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3화 (213/256)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존재라는 걸 알면서도 동경해버리고 만다.

나는 한눈에 진소영 선수에게 제압당하고 말았다.

“누나! 오늘 선하 온다고 했잖아!”

“뭐 어때. 앞으로 매일 볼 건데.”

와.

크다.

걸을 때마다 부들, 부들, 하며 가슴이 떨린다.

F컵? G컵? 아니면 그보다 더 커?

그런 만화에서나 볼 법한 가슴이 거기에 있었다.

미소 언니도 컸지만, 역시 ‘진짜’는 차원이 다르구나.

그나저나 집안이라고 해도 저렇게 가슴을 내놓고 다니다니.

오빠가 봐도 아무렇지도 않나?

혹시 셀럽들은 이런 게 당연한 건가?

“누나! 옷 좀 입어!”

그렇지도 않은 거 같다.

오빠는 심하게 당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오빠가 진소영 선수의 알몸을 봐서 그런 게 아니라 내가 보고 있어서 당황한 거 같았다.

오빠한테는 익숙한 장면이란 거겠지.

“내 집에서 내가 벗고 다니겠다는데, 네가 왜?”

오빠가 뭐라 하든 진소영 선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너무나 당당한 태도에 나도 절로 설득당하고 말았다.

진소영이라면 집에서 발가벗고 있어도 인정이지, 하고 납득해버린다.

나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추고 당당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김선하입니다.”

“흠.”

유심히 내 얼굴을 관찰하는 진소영 선수.

나는 사자 앞의 고양이가 된 기분으로 바짝 얼어있었다.

“너, 고양이 같네.”

“네……?”

마침 고양이와 사자를 떠올리고 있던 나는 마음을 읽힌 것 같아 흠칫 놀랐다.

“페르시안의 숲? 내 후배가 키우는 그 고양이랑 닮았어.”

“흡!”

진소영 선수는 보기보다 유머러스한 사람이었다.

나는 터지려는 웃음을 참느라 안간힘을 써야 했다.

“누나. 그게 뭐야. 페르시안이면 페르시안이고 노르웨이 숲이면 노르웨이 숲이지. 부끄럽게 그러지 좀 마.”

오빠가 정정하지만 진소영 선수는 여전히 들은 척도 안 했다.

‘내가 페르시안의 숲이라면 페르시안의 숲이다’라는 듯한 당당한 태도였다.

멋있었다. 여자들이 진소영을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디.”

진소영 선수가 내 얼굴에 손을 뻗는다.

……맞는 건가?!

설마 그럴 리는 없다고 이해는 하고 있으면서도, 나는 지레 겁을 먹고 눈을 꼭 감았다.

조물.

조물조물.

……왠지, 양손으로 내 볼살을 조물거리는 진소영 선수였다.

“되게 귀엽다 너.”

“아! 누나! 하지 말라니까!”

오빠가 진소영 선수의 뒤에서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양팔을 제압해 나한테서 억지로 떨어뜨린다.

그런데도 진소영 선수는 오빠한테는 신경도 쓰지 않고 나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마침 잘됐어. 이 집에는 말 안 듣는 동생만 둘이나 있어서 짜증 났는데. 언니 말 잘 들으면 이 언니가 용돈 줄게.”

“아, 에, 네. 에?”

“그래. 착하지. 언니라고 불러봐.”

“언니……소영 언니?”

와.

얼떨결에 진소영 선수한테 언니라고 불러버렸다.

미소 언니도 언니라고 불렀지만 그거랑은 또 느낌이 달랐다.

뭔가 범접할 수 없는 세계에 발을 디딘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옳지. 야. 진선후 네 카드 이제 얘 줘.”

“카드?”

“내가 준 카드 말이야. 넌 이제 돈 버니까 필요 없잖아.”

“어……그건 그런데.”

카드? 무슨 카드? 신용 카드?

나한테 신용 카드를 준다고?

“선하 너, 앞으로 필요한 거 있으면 언니 카드로 사. 언니는 돈 많으니까 돈 걱정하지 말고 제일 비싼 거로 사고. 네 오빠가 잘난 척하면서 끌고 다니는 외제차도 다 이 언니가 사준 거거든? 너도 면허 따면 하나 뽑아줄 테니까 마음에 드는 거 하나 골라 놔.”

“어, 에.”

“누나, 선하는 내가.”

“이 시키가.”

-퍽.

진소영 선수가 오빠 뒤통수를 후려쳤다.

우와, 방금 수박 쪼개지는 소리 났는데.

오빠는 괜찮은 걸까?

“찬물도 위아래가 있지. 어딜.”

“아! 누나! 선하도 보고 있는데!”

“보고 있으면 뭐? 안 맞을 줄 알았냐?”

“아! 좀! 들어가!”

오빠가 진소영 선수를 방으로 떠밀어 넣는다.

“대신 넌 말 잘 들어야 한다? 네 오빠 이러는 거 보고 따라 하면 안 돼! 알겠지?”

진소영 선수는 방에 들어가면서도 나한테 그렇게 소리쳤다.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휴.”

진소영 선수를 방에 밀어 넣은 뒤, 오빠가 진땀 뺐다는 표정으로 돌아왔다.

“선하야 미안. 원래 저런 사람이 아닌데.”

곤란해하는 오빠를 보며, 나는 일말의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야, 오빠.”

이런 게 진짜 남매란 거겠지.

서로 때리고 맞는 것도 자연스럽고.

알몸을 보여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하고 싶은 말은 뭐든지 거리끼지 않고 하는.

이런 게 진짜 남매인 거겠지……? 

오빠와 나처럼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그런 서먹한 남매와는 다른, ‘진짜 남매’를 과시 당한 것 같아서.

조금 슬펐다.

“선하가 왔니?”

아.

임신혜 배우다.

임신혜 배우는……네글리제?

그런 속이 비치는 잠옷을 입고 있었다.

왠지 진소영 선수의 알몸을 봤을 때보다 더 야하게 느껴졌다.

진소영 선수에게는 없는, 몹시도 고혹적인 모습이었다.

“어, 엄마.”

오빠도 진소영 선수의 알몸을 봤을 때보다도 더 당황하고 있었다.

나 때문에 그러는 걸까.

로마에 가선 로마법을 따르라고, 이 집에선 이런 모습이 당연한 거라면 나도 별로 말할 생각은 없다.

내가 따라 할 자신은 없지만, 그렇다고 남의 집 법을 바꾸려 들 정도로 내가 잘난 인간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안녕하세요. 김선하입니다.”

……솔직히, 임신혜 배우는 진소영 선수보다도 더 대하기 거북했다.

오빠를 데려간 사람이라는 사적인 감정도 있었지만, TV에서 보여주는 악녀 이미지가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그건 드라마에서 꾸민 캐릭터일 뿐이란 건 알지만, 이미지란 게 쉽게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

“어서 오렴.”

진소영 선수와 내가 사자와 고양이라면, 임신혜 배우와 나는 황새와 뱁새처럼 느껴졌다.

행동 하나하나가 우아하고 품위 있었다.

이런 게 여배우의 품격이라는 걸까.

임신혜 배우 앞에서 나란 존재는 너무나도 초라하게 느껴졌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분간 잘 부탁드립니다.”

적어도 야무지게 보일 수 있도록 또박또박 인사했다.

그러자 임신혜 배우는 웃으며 이쪽으로 다가온다.

왠지 술에 취한 것처럼 비틀비틀. 다리에 힘이 없어 보인다.

이번 일로 충격을 많이 받으셨다더니, 그래서 그럴까?

“미안해. 엄마가 미리 마중 나왔어야 했는데. 선후가 아침까지 놓아주질 않아서…….”

“엄마!”

“에.”

가까이 다가온 임신혜 배우에게서 물씬 풍기는 냄새.

그건 술 냄새가 아니었다.

언젠가 수학여행 가는 길에 숲에서 풍겨왔던 그 냄새.

조금은 기분 나쁘고 역겨웠던, 그런데 이상하게 친구들은 킥킥대며 웃었던.

그때 맡은 밤꽃 냄새와 닮아있었다.

왜 웃냐고 묻자 친구는 말했다.

‘이거 정액 냄새잖아’라고.

그래. 이건 정액 냄새였다.

……난 몰라! 어떡해!

오빠 말고는 여자 가족뿐인 줄 알았는데 남자도 있었나 봐!

나는 어렸을 적 기억이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왠지 모르게 남자는 무서워했다.

그래서 중고등학교도 여중 여고에 대학교도 여대에 입학 예정이다.

나에게 있어 유일한 예외가 오빠였다.

이 집에도 오빠 말고 다른 남자는 없는 줄 알았고, 그래서 오겠다고 한 거였는데.

다른 남자가 있는 줄 알았으면 안 왔을 텐데…….

오빠는 왜 미리 말해주지 않은 걸까?

“어머. 아직 말하면 안 됐니? 미안해, 엄마가 눈치도 없이.”

“엄마! 제발 들어가!”

진소영 선수와 마찬가지로 오빠는 임신혜 배우도 등을 밀어 방에 억지로 넣는다.

임신혜 배우는 오빠에게 떠밀려 가면서도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선하야, 앞으로 잘 부탁해. 내 집이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있어.”

“에.”

진소영 선수랑 성격은 완전히 달라 보이는데, 이상한 부분은 또 닮아있었다.

역시 모녀란 걸까.

“미안. 선하야. 신경 쓰지 마.”

진소영 선수 때 이상으로 당황해 보이는 오빠.

“뭘 신경 쓰지 마? 정액 냄새?”

“윽.”

아니나 다를까.

오빠는 숨기고 있었던 사실이 들킨 것처럼 당혹스러워했다.

“오빠, 혹시 다른 남자도 있어?”

“아니……그게…….”

어째서 오빠는 대답을 못 하는 걸까.

안 그래도 불편한데, 모르는 남자까지 있다면 굳이 여기서 지낼 생각은 없었다.

오빠가 날 생각해주는 건 아니까 확실하게 말해줬으면 했다.

서로 괜히 불편해지지 않게. 

“후아~ 피곤해!”

마침 한발 늦게 미소 언니가 돌아왔다.

미소 언니는 밖에 남아서 기자들의 시선을 끌어주고 돌아온 참이었다.

우리가 무사히 기자들을 피해 집에 들어올 수 있도록.

“응? 왜들 그러고 있어?”

왠지 분위기가 이상한 나와 오빠를 보고 미소 언니가 묻는다.

“언니. 혹시 이 집에 다른 남자도 있나요?”

“응응?”

미소 언니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와 오빠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왠지 빙그레 웃었다.

“선하야. 잠깐 언니 따라와 봐.”

그리고 미소 언니는 내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

찐튜브 방송에서도 몇 번 나온 적 있는 미소 언니의 방이었다.

“선하야. 너 오빠랑 어떤 사이가 되고 싶어?”

미소 언니는 내 손을 놓고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떤 사이요?”

언니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오빠 동생 사이에 오빠 동생 말고 어떤 사이가 있단 말인가?

“선후 오빠랑 지금 관계로 만족해? 서먹서먹한 오빠 동생 관계로? 아니면 좀 더 허물없는 가족처럼 지내고 싶어?”

미소 언니의 장난스러운 눈빛은 내 깊은 속마음까지 꿰뚫어 보는 듯했다.

“아니면 그보다 더 깊은 관계는 어때? 이를테면, 남녀 관계라든가?”

두근.

두근.

두근.

친동생 김선하 - 남매의 외출, 그 뒷면에서 2 

-쏴아아.

따뜻한 샤워 물을 맞으며.

나는 미소 언니가 나가기 전에 해준 조언을 떠올린다.

‘대답 안 들어도 표정만 봐도 알겠네. 선하가 오빠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렇게 내 얼굴에 티가 난 걸까.

얼굴이 빨개지는 걸 감출 수가 없었다.

‘아무 걱정하지 마, 선후 오빠에 관한 건 내가 전문가니까. 선하는 이 미소 언니 말만 들으면 돼! 알았지? 미소 PD가 전부 프로듀싱 해줄 테니까!’

선후 오빠의 동생으로 10년을 넘게 살아온 미소 언니.

찐남매 튜브에서 보여주는 모습만 봐도 언니와 오빠가 얼마나 서로를 잘 아는지 알 수 있다.

전에는 그런 모습을 보면 미소 언니가 부러워서 어쩔 수가 없었다.

원래는 내가 있었어야 할 자리.

선후 오빠의 동생이라는 자리를 미소 언니에게 빼앗긴 듯한 기분에 원망스러워 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미소 언니가 있다는 게 너무나 다행스러웠다.

나 혼자서는 절대 이런 용기를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오빠와 여동생이라는 관계는 절대 불변이라고 믿고 거기에서 만족했을 것이다.

미소 언니는 그렇게 멍하니 멈춰버린 내 등을 밀어주었다.

남매라는 벽 너머에 내가 모르는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우선 이거로 머리카락 외의 털은 전부 제거해. 나중엔 남자 취향에 맞춰 기르더라도, 처음에는 순수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좋아!’

센터에서도 학교에서도 가르쳐주지 않는 이야기.

친구들에게서도 그런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진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란 건 이런 거 아닐까.

‘특히 여기랑 여기랑 여기. 이 세 군데는 한 가닥이라도 남기면 안 돼. 수북한 것보다 한 가닥만 남아있는 게 남자한테는 더 흉물스럽게 느껴질 수 있으니까, 꼼꼼하게! 확실하게!’

으으……이런 곳까지…….

하긴. 남녀가 그런 일을 한다는 건 이런 곳까지 보여준다는 거겠지?

이렇게 당연한 일을 생각조차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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