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2화 (182/256)

우와. 어떡하지.

내가 뭐 말실수라도 했나? 감히 의견을 낼 짬밥이 아니라든가?

옆에 있던 비서도 불안한 눈으로 이사님 눈치를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

“……진선후 씨.”

“네, 네?”

“연예인은 이미지를 파는 장사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선후 씨에게 씌우려는 이미지는 ‘고급’. 거기에 패스트 푸드는 진선후 씨의 이미지 메이킹에 마이너스고요.”

나는 일단 이사님 말씀을 성실하게 들었다.

“이미지를 깎으면서 CF를 찍는다면 돈이라도 많이 받아야 하고, 그 돈이란 진선후 씨 혼자만의 돈이 아니라 소속사와도 나눠야 하는 돈이라는 건 아시죠?”

아……. 그랬지.

그렇게 단순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니.

내 마음대로 돈을 깎겠다든가, 그런 말은 당연히 해선 안 되는 거였다.

“그러니까 진선후 씨의 요구는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왠지 마지막에 반전을 준다.

안 된다는 말 아니었어?

괜히 기대하게 만들어 놓고 결국은 안 된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이상하네요. 진선후 씨의 말에는 이상한 설득력이 있어요. 단칼에 거절해야 할 일이란 걸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진선후 씨의 바람을 들어주고 싶어져요.”

이사님은 훗, 하고 작게 웃었다.

무거운 공기도 많이 사라졌다.

“어떻게 해야 진선후 씨의 요구를 정당화시킬 수 있을지, 저도 모르게 고민하게 되는군요. 관객을 설득하는 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신혜 씨 말이 이해가 될 것 같아요.”

이사님은 양손으로 깍지를 끼고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알겠습니다. 저희는 진선후 씨의 요망에 최대한 맞출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대신 진선후 씨도 다음 재계약 협상 때 오늘 일을 기억해주세요. 저희는 소속 배우의 요구에 최대한 응해주는 회사라는 걸.”

“예. 감사합니다.”

어휴. 어찌어찌 허락받을 수 있었다.

소속사 계약은 이제 막 맺은 직후인데 벌써 재계약을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나한테 재계약 같은 건 너무나 먼 미래의 일처럼 느껴지는데.

“그럼 이렇게 네 가지만 협상할게요. 아직 확정된 건 아니니까 지금은 일단 마음의 준비만 하고 있어요.”

“네. 잘 부탁드립니다.”

마음의 준비라…….

그런 말을 들어도 왠지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내가 CF라니. 정말 그런 게 TV에 나오는 걸까?

으음…….

지금은 제안이 들어온 것뿐이고, 찍는다고 확정된 것도 아니니까.

진짜 찍게 될 때까진 잊고 지내도록 하자.

CF 촬영 

결론부터 말하자면, 광고는 찍게 됐다.

그것도 4개 전부.

정말이지 정신없는 일주일이었다.

소속사와 협의가 끝나자마자 해당 기업 광고 담당자들과 차례로 면담하고.

거기서 계약서에 도장 찍고 곧바로 일정 잡아 촬영까지.

모든 게 일사천리였다.

광고라는 게 이렇게 뚝딱뚝딱 찍어내는 거였던가?

“‘꽃당나’에 넣으려고 서두른 거겠죠. 시청률이 오를수록 광고비도 오를 테고, 비용이 오르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찍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합니다.”

“어…… 그럼 기업들은 시청률이 앞으로 더 오른다고 보는 건가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어느 기업과 계약 후 돌아오는 길에, 이사님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답했다.

그런가…… 오르는 건가.

다른 배우들이나 제작진들도 오를 거라고 이야기하긴 했다.

나도 출연진의 한 사람으로서 당연히 시청률이 오르길 바라지만, 이사님이나 다른 사람들처럼 확언할 수는 없었다.

나도 그렇고 드라마를 찍는 당사자들은 아무래도 주관적인 감정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주변에 물어봐도 앞으로 시청률이 떨어질 거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고.

객관적으로 판단할 근거가 부족했다. 그렇다고 인터넷 여론을 확인할 수도 없고.

하지만 돈을 내고 광고를 넣는 기업들은 어떨까?

수천에서 수억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이다.

예측을 잘못하면 크나큰 손실을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몇 군데나 되는 큰 기업에서 시청률이 오를 거라 예상한다는 건, 믿을만한 분석이라고 봐도 되겠지?

으음. 정말 오르려나.

올랐으면 좋겠네.

30%……아니, 20% 후반대만 돼도 좋겠는데…….

그렇게 해서 나는 4개의 광고를 곧바로 촬영에 들어간 것이었다.

거의 이틀에 하나씩 찍어대는 기세로, 눈이 핑핑 돌 만큼 바쁜 날들을 보내야 했다.

우선 첫 번째 광고는 피아노.

국내 악기 제조 업체 중에선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유명 업체다.

광고는 8살 정도 돼 보이는 남자아이가 무대 위에서 피아노를 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누구나 좋아하고 누구나 칠 수 있는, 그렇지만 제대로 치기는 의외로 어려운 곡,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다.

어디서 찾아냈는지 아역 모델은 피아노도 굉장히 잘 치고 인물도 좋았다. 

왠지 내 어릴 적 모습과 닮아 보이기도 했다.

무대 위에서 피아노 치는 소년을 중심으로 카메라가 한 바퀴 돈다. 

그렇게 한 바퀴 돌고 나자 무대 위 남자아이가 나, 진선후로 바뀌었다.

연주하는 곡은 여전히 월광 소나타지만 폼만은 일류 피아니스트였다.

음악에 몰입해서 취한 듯이 치고 있다.

세상에. 부끄러워라.

『아이의 재능을 꽃피워주세요.』

『세상의 모든 악기, 온음 피아노』

광고는 무대 위에서 연주를 마친 내가 수많은 관객이 기립박수를 받는 장면에서 끝난다.

정식으로 무대에서 연주한 적조차 없는 나로선 민망하기 짝이 없는 광고지만…….

나는 광고 감독님이 시키는대로 연기했을 뿐이다…….

이 광고가 말하고자 하는 건, 지난번 엄마가 찐남매 튜브에 나와서 했던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아이의 재능을 찾아주는 것은 부모의 의무다’라는 것이다.

국산 피아노를 사는 주 소비층은 이제 막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어린이, 정확하게는 그 어린이의 부모라고 할 수 있다.

그 부모들에게 ‘혹시 우리 아이도 피아노에 재능이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피아노를 지르게 만드는 게 광고 전략인 것 같다.

이 광고를 본 우리 가족들의 한 줄 평은 다음과 같았다.

엄마 “역시 우리 아들! 너무 멋있어!”

누나 “개똥폼 잡고 있네.”

동생 “피아노 되게 예쁘다.”

참고로 내 방에 있는 피아노도 저 브랜드 걸로 바꿨다.

찐남매 튜브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내가 저 피아노 업체 전속 모델인데 다른 브랜드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내보낼 순 없으니까.

기존에 쓰던 피아노는 일단 빈방으로 옮겨놓았다.

나름대로 추억이 있는 피아노다 보니 버릴 수도 없고, 당분간은 먼지를 쓰게 놔둘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두 번째 광고는 화장품 광고다.

이쪽도 대기업 산하의 유명 화장품 브랜드다.

이 회사의 주력 상품은 여성용 화장품이고, 남성용 화장품은 여성용에 비해 매출이 적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남성 화장품 시장은 블루오션이라는 뜻도 된다.

새해에는 그 블루오션을 공략하는 게 이 회사의 전략인 것 같다.

그를 위해 ‘옴므 페이탈’이라는 남성용 브랜드를 런칭했다.

그리고 그 뉴 브랜드에 걸맞은 아이콘을 광고 모델로 발탁했으니, 그게 바로 나였다.

상의를 탈의한 남자의 얼굴이 클로즈업으로 나온다.

말할 것도 없이 나, 진선후다.

화면에 잡히는 건 쇄골에서부터 얼굴까지.

나는 카메라가 무슨 거울이라도 되는 것처럼 들여다보면서 얼굴을 만지작거린다.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를 자랑하면서.

평소보다 50%는 더 잘생겨 보인다.

위대한 컴퓨터 그래픽의 힘이었다.

얼굴을 다 확인한 나는 와이셔츠를 펄럭, 요란하게 걸치고서 문밖으로 나선다.

화면은 번화가의 도로변으로 바뀐다.

잘난 척하며 걸어가는 나,

그리고 여자 모델이 내 정면에서 마주 걸어온다.

두 사람은 이내 스쳐 지나가고, 내 옆을 지나간 여자는 도중에 멈춰서서 나를 돌아본다.

『누구지?』

그런 여자의 의문을 뒤로하고, 나는 잘난 척 웃으며 걸어간다.

저렇게 쳐다보는 것 정도는 당연한 일상이라는 듯이.

『내 남자의 첫 번째 화장품.』

『옴므 페이탈-올인원』

…….

으음…….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펴지질 않는다.

이게 화장품 광고인지 진선후 얼굴 광고인지 모르겠다.

이 광고에 나오는 내 얼굴은 개조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걸 본 사람들이 광고 얼굴이랑 내 실제 얼굴이 다르다고 욕하면 어쩌지?

으음…….

이 광고의 주 타겟층은 당연히 외모에 관심 있는 젊은 남성.

거기에 선물을 줄 남자가 있는 여자들 또한 타겟이다. 

여자가 상대적으로 남자보다 화장품에 관심이 많으니까, 자신을 치장하는 데에 관심 없는 남자친구에게 선물해주라는 거다.

이 화장품은 나도 써봤지만 편하기도 하고 가격대도 부담스러운 수준은 아니었다.

품질도…… 아마 괜찮을 거다.

어쨌든 잘 팔렸으면 좋겠네.

이 광고에 대한 가족들의 한 줄 평은 다음과 같았다.

엄마 “우리 아들 너무 멋있어!”

누나 “아주 꼴값을 떨고 있네.”

동생 “찢었다.”(좋은 뜻)

얼굴이 어색하지 않냐는 내 물음에는 다들 괜찮다는 반응이었다.

으음. 매일 보는 가족들이 괜찮다고 할 정도면 별문제 없으려나.

다음 광고는 해피밀 햄버거다.

해피밀 세트는 흔한 패스트 푸드 햄버거에 장난감이 들어있는 랜덤 박스를 주는 세트를 말한다.

랜덤 박스에는 시즌마다 네 종류의 장난감이 들어있으며 내용물은 랜덤이다.

그래서 모두 모으려면 최소 4번은 사 먹을 필요가 있다.

그럼, 광고 시작.

10살 남짓한 귀여운 여자아이가 두근대는 표정으로 랜덤 박스를 연다.

드라마에서 내 딸로도 나오는 아역배우 나승희다.

이번 시즌 해피밀 장난감은 몬스터 특집으로, 랜덤 박스에는 좀비, 미라, 늑대인간, 구미호 중 하나가 들어있다.

이번에 승희가 뽑은 장난감은 좀비였다.

『아~! 난 또 좀비야! 아빠는?』

승희의 아빠 역은 당연히 나다.

『짠! 아빠는 늑대인간!』

아빠는 자신만만하게 늑대인간 장난감을 꺼내 보인다.

『힝~ 난 구미호 뽑고 싶었는데.』

승희는 실망하면서도 아빠 장난감을 챙겼다.

『큭. 구미호…… 뽑고 말겠어……!』

아빠는 주먹을 불끈 쥐며 설욕을 다짐했다.

다음날, 회사 점심시간.

『어이, 김 대리! 어디가? 점심 안 먹어?』

『죄송합니다!』

회사원인 아빠는 상사의 부름을 뒤로하고 서둘러 사무실을 나간다.

향한 곳은 당연히 해피밀 매장.

『으으. 이번에야말로……!』

오늘도 딸에게 장난감을 구해주기 위해 점심을 햄버거로 때우는 아빠.

심각한 얼굴로 랜덤 장난감 박스를 연다.

『떴다! 구미호!』

이번에 뽑은 장난감은 딸이 갖고 싶어 하던 구미호 장난감이었다.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아빠.

이제 구미호 장난감을 딸에게 주고, 딸은 ‘아빠 최고!’ 하겠지.

……하지만 그 예상은 빗나갔다.

구미호는 아빠의 비밀 금고 안에 고이 모셔졌다.

금고 안에는 이미 다른 해피밀 장난감들이 종류별로 늘어서 있었다.

사실은 딸에게 주려던 게 아니라 아빠 본인이 장난감을 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새해에도 해피밀로 해피하세요!』

그런 반전 속에서 아빠와 딸이 행복한 표정으로 함께 햄버거를 먹는 장면을 끝으로 광고는 끝났다.

이 광고를 본 가족들의 평.

엄마 “우리 아들은 먹는 것도 어찌나 복스러운지 몰라.”

누나 “오타쿠냐?”

동생 “아~ 나도 햄버거 먹고 싶어~!”

앞의 두 광고와 달리 해피밀은 스토리가 있는 광고였다.

하지만 우리 가족들은 스토리 내용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불안한데. 잘 먹혔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광고는 여성용 속옷 광고다.

‘에드가&바스티안’, 줄여서 E&B는 프랑스의 유명 디자이너가 이름을 걸고 만드는 고급 속옷 브랜드다.

그 역사적인 국내 첫 광고 모델이 남자인 나라니.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이 광고는 어느 여성용 속옷 매장에 긴장한 표정의 청년이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거듭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 청년은 나다.

그 매장 안에 남자는 나뿐.

직원도 고객도 전원 여성이다.

여성 속옷 전문 매장이니만큼 당연한 거겠지.

그녀들은 동물원을 탈출한 원숭이라도 보듯이 신기하게 나를 보며 속닥거리고 있었다.

『저…… 어머니 선물 드리려고요.』

나는 쭈뼛거리며 직원에게 말하고, 직원은 웃으면서 응대한다.

『네. 사이즈는 어떻게 되세요?』

『어…… 그게, 저도 잘…… 잠시만요!』

당황한 나는 급히 엄마에게 문자를 보낸다.

그런 나를 직원과 주변 여자들이 흐뭇한 얼굴로 바라본다.

그리고 장면은 곧장 집으로 바뀌었다.

집에 돌아온 내 손에는 E&B라는 로고가 새겨진 종이가방이 들려져 있다.

성공적으로 쇼핑을 마친 것이다.

나는 엄마(대역 배우)에게 그 종이가방을 내민다.

『엄마. 이거.』

『어머나, 이게 뭐니?』

『지금까지 저 키우느라 힘드셨죠? 이제 저 걱정은 마시고 엄마 인생 사세요.』

그리고 내가 감격한 엄마의 포옹을 받는 장면을 끝으로 화면이 흐려진다.

『소중한 첫 월급, 감사의 마음을 선물하세요.』

『어머니에서 여자로 변하는 시간.』

『에드가&바스티앙.』

……여자 속옷 광고라 불안해했던 거에 비해 내용 자체는 괜찮았던 거 같다.

이 광고의 슬로건은 ‘첫 월급으로 어머니 속옷을 사드리자’라는 것.

첫 월급 선물로 속옷을 사주는 문화는 거의 없어졌지만, 첫 월급으로 부모님 용돈이나 선물을 드리는 문화 자체는 아직 남아있다.

E&B는 고가형 브랜드니 사회 초년생 첫 월급으로 사기에는 부담스러운 감도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보통 용돈으로 드리는 돈이 30만~50만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싸게 치인다고도 볼 수 있겠지.

그러니까 ‘첫 월급으로 어머니 속옷을 사드리자’는 것이다.

E&B 홍보팀의 목표는 자사 제품을 어머니께 드리는 선물로 유행시키는 거라고 한다.

글쎄, 나 같은 변태 아들이 많으면 모르겠지만…… 그런 게 잘 먹히려나…….

한편, 우리 가족들의 평가는 어떤가 하면.

엄마 “너무 감동적이야…… 선후야, 엄마 좀 안아줄래?”

누나 “변태 새끼.”

동생 “오빠, 나는 안 사줘?”

……누나의 평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대체로 나쁘지 않았다.

가족들의 반응을 종합해보고 알 수 있었던 점이라면,

엄마는 상품에는 관심이 없고 모델(나)에 무조건 긍정,

누나는 모델(나)에 무조건 부정, 

그나마 미소만은 상품에도 관심을 보였다, 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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