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8화 (188/256)

당연하지! 가슴은 무조건 큰 게 좋다! 가슴은 권력! 대대익선!! 

……라고 큰소리로 외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에게 그런 배짱은 없다.

“……아니. 크다고 무조건 좋은 건 아니야. 중요한 건 마음이지.”

“으응?”

“물론 가슴이 큰 걸 좋아하는 남자도 있겠지만 모든 남자가 그런 건 아니야. 우연히 좋아하게 된 여자가 가슴이 컸다거나, 반대로 좋아하게 된 여자가 가슴이 작았다거나 하는 거지. 단지 가슴이 크다는 이유로 그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는 없어.”

“우응~?”

미안하다 승희야.

이 아빠는 거짓말쟁이란다.

“그럼, 아빠가 좋아하게 된 사람은 어떤 사람인데?”

“아빠가 좋아하게 된 사람은──저쪽에 계시네.”

내가 한쪽을 가리키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내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다.

내가 가리킨 사람.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엄마다.

“응?”

갑자기 주목을 받은 엄마는 영문을 모르고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그리고 이쪽에 배우들이 모여있는 걸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한편 승희는 짝! 하고 손뼉을 쳤다.

“알았다! 아빠는 사실 가슴 큰 여자가 좋은데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거구나?”

“큭.”

이 녀석!

내가 언제 그랬어!

그리고 그런 건 눈치챘더라도 말하는 게 아니야!

공교롭게도 엄마는 여배우들 중에서 가장 가슴이 컸다.

아마 승희의 짧은 인생 안에서는 우리 엄마의 가슴이 가장 큰 가슴일지도 모른다. 

“선후 씨.”

수아 누나의 눈총이 아프다.

지혜 누나는 깔깔대며 웃었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결코 가슴 큰 여자가 좋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들 무슨 얘기들 하고 있어?”

“선생님.”

엄마도 결국 이 자리에 합류했다.

여배우 트로이카, 아니, 승희까지 콰르텟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우리 드라마에 출연하는 네 명의 메인 여배우가 전부 한자리에 모였다.

으윽. 눈부셔.

“할머니. 가슴은 어떻게 해야 커져요?”

“뭐어?”

뜬금없는 승희의 물음에 엄마는 당황한다.

그리고 당황한 사람은 우리 엄마뿐만이 아니었다.

“승희야!”

아마 전원이 당황했겠지만, 가장 당황한 사람은 분명 승희 어머니겠지.

승희가 아직 아이라곤 하지만 내용이 내용이다.

게다가 극 중에선 할머니-손녀딸 역할이긴 하지만 현실에서도 할머니라고 불러도 되는가 하면 애매한 이야기였다.

여배우라면 나이에 예민한 사람도 있을 테고.

다행히도 엄마는 그런 일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니었다.

“괜찮아요. 드라마에서는 진짜 승희 할머니니까. 그리고 우리 선후한테 애 생기면 현실에서도 할머니가 될 테고.”

엄마가 승희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그래도 승희 어머니는 연신 고개를 꾸벅거리며 사과했다. 마음 같아선 승희 입이라도 막고 싶었을 것이다.

흐음. 하지만 나한테 아이가 생긴다면 그건 엄마와 나 사이에 생기는 걸 텐데, 그럼 엄마는 여전히 엄마인 채 아닐까? 엄마가 낳은 아이니까 손자보다는 아들에 가깝지 않아?

그리고 내가 승희를 안고서 엄마가 승희 머리를 쓰다듬는 이 구도.

왠지 가족사진 같아서 좋은데.

누가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주지 않으려나.

“승희는 왜 그런 게 궁금하니? 가슴이 커지고 싶어?”

“아빠가 가슴이 큰 여자가 좋대!”

“으악! 아니야!”

터무니없는 누명이다!

사실이긴 하지만!

나는 한 마디도 가슴 큰 여자가 좋다는 말은 한 적이 없어!

사실이긴 하지만!

“……선후 너, 애한테 무슨 얘길 한 거니?”

“아니야 엄마! 나 그런 말 절대 안 했어! 승희 어머니도 웃지만 말고 얘기 좀 해주세요!”

“……나중에 집에 가서 얘기해.”

진선후 일생일대 쓰레기 전락의 위기인데, 이 자리에서 나와 친분이 있는 여자들은 다들 웃고만 있었다.

나도 ‘좋아하게 된 여자가 우연히 가슴이 컸을 뿐’인데!

“승희야. 가슴이 커지고 싶다면 할머니 말고 먼저 물어볼 사람이 있지 않니?”

“응? 누구?”

“승희 엄마 말이야.”

“엄마?”

승희의 시선이 수아 누나의 가슴을 향했다.

그리고 일순간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가, 뒤늦게 ‘승희 엄마’가 누굴 가리키는지 깨달은 듯 승희 어머니의 가슴으로 시선을 돌렸다.

“푸풋. 참으세요, 수아 선배. 애들이 순수해서 그런 거니까.”

지혜 누나의 도발에 수아 누나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선 듯한 기분이 든다.

참고로 이 자리에 있는 여성들의 가슴 사이즈 순서는 엄마(F)>승희 어머니(D)>지혜 누나(C)>수아 누나(B) 순이다. 네 사람의 가슴을 직접 확인한 내가 하는 말이니 확실하다.

“……지혜 씨.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푸후훗.”

한편, 승희의 시선을 따라 사람들의 시선이 승희 어머니의 가슴으로 향했다.

주목받는 데에 익숙하지 않은 승희 어머니는 손에 들고 있던 가방으로 엉거주춤 가슴을 가렸다.

나는 혹시 모를 성희롱 혐의를 피하기 위해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고 가까스로 참아냈다.

“엄마. 가슴은 어떻게 하면 커져?”

“스, 승희야, 그건 집에 가서 얘기하자. 응?”

그래. 제발 그런 이야긴 집에 가서 해줘.

덕분에 나한테도 이상한 혐의가 걸려버렸잖아. 사실이지만.

“승희야.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가슴은 유전이니까.”

“유전?”

엄마가 승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곤조곤 이야기한다.

유전. 유전인가.

엄마가 낳은 두 딸의 가슴 사이즈를 생각해보면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래. 승희도 엄마 닮아서 금방 커질 거야. 음식 가리지 말고 골고루 먹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만 하면 돼. 나머지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는 엄마한테 배우렴.”

“네! 고맙습니다!”

승희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엄마 닮아서 커진다는 이야기에 승희의 기분도 좋아진 거 같다.

거기까지만 했으면 훈훈한 이야기였을 텐데.

“아빠! 나도 가슴 커진대!”

“어? 어?”

……그러니까 그걸 왜 나한테 말하냐고.

난 가슴 큰 여자가 좋다는 이야긴 한마디도 안 했는데.

“그러니까 10년만 기다려, 아빠!”

엄마가, 승희 어머니가, 수아 누나가, 지혜 누나가.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몹시……뭐라 말하기 힘든 눈으로.

“아니…… 음…… 하하. 하하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정말로 억울하다.

엄마와 본방 모니터링 

‘꽃당나’ 5화가 방영하는 날.

운 좋게도 이날은 엄마도 나도 스케쥴이 비어있었다.

그래서 엄마와 나는 함께 본방 모니터링을 하기로 했다.

본방 모니터링이라고 거창하게 말해봤자 별로 특별한 일을 하는 건 아니다.

거실 소파에 앉아 같이 드라마를 보면서 연기나 드라마 내용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뿐.

그래도, 마음만은 데이트였다.

“엄마. 빨리 오라니까. 벌써 시작했어.”

“응. 지금 가.”

엄마는 껍질째 먹는 청포도와 자른 파인애플을 접시에 담아 왔다.

모처럼 단둘인데, 나는 과일보다 조금이라도 엄마와 함께 있는 게 좋았다.

“선후야, 포도 먹어 봐. 달아.”

“응? 앙.”

엄마가 포도알을 집어 내 입에 쏙 넣어준다.

응? 달다.

“그러네. 되게 달아.”

“그렇지?”

“엄마도 먹어 봐.”

나도 엄마 입에 포도알을 넣어주었다.

엄지가 아랫입술에 살짝 닿았지만 엄마는 모른 척 포도를 먹었다.

“선후가 먹여주니까 더 맛있는 거 같네.”

“그렇지? 나도 그랬어.”

그렇게 현실의 나와 엄마가 알콩달콩하고 있는 사이에, 화면 속의 나와 엄마의 분위기는 심각해지고 있었다.

『엄마, 혹시 선아 만났어?』

『누가 그래? 선아 그 계집애가 그러디? 하여간 천한 것이 입도 싸다니까. 나불나불 잘도 떠들어.』

『하. 엄마. 엄마가 선아를 왜 만나?』

『왜? 엄마가 만나면 안 되니? 뭐 찔리는 거라도 있어?』

『무슨 소리야? 선아랑 그런 사이 아냐. 일 때문에 만나는 거라고.』

『엄마도 일 때문에 만났어. 이 회사가 네 회사야? 엄마가 거래처랑 미팅하는 게 뭐 어때서? 엄마가 누굴 만나든 네가 찔리는 거 없으면 상관없잖아?』

1, 2화의 줄거리가 김선아와 황진우의 재회라면 3, 4화는 황진우 모친의 김선아 견제, 5, 6화는 황진우와 가족 간의 갈등이 주제라고 할 수 있다.

4화에서 나온 모친의 말과 행동을 보면 황진우와 김선아 두 사람이 헤어진 데에는 모친의 뒷공작이 있었다는 걸시청자들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황진우와 김선아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른다.

황진우는 김선아에게 다른 남자가 생겼다고, 김선아는 황진우에게 다른 여자가 생겨서 헤어졌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은 서로 끌리면서도 미묘한 거리감을 유지한 채 만나고 있으며, 진실을 아는 시청자들은 답답함을 금할 수 없겠지.

『아무튼 선아랑은 이제 만나지 마. 내 프로젝트는 내가 알아서 해. 엄마는 손 떼.』

『알아서 해? 퍽이나. 여자한테 홀려서 업체 선정이나 제대로 하겠어?』

『선아랑은 그런 사이 아니라고 했잖아!』

『그런 사이 아니면 왜 감싸고 도는 건데? 너 혹시 걔한테 벌써 접대라도 받았니?』

『엄마!』

마치 선아가 몸을 써서 계약을 따낸다는 듯한 말투.

거기에 진우는 참지 못하고 폭발하고 말았다.

“엄마, 앙.”

그러거나 말거나, 현실의 나는 엄마와 서로 포도를 먹여주며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다.

“엄마 신경 쓰지 말고 선후 먹어.”

그러면서 나도 엄마에게서 포도를 받아먹는다.

은근슬쩍 엄마의 손가락을 혀로 핥았다.

“얘는.”

엄마는 나무라는 듯 말하고서 내 침이 묻은 손가락을 슬쩍 핥았다.

야하다.

엄마는 어째서 이렇게 야한 걸까.

“엄마.”

엄마 어깨에 슬근슬근 팔을 두른다.

반대쪽 손으론 엄마의 허벅지를 쓰다듬는다.

하지만 엄마는 내 손등을 찰싹 쳐서 떨어뜨리고 말았다.

“안 돼. 드라마 보기로 했잖아.”

“보면서 만지기만 하는 건 괜찮잖아?”

한마디 들었다고 물러날 내가 아니다.

나는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어휴. 그럼 만질 때 만지더라도 보는 건 제대로 봐야 해.”

흐흐. 성공이다.

역시 엄마는 나를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렇게 계속 만지작거리다 보면 엄마도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이고 말겠지.

엄마학개론의 권위자인 나는 엄마의 행동 패턴을 이미 다 파악하고 있었다.

나는 느긋하게 엄마의 어깨와 팔,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TV 화면에 집중했다.

『김 비서. 거기 입찰 경쟁 업체가 제일 바이오로직스라고 했지?』

『예, 사모님.』

『거기 책임자와 자리 세팅해줘요.』

『사모님. 입찰에 관여하실 생각입니까?』

『뭘, 정보를 공유하는 것뿐이야. ‘각자 서로의 회사를 위해서’ 말이지.』

엄마는 선아의 회사를 입찰에서 떨어뜨리기 위해 뒷공작을 벌일 생각이었다.

이번 황산 그룹의 입찰에 사운을 건 선아네 벤처기업으로서는 절체절명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뭐, 이것도 나중에 황진우의 도움으로 결국 선아네 회사가 입찰을 따내게 되지만.

“엄마. 웅.”

파인애플 반쪽을 입에 물고 엄마에게 내민다.

“얘. 드라마 보기로 했잖아.”

“웅웅.”

황당해하는 엄마에게 나는 빨리 받으라며 입을 까딱인다.

“내가 못 살아.”

엄마는 그러면서도 싫지만은 않은 눈치였다.

내가 내민 파인애플의 나머지 절반을 깨문다.

자연히 입술이 닿았지만, 엄마는 얼른 베어 물고서 얼굴을 뒤로 빼버렸다.

“됐지?”

“치.”

삐친 척을 한다.

그러자 잠시 후, 이번엔 엄마가 파인애플을 입에 물고 내밀었다.

“응.”

흐흐.

나는 고개를 살짝 틀고서 그 파인애플을 크게 베어 물었다.

“츕.”

자연스럽게 입을 맞춘다.

파인애플 맛이 나는 키스였다.

혀를 넣으려 하자 이번엔 허벅지를 꼬집혔다.

“아야.”

“드라마 제대로 봐.”

쳇. 조금만 더 하면 넘어올 것 같았는데.

나는 다음을 기약하며 TV로 고개를 돌렸다.

화면에는 나와 수아 누나가 대화하고 있었다.

『여보, 우리 얘기 좀 해.』

『얘기? 무슨 얘기?』

『수정이 학교 선생님한테 전화 왔었어. 수정이가 요즘 수업에도 집중 못 하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겉돈다고. 가정에 무슨 문제 있냐고.』

“선후야. 수아 씨랑은 어떻게 돼 가?”

“응? 수아 씨?”

이전부터 엄마는 수아 누나를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

처음 나한테 소개해줄 때부터 며느릿감이라고 했을 정도다.

예쁘지, 성격 좋지, 어른한테 싹싹하지, 모아놓은 재산도 있고 능력도 좋다.

눈 씻고 찾아봐도 결점이 안 보인다.

솔직히, 신인 배우 진선후 따위가 감히 넘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으음,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이랄까?”

나도 수아 누나는 좋아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건 아니다.

기껏해야 4번째. 혹은 그 이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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