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2화 (252/256)

〈 252화 〉 필로 토크 2

* * *

엄마가 이렇게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유.

폐경 때문이다.

지금 엄마 나이는 4○세. 분명 폐경을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였다.

배란 조절제를 끊고서 한 번이라도 생리가 왔다면 모를까, 그대로 생리가 오지 않는다면 폐경을 먼저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미안해, 선후야,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

나에게 기대어 흐느끼는 엄마에게,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내 마음속에 당장 떠오르는 생각은 ‘임신일 수도 있잖아?’라는 것이다.

하지만 누나는 그 가능성을 입에 담지 못하게 했다. 지금도 나를 매서운 눈으로 째려보며 눈치를 주고 있었다.

누나 생각은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 앞에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면 둘 중 유리한 쪽을 믿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괜히 임신 이야기를 꺼내면 엄마도 그쪽을 기대하게 되겠지.

그랬다가 만약 진짜 폐경이라고 밝혀지면 엄마는 더 큰 충격을 받을 거다. 누나는 그쪽을 염려하고 있었다.

지금 엄마는 슬퍼하고는 있지만, 일단은 폐경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누나 생각처럼 엄마에게 괜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건 안 좋을지도 모른다.

내려놓고 있다가, 만약 임신이라면 좋은 거고, 정말 폐경이라면 어쩔 수 없는 거고.

나는 입이 근질거리는 기분을 참으며 엄마를 위로했다.

“엄마. 너무 그렇게 상심하지 마. 누구나 다 거쳐 가는 일이니까…….”

“으흐흑……!”

위로한답시고 말했지만, 엄마는 더 크게 울어버렸다.

누나의 눈에서는 레이저가 쏘아졌다. 내 멘트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 같다.

음…… 솔직히 남자인 내가 무슨 말을 해도 NG일 거 같은데. 솔직히 ‘생리가 안 오면 편해서 좋은 거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고.

20대 남자인 내가 폐경을 맞은 여성의 심리 같은 걸 알 리가 없다. 나는 그냥 입 다물고 있는 게 나을 거 같다.

얼 타는 나를 보다 못한 누나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래 엄마.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뭘 울고 그래? 진선후 어리광 들어줄 필요 없어.”

“소영아…….”

“참나. 진선후야 바보니까 그렇다 쳐도, 엄마는 진심으로 진선후 애 낳으려고 했어? 엄마 나이가 몇인데. 위험하다고.”

“그래도…….”

“그래도고 자시고, 그냥 신경을 쓰지 마. 어휴, 차라리 잘됐어. 이 나이에 동생이라니. 부끄러워서 남들한테 뭐라고 말해? 그냥 잊어버려, 엄마.”

그리고 다음은 내가 누나에게서 바통을 넘겨받아 엄마를 위로했다.

“미안해, 엄마. 내가 괜한 부담 줘서.”

“선후야…….”

“괜찮아. 아이가 없어도 내가 엄마를 사랑하는 건 변하지 않으니까. 엄마도 그렇지? 나도 똑같아.”

눈물로 젖은 엄마의 얼굴을 마주하자 내 마음도 찢어질 것만 같았다.

괜한 소릴 했다. 괜한 욕심을 부렸다.

엄마와 아이를 갖고 싶었던 건 사실이지만, 엄마를 슬프게 하면서까지 갖고 싶었던 게 아니었는데.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엄마와 나의 행복이니까.

“그래도……엄마도 낳고 싶었어. 선후의 아이를 갖고 싶었어.”

“엄마…….”

“좀 더 빨리 마음을 정했으면 좋았을 텐데. 엄마가 먼저 다가갔어야 했는데. 망설이며 시간을 낭비했던 게 너무 후회가 돼.”

엄마가 이렇게까지 슬퍼하는 건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엄마도 갖고 싶었던 거다. 나와의 아이를.

하지만 엄마는 아이를 갖고 싶다고 해서 쉽게 가질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엄마와 내 앞에는 수많은 장벽이 있었다.

평생 엄마라는 바람막이 뒤에서 자라온 철없는 나는 신경 쓰지 않았던 제약이. 사회의 시선이, 조그마한 틈만 있으면 칼날을 들이대는 세상이 있었다.

엄마에게 ‘40대 미혼모 임산부’라는 딱지가 붙을 걸 생각하면 내 요구는 너무 철없는 거였는지도 모른다.

수십 년간 미디어의 최전선에서 활약해오면서 언론의 괴롭힘을 당해온 엄마가 내 아이를 가지겠다는 결정을 내리는 데에 얼마나 많은 고민이 있었을지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아는 문제였다.

당사자인 우리 가족이야 어쨌든, 적어도 세상은 엄마의 임신을 아름답게만 보지 않을 테니까. 애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고, 어쩌면 엄마와 나와의 관계를 의심해 천박한 소설을 써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건 소설이 아니라 사실이라서 더 문제다.

그리고 엄마가 그 모든 제약을 감수하고서라도 아이를 갖겠다고 결심했을 때는 이미 제한 시간이 지나버린 뒤였다. 어떻게 슬프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비록 아이는 갖지 못했어도, 대신 얻은 건 있었다.

“아냐, 엄마. 조금 늦어지긴 했지만, 그래서 아이를 갖진 못했지만, 그래도 그보다 더 소중한 걸 얻었잖아? 엄마가 만약 더 일찍 은퇴해서 아이를 가졌으면 나랑 같이 드라마를 찍지는 못했을 테니까. 나는 엄마랑 같이 드라마를 찍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흑……응…….”

그 드라마를 내 아이 대신이라고 생각하는 건 너무 오버일지도 모르지만, 엄마와 함께 출연한 드라마에 큰 의미가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나는 엄마가 진정될 때까지 조용히 끌어안고서 다독여주었다.

……그러다, 옆에서 듣고 있던 누나가 폭탄 발언을 했다.

“엄마. 괜찮아. 선후 애라면 내가 낳아줄 테니까.”

“소영아…….”

“……누나?”

누나가……임신?

상상도 되지 않는다. 저 누나가 내 아이를 임신해 부른 배를 쓰다듬는 광경이라니.

‘내 자식은 강하게 키워야 해!’라며 갓난아기를 벼랑 위에서 떨어뜨리는 광경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엄마는 나랑 진미소 낳은 거로 할 거 다 한 거야. 뒤는 우리한테 맡겨.”

“그래 엄마! 우리한테 맡겨! 우리도 절반은 엄마잖아? 우리가 한 명씩 낳으면 엄마가 한 명 낳은 거나 마찬가지야!”

미소도 이쪽으로 와서 거들었다.

말도 안 되는 엉터리 이론이었지만, 그래서 더욱 가슴에 와 닿는 것도 있었다.

“소영아……미소야……!”

엄마는 감격한 듯 그런 두 딸을 끌어안았다.

딸들이 엄마 대신 아들의 아이를 낳아주겠다니,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가 또 있을까.

욕탕이 감동으로 물들고 있었다.

거기에 선하도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저, 저도 절반은 오빠니까…….”

……넌 아니지, 선하야. 애초에 언니들이 말하는 건 그런 게 아닌데.

뭣보다 너랑 엄마랑은 피 한 방울도 안 섞여 있고. 유전병 문제도 있고.

……아니지. 1대까지는 괜찮은가?

“고마워, 얘들아. 선하도 고마워.”

엄마는 우리 네 남매를 한꺼번에 끌어안는다.

하지만 네 명을 안기에는 팔 길이가 부족했다. 대신 우리는 한 곳에 뭉치듯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온 가족이 함께한 목욕 시간은 그렇게 훈훈하게 지나갔다.

비록 엄마는 눈물을 보였지만, 지난 슬픔보다는 앞으로의 희망이 빛나는 시간이었다.

* * *

목욕을 마치고.

나는 엄마 방에서 엄마와 단둘이 밤을 보냈다.

야한 짓을 했다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함께 밤을 보냈을 뿐이다.

“엄마, 그거 기억나? 나 엄마 손 잡고 처음 집에 왔을 때──”

옛날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초등학교 입학하던 때, 처음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을 때, 연기 연습을 시작했을 때.

처음 엄마와 야한 짓을 했을 때나, 처음 섹스를 했을 때나, 드라마 오디션을 봤을 때나.

엄마와 함께 침대에 누워 예쁜 추억 이야기를 나눈다.

물론 추억만큼이나 괴로운 기억도 많았지만, 그쪽 이야기는 의식적으로 피했다.

아름다운 이야기만 나누기에도 이 밤은 너무나 짧았으니까.

야한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오늘은 이야기만 나누려 했다.

하지만 이렇게 같은 침대에 누워있으면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엄마의 숨소리가 가까이 들리고, 체온이 전해지고, 나를 바라보는 눈길이 느껴지고.

“……엄마. 누나 몰래 할까?”

비밀 얘기를 나누듯 엄마의 귓가에 속삭인다. 듣는 사람도 없는데.

굳이 ‘누나 몰래’라고 한 건 이 방에 들어올 때 누나가 신신당부했기 때문이다. 야한 짓 할 생각 말고 엄마랑 이야기나 하다 자라고. 누나도 엄마의 불안한 심리 상태에 걱정이 많았다.

엄마는 내 말에 황당하다는 듯이 웃었다.

“얘는. 그렇게 하고도 부족해?”

“난 항상 부족해. 엄마랑은 하루종일 하고 싶어.”

하지만 엄마는 고개를 끄덕여주지 않았다.

“씻었으니까 오늘은 이만 자. 엄마도 피곤하고.”

“치.”

“그리고……앞으론 엄마보단 다른 여자애들을 사랑해줘. 엄마한테 줄 사랑을 누나나 동생들에게 나눠줘.”

“엄만 또 그런다. 누나랑 미소, 선하는 엄마랑 다르다니까.”

“안 돼. 엄마는 배우 일 은퇴한 것처럼 이제 여자 일에서도 은퇴할 거야.”

“엄마.”

임신혜, 여자 은퇴 선언.

이 무슨 무서운 말이란 말인가. 엄마는 남자가 되기라도 하겠단 걸까?

“엄만 이제 엄마로서만 살 거야. 선후랑 소영이, 미소, 선하, 내 새끼들 뒷바라지나 하면서, 넷 다 잘 키워서 시집·장가 보낼 거야. 지금까지 엄마로서 못 해줬던 거 다 해주면서. 남은 인생은 엄마로서만 살 거야.”

엄마는 스스로 다짐하듯이 그렇게 독백했다.

엄마가 만약 지쳐서 하기 싫다면 나도 아쉽지만, 매우 아쉽지만, 엄마의 마음을 존중해줄 수는 있다. 하루에 한 번 하던 걸 이틀에 한 번, 사흘에 한 번으로 미룰 수도 있다.

하지만 엄마가 하기 싫어서 그러는 건 아니다. 폐경을 맞음으로써 여자로서의 인생이 끝났다고 체념했기 때문이다.

“……엄마. 그 전에 내일 병원부터 가보자.”

“병원?”

병원이라는 말에 엄마는 당연히 달가워하지 않았다.

“응. 정말 폐경이 왔는지, 아니면 호르몬 이상인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다른 거일 수도 있고.”

“다른 거 뭐? 임신?”

“……응.”

엄마가 먼저 임신 얘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 하긴, 당사자인 엄마가 그 생각을 안 했을 리가 없나.

엄마는 자조하듯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임신은 아니야. 엄마는 임신 두 번이나 해봤잖아? 임신했을 때 느낌도 잘 알아. 이건 임신 아니야.”

“엄마 혹시 임신 테스트기 써봤어?”

“안 써봐도 알아. 임신인지 아닌지 정도는.”

엄마는 유독 자신 있게 말했다.

엄마 말처럼 두 번이나 경험해봤으니 당연히 엄마가 나보단 잘 알겠지.

하지만 혹시 모르는 거잖아? 제대로 검사를 해봐야지.

“그래도 엄마, 혹시 다른 문제 있을지도 모르니까 가보자. 응?”

“엄마 창피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괜찮다니까. 나도 같이 갈게. 그리고 엄마가 병원 안 가면 나도 이제 병원 안 갈 거야.”

어린애도 아니면서 생떼를 썼다.

하지만 그 효과는 굉장했다.

엄마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병원 갈게. 대신 오늘은 이만 자.”

엄마는 결국 내 말을 받아들였다.

사실은 임신 테스트기부터 써서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건 엄마가 안 하려 들겠지.

……임신일까 아닐까. 임신이라면 좋겠네.

만약 아니라면, 정말 폐경이 온 거라면, 나는 안 그래도 우울해하는 엄마를 확인 사살한 게 된다. 나는 또 괜한 짓을 벌인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임신이라면…….

그날 밤은 복잡한 생각에 좀처럼 잠들 수 없었다.

* * *

다음 날 아침 일찍, 나와 엄마는 산부인과를 찾았다.

혈액을 채취하고, 소변을 받아 제출하고.

긴장된 표정으로 차례를 기다리길 10분.

“임신혜 님.”

마침내 엄마의 이름이 불리고.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엄마와 내가 자리에 나란히 앉는다.

책상 위 모니터를 보며 마우스를 달칵거리던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축하합니다. 임신입니다.”

맞잡은 엄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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