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집, 아버지 서재.
여자에게 흔들려 중요한 프로젝트를 망친 후, 황진우는 처음으로 아버지인 황 회장과 독대하고 있었다.
“회장님.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바닥에 무릎 꿇은 황진우를 내버려 두고 묵묵히 분재를 손질하는 황 회장.
태어나서 처음으로 고개를 숙이는 아들에게 회장은 눈길도 주지 않고 대꾸한다.
“흥. 네놈이 망쳐놓은 프로젝트가 얼마짜린지나 알아?”
“제가 벌인 일, 제가 수습하겠습니다.”
“못난 놈. 이제야 똥줄이 타더냐? 그렇게 사장 자리가 탐났어?”
“……가정을 지키고 싶습니다. 회장님, 아니, 아버지.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탁.
회장은 책상 위에 분재가위를 내려놓고 돌아선다.
그리고 무릎 꿇은 진우에게 다가온다.
-짝!
그건 황 회장이 처음으로 외동아들에게 내린 체벌이었다.
“일주일 내로 수습해. 이번이 마지막이야.”
황진우의 절망적인 표정에서 한 줄기 희망이 피어났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흥!”
언짢은 듯 서재를 나서는 황 회장.
황 회장이 문을 열고 나가자 안절부절못하며 엿듣고 있는 아내가 있었다.
“여보. 안에서 무슨 소리 들리던데. 설마 우리 진우 때린 거 아니죠?”
……희대의 악녀라 불리는 여자도, 돌아서면 단순한 엄마였다.
그런 진우 엄마에게 황 회장은 언짢은 듯 내뱉는다.
“크흠. 진우 자식, 저렇게 핼쑥해져선. 당신이 애 밥이라도 먹여서 보내.”
“네, 여보……!”
……황 회장 또한 단순한 아버지였다.
그리고 다음 편.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드라마 ‘꽃당나’, 그 대단원을 장식할 마지막 편이었다.
드라마 '꽃당나' 마지막 화
병원. 수정이가 입원한 병실 앞 복도.
며칠이나 밤을 새워 초췌해진 황진우의 아내, 신아영이 앉아 있었다.
-또각, 또각.
그런 신아영이 앉아 있는 대기 의자를 향해 힐 소리를 울리며 걸어오는 한 인영이 있었다.
신아영의 남편을 뺏으려 했던, 신아영이 증오해마지않는 여우 같은 여자.
바로 김선아였다.
그녀 앞에 멈춰선 하이힐.
그 하이힐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확인한 신아영이 표독스럽게 눈을 치켜뜬다.
“……여기가 어디라고 와?”
가증스러운 여자.
신아영은 따귀라도 치고 큰소리로 매도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신아영은 이 여자와 싸우기에는 너무나 지쳐있었다.
이대로 며칠만 더 지나면 딸의 간호를 하고 있는 본인이 입원해야 할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작별 선물을 주러 왔어요. 그 남자가 연락을 안 받아서.”
그 남자라는 건 신아영의 남편인 황진우를 가리키는 거겠지.
어차피 여기에 온 용건도 남편 때문일 거다. 자신과 그녀 사이에 연결고리라곤 남편뿐이니까.
한 번은 실망해서 포기하려 했던 남편이었다.
불과 며칠 전이였다면 그깟 남자 필요 없으니까 가지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신아영은 달랐다.
개심한 남편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믿어보기로 했다.
신아영 자신뿐이라면 몰라도, 아빠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딸의 애처로운 소원까지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신아영은 가정을 지키기로 했다. 우리 가정을 부수려 드는 이가 있다면 그게 누구든 맞서 싸울 생각이었다.
“자요.”
김선아는 에델바이스 꽃 모양 열쇠고리가 달린 USB를 내민다.
이 여자는 또 무슨 수작질을 꾸미는 걸까.
신아영은 여자가 내민 USB를 가만히 노려볼 뿐이다.
“받아요.”
“내가 그걸 왜 받아?”
신아영은 경계한다.
그 안에 뭐가 들어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 가정을 파탄 낼 무언가가 들어있을지도.
하지만 김선아는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여기에 당신 남편을 살려줄 정보가 들어있어요. 이상한 거 아니니까 걱정 말아요.”
“……뭐?”
남편을 살려줄 정보.
그런 걸 왜 이 여자가 가지고 있고, 그런 걸 왜 자신한테 내민단 말인가.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몰라도, 원수 같은 여자가 내민 물건을 선뜻 받을 수는 없었다.
“……나한테 바라는 게 뭐야?”
“바라는 거? 훗. 말했잖아요. 작별 선물이라고.”
김선아는 받으려 하지 않는 신아영의 가방에 USB를 억지로 집어넣는다.
신아영은 그걸 돌려줘야 할지 고민하다, 모른 척 받기로 했다.
적어도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확인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신아영을 보고 김선아는 만족스러운 듯이 웃는다.
“당신 남편,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강한 남자 아니에요. 뭐든 혼자서 하려고 하지만, 정작 옆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혼자선 아무것도 못 하는 남자예요. 누구보다 약하고, 누구보다 외로움 많이 타는, 그러면서 고집은 더럽게 세서 약한 모습은 절대 안 보이려 하는 그런 남자라구요.”
아영은 멍하니 선아를 올려다본다.
그리고 선아는 살풋 웃으며 마지막 말을 건넨다.
“앞으로 우리 진우 씨, 저 대신 잘 부탁해요.”
그대로 돌아서서 떠나는 선아.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멀어진다.
“……이봐요!”
뒤늦게 아영이 불러보지만, 선아는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패배해 돌아서서 눈물을 흘리는, 그런 비참한 모습을 승자에게 보일 수는 없으니까.
──김선아의 사랑은 그렇게 끝이 났다.
* * *
회사, 황진우가 맡은 프로젝트팀 사무실.
한때 황진우와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직원들은 다른 부서로 발령받아 짐을 옮기는 중이었다.
황진우는 그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을 붙잡고 따로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김 주임.”
“실장님.”
김 주임은 허둥지둥 손을 닦고는 황진우가 내민 손을 맞잡는다. (악수한 손은 왼손이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이번에 김 주임 고생한 거 내가 제일 잘 알아요. 다음에 또 기회 오면 내가 부를게.”
“실장님…….”
김 주임은 황 실장의 따뜻한 격려에 감격한 듯 울먹인다.
“그래도, 너무 분합니다! 분명 우리가 더 유리한 조건이었는데……왜 떨어졌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갑니다.”
“이 바닥이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다음엔 우리가 운 좋게 얻어걸리는 날도 있겠죠. 너무 상심하지 맙시다.”
“예, 실장님…….”
황진우가 어깨를 두드리고, 김 주임은 아쉬움을 삼키며 고개를 떨어뜨린다.
그런 우울한 프로젝트팀 사무실에 급히 뛰어 들어오는 사원이 있었다.
“실장님! 큰일 났습니다!”
“큰일?”
다급한 사원의 말에 TV가 있는 회의실로 서둘러 이동하는 황진우.
TV에선 뉴스가 나오고 있고, 그 앞에는 이미 다른 사원들이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다음 뉴스입니다. 얼마 전 진광 그룹이 1조 원 규모의 계약을 따낸 ‘전국 태양광 발전 국책 사업’이, 입찰 과정에서 정부 고위 공직자의 입김이 작용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불법적인 정황이──』
믿을 수 없는 뉴스에 황진우의 눈이 커진다.
뉴스를 보고 있던 직원들도 저마다 수군거린다.
“진광?”
“진광 그룹이라면 이번에 우리 대신 입찰 따낸 데잖아.”
“어떻게 된 거야?”
“우리 프로젝트팀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놀란 건 황진우뿐만이 아니다.
황진우를 따라온 프로젝트팀 일원들도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실장님!”
황진우의 눈이 빛난다.
완벽히 따냈다고 생각했던 입찰을 경쟁 업체에 밀렸다.
그리고 그 실패의 책임을 황진우는 프로젝트 실장으로서 전부 떠안아야 했다.
하지만, 입찰 과정에서 부정이 있었다면.
해볼 만했다. 뒤집을 찬스였다.
“──김 주임. 팀원들 다시 모아줘요. 바로 대응 준비해야 하니까.”
“예!”
황진우의 지시에 팀원들이 저마다 흩어진다.
황진우는 조용히 주먹을 불끈 쥐었다.
* * *
공항.
김선아는 알이 굵은 선글라스를 슬쩍 내려 공항 TV에서 흐르는 뉴스를 본다.
TV에는 요전 비리로 취소되었던 국책 사업에 황산 그룹이 새롭게 낙찰됐다는 자막과 함께, 한때 선아가 사랑했던 남자가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 속에서 사업 총책임자와 악수를 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김선아는 얇은 웃음을 짓는다.
“그래. 이러면 된 거야.”
-또각또각.
김선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하이힐 소리를 울리며 홀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그 뒷모습에 미련은 없었다.
* * *
-2년 후-
“아빠! 빨리!”
놀이공원.
오랜만의 가족 나들이에 신난 수정이가 환하게 웃으며 뛰어간다.
“수정아, 기다려! 엄마랑 같이 가야지!”
수정이 아빠 황진우는 그런 수정이를 애타게 부른다.
앞서간 딸을 쫓아야 할지, 아니면 느릿하게 걸어오는 아내 옆에 있어야 할지 몰라 허둥거린다.
“수정이 아빠. 수정이 따라가 줘요.”
“아니, 그래도, 당신이 이런데 어떻게.”
“괜찮다니까.”
황진우가 이렇게 쩔쩔매는 이유.
둘째를 임신한 아내 신아영이 곧 있을 출산을 앞두고 만삭인 채 걷고 있기 때문이다.
신아영은 부풀어 오른 배를 안고서 앞서가는 수정이 뒤를 따라 느긋하게 걷는다.
황진우도 수정이를 따라가지 않고 아내를 부축하며 따라 걷는다.
“꺅!”
그러다, 앞서 뛰어가던 수정이가 넘어지고 말았다.
“수정아!”
황진우는 깜짝 놀라 수정이에게 달려간다.
“우엥~!”
“그러게 아빠가 같이 가자고 했잖아.”
훌쩍훌쩍 우는 수정이와 그런 수정이를 달래는 아빠 황진우.
그런 부녀를 신아영은 흐뭇한 눈으로 본다.
-슈우우우-
단란한 가족의 머리 위로 비행기가 지나가고 있었다.
* * *
한편, 비행기 안.
퍼스트 클래스 좌석에서 노트북을 펼치고 무언가 문서를 작성하는 여자.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져 안 보이지만, 누구라도 알 수 있겠지.
다름 아닌 이 드라마의 히로인, 김선아다.
2년 사이에 선아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선아의 의상은 한층 고급스러워 보이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이젠 회장 사모님, 재벌 2세 사모님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아니, 스스로의 힘으로 그 모든 걸 얻어냈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그보다 멋있어 보일 지경이었다.
선아는 작성하던 문서를 마무리 짓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노트북을 덮는다.
그리고 그런 선아에게 커피를 건네는 외국인 남성이 있었다.
「고마워요.」
선아는 여유롭게 웃으며 커피를 받는다.
커피를 건넨 외국인 남성은 자연스럽게 선아의 옆자리에 앉는다.
「치프. 한국은 2년 만이라고 들었습니다.」
치프. 그 호칭이 현재 선아의 직책을 나타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영어로 말하고, 아래에 한글로 해석 자막이 나온다.
「한국엔 뭔가 특별한 추억 같은 거라도 있습니까?」
「추억이라……글쎄요.」
선아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녀의 손은 정장 옷깃에 끼워진 에델바이스 꽃 모양 브로치를 매만지고 있었다.
「있다면 있죠. 아주…… 멋진 추억이.」
이 비행기는 곧 착륙 예정임을 안내 방송이 알린다.
선아는 먼 곳을 보듯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 * *
오늘은 황산 그룹과 외국계 기업 STT의 공동 사업 미팅이 있는 날.
2년 전 프로젝트 성공 이후 승승장구해 부사장의 자리까지 오른 황진우는 황산 그룹을 대표해 이번 미팅에 참석하고 있었다.
“치프 엘레나? 어떤 사람이지?”
이번 미팅에서 상대측 대표는 STT의 CEO인 엘레나 킴.
낯선 이름을 발견한 황진우는 함께 온 비서에게 묻는다.
“한국계 미국인이라고 합니다. 자세한 정보는 공개되지 않아 알 수 없었습니다.”
“흠. 한국계라.”
이 정도 그룹의 CEO라면 인터넷 검색만 해도 나오겠지만, 누구도 비서의 말을 의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건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곧 회의실 문이 열리고, STT그룹 인사들이 줄줄이 들어온다.
그 무리의 선두에는 젊은 한국계 여성, 엘레나 킴이 있었다.
「치프 엘레나. 만나서 반갑습니다. 황산 그룹의 진우 황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유창한 영어로 인사하는 황진우.
진우의 인사를 받은 엘레나 킴은 웃으며 선글라스를 벗는다.
선글라스를 벗자 드러나는 엘레나 킴의 정체.
그녀는 놀랍게도 황진우 또한 잘 아는 인물이었다.
“오랜만이에요, 황 실장님. 아니, 황 부사장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상대의 정체를 알아본 황진우의 눈이 크게 뜨인다.
“당신은……!”
“엘레나 킴이라고 해요. 잘 부탁해요, 황 부사장님.”
선아는 여유롭게 미소지으며 황진우의 손을 잡는다.
대체 이 두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된단 말인가!
진우와 선아 사이엔 또다시 장밋빛 바람이 부는 것인가!
그런 여운을 남기며.
~지금까지 꽃과 당신과 나를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드라마는, 그렇게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