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테라포밍
“아… 졸려 뒤질 것 같아…”
“네가 자초한 일이잖아?”
아침 구보 후, 아침을 먹으며 감기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특히 운동 후 찾아오는 노곤함이 더욱 나를 괴롭힌다.
몸과 정신이 피곤한 것은 아니다.
어제 침대 위에서 한 운동과, 밤샘으로 인한 정신적 피로는 특성의 덕에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20년 넘게 수면시간을 어기지 않았던 나의 생활 패턴이 악재가 되었다.
“내가 자초하긴 개뿔… 절대 나를 못 자게 한 게 누군데?”
나는 불만이 담긴 눈빛을 담아 블랑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전혀 반성하는 눈치가 아니다.
태연히 남은 아침을 전부 입에 쓸어 넣은 블랑은 음식을 씹으며 내게 말을 했다.
“제일 관심 없다고 한 놈이 제일 빠르게 움직였으니 그러지! 적어도 언질이라도 줬으면 그렇게 안 괴롭혔어!”
무슨 말을 하든 상관은 없는데 제발 음식은 다 삼키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비위가 상해 아침을 못 먹겠잖아.
“게다가 결국 밤새 물어봐도 자세한 건 하나도 말 안 해줘 놓고.”
“말해 줬잖아. 광년이가 술에 취해서 벌어진 우연이었다고.”
“설마 그걸 믿으라는 건 아니겠지?”
에휴…
계속 해봐야 새벽의 대화가 반복될 뿐이었다.
나는 내 주위를 둘러싼 룸메이트 4명을 바라보았다.
의외로 마음에 둔 여자를 빼앗긴 사람과 빼앗은 사람 사이의 어색한 기류는 하나도 없었다.
어젯밤.
방을 들어갔을 때, 모두들 생각보다 털털하게 반응했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나를 축하해 주는 분위기였다.
서로 사귀는 것은 아니란 걸 듣고서는 좀 덜해지긴 했지만, 나를 향한 질투는 거의 없었다.
특히 블랑의 경우는 그런 치욕을 겪고서도 마음에 뒀길래 꽤나 진지한 줄 알았는데.
‘그러고 보니 이들과 광년이는 만난 지 2일도 안 되었지… 연정이 깊어지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으려나?’
원나잇.
광년이가 내게 허락해 준 것은 고작 한 번이다.
두 번 째 요구했을 때는 둘 중 하나겠지.
호쾌하게 허락해주던가, 두번 다시는 허락을 받지 못하던가.
평소 그녀의 호탕한 성격을 생각해 보면 전자일 확률이 높긴 하지만, 세상에 절대란 건 없다.
물론 나는 그녀와 원나잇으로 끝낼 생각은 전혀 없다.
‘뭐, 한번이 될지 두번이 될지는 전부 내 행동에 따라 달린 것이겠지.’
남은 아침을 입에 전부 넣은 뒤, 자리를 떴다.
*
오전 훈련에 대비해 훈련생 전원이 각자 몸을 풀고 있을 때,
멀리서 광년이가 나를 보며 생긋생긋 웃고 있다.
심지어 눈을 마주치니 이쪽을 향해 작게 손을 흔드는 것이 아닌가?
뭐지?
쟤가 웃으면 불안하다.
심지어 나를 향해 달갑게 손을 흔드니 공포스러울 수 밖에 없다.
‘설마 어제 내 섹스 스킬에 반해버린 건가?’
음… 가능성 있다.
내가 말하긴 뭐하지만, 어젯밤의 만족도는 90점은 가볍게 넘었을 것이다.
이거 잘만하면 두번째 밤이 멀지 않을 것 같다.
“박찬영 훈련생! 나를 따라와라.”
뭐야?
브랙이 나를 불렀다.
광년이면 몰라도 그가 나를 부를 이유는 전혀 없었기에 의문을 가지고 그에게 다가갔다.
“부르셨습니까?”
“따라오면서 들어라.”
저벅 저벅…
브랙은 앞서 걸어가며 내게 말을 했다.
그나저나 계속 이렇게 걸어가면 훈련장이랑 멀어질 텐데?
이쪽은 훈련장의 방향도, 훈련소의 방향도 아니다.
나는 열심히 브랙의 의도를 추측하면서 발을 움직였다.
“박찬영 훈련생. 자네는 지구력과 체력은 나름 준수하나, 민첩성과 유연성이 심각하게 떨어지지. 원인은 알고 있나?”
브랙은 손에 든 종이 몇 장을 넘겨가며 네게 말했다.
저 종이의 정체는 체력 측정 당시 내 정보에 더해 출신과 국적 등을 기록해 놓은 파일이다.
다시 말해 내 프로필이다.
내 민첩성이 떨어지는 원인이라…
이 질문의 답은 하나밖에 없다.
“…살 때문이 아닐까요?”
“알고 있군. 자네는 심각한 고도 비만이야. 어떻게 전투직으로 배정받은 것인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 움찔!
약간 찔리는 곳이 없지 않아 있기에 놀랐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또한 작게 ‘그렇군요…’라고 말하며 어물쩍 넘어갔다.
“그러나 이미 한번 훈련소에 입소한 이상, 교관들은 자네를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어.”
나는 슬슬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깨닫기 시작했다.
첫날과 둘째 날에 언급이 없기에 그냥 넘어가려는 줄 알았으나, 그렇지 않았다니!
예상치 못한 시간차 공격에 등이 땀에 젖었다.
“그 정도의 살을 가지고 있으면서 평균을 넘어서는 지구력이라니! 자네는 분명 살을 빼면 두각을 보일게 틀림없어! 그래. 살을 뺀다면.”
“하하! 어차피 훈련소 3개월을 지나면 자동으로 빠져있지 않을까요?”
“아니! 그렇게 심한 비만으로는 앞으로의 훈련에 큰 지장이 있어! 그런 자네를 위해 특별한 교육과정을 한 개 준비했지.”
다른 말로 지옥 훈련?
그 특별한 교육과정이란 것의 내용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 내게 들이밀지 마…!
“교육 기간은 14박 15일. 자네는 교육기간 동안 다른 훈련생들이 하는 모든 체력 훈련에 열외 되어 나와 1:1 맞춤형 훈련을 시행할 예정이야. 이 기간도 너무 짧지만, 사정상 최대한 줄이고 줄인 것이니 양해 바라네.”
브랙은 선심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24시간 밀착 1:1개인 PT를 무료로 해준다고?
그것도 2주일 동안?
진심을 담아 말하겠는데, 필요 없다!
나는 이곳에서 3개월, 현실의 3개월을 합쳐서 6개월간 천천히 살을 빼낼 생각이었다.
그런다 15일 만에 빠지게 생겼다.
사실 이 정도 살덩이면 6개월 안에 빼는 것도 무척 빡세게 빼는 것이다!
6개월이 반개월로?
어떤 지옥이 펼쳐질지 자동으로 머리에 그려졌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두려웠다.
“아무리 그래도 14박 15일은 너무 깁니다!”
“나 역시 전례 없던 특이 케이스인 자네와 맞춤형 훈련을 하고 싶었으나… 내가 빠지면 그녀 혼자서 훈련생 전원을 통제하며 훈련을 진행해야 할 테니 큰 고민이었지. 그러나 오늘 아침, 그녀가 스스로 찾아와서 내게 먼저 제안을 하더군! 자네를 ‘위해’ 특수한 훈련을 한가지 만들자고!”
“그녀라면 설마…”
그녀라는 말을 듣자마자 떠오른 웃는 얼굴.
“그녀라면 그녀지. 나를 제외한 교관은 한 명밖에 없지 않나?”
“광년이… 이 개…”
새끼야!
겨우겨우 뒷말을 삼켜냈다.
“기뻐하게! 자네를 위해 밤새 교육 과정까지 생각해 온 모양이더군! 심지어 그렇게 내게 미루던 업무를 2주간 본인 혼자 내 몫까지 하기를 자처하며! 내용이 무척이나 힘들어 보이긴 하지만… 그녀도 생각이 있으니 이런 훈련을 만든 것이겠지! 그녀의 희생을 보아 열심히 생각해 온 훈련 과정 전부를 채택했네!”
뒷골이 땡긴다.
오늘 아침 나를 보며 생글생글 웃던 그녀의 얼굴… 아니 면상이 떠오른다.
지금이라면 전력으로 달려가 칼침을 놓을 수 있을 것 같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데!! 이름이 마음에 안드냐? 박찬영이란 이름이 잘못된 거냐고!!’
도망… 도망가야 해…
브랙 이 사람,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시작되면 멈출 수 없다.
터억!
“자네는 오늘부로 바뀌어 줘야겠네. 자네의 의지가 아니라, 나의 의지로.”
뒤돌아 도망가려던 내 어깨를 큼직하고 두꺼운 브랙의 손이 덮었다.
나는 절대 도망갈 수 없을 거란 걸 직감했다.
‘고문! 고문에 대한 대비 되어있다면서! 이거 고문 아니야? 고문이잖아!’
시스템을 주고 간 천사에 대한 항의를 해봤지만, 나를 구원해 줄 시스템 창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강력한 힘에 의해 질질 끌려갔을 뿐이다.
나를 향해 탐스럽게 아가리를 벌린 지옥의 입구를 향해.
*
브랙이 전직 트레이너라고 했던가?
그 말은 정확했다.
그는 사람의 한계를 몰아붙이는 방법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움직여! 움직여! 오른쪽 다리만 쓰면 쥐난다! 그러면 나중에 더 힘들어져!”
‘끄으으윽…!’
풍덩! 풍덩!
브랙이 말한 대로 왼쪽 다리에도 힘을 줘 물을 찼다.
그의 말을 흘려들었다가 몇 번 고생한 뒤, 차라리 말을 듣는 것이 장기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것을 뼛속 깊이 알아버렸다.
풍덩! 풍덩!
“뚱뚱한 사람은 물에 뜬다! 겁먹지 말고 팔다리 움직이는 데 집중해!”
“흐읍! 푸하!”
물 위로 고개를 내밀어 숨을 들이마시고, 팔과 다리로 물을 가로질렀다.
수영 선수들이 왜 코어 근육이 대단하지 알 것 같다.
전신이 힘들었지만, 특히 등허리의 코어근육이 땡기듯 아파왔다.
내가 갑자기 왜 수영을 하고 있냐고?
브랙은 내 몸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지나친 육상운동을 하면 관절이 상할 수 있다며, 쉘터 외각의 강 하류로 데리고 왔다.
내리쬐는 태양의 더위를 피할 수 있으니 좋은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전혀 아니다.
내가 ‘훈련 도중 체력이 다해서 물에 빠지면 어떻게 합니까?’ 라고 물어보자 ‘내가 살릴 테니 걱정하지 말고 물속에서 기절해라.’라는 답변을 들었다.
참으로 공포스러운 답변이 아닐 수 없다.
기절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훈련이라니…
심지어 육지에서처럼 지쳤다고 포기하며 드러누울 수도 없었다.
진지하게 한번 죽고, 시간을 돌리는 것을 고려해봤지만…
첨벙! 첨벙!
“푸흐흐흡! 콜록! 콜록! 콜록!”
아무리 진짜 죽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익사는 절대 아니다.
진짜 폐에 물이 차 맞이하는 죽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오늘 깨달았다.
‘안락사! 제발 안락사시켜줘!’
코와 입으로 끊임없이 들어오는 강물.
내제된 생존 본능 때문에 무의식적인 체력의 한도의 한도까지 끌어다 사용하고 있었다.
이 후폭풍이 저녁에 어떻게 돌아올지, 상상만 해도 두려웠다.
제발 자연치유가 내 생각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길…
“유산소! 전신! 게다가 부상의 위험도 적다니! 이처럼 완벽한 운동은 찾기 힘들지!”
수영의 유용성은 인정하겠다.
그렇지만 도저히 내가 하고 싶지는 않다.
첨벙! 첨벙!
‘개같은… 광년이… 씹새…’
팔다리가 혹사로 인해 벌벌 떨려가면서도 원한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식사와 수면 모두 이 강 근처에서 해야 했기 때문에 내가 광년이를 보는 건 14일 뒤가 될 것이다.
14일뒤… 딱 14일 뒤 보자.
뿌드드득…
이가 갈린다.
“자 이제 그럼 몸이 덥혀졌으니,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예? 본… 본격적인 시작이라니요?”
시작은 1시간 전에 한 것 아니었는가?!
지금도 지쳐서 손발이 벌벌 떨리는데, 아직 시작도 안 했다고?
구라지?
*
타닥타닥!
느긋하게 흐르는 강줄기 옆.
따스한 모닥불이 마음이 편안해지는 소음을 내며 타오른다.
고개를 들면 하늘을 수놓은 은하수, 고개를 돌리면 강물에 비친 푸른 달.
감성이 충만해져 당장에라도 낯부끄러운 시를 한 수 읊게 하는 기분을 들게 하는 절경이다.
…옆에 있는 사람이 모닥불의 빛에 반사되어 대머리가 번쩍거리는 근육질 남자만 아니었다면.
펄럭 펄럭.
“전날 측정한 체력검사가 잘못되었군. 기록보다 훨씬 신체능력이 양호해! 으음… 역시, 반백 명을 동시에 측정하면 이런 오류가 발생할 수밖에 없구만…”
브랙은 나의 프로필을 보며 말을 했다.
어제의 체력 검사 결과는 정확했을 것이다.
갑자기 늘어난 스텟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이겠지.
“자! 오늘 저녁은 케틀렙토마구셉소의 가슴살과, 체력 회복에 효과가 있는 약초를 넣고 끓인 스튜라네!”
나를 향해 건네지는 죽이 담긴 그릇.
간단하게 치킨이라 부르지 않고 케틀…어쩌고의 풀네임을 부르는 사람은 브랙이 유일하지 않을까?
광년이 때문에 저 이름만 들으면 마구섹스가 떠올라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탄수화물을 줄이고, 단백질에 치중한 영양식이지! 내가 손수 떠먹여… 줄 필요는 없을 것 같군.”
타악!
‘떠먹여 주긴 뭔… 여자면 몰라도 대머리 남자한테? 내가 미쳤냐?’
나는 브랙이 내미는 접시를 두 손으로 공손히, 그러나 단호하게 뺏었다.
그런 나를 떨떠름하게 흩어본 브랙이 입맛을 다셨다.
왜 남정네들 끼리 밥을 먹여주려고 하는 거지?
설마 브랙의 취향이?…
…훈련기간 동안 내가 위험한 건 육체적 고통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나는 슬쩍 브랙에게 떨어져 앉으며 식은땀을 흘렸다.
젠장, 오늘 밤 잠도 제대로 못 자겠는데?
그러나 이런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브랙이 내게 밥을 먹여주려 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자네, 신기하군. 하루종일 고강도 훈련을 하다 한번 길게 휴식을 하게 되면, 근육이 풀어져 지금쯤 사지가 움직이지 않아야 정상인데…”
브랙은 열심히 수저로 음식을 떠먹는 내 팔을 쳐다보았다.
“잘만 움직이는군.”
움찔!
나는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허겁지겁 움직이던 손을 멈추었다.
수영하고 난 뒤 특유의 허기와, 휴식의 달콤함에 취해 미처 생각이 닿지 못했다.
평소라면 분명 브랙이 먹여주려고 한 시점에서 눈치를 챘을 텐데!
“훈련 동안 엄살을 피운 건가? 아니… 그렇다기엔 내 경험상 한계까지 몰아붙인 게 분명한데…”
꿀꺽!
설마 내가 특성이라는 특이한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들키나?…
“생각할 가능성은… 박찬영 훈련생. 혹시 공기 중 무언가가 느껴지는 게 있나? 예를 들어 마나라던가.”
…뭐요?
마나?…
‘변명할 기회다!’
전혀 짐작지 못한 뜬금없는 소리였지만, 나는 이것이 거짓말을 할 기회라는 것을 직감했다.
속이는 것에 대한 죄책감은 없었다.
그에게 시스템과 특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지 않은가?
“확실히 뭔가 느껴지는 것 같긴 한데… 아직은 명확히 갈피를 못 잡겠습니다. 다만, 지구의 공기와는 좀 다른 것 같네요.”
“으하하하! 역시!”
내 말에 브랙은 반색을 했다.
나는 남몰래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세계가 마법이 있는 세계라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