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분에 각본과 결말까지 대대적으로 수정이 필요한 상황이라 여러 스탭들이 갈려 나가고 있다고 한다.
나야 받은 대본 그대로 연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그리 힘든 일은 없었다.
엄마와 함께할 수 있는 드라마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테니 화수가 늘어나는 건 나로선 오히려 반가운 일이었다.
‘꽃당나’ 드라마 촬영 외의 내 스케쥴은 대부분 CF 촬영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대기업부터 생전 처음 들어보는 벤처 기업까지, 나를 모델로 원하는 기업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그 모든 요청을 검토하고 협의하는 데에 J-up 이사님 이하 전 직원이 달라붙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덕분에 일은 많지만 그만큼 보너스가 넘치게 나온다며 직원들은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렇게, 드라마 찍고 CF 찍고 집에 돌아와 가족들과 사랑을 나누고.
그런 평화로운 날들 속에 작은 사건 하나가 있었다.
“오?”
주차할 자리가 마땅치 않아 공동현관문에서 먼 곳에 주차하고 오는 길.
웬일로 미소가 지하 주차장 한쪽에서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멀리서 조심조심 접근해봤다.
혹시 중요한 이야기 중일 수도 있는데, 방해하면 안 되니까.
혹시 기자는 아니겠지?
‘그 사건’ 이후로 연예인의 집 앞에서 기자가 기다리는 행위는 금기시되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도 우리 집에 찾아오는 간 큰 기자는 없을 것이다.
그럼 누굴까?
조금 가까워져서 보니 미소의 표정을 알아볼 수 있었다.
왠지 그리 탐탁지 않아 보이는 표정.
곤란한 부탁을 들은 듯 거절하려 하지만, 상대방이 계속 매달려서 난감해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흠. 뭘까.
이런 건 내가 나서도 되는 거겠지? 오빠니까.
잠깐 인사라도 하는 척하면서, 보험 권유 같은 거라면 쫓아버리면 된다.
이럴 때야말로 오빠의 위엄을 보여주자.
나는 그렇게 마음먹고 다가갔다.
“미소야.”
“아! 오빠……?!”
미소의 그런 표정은 처음 봤다.
연기로 치면 바람피우다 걸린 아내의 표정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미소가 바람피우다 걸렸다는 의미는 아니다.
상대는 여자였으니까.
미소보다 작은 키에 조금 통통한 체형.
단발머리에 두꺼운 뿔테 안경.
어쩐지 낯익은 옆모습이었다.
“어.”
아니. 낯익은 정도가 아니었다.
돌아본 정면 얼굴을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연이야?”
연이. 지연이. 이지연.
내가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사귀었던 여자친구였다.
그 뒤로 여자친구가 없었으니까 처음이자 마지막 여자친구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
연이도 나를 알아봤다.
표정이 바뀐다.
이쪽도 왠지 바람피우다 걸린 남편 같은 표정이었다.
“연아.”
내가 부르자.
연이는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나한테서 도망친 것이다.
“어?!”
“오, 오빠, 어서 와?”
미소가 인사하지만, 나는 미소가 아니라 연이를 쫓아갔다.
야생동물이 도망치는 사람을 공격하는 것처럼, 도망가는 여자를 쫓아가는 건 남자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연이를 쫓았다.
“연아!”
연이는 체력도 약하고 몸도 날래지 못하다. 순식간에 거리는 좁혀졌다.
어째서 연이가 여기 있는 걸까, 왜 도망치는 걸까.
그런 생각이 하나도 정리되기 전에 연이는 잡힐 것 같았다.
“꺅!”
……게다가 연이는 넘어지고 말았다.
뛰는 게 익숙하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급하게 달리니까 그렇지.
아파트 주차장 바닥에 불쌍하게 엎드린 연이에게 다가간다.
“연아, 괜찮아?”
“아……우우…….”
……이럴 땐 어떻게 하지?
연이와는 안 좋게 헤어진 건 아니지만, 일단은 차이고 헤어진 전 여자친구다
일으켜주는 것도 불편해하는 거 아닐까.
연이를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연이와 알고 지냈던 과거의 소심했던 진선후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낀다.
일단 나는 손을 내밀어 보았다.
“괜찮아? 일어설 수 있겠어?”
“……응.”
연이는 아픈 것보다 부끄럽다는 감정이 큰 것 같다.
다 큰 처자가 뛰다가 엎어졌으니 당연한 거겠지.
그래도 연이는 내 손을 잡고 일어나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었다.
“아……안녕, 선후야…….”
“오랜만이네.”
작고 통통한 체형에 소박하고 귀여운 인상.
예전과 조금도 변하지 않은 듯한 연이의 모습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어디 좀 앉아서 이야기할까? 걸을 수 있겠어?”
“……응.”
잡은 손을 새삼스레 놓기도 애매해서, 그대로 연이의 손을 잡고 걷는다.
생각해보면 연이와 손을 잡는 건 이번이 두 번째구나.
그래도 한 때 여자친구였는데.
초등학생보다 순수했던 그 시절을 떠올려 웃음이 났다.
* * *
연이는 이전 찐남매 튜브에서도 언급했던 고등학생 시절 사귄 내 전 여자친구다.
까놓고 말해서 미인은 아니다.
하지만 연이는 정신병 수준으로 소심했던 나와도 어울려줄 만큼 착했다.
선생님이 애들한테 뭐라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대부분이 멀리서 수군거리기만 할 뿐,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주는 사람은 학교에서 연이가 유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에서 유일하게 말을 걸어주는 여자 사람 친구.
아싸 찐따였던 내 안에서 연이를 향한 새로운 감정이 싹튼 건 예정된 수순이었겠지.
무엇보다도……연이는 가슴이 컸다.
아마도 반에서 제일. 학교에서도 손꼽힐 만큼.
가슴 큰 가족들 사이에서 번뇌하던 나에게 그것 이상으로 매력적인 어필 포인트는 없었다.
결국 내가 먼저 연이에게 고백해서 사귀게 되었다.
뭐, 며칠도 안 가 깨졌지만.
아마 연이가 고백을 받아준 것도 내가 거절당하면 상처받을까 봐 그랬던 거겠지.
당시의 나와 사귀는 메리트 같은 건 전혀 없다고 해도 될 정도였으니까.
누나는 지금도 날 찐따, 찌질이라고 부르지만, 그때의 나와 비교하면 캡사이신 원액과 신라면 정도로 ‘찐’의 농도가 다르다.
연이한테도 괜히 흑역사를 남긴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연이에 대한 설명은 대충 끝내기로 하고.
지금 문제는 연이가 왜 우리 아파트에서 미소와 이야기하고 있었느냐 하는 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소와 연이 사이의 연결고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연아. 마셔.”
“응……고마워.”
나는 편의점에서 사 온 따뜻한 캔커피를 따서 연이에게 건네고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여긴 어쩐 일이야? 연이도 이 아파트 살았어?”
“아니……그건 아닌데…….”
우물쭈물, 대답을 망설이는 연이.
나는 캔커피를 홀짝이며 대답을 기다렸다.
언젠가 노벨피아에서 본 ‘날 차버린 전 여친이 내게 집착한다’라는 소설이 떠올랐다.
제목 그대로 무능한 주인공이 히로인에게 차였지만 뒤늦게 성공해서 히로인이 후회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 히로인 캐릭터와 연이의 캐릭터가 너무나 안 어울렸기 때문이다.
나와 연이가 헤어진 건 여러 연예인들이 결별할 때 상투적으로 쓰는 말처럼 ‘성격 차이’나 ‘서로 다른 길을 걷기로 했다’ 정도로 말할 수 있다.
서로 죽고 못 살 만큼 사랑했던 것도 아니고 헤어질 때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니다.
그냥 풋풋하게 사귀었다가 풋풋하게 헤어진 것뿐.
……혹시 그게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건 아니겠지?
“선후야…….”
“응.”
겨우 입을 열어주었다.
끈기 있게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미안해……이렇게 찾아오려던 건 아니었는데…….”
“괜찮아. 천천히 이야기해 봐.”
나는 기다린 김에 좀 더 기다리기로 했다.
연이는 원래 이야기에 요령이 없어서 대화가 이리저리 샛길로 새곤 한다.
……내 회화 스킬이 떨어져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이번에도 이야기가 한참 빙빙 돈 후에야 본론을 들을 수 있었다.
“어?! 연이 네가 찐남매 튜브 편집자였어?”
“응…….”
신기한 인연도 다 있었다.
연이가 우연히 우리 유튜브 편집자가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아니, 이건 우연이 아니겠지.
연이도 내 동생이 미소라는 건 알고 있었고.
나와 미소가 운영하는 채널이라는 걸 알고 편집자로 지원했다고 보는 게 맞을 거다.
“연아, 혹시…….”
연이가 그럴 캐릭터가 아니란 건 알지만.
연이가 나랑 헤어진 걸 후회해서 내 주위를 맴돌며 집착하다가 피폐해진 건 아닐까.
그 소설의 영향 때문인지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나랑 헤어진 거 후회하니?”
“아니?”
“하아~.”
단호한 연이의 대답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지금 나는 연이와 사귀고 싶어도 사귈 수 없다.
새삼 여친을 만들기엔 너무 유명해져 버렸고.
무엇보다 이미 엄마한테 임신 예약까지 걸어놓은 상태고.
솔직히 지금은 집안에 ‘4교대 착정 공장’이 가동 중이라 다른 여자를 만날 틈이 없다.
그렇다고 연이가 내 주위를 맴돌며 피폐해지길 바라는 것도 아니다.
연이와는 결코 안 좋게 헤어진 게 아니니까.
연이는 평범하게 자기 행복을 찾아갔으면 한다.
“선후한테는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나는 팬질하는 게 좋아.”
“팬질?”
“응. 사실은 이렇게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도 좀……거북해. 이미지가 깨지니까.”
“큭!”
설마 후회-집착-피폐 루트는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만나는 것 자체가 싫을 거라곤 생각 못 했다.
마음이 아프다…….
충격받은 듯한 나를 보고 연이가 작게 웃었다.
“이상하지? 보통 팬이라면 만나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한 건데.”
“그……렇긴 하지. 그래도 이해는 가. 나도 좋아하던 아이돌 직접 만나보고 실망한 적이 있으니까.”
“그래?”
“응. h…….”
“잠깐만. 말하지 마. 이미지 깨지니까.”
“……알았어.”
“선후랑 사귀었을 때 깨달았어. 나는 직접 만나거나 사귀는 것보단 멀리서 지켜보면서 응원하는 게 더 어울린다고.”
“……그래…….”
거기까진 잘 이해가 안 되지만.
사람한테는 그 사람만의 사랑하는 방식이 있는 거니까.
거기에 대고 내가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 누구처럼 나한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저기, 그럼 여긴 왜 온 거야?”
“응……실은……이번 봄축제에 선후가 와줄 수 있나 해서.”
“축제?”
“우리 대학 축제. 나도 S대거든.”
“아.”
연이도 S대였구나.
학교에서 한 번쯤 마주쳤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항상 사람들 눈을 피해 다녀서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거기에 초청 가수로 스프링 부르기로 했는데, 혹시 선후만 괜찮으면 스프링이랑 같이 피아노 반주랑 사인회 같은 거 해줄 수 있을까 해서……우리 학교에도 선후 팬 많으니까…….”
“흠…….”
나는 괜찮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돈을 떠나서 의미 있는 일이니까.
S대는 잠시나마 내가 다녔던 학교이니 나름 소속감도 있다.
스프링과의 합동 공연도 인터넷 방송용 외엔 해본 적이 없었다. 미소와 처음으로 한 무대에 설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는 것도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지만 졸업식 때 해보니 의외로 별거 없었다. 연주에 노래까지 멀쩡히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축제에 참여하는 데에 나 개인적인 문제는 없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건 연이와 이야기할 때 미소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는 점이다.
미소라면 환영할 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는데.
뭔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는 걸까.
“나는 괜찮은 거 같은데…….”
“정말?”
내가 그렇게 입을 열자 연이가 순수하게 기뻐한다.
하지만 내 이야긴 그게 끝이 아니다.
“그런데 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는 일이라서.”
“아. 역시 그렇지…….”
“우리 소속사랑도 이야기해 봐야 하고, 스프링 쪽이랑도 이야기해 봐야 하고.”
“응…….”
“일단 너무 기대는 하지 말고 기다려 봐. 이야기해 보고 알려줄게.”
“……응.”
“연락은 미소 통해서 하면 되지? 소속사에서 ‘그 일’ 이후로 여자랑 사적인 연락은 못 하게 하거든.”
“이해해. 그리고 나도 그렇게 해주면 더 좋아.”
그 뒤론 연이와 잡담만 조금 하다 헤어졌다.
학교에 내 팬클럽도 있다나 뭐라나.
의외로 상당히 메이저한 클럽인 데다 내가 휴학한 뒤로 다들 보고 싶어 하니까 꼭 와줬으면 한다고도 했다.
의외로 가까운 곳에 내 팬이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 낯간지러웠다.
그렇게 오랜만에 만난 연이를 배웅한 후.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미소에게도 사정을 듣기 위해서.
몸은 답을 알고 있다
“아앙! 오빠아! 아아아앙?!♡”
나는 미소에게 물었다.
연이와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하지만 미소는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았다.
대충 얼버무려 넘어가려 했다.
그래서 나는 미소의 입이 아닌 몸에다 물어보기로 했다.
“하앙!? 오빠! 안 돼! 안 되엣──?!!♡”
다시 한번 미소에게 오르가즘이 찾아왔다.
꽉 수축하는 미소의 질.
유연하게 뒤로 꺾이는 허리.
너무 느껴 한심하게 일그러진 얼굴.
조금 심했나, 속으로 혼자 반성하며 미소의 꺾인 등을 쓰다듬는다.
“하응……!”
후배위의 매력은 여자가 느낄 때 보여주는 이 등의 라인이라고 생각한다.
예술적인 곡선의 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