소모품 상점]
.
.
.
고급스러운 향수 [95카르마]
키 크는 약 [100 카르마]
하급 포션 [100 카르마]
.
.
.
=
“역시…”
즉, 이 포션의 해금 자체가 보상이란 건가.
내게 준 포션 한 개는 샘플이자 보너스고?
좋다.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
이 포션의 이름이 하급 포션인가보다.
100 카르마라…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은 아니다.
정확한 성능 또한 모른다.
하지만 비상시 망설이지 않고 구입이 가능한 가격이란 것에서 높은 점수를 줬다.
“눈…눈치가 엄청 빠르시네요?! 크흠!”
“어. 고마워.”
띠링!
=
[소모품]
이름: 하급 포션
레벨: -
효과: 경구 섭취 또는, 상처 부위에 뿌리는 것으로 상처를 서서히 치료합니다.
상세: 후유증이 있는 상처를 상흔이 남는 정도로, 불구가 되는 상처를 후유증이 있는 정도로, 죽음에 가까운 상처를 불구가 되는 정도로 치료해줍니다. 이 포션을 너무 신뢰하지는 마세요. 어디까지나 ‘하급’ 포션입니다.
가격: 100 카르마
[구매하기]
=
시스템의 설명 덕에 천사에게 물어볼 거리도 줄어들었다.
아주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스포일러가 되어버렸지만… 원래 이 정보는 첫 번째 소설인 ‘테라포밍’이 완결되면 확인 가능한 정보에요…”
소설을 완결시키면 그 세계관 아이템을 구매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건가??
“상관없잖아. 그 정보를 클리어 전에 얻는다고 한들 영향이 가는 것도 없고.”
“…있긴 해요. 아직 모르시겠지만.”
“뭐?”
“찬영님은 똑똑하니까 실마리를 얻게 되면 바로 눈치채실 거에요. 왜 영향이 간다고 했는지…”
또 거창한 떡밥을 뿌려댄다.
소설이나 만화를 읽을 때는 이런 떡밥을 보면 기대가 됐지만, 현실이 되니 다 필요 없고 빠르게 알고 싶다.
“어차피 눈치챌 거 미리 말해주면 안 돼?”
“안됩니다! 선배님이 제 입으로는 절대절대절대 알려주지 말라고 했어요.”
몇 번을 설득해보아도 도무지 요지부동이다.
아마도 그 선배 천사가 단단하게 말해두었나 보다.
결국 나는 캐묻기를 포기했다.
아쉬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다른 한 가지 의문이 생겼기에 깊게 묻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나중이 되면 알게 된다고 하고.
“근데 상점 창에는 판타지적인 물건 하나 있던데? ‘키 크는 약’. 그거 설마 지구에 진짜로 있는 거야?”
“설마요. 그건 저희가 서비스로 박찬영 님 인벤토리에 ‘키 크는 약’을 넣었다 빼서… 앗!”
“인벤토리라니? 게임에 나오는 그거?”
“…또 스포일러 해버렸네요. 아직 기능 해금이 되지 않으셔서 못 쓰실 거예요.”
그래서 키 크는 약이 유일하게 구매 가능한 판타지적인 물건이었구나.
음?
잠깐만…
…
‘내 인벤토리에 키 크는 약을 넣었다 뺐다고?… 이거… 전에 한 말과 모순되는 것 같은데?…’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인벤토리…
내 소유권…
키 크는 약…
소유권…
시스템…
시스템?
“잠깐, 너 지난번에 분명히 시스템에 대해 읽기 권한만 있다고 하고, 쓰기… 읍?!”
“!!”
터업-!
절레절레절레절레절레!!!
내 입을 양손으로 막고,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미친 듯이 고개를 젓는 아기천사.
필사적으로 내 말을 막았다.
절박할 정도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지금 이 말을 하면 안 된다는 뜻 같다.
천사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입을 열면 내가 위험해진다고.
‘젠장… 이거 잘못 건드린 것 같은데…’
내가 의문을 느낀 부분은 간단하다.
지금까지 ‘시스템에 간섭할 수 없다’라고 강조하듯 말해 온 천계다.
그러나 시스템 속 인벤토리에 멋대로 아이템을 넣고, 멋대로 아이템을 회수하는 행동은 마치…
간섭이 가능해야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닌가?
나는 이 점을 물어보려 했고,
방금 천사에게 저지당했다.
끄덕…
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여 말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절레절레…
천사는 나를 향해 고개를 몇 번 더 젓고는, 아주 천천히… 천천히 내 입에서 손을 떼었다.
내가 단 한마디로 하면 다시 입을 막을 기세였다.
왠지 모를 긴장감에 식은땀이 나온다.
“푸하…”
두리번… 두리번…
천사는 명백하게 주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사람… 아니면 그 밖의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이 집에는 나와 천사 둘밖에 없는데도.
내가 찌른 말은 분명히 천사를 넘어선, 천계의 약점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이용할 생각을 해선 안 된다.
그 이전에 관련된 발언조차 하면 안될 것 같다.
나는 논리를 중요하게 여기기에 감이란 것을 신봉하지는 않지만, 이번만큼은 감을 따라야 할 것 같은 기분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든다.
누군가 이곳을 보고 있는 건가?
천사가 별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지만…
만약 누가 보고 있다면 이렇게 어색한 공기여서야 무슨 일이 있었다고 금방 눈치채버린다.
아까의 대화가 들켜선 안 된다면, 평범한 대화를 연기해야 한다.
나름 연기에는 자신이 있었기에 평소의 유쾌함을 가장하는 데 성공했다.
“…천사의 날개나, 천사의 고리 같은 것도 아이템 취급이야?”
스윽…
“예? 그건 왜… 앗! 지금 만지시려고 했죠! 후후, 소용없어요! 소유권이 일정 시간 이상 인정 돼야 상점 창에 등록되거든요?”
-메롱
천사도 이쪽 의도를 눈치챘는지, 나의 장난을 평소처럼 받아줬다.
그 연기가 너무나 어색했다는 것은 비밀로 하자.
나름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것 같으니.
…아깝네.
저 날개와 고리, 특별해 보였는데.
사실 장난이 아니라, 장난인 척하는 노림수였다.
혼란스러운 틈에서도 자신의 이득을 챙기는 자가 일류다.
“아…아…아무튼… 저…저어는… 이만 가보 올테니이… 나중에! 봐요! 하하!”
- and I↗ will…
끝까지 어색하게 행동하네…
저렇게 연기를 못하니 도리어 수상해 보인다.
그렇기에 나도 천사를 빠르게 보내고 싶었다.
사실 천사가 연기를 못할 거란 것은 예상할 수 있었다.
평소에 얘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니까.
노래가 흘러가며 천사는 사라지고, 나는 배웅하려던 그때.
- …always love youuuu…↘↘
노래가 갑자기 늘어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천사의 얼굴을 보니 본인이 노래를 끈 것 같았다.
그러면서 내게 당황한 목소리를 소식을 전했다.
아주 놀라운 소식을.
“방금 연락이 왔는데… 찬영님을 데리고 천계로 올라오라는데요?…”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