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테라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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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에 여유롭게 떠다니는 구름.
멍하니 뻥 뚫린 하늘을 보고 있으면…
북부 훈련소의 미친 교관, 크리스 베넷은 이곳이 마치 지구 같다고 느꼈다.
너무나 익숙한 광경이기에.
그녀는 그럴 때면 항상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총을 쓸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미사일, 박격포, 지뢰… 현대 기술이 들어간 수백 수천의 무기들.
자신보다 강력한 생명체의 목숨을 손쉽게 앗아갈 수 있는 화약 무기.
종류는 상관 없다.
그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크리스 베넷은 두 팔 벌려 환영할 수 있었다.
‘그러면 괜히 마음 아프게 이런 좆같은 훈련을 억지로 시킬 필요도 없었잖아…’
그러나 그녀의 세계에게 허용된 것은 냉병기 뿐이었다.
추가로 마법 비스무리 한 것도.
‘젠장… 정말로 신이란 것이 있긴 하나 보네.’
외계인일 수도 있지 않느냐고?
허나 매달 100명을 차원 이동시키고, 원인 짐작조차 가지 않는 방법으로 문명에 제약을 걸어버린 존재가 있다면 그게 신이랑 다른 것이 무엇인가.
개미 입장에서 그녀가 신인 것처럼, 그녀 입장에선 그들이 신이랑 다를 바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하는 일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항상 스스로를 설득하고는 한다.
모든 것은 현대 화기를 금지한 빌어먹을 신 때문이라고.
자신은 그저 바닥을 치는 전투직의 생존율을 끌어올리기 위한 나름의 발버둥일 뿐이라고.
실제로 그녀의 생각은 그리 틀린 말 없었다.
‘…변명인 걸 알지만, 이게 내가 생각한 최선의 방법인 것을 어떻게 하라고.’
설렁설렁 훈련을 진행하면 지금이야 편하겠지만, 실전에 투입된 순간부터 시한부 인생 시작과 다를 바 없다.
지금의 훈련 강도는 크리스 베넷이 생각해 놓은 마지노선이었다.
이 이상 난이도를 내릴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전투직 사망률이 치솟을 게 그녀의 눈에 뻔히 보였기에.
크리스 베넷은 반드시 사람들의 목숨을 조금이라도 더 지켜내야 했다.
오래전 스스로에게 새긴 맹세다.
죽기 직전까지 저버려서는 안되는.
그러한 골치 아픈 이유로, 다가오는 훈련생 무리를 보며 조용히 손목을 풀었다.
*
“교관님. 저희가 의견을 통합해 보았…”
“이번 기수는 순진하네. 주동자가 이렇게 대놓고 나서주다니… 덕분에 편해졌어.”
짜악-!
뺨을 치는 것은 사람의 기를 꺾는데 무척이나 효율적이다.
충격이 머리에 그대로 직격하기에 시야가 흔들리고 감각이 뒤섞인다.
게다가 때릴 때마다 귀 근처에 울리는 큰 타격음은, 아무리 억센 사람이라고 한들 잠시나마 위축될 수밖에 없다.
또한 극도로 굴욕감을 일으켜 상하관계를 뼛속 깊이 새기는 데 효과가 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장점은…
타격점이 넓어 피부가 터질 수는 있으나, 뼈가 부러질 확률은 낮다.
후유증이 없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크리스 베넷은 리 샤오린의 뺨을 내려쳤다.
“무슨…!”
짜악-!
그녀는 눈 앞 훈련생의 말이 이어지게 두지 않았다.
머리를 굴리도록 두지 않았다.
이미 리 샤오린의 계획은 전부 알고 있었다.
수년에 걸친 크리스 베넷의 교관 경력에 이와 비슷한 상황이 많았던 탓이다.
결코 리 샤오린에게 주도권이 가도록 두지 않으리라.
야생에서 시야를 잃는다는 것은 곧 죽음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동물은 눈 주변을 가격당하는 것에 본능적으로 큰 거부감을 느낀다.
인간도 다르지 않다.
훈련받지 않은 한, 급소가 밀집된 머리. 그것도 눈의 바로 옆을 맞게 되면 냉정함을 유지할 수 없다.
수만 년에 걸쳐 진화한 생존 본능에 불을 지폈다.
짜악-
“리 샤오린. 21세. 중국 출신. 맞지? 너 눈 예쁘다!”
크리스는 밤새 그녀의 방에 찾아오는 훈련생들을 기다리며 훈련생 프로필을 외웠다.
50명 전부를 외우기엔 시간이 부족했기에 눈여겨 볼만한 훈련생들을 추려서.
리 샤오린의 정보 또한 추려낸 프로필에 들어있었다.
그녀는 명백한 요주의 인물, 여자 무리의 리더였기 때문이다.
크리스가 이걸 내뱉는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너에 대해 알고 있다, 자신의 정보가 상대에게 파악되어 있음에서 오는 혼란을 주기 위해서다.
노림수는 먹혀들었다.
리 샤오린은 자신의 신상이 그녀의 입에서 나오자 무의식적으로 몸이 놀라 굳어버렸다.
그녀의 당황이 크리스에게 읽혔다.
‘여태껏 주동자는 다들 그랬지만… 이 훈련생 역시 독기가 있어.’
그녀가 느낀 리 샤오린의 눈빛은 억셌다.
크리스가 겪은 이강인이란 남자 훈련생처럼.
그러나 다른 점 또한 있었다.
이강인은 올곧았다.
감정은 격렬했으나, 투지라는 하나의 감정만을 띄고 있었다.
허나 리 샤오린은 다르다.
수십 개의 감정이 섞여 있다.
그리고 그 끝에 있었던 것은…
바로 공포였다.
‘아직 부족해.’
실제로 리 샤오린을 굴복시키기엔 한참 부족했다.
크리스로서는 좀 더 공포를 부추길 필요가 있었다.
짝-!
고작 6초가 흘렀다.
리 샤오린이 크리스에게 말을 건 뒤 걸린 시간이.
같이 항의하려 몰려든 훈련생은 크리스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빠르게 대응하지 못했다.
아직까지 당황한 채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분위기는 이미 만들어졌다.
크리스와 리 샤오린 사이에 선뜻 껴들기 어려울 만한 분위기가 맴돌고 있었다.
‘내가 의도한 대로.’
짜아악-
짜악-
짜악-!
여섯 번, 일곱 번, 여덟 번…
손바닥이 뺨을 갈길수록 점점 리 샤오린의 눈 속 독기는 사라져 갔다.
마음속 반항심을 대체하여 점차 굴복과 공포가 자리하기 시작했다.
슬슬인가?
크리스는 곁눈질해 훈련생들을 흩어 보았다.
“말려야 하지 않아?…”
“우…우리가?…”
역시 폭력이 계속되니 훈련생들의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이들이 나서기 전에 조치를 해야 한다.
그녀는 남모르게 브랙에게 신호를 보냈다.
“으음…”
신호를 본 브랙이 존재감을 과시했다.
타고난 큰 덩치, 훈련 때 고압적인 행동, 그리고 이 인원들의 책임자이자, 그녀 자신과 동등한 ‘교관’이라는 위치.
훈련생들은 브랙의 존재를 눈치챈 뒤, ‘브랙 교관님이 나서려나 봐.’로 생각이 바뀌었다.
‘뭐, 말릴 생각은 없겠지만.’
말 그대로 브랙은 존재감만 과시할 뿐, 전혀 크리스를 말리려 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사전에 브랙과 크리스가 계획한 시나리오가 그러했으니까.
크리스는 다시 리 샤오린에게 집중했다.
여러 번 뺨을 맞았음에도 그녀의 눈에는 독기와 반발이 완전히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예상대로, 이런 일차원적인 폭력과 고통만으로는 그녀를 굴복시키기엔 부족했다.
크리스는 손을 내리고 훈련생에게 물었다.
“어때, 좆같아?”
“저는 정당한 요구를 하기 위해…!”
짜악-!
“어때, 좆같아?”
“제가 맞을 이유는 하나도…!”
짜악-!
“어때, 좆같아?”
“사람이 말을 하면 들…!”
짜악-!
“어때, 좆같아?”
“…그래 좆같다 이 미친년아!”
4번만에 만족할 만한 답이 나왔다.
이 정도면 분노로 눈이 가려진 상태치고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이전의 훈련생들 중, 크리스에게 10번이 넘게 맞은 사람도 있었으니까.
“게임 하나 할까?”
“꺼져!”
“킥킥. 닥치고 들어. 여기서는 초인적인 힘을 가진 전투직 끼리 불화가 생기면…”
땡그랑!
크리스가 던진 단검 하나가 바닥을 굴렀다.
‘도축용으로 쓰던 단검이기에 날을 소중히 다뤄야 하지만… 이런 분위기에서 얌전히 두 손으로 넘겨주는 것도 우습지.’
리 샤오린은 단검을 내려다본 뒤, 크리스를 쏘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뭐 어쩌란 거야?’라고 쓰여있는 것만 같았다.
“대부분 둘 중 하나는 죽어. 누가 말리기 전에 시체가 나오거든.”
“서…설마…”
“뭘 상상하는지는 알만한데, 내가 애새끼도 아니고 병아리 짓밟는 취미는 없거든. 설마 너보고 나와 싸우라고 하겠어?”
“그럼 뭔데!”
“잠깐! 그전에, 너는 아직 전투직이 아닌 훈련생이니까… 교관의 권한으로 너를 임시 전투직으로 임명하지. 이걸로 너와 나는 동등해졌어. 오케이? 네가 나를 죽이든 강간을 하든 아무런 문제 없단 거야.”
“아니, 문제가 많지.”
“넌 닥치고 있어봐 브랙.”
“죽인다니… 무슨…”
“그 칼을 주워서 내 목을 찔러. 피하지도, 막지도 않을게.”
크리스의 입에서 나온 충격적인 말에 주변 훈련생들은 경악에 찼다.
크리스가 보통 미친년이 아닌 것을 알았지만, 이 정도로 미친년인 줄은 몰랐단 눈치다.
그러나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브랙 교관님이 막지 않을까?’, ‘아무리 그래도 찔리기 직전에 피하겠지.’등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훈련생들 역시 크리스의 신체능력을 잘 알고 있다.
실제로 평범한 사람이 내지르는 칼날을 피하는 건 크리스에겐 손쉬운 일이다.
숲의 주인이 인간이 아니고, 몬스터들이 습격하는 세계.
자연스럽게 무력의 중요성이 비정상적으로 높아진다.
그렇다면 그 새싹을 키우는 ‘교관’이 얼마나 중책인지,
얼마나 엘리트 중 엘리트만 맡을 수 있는지는…
길게 말하면 입만 아플 뿐이다.
크리스 베넷은 명실상부한 초인이다.
주먹으로 바위를 부수고, 범인이 겨우 눈에 쫓을 속도로 몸을 움직이는.
리 샤오린이 기습적으로 칼을 내지르더라도 우습게 막아낼 수 있다.
‘…피하지는 않을 거지만.’
리 샤오린은 미약하게 망설이고 있다.
그녀가 벌써 포기해서야 계획이 어그러진다.
행동을 유도해야 했다.
그녀의 언행을 살펴보면 자존심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살짝 긁어 볼까?
“내가 좆같다고 했지? 그럼 죽여서 치우면 돼.”
“…못할 것 같아?! 나 할 거야! 죽여버릴 거라고!”
“해봐. 할 수 있으면.”
“이익! 네가 시킨 거야! 네가 시켰으니까! 후회하지 마!”
리 샤오린은 허리를 숙여 단검을 주워들었다.
“읏…”
그녀가 단검을 든 채 잠시 멈칫했다.
의외로 단검이 묵직해 약간 놀랐기 때문이다.
칼이란 물건을 처음 쥐어본 사람은 다들 저럴 수밖에 없었다.
철 덩어리는 생각보다 무거웠으니까.
손을 타고 올라오는 차가운 무게감이 리 샤오린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생생하게 떠오르게끔 했다.
칼이 그녀의 앞에 선 교관의 목에 박혀 피를 뿜는 광경까지는 아니더라도…
스스로가 칼을 쥔 채 크리스에게 내지르는 장면 정도는 충분히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유도한 크리스 또한 리 샤오린의 머릿속을 속속히 꿰뚫고 있었다.
‘현대인은 감당 못한다. 감성적이게 되지만 않으면.’
그러니 감성적이게 되지 않게, 현실감을 더더욱 주어야 한다.
크리스는 리 샤오린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리 샤오린의 손에 들린 칼이 그녀에게 겨누어 진다.
동공은 흔들렸고, 숨은 거칠었다.
손과 다리는 미세하게 떨고 있다.
말 그대로 감성적인 인간의 표본이었다.
‘어이쿠, 진짜 찌르겠네?’
크리스는 가만히 두고 보지만은 않았다.
터벅! 터벅!
“뭣! 뭐야!”
크리스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리 샤오린의 앞으로 걸어간다.
그 후, 리 샤오린이 꽉 쥐고 있는 칼자루 위에 크리스의 손이 겹쳐 올려졌다.
크리스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리 샤오린의 손가락이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윽…”
리 샤오린은 손가락에 느껴지는 고통에 가까운 압박에 흥분이 가시기 시작했다.
크리스는 일부러 고개를 틀어 무방비하게 목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힘을 줘 칼자루를 끌어 칼날을 스스로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살짝 피부를 파고들어 피가 맺힐 정도로 가까이.
“게임이라고 했지? 만약 네가 찌르지 못하면 내가 너를 한번 찌를게.”
칼날은 차가웠다.
왜 한겨울의 찬 바람을 ‘칼날 같다.’로 비유하는지 공감 갈 정도로.
그와 반대로 리 샤오린의 날숨은 따스했다.
거리가 가까웠기에 크리스는 그녀의 숨결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칼날이 목에 닿은 아슬아슬한 상황.
크리스가 뱉은 말에 리 샤오린은 당황한 표정을 만들어 내었다.
아니면 스스로 칼날을 목에 가져다 댄 미친 행동 때문에 당황한 걸까?
크리스는 깊게 고민하지는 않았다.
크리스와 리 샤오린의 키는 비슷했다.
그러나 크리스가 목을 무방비하게 보여주기 위해 고개를 위로 틀어 아래로 내려다보는 형태가 되었다.
일부러 유도한 구도였다.
리 샤오린에게 압박을 주기 위해서.
“이익!… 할 거야… 할 수 있어…”
크리스의 미친년이라는 이미지.
초인적인 신체능력.
교관과 훈련생이라는 상하관계.
모두 리 샤오린을 압박하는 재료가 되었다.
한땀 한땀 쌓은 계획적인 행동이 모여 리 샤오린에게 큰 압박으로 돌아왔다.
자신을 꿰뚫어 보는 듯한 저 새빨간 동공.
그녀의 등이 식은땀으로 젖는다.
리 샤오린은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선을 피해 눈동자가 도망친 곳은…
칼날이 닿은 크리스의 목덜미였다.
‘리 샤오린. 봤군.’
별로 좋지 못한 판단이었다.
“흉터가…”
크리스의 목덜미에는 흉터가 있었다.
피부가 찢긴듯한 흉터만 십수 개.
바로 지금처럼 칼날이 피부만을 뚫었을 때 생길만한 상처들이다.
리 샤오린은 잠시 망설이다, 힘겹게 말을 꺼냈다.
“…너… 이런 정신 나간 ‘게임’을 몇 번이나 한 거야…”
“글쎄, 양손으로 다 못 세길래 잊었지. 네가 대신 상처 한번 세어봐.”
크리스는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 이전에 이런 식으로 목덜미에 칼날을 드리운 병아리들 십수 명이 있었고, 모두 실패했다. 과연 너라고 다를까?’
크리스가 조소를 담은 눈빛으로 리 샤오린을 내려다본다.
정확히는 남들이 볼 때 조소를 담은 눈으로 보이도록 표정을 지어냈다.
“나는 달라! 나는…”
“힘들어 보이네. 도와줄까?”
“뭐? 그게 무슨…!?”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 정말로 찌르게 되면 크리스 본인이 곤란해지니까.
크리스는 칼자루를 잡은 리 샤오린의 손등 위에 올린 손에 힘을 주워, 스스로의 목을 향해 칼날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직접 칼자루를 잡고 있는 리 샤오린은 칼날이 크리스의 목을 파고드는 감촉을 선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주르륵
살짝 맺혀있는 정도의 피가 칼날이 파고들며 점점 출혈이 심해진다.
뜨거운 피가 목을 타고 흐른다.
“미친! 지금 뭐하는…!”
“도와주고 있잖아?”
“그만둬! 해도 내가 할거야! 아직 마음의 준비가…!”
리 샤오린은 화들짝 놀라 칼자루에 힘을 주었다.
우스운 일이다.
찔러야 할 그녀가 정작 칼날이 크리스의 목으로 들어오는 걸 막고 있다.
찌르는 힘을 아주 약하게 주었기에 리 샤오린이 막은 정도로 칼날이 파고드는 건 멈추었다.
크리스는 리 샤오린을 내려다 보았다.
서로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
리 샤오린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독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눈앞에 다가온 살인의 무게에 완벽히 겁먹은 표정이다.
크리스는 입을 다문 채 칼자루에 힘을 주었다.
물론 스스로의 목을 찌르는 방향으로.
“아!… 그만!…”
점점 크리스의 당기는 힘은 강해졌고, 그와 똑같이 리 샤오린이 칼날을 막아서는 힘 또한 강해졌다.
한 손으로 막기에는 힘이 부쳤나 보다.
리 샤오린은 다른 손을 크리스의 손등에 올려 칼날의 진행을 최대한 막았다.
‘스스로도 도대체 자신이 왜 막아서는지 모르겠지.’
그러나 그것도 금방 힘에 부쳤다.
크리스의 근력은 일반인을 초월했으니 당연하다.
일반 여성의 양손 근력 정도로는 초인의 한 손조차 막지 못한다.
크리스가 리 샤오린의 표정을 보더니, 이 정도가 그녀의 힘의 한계인 것을 알아챘다.
리 샤오린은 젖먹던 힘을 다했기에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칼날의 끝 역시 미친 듯이 흔들렸다.
‘…따갑네.’
크리스가 노린 대로 흔들리는 칼끝이 그녀의 피부를 헤집는 것은 물론이었고.
그러나 크리스는 신음 하나 내지 않았다.
“칼로 내 목을 찔러. 안 그러면 네 왼쪽 눈은 파인다. 이 단검으로.”
크리스는 여태까지 방정맞던 말투를 그만두고 무게감 있게 말을 지어 내었다.
이럴 때까지 가벼움을 연기하는 것은 도움되지 않는다.
항상 가벼운 분위기의 사람이 갑작스레 무겁고 진중한 목소리를 내면…
상대방은 진심이라 받아들인다.
크리스는 이러한 심리적 압박 요소를 이용해 리 샤오린의 스트레스를 유발했다.
단검이라는 단어에 유독 힘이 주어져 있었다.
단순히 ‘죽인다’가 아닌, ‘왼쪽’ ‘눈’을 파버린다며 상세한 부위를 지목하는 것 또한 의도된 행동이다.
누가 자신이 죽는 것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까?
그러나 한쪽 눈이 파이는 것 정도는 상상할 수 있다.
샛붉은 피의 비린내가 코를 간질이는 상황에서는 누구나.
“힘을!… 풀어!… 내가!… 내 의지로!…”
“너야말로 힘을 풀어. 찌르지 않아도, 힘만 풀면 네가 이기는 거야.”
“으윽!…”
‘지금! 눌러야 한다!’
“힘 풀어.”
살기가 끌어올려 진다.
눈에 크게 치켜뜨고, 동공과 동공을 마주한다.
목의 상처에서 나온 피가 칼을 타고 손을 적신다.
피는 상온보다 훨씬 따뜻했다.
손가락이 따스해졌다.
비릿함이 코에 맴돈다.
1초, 2초, 3초.
최후의 수로…
크리스가 자신의 손에 힘을 더 주려는 그때.
“…못하… 못하겠어요… 잘못 했습니다… 흐윽…”
리 샤오린이 완전히 꺾였다.
그렇게 독기를 담았던 눈에서 눈물만이 흘러나온다.
그녀는 크리스에게 굴복했다.
펑펑 눈물을 흘리며 백기를 들었다.
땡그랑!
“흐으윽… 흑…”
크리스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손에 힘을 풀었다.
그녀가 손을 뗀 순간 단검은 바닥에 떨어졌다.
리 샤오린이 단검을 던지듯 내버렸기 때문이다.
크리스의 몸에 한껏 끌어올린 긴장이 풀어진다.
긴장을 했던 이유?
혹시나 리 샤오린이 단검에 쥔 손에 힘을 풀면, 크리스의 반사신경만으로 단검을 멈추어야 했기 때문이다.
충분히 가능했지만, 칼날과의 거리가 거리인 만큼 적당한 긴장은 필요했다.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지만, 도저히 못 해먹겠네.’
아…
미친년 연기해야 하지?
그럼…
“카악 퉷!”
크리스가 손바닥에 걸쭉한 침을 뱉었다.
더럽지만, 꺼림직 하지만, 표정과 몸짓은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었다.
광기가 느껴지는 미소를 의식적으로 끌어 올리며, 목의 상처에 침을 치덕치덕 발라 지혈한다.
아니나다를까 훈련생들은 크리스를 질린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후…’
…크리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강렬한 첫인상에 더불어 계속되는 비정상적인 행동.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제멋대로인 성격 하며 천박하기 그지없는 말투.
‘…이 정도면 어느 정도 미친년이란 이미지는 굳어졌겠지…’
그녀의 머릿속에는 빠르게 이 일을 마무리하고 방에 들어가서 제대로 지혈이나 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이런 연기는 그녀의 기력을 빼앗았다.
“네가 졌어. 리 샤오린.”
“으흑…”
크리스가 주저앉아있는 리 샤오린에게 다가갔다.
피에 젖은 단검을 주워 장난스레 흔들며.
이제 마무리할 시간이다.
“역시 네 눈 예쁜데? 보석 같아. 이곳에는 악세서리는 없거든. 그래서 하나 가지고 싶었어.”
정말로 눈을 파버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진짜 미친년도 아니고…’
훈련소에 들어온 이상 크리스는 이들의 스승이고, 이들은 크리스의 제자다.
크리스는 그 점을 꽤 중요시 여기고 있었다.
게다가 이 미친 짓을 하는 목적이 훈련생의 생존률을 위해서인데, 그런 그녀가 훈련생을 위협할 리 없다.
그러나 그냥 용서해 버려서야 크리스의 ‘이미지’가 망가진다.
지금껏 몸서리쳐지는 연기를 해가며 쌓아온 미친년 이미지가.
상식적으로 미친년이 이런 일을 곱게 넘어가겠는가?
“눈… 제발 눈은 안돼요… 흐윽… 제발…”
리 샤오린은 크리스의 피로 젖은 팔로 최대한 눈을 가렸다.
주저앉은 채로 다리를 휘적여 가며 크리스와 거리를 벌린다.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그리 멀어지지는 않았다.
그녀는 정말로 크리스가 눈을 파버릴 거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 모습은 너무나 애처로워 보여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독한 사람이라도 한숨 한번 내쉬고 넘어갈 정도로.
크리스는 슬슬 뒤에 지켜보고 있던 브랙에게 남모르게 신호를 보냈다.
사전에 합의한 대로, 크리스의 신호를 본 브랙이 그녀를 말렸다.
“이봐. 그쯤 하지.”
“앙? 또 왜!”
“그녀는 훈련생이다. 그건 체벌의 수준을 넘었어.”
“흐윽… 흑…”
리 샤오린은 매달리는 눈으로 브랙을 올려보았다.
눈동자 속 공포와 절망 사이 희망이 자리 잡았다.
누구라도 눈이 파이는 경험은 하고 싶지 않겠지.
“아까 이년이랑 한 대화 못 들었어? 얘 지금 임시로 전투직이라니까?”
“임시 전투직 임명 권한은 그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야.”
“어쨌든 전투직 맞잖아? 나랑 동등한!”
“틀렸어. 임시 전투직이면 훈련생과 전투직 두 신분 모두를 가지고 있다. 어느 쪽이 우선이냐면, 훈련생이 우선이지. 하극상을 방지하기 위해서.”
“…젠장. 그래서, 안된다고?”
“그래.”
훈련생들이 모두 똑똑히 들을 수 있게끔 이유를 설명한다.
크리스가 그녀의 눈을 파지 못하는 이유를.
물론 브랙과의 대화는 전부 짜고 치는 말이었다.
그러나 크리스는 안타까움이 가득 담긴 한숨을 내뱉었다.
누가 봐도 안타까워 보이도록.
‘내가 지랄하고, 브랙이 나를 통제한다.’
앞으로도 반복해서 훈련생들에게 보여줄 패턴이다.
‘착한 경찰과 나쁜 경찰’의 극단적인 활용법이다.
“존나 재미없네… 하…”
“감사… 감사합니다… 브랙 교관님… 흐윽…”
리 샤오린은 안심했는지 울면서 계속해 브랙에게 감사를 했다.
이것으로 주동자가 굴복하는 것을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그들이 교관에게 온 이유조차 듣지 않고 주동자를 굴복시킨 치사하기 그지없는 방법이지만, 이게 크리스로서는 가능한 최선의 수였다.
오늘의 일 이후, 앞으로 단체 반항은 잘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