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9화 (229/256)

그중에는 아는 얼굴도 있었다.

사적으로 아는 게 아니라 TV로 봐서 아는 얼굴들 말이다.

“안녕하세요. 혹시 사인 좀 해주실 수…….”

“아, 네. 그럼요.”

어라?

내가 왜 연예인한테 사인해주고 있지?

반대 아닌가?

“저도!”

“팬이에요!”

“언제 한 번 찐남매 튜브에 불러주세요!”

이름만 아는 신인 아이돌 그룹도 있었다.

“아, 저, 그건 제가 하는 게 아니라서.”

“저희랑도 같이 콜라보 공연해요!”

“그것도 제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차례대로 사인을 해준다.

왠지 정신이 없었다.

주로 사인용 용지에 받는 사람이 많았지만, 개인 소지품이나 휴대폰, 본인 앨범에 받는 사람도 있었다.

어째서?

그리고 이건 또 뭐야, 계약서?

뭘 이런 데다 사인을 받으려 그래?

“오빠!”

“미소야.”

마침 미소와 스프링 군단이 왔다.

스프링은 멤버만 4명에 매니저, 공연 실장, 스타일리스트, 메이크업 담당까지 있어서 군단이라고 불러도 무방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들!”

스프링을 보고 후배 아이돌들이 깍듯이 인사한다.

사인을 받은 다른 초대가수들은 인사만 하고 도망쳐버렸다.

“안녕하세요, 스프링 멤버분들. 오늘 공연 잘 부탁드립니다.”

친한 사이라도 공적인 자리인 만큼 나도 깍듯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사회인은 인사가 기본!

“안녕하세요 선후 씨.”

“선후 오빠, 안녕하세요.”

“흥.”

차례로 세아 씨, 진이, 에이.

예상했던 그대로의 반응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다들 예쁘게 차려입었구나.

에이만은 남장 여자 같은 차림이지만 기본 바탕이 되니 그것도 멋있었다.

이 사람이 나보다 멋있는 거 아닐까.

“에이 언니. 지금 우리 오빠 무시한 거야?”

“별로.”

또다시 눈싸움을 시작하는 미소와 에이.

거기에 세아 씨가 끼어들어 싸움을 말린다.

“자자, 둘 다 그만해. 에이도 이제 공연 같이해야 할 텐데 솔직하게 사과하지?”

“……죄송합니다.”

까딱 고개를 숙이며 형식적으로 인사하는 에이. 

그러면서 위아래로 훑어보는 그 눈빛에 나도 별로 기분 좋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싫은 티를 낼 만큼 나도 어린애는 아니지만.

“아니에요. 오늘 공연 같이 잘해봐요.”

에이는 ‘사과했으니 됐지?’하는 태도로 대답도 하지 않고 저리 가버렸다.

“선후 씨, 너무 기분 나빠하진 말아요. 제 고집 못 이겨서 그런 거니까.”

“괜찮아요. 신경 안 써요.”

나는 자주 볼 사이도 아니니까 뭐.

옆에서 분노의 콧김을 뿜고 있는 미소만이 걱정이었다.

“선후 오빠! 우리 끝나고 명동에서 데이트나 할까요?”

진이가 내 팔에 팔짱을 끼며 말한다.

사람 많은 명동에서 데이트라니. 큰일 날 소리를 하는 진이였다.

“진이 넌 내가 무슨 고생을 했는지 알고도 그러니?”

“그런가? 그럼 아예 기정사실 만들어버리는 게 어때요?”

“박수진! 죄송합니다!”

“와아~.”

사고 친 고양이라도 데려가듯이 매니저가 진이를 얼른 데려간다.

저런 걸 보면 어린애 같아서 귀엽지만, 속은 전혀 어린애가 아니란 말이지.

“스프링 여러분, 진선후 씨, 리허설 들어가겠슴다!”

벌써? 

흩어져서 놀고 있던 스프링 멤버들이 리허설이라는 말에 일사불란하게 무대 뒤로 모인다.

나도 얼른 그 뒤에 줄을 섰다.

“기다리셨다가 사회자가 부르면 다 나오시면 돼요. 진선후 씨는 바로 피아노에 앉으시면 됩니다.”

“아, 예.”

공연 실장의 설명을 들으며 동선을 짐작한다.

들어가서 인사, 노래 두 곡 하고 잠시 잡담, 다시 노래 두 곡 하고 인사 후 퇴장. 그리고 돌아와서 앙코르곡.

흠흠. 다섯 곡이나 하는 건가.

빡빡하구나.

『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소녀들! ‘Spring’! 그리고 S대가 낳은 자랑스러운 동문! 배우 겸 피아니스트, 진선후 씨를 모십니다!』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내가 언제 배우 겸 피아니스트가 됐대?

스프링 멤버들이 우르르 앞장서서 나가고, 나는 그 뒤를 따라 무대 위 피아노 앞에 앉았다.

뭔가 본격적이구나.

큰 무대에 수천 개의 간이 의자가 놓인 객석, 카메라도 제법 배치되어 있었다. 

나는 남들 앞에서 해본 연주라고 해봐야 집에서 가족들 앞이나 선하 졸업식 때 친 게 전부니까.

그래서 이런 정식 무대는 더 어색하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른다.

『안녕하세요! 스프링입니다!』

『저는 세아,』 『저는 에이,』 『미소,』 『진입니다!』

『반갑습니다!』

『여기서 진선후 씨가.』

『안녕하세요, 진선후입니다.』

『네. 좋아요. 아, 간단하게 피아노 연주하면서 인사해주실 수 있나요?』

『아, 네.』

-도로동동, 동.

『안녕하세요, 진선후입니다.』

『네! 좋습니다! 그렇게! 아 너무 멋있으시네!』

호들갑이 심한 사회자였다.

그렇게 노래 순서를 확인하거나 준비한 멘트를 떠들거나 하면서.

생애 첫 공연의 리허설은 간단히 마쳤다.

이번 공연은 즉흥성이 강하긴 하지만 일단은 대본도 있었다.

나는 공연 자체가 처음이지만, 대본을 읽고 따라 하는 건 내 전공이라고 할 수 있다.

대본 대로 피아노 반주자를 연기한다고 생각하면 어려울 것도 없었다.

스프링 멤버들이야 워낙 이런 일에 이골이 나서 내가 걱정할 것도 없었다.

미소도 평소와 달리 프로로서의 실력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고.

다시 한번 반할 것 같았다.

“리허설은 여기까지입니다. 10분 뒤부터 관객 입장이고 30분 뒤엔 시작이니까, 그 전에 준비 다 끝내주세요.”

“네~.”

무대 뒤로 내려가면서 보니 관객석에 연이가 있었다.

지금은 관계자 외 출입금지인데, 어떻게 있는 거지?

연이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으므로 손을 흔들어준다.

그러자 연이는 이전에 따로 만났을 때보다 100배 정도는 더 기쁘게 손을 흔들어 돌려주었다.

흠. 저런 게 팬질이라는 걸까.

잘 모르겠네.

그리고 10분 뒤.

공연장에 관객이 입장하기 시작했다.

‘와~ 와~’ 하는 소리가 조금 떨어진 천막까지 들려왔다.

“오빠. 오빠랑 같이 무대에 선다고 생각하니까 흥분돼.”

시작도 하기 전에 텐션이 한참 오른 미소.

아드레날린이 뿜뿜 뿜어져 나오는 것 같다.

“나도야. 흥분보다 긴장이 좀 더 강할지도 모르겠지만.”

반면에 나는 손가락이 좀 굳어서 걱정이었다.

아무리 정신병은 많이 나았다지만, 만 명 단위로 모여있는 곳에서 피아노를 친다는 게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오빠. 공연 잘 끝나면 집에 가서 이 옷 입은 그대로 할까? 조금 땀 냄새날지도 모르지만.’

소곤소곤 속삭이는 미소.

미소의 입꼬리가 기대로 올라가 있었다.

‘좋지.’

아마 내 표정도 미소와 비슷할 것이다.

미소의 것이라면 땀 냄새마저 사랑할 수 있었다.

‘세아 언니랑 진이한텐 비밀이야. 알면 따라오려고 할 테니까. 에이 언니한테두.’

‘당연하지.’

미소의 당근 작전 덕분에 긴장이 가셨다.

좋아! 최고의 무대를 보여주지!

그리고 상으로 미소와 최고의 섹스를 하는 거다!

지금 나는 어느 때보다도 의욕에 넘치고 있었다.

“스프링 여러분, 진선후 씨, 준비해주세요.”

“네~!”

“오빠. 가자.”

“응.”

미소에게 손가락을 잡혀 무대 뒤로 이동한다.

왠지 두근거린다.

남들 앞이니까 남매라도 손은 잡을 수 없다.

나와 미소 사이에선 최소한의 접촉, 그러나 사람들의 눈을 피하는 선에서는 최대한의 접촉이었다.

내 손가락을 쥐고 종종걸음으로 걷는 미소의 뒷모습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무사히 끝내고 돌아가면, 잔뜩 사랑해줘야지.

……나는 그렇게 열심히 플래그를 세우고 있었다.

스프링과 합동 공연, 그리고.... 

『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소녀들! ‘Spring’! 그리고 S대가 낳은 자랑스러운 동문! 배우 겸 피아니스트, 진선후 씨를 모십니다!』

사회자의 부름에 스프링 멤버들이 먼저 무대로 올라서고, 그 뒤를 내가 따른다.

“오빠, 화이팅.”

작게 주먹을 쥐어 보이는 미소.

나는 미소의 응원을 받으며 무대에 올라섰다.

-꺄아악! 선후 오빠! 진선후! 꺄악! 꺄악! 

무대에 오르자 들려오는 머리가 어지러워질 정도로 큰 환호.

나는 떨리는 가슴을 안고서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관객석의 광경은 장관이었다.

관객 수는 족히 2, 3만 명은 되지 않을까.

이렇게 많은 사람은 태어나서 본 적이 없었다.

그 많은 사람이 전부 나만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

게다가 그중 절반은 손에 휴대폰이나 카메라를 들고 영상을 촬영하고 있었다.

멀미가 날 것만 같았다.

『안녕하세요! 스프링입니다!』

『저는 세아,』 『저는 에이,』 『미소,』 『진입니다!』

『반갑습니다!』

스프링 멤버들이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차례차례 인사한다.

리허설대로였다.

이어서 나도 살짝 피아노를 두드리며 인사했다.

-도로동동 동.

『안녕하세요, 진선후입니다.』

-꺄아아아──!!

……어디서 살인사건이라도 일어난 걸까.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열광적인 반응이었다.

『S대 학생 여러분! 오늘 봄축제 재밌게 즐기고 가 주세요!』

세아 씨의 인사와 함께 반주를 시작한다.

첫 곡은 요즘 제일 잘 나가는 ‘스쿨 러브’.

나도 많이 쳐봐서 자면서도 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진 곡이었다.

『옆자리의 네가 너무 신경 쓰여♬』

노래 내용은 여고생의 첫사랑 얘기라 대학 축제와는 안 맞을지도 모르지만.

나도 멤버들도 관객들도, 다들 불과 얼마 전까진 고등학생이었던 이들이다.

많든 적든 공감 가는 이야기겠지.

밝고 통통 튀는 노래도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위한 첫 곡으론 안성맞춤일 것이다.

『어떻게 할까~ 좋아한다 말할까~』

활달하고 아기자기한 안무.

반주하는 나조차 절로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귀여운 노래 가사.

관중들의 반응도 최상.

스프링의 무대는 스타트부터 절호조였다.

진이의 솔로 보컬 파트, 에이의 랩 파트까지 지나.

이번 공연의 첫 곡 ‘스쿨 러브’는 완벽하게 마침표를 찍었다.

『바로 다음 곡 들려드릴게요.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Neverlove’ 들려드리겠습니다!』

-꺄아아!!

두 번째 곡이 바로 이어진다.

한껏 끓어오른 분위기를 식히지 않기 위해서, 스프링의 곡 중에서도 가장 인기 많았던 네버러브를 선곡했다.

그것도 ‘네버러브-진선후 어레인지 버전’이다.

진선후 어레인지 버전…… 부끄럽지만 공식으로 그렇게 불린다고 한다.

찐남매 튜브가 개설되기도 전, 미소의 SNS에 올리기 위해 찍었던 영상 덕분이다.

화려하고 다채로운 네버러브 원곡의 반주를 내 피아노 하나만으로 커버해야 했기 때문에 일부러 피아노에 힘을 줘서 편곡했었다. 절정 부분에는 피아노 솔로 애드립 파트까지 들어간다.

내 모교에서 하는 행사라 나한테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기회를 준 거겠지.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솔직히 좀, 부끄러웠다.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연주하는 줄 알았으면 사양했을 텐데.

조금 후회되는 마음도 있었다.

『왜 너 같은 남잘 만나서, 내가 이렇게 힘들어?』

파워풀한 안무. 에너지 넘치는 보컬.

4명이 모두 모인 완전체 스프링이 역대 최고 인기곡을 선보인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무대는 완벽했다.

거기서, 내 피아노 독주가 더해진다.

-꺄아아아아── 

피아노 소리가 묻히지나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커다란 함성.

미소와 스프링 멤버들은 항상 이런 환경에서 공연하는 걸까.

현장의 압박감을 몸으로 느낀다.

아이돌에 대한 존경심이 한층 더 솟았다.

그런 스프링의 공연을 내가 망칠 수는 없지.

나는 관객들의 환성에 묻히지 않도록 열정적으로 피아노를 두드렸다.

이상하다.

-두근, 두근.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분명 음악 소리와 피아노 소리, 관객의 환성에 귀가 멀어버릴 정도로 소란스러운데.

지금은 왠지 내 심장의 고동만이 들리고 있었다.

정말로 귀가 멀어버린 건 아니겠지?

나는 무아지경으로 피아노를 쳤다.

옆머리에 땀이 흘러서 간지럽다.

아니. 다른 데 신경 쓰지 마라.

피아노에 집중해.

하지만.

무언가가 신경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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