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테라포밍
훈련생들의 봉기는 실패했다.
게임을 했다는 것 외에 정확히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는 모른다.
원작 소설에서도 리 샤오린과 광년이 사이에 대한 묘사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광년이와 정신 나간 게임을 했다’ 정도로만 알고 있다.
생각해 보면 너무 깔끔하게 훈련생들의 반항이 진압되었다.
사실 훈련생들의 요구는 비합리적인 것이 전혀 아니었다.
그 정도로 훈련의 강도는 높았으니까.
그러나 광년이는 ‘합리적인 요구’를 듣지 않고, 훈련생들의 반항 의지 자체를 눌러 꺾어버렸다.
만약 그녀가 논리적으로 훈련생들과 대화를 시도했다면 도저히 이렇게 깔끔하게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협상해서 합의하든, 아니면 폭력으로 묵살하든 무조건 뒷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광년이가 미친년처럼 행동한 게 교관들 입장에선 이득이 된 것이다.
“당연히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참 대단한 우연이야. 원작이 소설이라서 그런가?”
사실 광년이의 행동들은 그다지 정신건강에 좋지 않은 행동이 많기에 ‘게임’의 내용은 그닥 궁금하지 않았다.
나야 변수 없이 원작의 흐름 그대로만 가면 어찌 되든 상관없으니까.
리 샤오린은 광년이에게 패배했고, 원작대로라면 앞으로 그녀가 교관들에게 반항하는 일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누구도 리 샤오린을 욕하지 않았다.
그녀 대신 누가 나서더라도 그런 정신 나간 게임에서 꺾이지 않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점심식사가 끝났음에도 훈련생들은 의욕을 잃은듯한 표정이었다.
“오늘은 개인의 체력검증이 목표였다. 어느 정도 확인이 끝난 것 같으니 첫날은 이쯤 하도록 하지. 오후는 자유시간이다.”
교관들은 의욕을 잃은 훈련생들을 더욱 굴리기보다는 반나절의 휴식을 주는 선택을 했다.
아침처럼 서로 삼삼오오 모여 떠드는 그룹은 적었다.
각자 상념에 잠겨 생각을 정리하는 듯했다.
나 또한 잡담보다는 모처럼 주어진 자유시간에 퀘스트를 깨는 것에 집중했다.
띠링!
=
[퀘스트] <완료>
내용: 5분간 교관의 지시에 반항하지 않고 따르기.
보상: 300 카르마.
실패 패널티: 클리어 전까지 이 퀘스트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
‘다행히 이강인과 둘이 토사물을 치운 것으로 퀘스트 클리어가 됐네.’
띠링!
퀘스트창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새로운 퀘스트가 나왔다.
앞선 퀘스트 내용들과 마찬가지로 초·중학생에게 방학숙제로 나올법한 유치한 난이도였다.
물론 불만 따위는 전혀 없었다.
*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기운다.
퀘스트가 갱신되는 시간이 랜덤이라 그 사이의 공백을 걱정했지만, 다행히 클리어하는 즉시 바로바로 올라왔다.
덕분에 생각한 것보다 많은 카르마를 얻는 데 성공했다.
내용은 별것 없었다.
몇 m을 뛰어라, 스쿼트를 몇 회 해라, 윗몸일으키기를 몇 회 해라 등등의 간단한 퀘스트가 대부분이었다.
덕분에 나는 모처럼 얻은 휴식시간에 운동하는 별종 취급을 받기는 했지만,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는 않았다.
앞으로 이럴 일이 무척이나 많을 테니까.
“대단합니다! 보이는 것보다 훨씬 체력이 뛰어나시네요?”
100미터를 구보하듯 뛰느라 흘린 땀을 손으로 흩으며 옆을 쳐다보았다.
육즙이 줄줄 흐르는 수육을 떠올리게 하는 나와 달리 상큼한 미남이 보였다.
‘이야… 같이 땀 흘렸는데 얘는 땀 냄새가 아니라 풋풋한 과일 향이 날 것 같냐…’
이강인은 자유시간 내내 옆에 붙어서 나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오전에 한 대화의 약발이 너무 과하게 먹힌 것 같다.
물론 나도 이강인과 친해지면 좋긴 한데…
‘이제 좀 가라… 얻은 카르마 좀 쓰자…’
도저히 상태창을 불러낼 수가 없다.
퀘스트 완료 창만 손을 휘저으며 갱신을 확인할 뿐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손을 휘젓는 행동은 의심을 살만한 행동일까?
‘그럴 리가 없지. 제정신인 사람이면 허공에 손을 휘젓는 것을 보고, ‘엇! 저 사람 설마 판타지 소설 속에 나오는 상태창을 사용하고 있나?’라고 의심하겠어?’
그냥 날벌레를 쫓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이곳은 근처에 수풀과 나무가 많기 때문에 실제로 날벌레가 많다.
그러나 직접 입으로 ‘상태창!’이라고 하는 것은 다르다.
상상력이 뛰어난 사람이면 충분히 의심 갈만한 행동이지.
“대단한 건 강인씨죠. 강인씨에 비하면 한참 부족한걸요. 전혀 지쳐 보이지 않으시네요.”
“아뇨아뇨. 그나저나 전에 운동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스쿼트같은 전신운동의 자세가 상당히 정확하네요?”
“하하. 평소 관심이 있어서 인터넷에서 영상이나 강의를 찾아봤죠.”
존나 날카롭네…
순간 섬뜩해서 말을 더듬을 뻔했다.
전혀 생각해 놓지 않은 곳에서 치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강인이 아는 나는 운동에 익숙지 않은 인간이다.
이강인과의 첫 만남에 나에 대해 그렇게 설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은 전혀 달랐다.
나는 나름 헬스에 조예가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표정관리 하는 것에 성공했다.
이강인도 별로 의심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와… 과거에 본 영상만으로 정확한 자세가 가능하다니, 재능 있는 것 같은데요?”
“감사합니다.”
물론 내가 박찬영이 아닌 백하민일 때 개인 트레이너에게 교정받은 자세들이다.
이제는 몸에 완벽히 익어 자연스레 자세가 나오는 것이고.
그와 별개로 이강인은 떠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네가 안 간다면… 내가 가야지.’
이제 슬슬 저녁 식사 시간이 다가온다.
솔직히 밤에 카르마를 사용해도 상관없지만,
아니… 오히려 그게 더 안전하지만,
지금 당장 사용하고 싶어 몸이 달아오른다.
지금까지 카르마를 사용한 것은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 키 크는 약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 정도 키에 대한 대비가 되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흐르면 169cm, 근 170cm가 되는 것이다!
가장 급한 불은 자동으로 꺼질 테니, 다음으로 필요한 건 뭘까?
바로 스텟이다.
평균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저질적인 스텟.
‘당장 카르마를 올려서 변화를 체감해 보고 싶어!’
설레여서 가슴이 떨린다.
그러나 상태창을 불러내기 위해선 이강인과 떨어져야 한다.
“강인씨는 더 훈련하실 건가요?”
“그만하시게요?”
“네. 저녁 식사 전에 목욕하려고요.”
“엇? 자기 전에 목욕하는 것이 개운하지 않나요?”
“그때는 사람이 미어터질 게 분명하니까요… 저는 혼자서 목욕하며 사색에 잠기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과연! 그럼 저도 같이…”
끈질기네.
“아하하… 그게…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혼자서 목욕하고 싶어 일부러 지금 시각에 들어가는 거라서…”
나는 의도적으로 굉장히 미안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잘생긴 이강인을 힐끗힐끗 쳐다보는 여자 무리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남자 둘이서만 목욕하러 들어가는 것은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다.’ 라는 의미의 눈짓이다.
이강인도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는지 깔끔하게 포기했다.
“아! 제가 생각이 거기까지 닿지 않았네요. 죄송합니다.”
“저야말로 죄송해요. 제 몇 없는 취미이자 스트레스 해소 수단이라… 이따 저녁에 식사라도 같이 하시죠.”
“네! 그럼 이따 식사시간 때 뵙죠!”
*
풍덩!
간단한 샤워시설만 있을 것이란 예상과 다르게 의외로 몸을 담글만한 욕탕까지 있었다.
높은 대우가 예정된 예비 전투생이라 그런가?
훈련소에는 쉘터 평균을 훌쩍 뛰어넘는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일단 아침과 점심으로 나온 밥부터가 그러했다.
“먹어줄 만했었지?”
자극적인 MSG에 길들여진 현대인의 혀도 나름 만족했다.
무엇보다 근육과 몸을 키워야 해서 양도 많고, 치킨의 고기가 반드시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저녁이 기대되었다.
저녁이 가장 푸짐하고 퀄리티가 좋은 것은 만국 공통이었으니까.
“상태창!”
띠링!
=
[이름] 박찬영
[직업] -
[힘] 4 [민첩] 1
[체력] 2 [지능] 5
[기교] 1 [매력] -23
[특성] 『자연치유』
보유 카르마: 1680
=
“흐흐흐…”
암산으로 계산했기 때문에 알고는 있었지만, 4자리가 넘는 카르마를 보니 만족스러운 웃음이 흘러나온다.
언제 오늘처럼 자유시간을 줄지 모르기 때문에 아주 귀중히 사용해야 한다.
외모 편집?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살을 빼기 전에는 아무리 연예인급 미모를 가지고 있어봐야 쓸모가 없다.
그렇다고 살을 빼는데 카르마를 사용하기에는 너무나 아깝다.
이곳에 구르다 보면 자연히 빠질 살인데, 조급할 필요가 전혀 없다.
어차피 현실은 시간이 흐르지 않고 있으니 느긋하게, 장기적인 시야를 가져야 한다.
1000이 넘는 카르마를 보니 자동으로 괜찮은 스킬을 구입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아무리 좋은 스킬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스킬을 사용하는 것은 내 육체다.
이렇게 평균보다 한참 못 미치는 신체는 절대 스킬의 제 효율을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이강인 정도…
하다못해 꾸준히 운동해온 일반인 수준의 신체능력을 갖추는 것이 먼저다.
나는 우선 스텟 하나를 올리는데 어느정도의 카르마가 사용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시험 삼아 터치했다.
띠링!
=
[민첩]
1 → 2
[필요 카르마] 100
=
[취소되었습니다.]
=
[힘]
4 → 5
[필요 카르마] 100
=
[취소되었습니다.]
스텟 한 개에 고정적으로 100인가?
그럴 리가 없지…
아주아주 높은 확률로 스텟의 십의 자릿수가 바뀔 때마다 필요 카르마가 올라갈 것이 눈에 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스텟을 올릴 때마다 저렇게 일일이 필요 카르마 수치를 보여줄 필요가 없다.
“한 스텟에 몰아넣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초반에는 능력을 골고루 올리는 것이 맞겠지.”
그나저나 기교와 지능, 매력은 어디에 쓰는 것이지?
힘, 민첩, 체력은 너무나 익숙했기 때문에 딱 봐도 스텟을 올리면 내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기교와 지능은 대충 알긴 했지만, 게임이나 소설마다 세세한 상세 영향이 다르기에 헷갈렸다.
“이거 뭐 도움말 없나? 도움창! HELP! 가이드북!”
띠링!
=
[기교]
물리력, 행동 관련된 스킬이 크게 영향받습니다.
그 외, 섬세한 작업을 필요로 하는 일에 추가 효과가 붙습니다.
[지능]
마법, 마나 관련 스킬이 크게 영향받습니다.
그 외, 정신력과 습득력에 추가 효과가 붙습니다.
[매력]
카리스마, 스타성, 목소리, 분위기 등 눈에 보이지 않는 매력을 상승시킵니다.
첫인상에 추가 호감도를 얻을 수 있습니다.
초반에는 투자를 권장하지 않습니다.
=
내 의지를 알아들었는지 딱 원하는 내용의 가이드북이 나왔다.
천천히 읽어 본 결과 3가지 모두 투자하지 않기로 했다.
기교와 지능은 스킬에 관련되었고, 매력은…
‘나중에.’
어련히 때가 오지 않을까 싶다.
엇?
그러고 보니 매력이 -23인데, 마이너스 스텟은 올리는데 훨씬 적게 들 가능성도 있다.
1개 올리는데 5 카르마나 10 카르마 정도면 조금 고민을 해줄 수도 있다.
띠링!
=
[매력]
-23 → -22
[필요 카르마] 150
=
“아니 평균보다 훨씬 낮은데 왜 필요한 카르마는 더 드는 거야!”
[취소되었습니다.]
에라이, 틀었다.
그냥 얌전히 힘민체나 올리도록 하자.
“가이드 북.”
혹시 내가 알고 있는 힘민체의 효능과 시스템의 효능이 차이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가이드 북을 불러와 모든 스텟의 설명을 확인해 보았다.
말 그대로 과한 걱정이지만, 카르마의 소모는 되돌릴 수 없으니 조심해야 한다.
다행히 내가 알고 있던 내용과 큰 차이는 없었다.
나는 기대감을 가지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띠링!
띠링!
띠링!
.
.
=
[이름] 박찬영
[직업] -
[힘] 4 → 9 [민첩] 1 → 9
[체력] 2 → 5 [지능] 5
[기교] 1 [매력] -23
[특성] 『자연치유』
보유 카르마: 80
=
체력은 5까지만 올렸다.
특성의 덕에 2였을 때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크게 부족함을 느끼지 않았다.
5 정도면 충분히 평균 이상의 효율을 보여줄 것이란 판단이 들었다.
“진짜 특성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어디 보자… 진짜 아무도 없겠지?”
20명정도는 여유롭게 수용 가능한 목욕탕을 슬쩍 둘러보았다.
입장 당시 확인했다시피 아무도 없었다.
나는 욕탕에서 슬쩍 일어나서 간단한 체조를 하며 신체를 점검해보기 시작했다.
“오? 오! 확실히 엄청나게 편해졌어!”
몸을 움직이는 것 자체가 정말 편해졌다.
어마어마한 무게의 살덩이에 짓눌려 운동 자체를 수월하게 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무릎을 바닥에 대지 않아도 팔굽혀 펴기가 가능했다.
‘딱 1번밖에 못했지만…’
빠르게 체력을 회복할 수 있는 내게는 그 1번을 성공할 힘이 가장 중요했다.
게다가 1포인트에서 9포인트로…
무려 9배가 된 민첩 스텟의 덕인가?
몸 자체가 상당히 유연해진 느낌이다.
“으윽!… 역시 이 자세는 안되네.”
유연해 졌다고 한들, 관절부위에도 빠지지 않고 들러붙은 살 덕에 크게 유연해지지는 않았다.
9포인트면 충분히 평균 이상인데…
역시 살을 빼는 것 또한 중요하다.
*
“좋은 일이 있으셨나 봐요?”
“엇? 그렇게 보이나요?”
“네. 확실히 목욕하면서 스트레스가 풀리나 보네요. 훨씬 밝아졌습니다.”
그건 스텟을 올리며 겪은 신체 능력 상승의 체감 때문이 분명하다.
실제로 나는 지금 완전히 의욕이 넘쳤다.
수근수근-
음…
역시 이렇게 이강인과 같이 밥을 먹으니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존잘남과 존못남이 한 자리에 있으니 당연한가?
‘끼리끼리 논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한국 말고 다른 나라에도 그런 말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평범한 남자도 이강인의 옆에 있으면 못생겨 보인다.
그런 그의 옆에 내가 있으니 오죽 못나 보일까.
부럽다.
분명 훈련 생활 도중 엄청나게 대쉬 받겠지?
대쉬가 뭐야, 사실 저 정도 외모면 모르는 여자가 대놓고 유혹하더라도 개연성이 있을 정도다.
‘섹스하고 싶다.’
나는 아마 외모를 전체적으로 뜯어고치기 전에는 떡 못 칠 거야…
박찬영으로 바뀌기 직전, 헌팅에 실패해 떡각을 놓친 기억이 괜스레 떠오른다.
그때 혼자서라도 헌팅을 했었어야 했는데!
사무치게 후회된다.
‘어?… 뭔가 중요한 것을… 잊어도 손해는 아니지만, 잊으면 안 되는 중요한 걸 잊고 있는 느낌이 드는데…’
뭐지?
뭘까?
“어엇!”
벌떡!
내가 갑작스럽게 일어나자, 밥을 먹던 이강인이 나를 의문서래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여유는 내게 없었다.
원작인 소설에선 단 몇 줄만 나오고 지나갔지만, 이걸 이용한다면…
‘섹스… 할 수 있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