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꼬며 맞이하는 건 우리 드라마의 원탑 여배우님이시다.
“안녕하세요, 신지혜 선배님.”
왠지 오늘은 한층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 사람은 이럴 때일수록 기분을 더 맞춰줘야 한다.
언제 갑자기 촬영장의 귀신으로 돌아설지 모르니까.
“신인이 빠져가지고. 선배님들 기다리게 하고 말이야.”
팍.
늘 그래왔던 것처럼 엉덩이를 걷어차는 지혜 선배.
“아야.”
나도 늘 그래왔던 것처럼 아픈 척을 한다.
신기하지. 이렇게 얻어맞는 거로 복귀한 걸 실감하게 되다니.
하지만 이 상황을 훈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이 자리에 나뿐이었다.
“아빠!”
가장 먼저 옆에 있던 승희가 깜짝 놀라 소리친다.
그리곤 나와 지혜 선배 사이를 가로막는다.
“우리 아빠 때리지 마요!”
“엥?”
그건 마치 호랑이 앞에 대드는 포메라니안 같았다.
“아니, 얘가…….”
“승희야, 괜찮아. 아빠 이 언니랑 장난친 거야.”
그런 승희를 보는 내 간담이 다 서늘해졌다.
하늘 같은 선배 배우한테 대들다니.
“아빠 아무렇지도 않아. 응? 그러니까 언니한테 미안하다고 사과하자.”
나는 쩔쩔매며 승희를 달래본다.
여배우들의 세계는 남배우는 감히 끼어들 수 없는 특유의 문화가 있다.
아무리 승희가 어리다고 해도 선배 배우에 대한 선은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그렇게 안절부절못하고 있자.
“지혜 씻! 왜 아픈 애를 때리고 그래!”
저쪽에서 감독님이 허둥지둥 뛰어왔다.
그것도 지혜 선배를 탓하면서.
“감독님.”
“선후야, 이리와, 이리와.”
감독님은 내가 인사도 하기 전에 등을 두드리며 저쪽 편으로 데려갔다.
“고생했어. 많이 힘들었지? 하여간 요즘은 여자들이 더 난폭하다니까. 지혜 씨는 내가 잘 타이를 테니까, 응? 저쪽에서 잠깐 쉬고 있어.”
“아, 어, 네.”
감독님도 성격이 이런 캐릭터는 아니었을 텐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상냥하게 웃으며 다독여주는 감독님이었다.
“감독님! 나도 주연배우거든요?!”
당연히 지혜 선배는 억울해했다.
하지만 여기에 내 편을 드는 건 감독님뿐만이 아니었다.
고참 배우들이 돌아가며 나를 감쌌다.
“어허, 그렇다고 사람을 때리면 어떡해? 때리면.”
“지혜 씨, 선후 씨는 환자잖아.”
“상처 덧나서 리타이어 하면 책임 질 거야?”
“지금 우리 성과급이 선후한테 달린 거 몰라?”
“성과급?”
솔깃한 이야기에 되묻고 만다.
“아, 성과급 말이지.”
나이 지긋한 선배 배우 한 분이 설명해주었다.
마지막 화에서 시청률 30%에서 1% 넘을 때마다 출연진뿐만 아니라 감독님 이하 전 스태프에게 성과급이 나온다고.
시들시들한 공중파 드라마 판에서 역대급 시청률을 찍은 ‘꽃당나’.
그 마지막 편에 방송국은 사활을 걸고 있다는 것 같다.
꽃당나의 성과가 앞으로 후속 드라마의 흥행 여부에까지 영향을 미칠 테니까.
“그래서 지금 선후 씨가 마지막 2화를 찍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게 초미의 관심사거든. 우리 진선후 배우님이 나와주기만 하면 40%는 보장된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 그럴까요……?”
선배 배우의 호언장담에 부담감이 펑펑 솟아오른다.
“뭘, 그렇게 부담가질 필요 없어. 선후는 병풍처럼 서 있기만 해도 40%는 찍을 테니까. 핫핫하!”
그 선배 배우뿐만 아니라 촬영장에 있는 전원이 같은 마음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쩌면 그 말도 틀린 건 아닐지도 모른다.
현재 미디어에서 ‘진선후’라는 이름이 가진 파급력은 이상할 정도로 컸다.
배경에 가만히 서 있는 모습만 나와도 그 한 장면을 보기 위해 시청자들은 채널을 고정할 것이다.
이번 주에 정규 분량 외에 서비스로 나간 스페셜 방영분도 시청률 30%를 넘겼을 정도니까.
“그러니까 잘 부탁해? 어디 아프면 바로바로 말하고. 누가 괴롭혀도 말이야.”
은근히 신지혜 선배를 가리키며 말하는 선배 배우.
“너무하네 진짜! 나도 주연 여배우라고요!”
신지혜 선배의 울분 섞인 외침은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렇게 특별 대우를 받았으면서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하면 안 되겠지.
으음…….
힘내자.
촬영 재개
드디어.
촬영이 재개되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카메라 렌즈의 건조함, 숨 막히는 분위기, 쏟아지는 수십 개의 시선.
그러나 나는 아무런 거부감도 느끼지 않았다.
나에게 연기는 인생이요, 인생이 연기 그 자체니까.
조금 단단한 압박감이 느껴지는 오른손 손가락 끝을 움직여 본다.
지금 내 오른손에는 가죽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감독님은 붕대를 감은 채로 해도 된다고 했지만, 그런 안일한 자세로 찍는 건 내가 사양했다.
붕대를 감고 찍을 수는 없고, 그렇다고 상처를 내놓고 찍을 수도 없다.
장갑은 그래서 내놓은 궁여지책이었다.
“가만히, 조심조심…….”
내 손에 장갑을 끼워준 사람은 다름 아닌 엄마였다.
나 혼자서 퉁퉁 부어버린 오른손에 장갑을 끼긴 힘들었고, 그렇다고 의상팀 누나들에게 부탁하려니 너무 부담스러워 했다.
거기서 내가 부탁할 사람은 엄마밖에 없었다.
내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
내 몸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겨주는 사람.
장갑을 끼다가 잘못돼서 피가 터지더라도 원망하지 않을 사람.
엄마밖에 없었다.
“너무 조이진 않니?”
“괜찮아, 엄마.”
엄마도 처음엔 기겁하며 사양했지만, 아들의 간절한 부탁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엄마도 연기자다.
열악한 환경에서 조금이라도 퀄리티를 올리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아프다 싶으면 바로 벗어야 해. 아니, 엄마든 누구든, 다른 사람한테 바로 벗겨달라고 해. 알았지? 절대 참고 있으면 안 돼.”
“알았다니까.”
엄마의 거듭된 충고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엄마도 어지간히 걱정인 거겠지.
나는 조금 불편하긴 해도 이 정도가 딱 좋았다.
너무 편하면 다친 걸 잊고 무리할지도 모르니까.
“진 배우님! 촬영 들어가실게요!”
“예! 엄마, 다녀올게.”
“우리 아들, 잘하고 와.”
내가 다친 이후로 엄마는 부쩍 울적한 표정을 짓는 일이 많아졌다.
엄마에게 웃음을 찾아주기 위해서라도 내가 건재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준비된 세트장 위로 올라섰다.
* * *
황진우의 얼굴은 초췌하다.
자신이 맡아 지휘해온 중요한 프로젝트가 실패로 끝났다.
경쟁 업체에 밀려 대규모 국가사업 수주를 따내지 못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황진우와 김선아와의 관계에 폭발한 아내 신아영이 이혼을 요구했다.
남편의 외도를 알면서도 그동안 계속 참고 있었던 아내 신아영.
하지만 회사 일에도 가정에도 소홀한 남편을 보다 못한 신아영이 결국 이혼 서류를 내밀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은 진우에게 위기였지만, 동시에 새로운 기회이기도 했다.
진우의 내연녀인 선아는 프로젝트에 실패해 약해진 진우를 끌어안아 주었다.
선아는 모든 비난의 화살이 진우에게 쏟아지고 있을 때, 유일하게 진우를 위로해준 존재였다.
모든 걸 버리고 자기와 함께 떠나자고, 당신만 있으면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말해주었다.
선아는 이전부터 진우에게 그런 뉘앙스를 풍겨왔지만, 지금까지 진우는 도저히 선아 말대로 떠날 수 없었다. 일과 가정이라는 족쇄에 묶여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생에서 가장 큰 실패를 경험했을 때, 황진우는 깨달았다.
지금의 가족과 선아, 어느 쪽이 자신을 진정으로 소중하게 생각해주는 존재인지를.
그리고 무엇이 자신을 위하는 길인지를, 황진우는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자신이 손에 쥔 모든 것은 족쇄에 불과했다.
평생을 얽어매고 있던 족쇄를 풀고 선아와 함께 떠나자. 거기서 새 출발 하자.
사업과 가정, 양쪽에서 흔들리는 도중에도, 황진우는 그런 달콤한 꿈에 젖어있었다.
진우는 회사도 가족도 모두 버리고 선아를 따라 외국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황진우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사건이 일어난다.
“아빠!”
황진우의 딸, 수정이.
어른들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수정이가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수정이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아빠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아빠를 빼앗아 가려는 건 지금 아빠와 같이 있는 저 여자.
수정이는 나쁜 마녀에게서 아빠를 되찾아야만 했다.
그러니까 수정이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달렸다.
우리 아빠라고, 아빠에게서 떨어지라고, 그 여자에게 외칠 작정이었다.
“수정아! 오지 마!”
뒤늦게 달려오는 수정이를 알아챈 진우가 외치지만.
도로를 가로질러 달리는 수정이에게 일어날 사고를 막진 못했다.
-끼이익! 쿵!
급정거한 승용차에 치인 수정이의 작은 몸이 떠오른다.
“수정아!!”
이마에 피를 흘리며, 도로에 쓰러진 수정이.
황진우는 다급히 수정이에게 달려온다.
“수정아! 아빠야, 눈 좀 떠봐, 수정아. 수정아!!”
쓰러진 수정이를 안고서 다급하게 외치는 황진우.
하지만 수정이는 죽은 듯이 꼼짝도 하지 않는다.
“수정아!!”
갑작스러운 사태에 입을 가리고 경악하고 있던 선아가 서둘러 119에 신고한다.
주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쓰러진 수정이와 그런 수정이를 안고 오열하는 진우를 둘러싸고서 지켜본다.
──여기까지가, 지난 화까지의 줄거리.
그런 막장 클라이맥스에서 ‘꽃당나’는 2주나 결방한 것이었다.
결방 사유가 사유인지라 시청자들도 얌전히 기다려줬지만, 만약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면 폭동이 일어났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원래 처음 대본은 진우와 선아가 그대로 미국으로 떠나는 해피(?) 엔딩으로, 여주인공 선아는 일도 성공하고 사랑도 쟁취하는, 이 시대의 여성으로서 대리만족을 느끼게 만드는 캐릭터가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드라마 연장이 결정되면서 엔딩이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황진우는 가정을 지키고 선아는 혼자서 미국행 비행기를 탄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뤄지지 않아서 더 애절한 첫사랑으로 끝나버리고 마는 것이다.
엔딩이 이렇게 바뀐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악역으로 나온 엄마와 수아 선배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한다.
여주인공인 지혜 선배의 인기는 물론 좋았다.
평소엔 푼수기 넘치고 자유로운 캐릭터지만, 일할 땐 똑 부러지게, 그리고 사랑할 땐 타오르듯 열정적으로. 선아는 그야말로 이 시대 젊은 여성의 워너비 같은 캐릭터였다.
하지만 가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아내, 어머니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시청자가 더 많았다. 이건 제작진도 예상하지 못한 의외의 반응이었다.
처음부터 여주인공의 앞길을 막는 악녀로 설계된 황진우의 모친과 아내.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두 사람은 단순한 악녀가 아니라 가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이 시대의 평범한 여성들이었다. 남편 황진우와 아들 황진우를 지키기 위한 두 여성의 처절한 몸부림이 화면 밖 시청자들에게도 전해진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황진우의 마음은 선아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이제 와서 황진우의 마음을 바꾸긴 어려웠다.
여기서 굳어진 황진우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제작진은 진우의 딸인 수정이가 사고를 당한다는 극단적인 장치를 꺼내 들었다.
그나저나 우리 승희가 고생이구나.
물에 빠지기도 하고 차에 치이기도 하고.
드라마 끝나면 맛있는 거라도 사줘야지.
* * *
세트장은 병실.
실제 환자로 입원해있던 나보다 더욱 환자처럼 보이는 수정이(나승희)가 침대에 누워있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서 조용히 잠든 수정이의 옆을 지키는 건 아내 신아영(황수아).
그 음울한 병실에 황진우(진선후)가 들어선다.
“……여보. 수정이는 좀 어때?”
돌아보지도 않는 아내에게 진우는 어렵게 말을 꺼낸다.
“나가.”
하지만 돌아오는 건 싸늘한 말 한마디.
새빨개진 눈으로 돌아본 그 모습에 ‘재벌 2세 사모님’ 신아영은 없었다.
‘사고로 다친 딸의 엄마’ 신아영이 있을 뿐이었다.
“나가. 여기가 어디라고 와? 당신 이제 내 남편 아니고, 당신 이제 수정이 아빠 아니야.”
아빠를 발견해 달려가다 수정이가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에, 그리고 사고 신고를 남편의 내연녀인 선아가 했다는 사실에, 아영의 분노는 치솟다 못해 무너질 지경이었다.
한 서린 아영의 목소리에 진우도 목이 멘다.
“여보.”
“나가! 나가라고!”
보고 싶지도 않다. 듣고 싶지도 않다.
폭발한 신아영이 손에 잡힌 가방을 던지고, 그 가방은 진우의 가슴에 맞고 떨어진다.
하지만 진우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모든 게 자신의 잘못이었다.
프로젝트를 망치고, 가정을 파탄 내고, 수정이를 다치게 하고.
모든 게 자신의 잘못이었다.
이런 남자는 버림받아 마땅했다.
남편 자격도, 아빠 자격도 없다.
그러니까 조용히 떠나자.
마음을 굳힌 진우는 발걸음을 돌려 병실에서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런 진우를 붙잡는 목소리가 있었다.
“아, 빠…….”
수정이였다.
“수정아!”
사고 후 줄곧 잠들어 있던 수정이가, 하필 그 순간, 기적처럼 깨어난 것이다.
“정신이 들어? 엄마야, 엄마 알아보겠니?”
엄마 신아영이 수정이의 손을 잡고 오열한다.
겨우 실눈을 뜬 수정이는 힘겹게 입술을 달싹이며 중얼거린다.
“가지, 마…… 아빠…….”
아빠에게 뻗은 고사리 같은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수정아!”
그 애처로운 모습에 진우도 무너지고 만다.
“수정아. 아빠 아무 데도 안 가.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진우는 수정이의 손을 잡고 왈칵 눈물을 쏟는다.
붙잡은 그 손은 너무나도 작고, 또 따뜻했다.
이런 딸을 두고 자신은 어딜 가려 했단 말인가.
진우는 후회에 몸부림친다.
“미안해, 수정아……!”
각각 수정이의 손을 한쪽씩 잡고서 눈물을 흘리는 아빠와 엄마.
가족을 되찾았어.
수정이는 겨우 안심했는지 웃으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