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하는 승희를 위해서라도 빨리 나아서 복귀해야 할 것 같다.
“응. 고마워. 승희 봤더니 기운 나서 금방 나을 거 같아.”
조막만 한 손으로 낑낑대며 내 다리를 주무르는 승희.
마치 주무를수록 아빠가 빨리 낫기라도 하는 것처럼 열심이었다.
그런 승희를 엄마를 포함한 모두가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님, 제가 할게요.”
“어머나.”
훈훈하게 승희를 보고 있던 수아 누나가 엄마 자리를 약삭빠르게 빼앗았다.
“수아 누나까지 안 그래도 돼요.”
“환자는 가만히 누워있어.”
엄마나 승희는 그렇다 쳐도, 나이 가까운 여배우가 이러는 건 문제 있는 거 아닐까.
내가 난처한 눈으로 엄마를 보자 엄마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선후도 엄마보단 예쁜 누나가 주물러주는 게 더 좋잖아?”
엄마가 놀리듯이 말한다.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닌데…….”
그렇다고 딱 잘라 아니라고 하면 수아 누나한테 실례일 것 같고.
엄마도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으니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겠지.
누가 보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럼 나는 어깨 주물러줄게.”
뭐가 재밌어 보였는지, 이번엔 지혜 누나가 내 어깨를 주물러주겠다고 나섰다.
수아 누나가 오른쪽 다리, 승희가 왼쪽 다리, 지혜 누나가 양쪽 어깨.
요즘 시대에 공중파 시청률 40%대를 찍은 초호화 멤버들이 병실에 모여 내 안마나 하고 있었다.
그러자 승희 어머니만 따돌림당한 듯 남아버렸다.
그런 승희 어머니의 시선은 왠지 내 다리 사이를 향해 있었다.
설마 남은 곳이 거기뿐이니 거기라도 주무르시겠다는 건 아니겠죠?
승희도 보고 있다구요.
“우리 선후가 호강하네.”
“그러게나 말이에요.”
“으음, 호강하는 건가? 환자 가지고 장난치는 거 아니고?”
내 말에 어깨를 주무르던 지혜 누나가 팔로 내 목을 안아 조른다.
“건방지긴. 호강하는 거지 그럼.”
“켁. 고맙습니다.”
물론 이 누나도 입원 중인 환자를 진심으로 괴롭힐 만큼 악당은 아니다.
이건 지혜 누나 나름의 서비스라고 봐야겠지.
목덜미에 뭉클한 감촉이 닿고 있으니까.
“지혜 씨. 환자를 괴롭히면 안 돼.”
“선배, 괴롭히다니요. 얘도 좋아하는데. 그렇지?”
“하, 하하……그런가?”
승희랑 승희 어머니도 보는데 이상한 대결은 안 했으면 한다.
왠지 난감해져서 눈을 굴리다 승희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승희 어머니가 마침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진선후 배우님, 저번 일은 감사합니다.”
“저번 일요?”
“광고 건이요. 전화로도 말씀드렸지만, 역시 이런 일은 얼굴 보고 직접 말씀드려야 한다고 생각해서.”
아차. 그건가.
“아……신경 쓰지 마세요. 정말로요. 제가 괜히 오지랖 부린 거니까.”
예전에 승희와 함께 찍은 해피밀 광고.
그때 나는 승희네 사정을 생각해 내 모델료를 승희 쪽으로 많이 양보했었다.
승희나 승희 어머니에게는 비밀로, 우리 소속사의 반대도 무릅쓰고 진행했던 일이었다.
순수하게 내 자기만족을 위해서.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묻힐 일이었는데, 이번 사건 함께 그 일도 뉴스를 타고 말았다.
‘진선후 가짜 스캔들 사건’과 ‘진선후 피습 사건’이 연달아 터진 후, 화제의 중심이 된 진선후의 이름을 광고주 측에서 이용하지 않을 리 없었던 것이다.
각종 매체에서 나와 관련된 거라면 조그마한 이야깃거리도 크게 부풀려서 ‘진선후 미담’으로 포장해 내보냈다.
내가 아동 복지 센터에 계약금 전액을 기부했다든가, 크리스마스에 남몰래 봉사활동을 하고 갔다든가, 길에서 치매 노인을 도와줬다든가, 정작 당사자인 나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사소한 일들마저 뉴스를 탔다.
그리고 그 안에는 승희네 가족 이야기도 들어 있었다.
자식 이름으로 거액의 도박자금을 빌린 못난 친아빠.
그런 승희를 음으로 양으로 지원해준 ‘배역상의 아빠’ 진선후.
너무나 대비되는 두 아빠의 이야기는 여러 매체에서 가십거리로 삼기에 딱 좋은 소재였다.
승희와 승희 어머니는 어찌 보면 ‘진선후 미담’에 이용당했다고도 볼 수 있다.
뒤늦게 뉴스를 전해 들은 나는 그저 민망할 따름이었다.
“오히려 그런 일이 뉴스로 나와서……제가 더 죄송해요.”
승희 어머니도 이번 모델료 건은 뉴스를 보고 알았다고 한다.
화젯거리가 될 거라고 생각한 광고주 측에서 상의도 없이 터뜨린 거겠지. 젠장.
그게 내 이야기만 나왔으면 모를까, 승희 아버지와 관련한 치부까지 한꺼번에 뉴스를 타고 말았으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워낙 화제가 된 탓에 주워 담는 게 불가능한 수준으로 퍼졌고, 까딱 잘못하면 승희의 배우 커리어에도 악영향이 갈 수 있는 문제였다.
“아니에요. 저희한텐 그게 오히려 호재였는 걸요. 이것도 진선후 배우님이랑 연결되어 있으니까 사람들이 좋게 봐준 덕분이에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승희 어머니가 그렇게 말해주시니 나도 조금이나마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었다.
연예인, 유명인이란 본인의 잘못뿐만 아니라 가족의 과실도 연좌로 묶여 피해를 받는 일이 왕왕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소녀 가장 나승희에 대한 동정론이 더 우세했고, 결과적으로는 승희도 나쁜 소문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잘돼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내 탓으로 승희의 앞길이 막히다니, 생각만 해도 눈앞이 캄캄해지는 일이다. 승희는 앞으로 국내 최고의 여배우가 될 인재인데.
“진선후 배우님, 모델료는 제가 일을 해서라도 갚을 테니까…….”
“승희 어머니! 무슨 말씀이세요? 진짜 안 그러셔도 돼요!”
나는 승희 어머니의 말에 침대에서 펄쩍 뛸 지경이었다.
마음 같아선 민폐료라도 내고 싶을 정돈데, 내가 승희 어머니한테 돈을 받다니. 사탄도 울고 갈 일이었다.
“맞아요, 승희 어머니. 어차피 얘 몸값 장난 아니게 오를 테니까 안 갚아도 돼요.”
“몸값이 문제가 아닌데.”
“아무튼. 너 나중에 나한테도 CF 하나 꽂아주라.”
“지혜 선배는 혼자서도 잘 나가잖아.”
내가 요즘 빵 뜬 건 사실이지만 쌓아 온 커리어는 무시할 수 없다.
내가 성공시킨 드라마는 ‘꽃당나’ 하나뿐이고, 이 자리에 계시는 세 여배우의 커리어와는 비교가 되질 않는다. 하다못해 승희조차 커리어는 나보다 훨씬 대단하니까.
“승희 어머니, 그 얘기도 해주세요. 승희 아버지 배 탔다고.”
“배? 승희 아버지가?”
수아 누나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자리에 나 빼고는 다 아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네. 승희 아빠, 참치잡이 어선 탔어요. 이제 정말로 개심하겠다고. 배 타면서 받은 돈은 전부 승희 앞으로 보내왔고요.”
“아……그건, 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참치잡이 어선이라니. 그거 엄청 힘들고 위험한 일 아닌가?
아무 일도 안 하던 승희 아버지가 갑자기 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일인 거 같은데?
“다행이죠 뭐. 그 인간, 이제야 겨우 사람 구실 하는 거니까. 보내준 돈도 빌린 돈에 비하면 어림도 없고요. 고생이라도 실컷 해봐야 해요.”
애증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뭔가 좀, 착잡하다고 해야
할까.
저런 인간이어도 한때 남편이었고 애 아빠였으니까. 승희 어머니도 생각하는 바가 있겠지.
“승희 아빠가 저렇게 정신 차린 것도 다 진선후 배우님 덕분이에요. 감사드려요.”
“아니요……제가 한 일이 있나요, 뭐.”
재차 고개를 숙이는 승희 어머니에게 뭐라 말하기 민망한 기분을 느꼈다.
승희 아버지와는 나도 적게나마 인연이 있었다. 그리 좋은 인연이라곤 할 순 없지만.
괜히 사고라도 당하면 뒷맛이 씁쓸할 거 같은데. 부디 무사히 돌아오셨으면 좋겠다.
물론 그래도 승희 어머니와 재결합은 반대하겠지만.
“응? 아빠, 왜?”
왼손으로 승희 머리를 쓰다듬자 승희가 의아한 듯이 쳐다본다.
“아냐, 아무것도.”
나는 그저 웃었다.
지금은 내가 승희 아버지니까 말이야.
촬영 복귀
퇴원했다.
물론 다 나아서 퇴원한 건 아니다.
의사 선생님이 기를 쓰고 말리는 걸 억지로 우겨서 퇴원한 것이었다.
선생님은 최악의 경우 다시는 오른손을 쓸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나는 그래도 괜찮다고, 잘못돼도 병원 탓은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퇴원했다.
물론 정말로 손을 못 쓰게 되어도 괜찮다는 건 아니다.
병원은 항상 최악의 경우를 알려주고 책임을 피하려고 하는 것뿐이니까.
뭐, 그 말을 들은 엄마가 퇴원을 취소하려 했던 건 문제였지만……그것도 내가 어떻게든 설득할 수 있었다.
손은 여전히 아프다.
뜨겁고, 아리고, 따갑다.
솔직히 처음 베였을 때보다 더 아픈 것 같다.
그래도 이 아픔이 나를 안심하게 한다.
손이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니까.
아무 감각도 없었다면 더 무서웠을 것이다.
“진선후 배우님 화이팅!”
“감사합니다.”
매니저와 함께 방송국 복도를 걷는다.
나를 알아본 많은 사람들이 말을 걸어온다.
“멋있어요!”
“잘생겼어요!”
“꺅!”
“황진우 최고!”
“감사합니다.”
그 말들은 이전보다 훨씬 따뜻하고 애정이 넘친다.
이런 응원을 받고 기분 나쁘다면 사람이 아니겠지.
나는 웃으며 손을 흔들며 인사를 돌려준다.
그럼 팬들은(방송국 안이니까 팬이라기보단 방송 관계자겠지만) 신나서 꺅꺅거리며 방방 뛰는 것이다.
“사진 찍으실래요?”
“네!”
“꺄악!”
그 중 너무너무 간절한 눈빛을 보내오는 사람이 있어서 같이 사진을 찍는다.
“김치~.”
나는 붕대를 칭칭 감은 오른손으로 V사인을 그렸다.
“사진 감사합니다!”
“응원 고맙습니다.”
나와 같이 사진 찍은 여자분은 가보라도 물려받은 듯한 표정으로 사진 찍은 휴대폰을 꼭 끌어안았다.
아마 이 사진도 SNS에 퍼지고 뉴스에도 뜨겠지.
‘진선후, 중상에도 불구 촬영장 복귀, 눈물의 부상 투혼’ 이런 제목으로.
그리고 누나는 깔깔 웃으며 나를 때리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난다. 상처가 울리니까 살살 때려줬으면 좋겠다.
“저, 저도 사진 좀…….”
내가 사진 찍어주는 모습을 보고 다른 여성분이 또 사진을 신청했다.
“진선후 씨! 빨리 가야 합니다!”
그러자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매니저가 남들 들으란 듯이 외친다.
매니저한테는 미안하지만 나도 모른 척하고 갈 수는 없었다.
나는 주위에 큰소리로 외쳤다.
“죄송합니다! 시간 없어서 한꺼번에 찍을게요! 사진 찍으실 분들 이쪽으로 오세요!”
“꺄악!”
조금 당황스러웠다.
토끼굴에 숨어있던 토끼가 튀어나오듯이 곳곳에 숨어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족히 20명은 넘는 거 아닐까.
내 돌출행동에는 같이 온 매니저도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진선후 씨는 환자니까 몸에 닿지 않게 조심해주세요! 상처 터지면 큰일 나요!”
“네~!”
그렇게 부탁하는 게 고작이었다.
……미안. 나도 이렇게 많을 줄 알았으면 안 그랬을 텐데.
“김치~!”
참고로 카메라맨은 우리 매니저였다.
그렇게 나는 20명의 여성들에게 둘러싸여 사진을 찍었다.
실제 해보면 생각보다 부러워할 만한 상황은 아니라는 것만은 알아줬으면 한다.
“꺅! 감사합니다!”
“내 쪽으로도 보내줘!”
“으헝~!”
사진을 찍은 뒤엔 목적은 달성했다는 듯 나에게서 떨어져 서로서로 사진을 전송한다.
그 중엔 감격의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도 있었다.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고 헤어진다.
“촬영 잘하세요!”
“화이팅!”
“최종화 꼭 볼게요!”
손을 흔들며 사람들과 헤어진다.
그리고 매니저의 예정된 잔소리가 날아왔다.
“진선후 씨, 제발 좀 봐주세요. 촬영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혹시 또 사고 일어날지도 모르고.”
“예. 죄송합니다. 오랜만의 촬영이라 흥분했나 봐요.”
나도 안일했다는 건 인정한다.
그런 사건이 있었던 직후인데.
매니저 입장에선 간담이 서늘했겠지.
“그런 것도 진선후 씨 인기 비결이겠지만……손 나을 때까지만 조심하자구요. 제발 저 좀 살려준다고 생각하시고.”
“옙.”
아마 앞으로도 이 비슷한 대화를 몇 번이고 반복하겠지.
하지만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는 건 내 천성 같은 거라 나도 어쩔 수가 없다.
나는 그대로 ‘꽃당나’ 세트장에 들어섰다.
휴. 이제 정말 촬영이구나.
익숙한 세트장의 모습을 보자 겨우 돌아온 게 실감이 났다.
“아빠!”
“승희야!”
가장 먼저 나를 알아채고 달려오는 승희.
승희와는 지난주에 병실에서 보고 오늘이 처음 보는 거였다.
나는 언제나처럼 달려온 승희를 안으려고 팔을 벌렸지만, 왠지 승희는 내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뾰로통한 얼굴로 올려보며 말했다.
“아빠. 안 돼. 손 아프잖아.”
왠지 혼나버렸다.
“그, 그랬지.”
왼손만으로도 승희 정도는 안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면 그것도 위험한 생각이었다.
받쳐주는 손이 없으니 승희가 떨어질지도 모르고.
승희가 떨어지려 하면 무심코 오른손을 뻗어버릴 테니까.
만약 그래서 상처가 벌어지기라도 하면 나 때문에 또 승희가 욕을 먹을 거다.
나도 좀 더 환자라는 자각을 가져야지.
승희는 나에게 안기는 대신, 내 멀쩡한 왼손 손가락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마치 치매 노인을 안내하는 것처럼 내 손을 끌고 앞장서서 걸었다.
“승희가 아빠보다 낫네요.”
같이 온 매니저가 웃는다.
“누구 딸인데요 그럼.”
승희가 나고 크는 데에 내가 한 건 1%도 없지만.
지금은 내가 자타공인 승희 아빠니까 말이지.
딸 키우는 데 드는 노력은 하나도 하지 않고 딸의 귀여움만을 즐긴다.
이게 책임 없는 쾌락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하하.
“아빠. 아직 많이 아파?”
여전히 붕대로 둘둘 감긴 내 오른손을 보고 승희가 걱정스러운 듯이 묻는다.
“아니. 승희 보니까 아픈 거 다 나았어.”
솔직히 아프지만.
승희 앞에서 아픈 티를 낼 수는 없지.
나는 아빠니까!
“진선후 배우님, 어서 오세요!”
“너무 보고 싶었어요!”
“오랜만이에요!”
“화이팅!”
“촬영 수고하세요!”
나를 알아본 촬영 스태프들이 너도나도 한 마디씩 인사한다.
나도 거기에 한 명 한 명 웃으면서 인사를 돌려준다.
“안녕하세요.” “저도요.” “오랜만입니다.” “화이팅.” “고맙습니다.”
뻔한 얘기지만, 사회인은 인사가 기본이니까.
인사 한마디 정도로 촬영장에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살릴 수 있다면 싼 거지.
“잘난 진 배우님께서 드디어 오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