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7화 (177/256)

하지만 선하는 어떨까.

미소에겐 아빠가 없었지만, 선하에겐 아무도 없었다.

아빠도 엄마도 오빠도 언니도.

미소는 그나마 엄마나 나에게 응석 부릴 수라도 있었지만, 선하에게는 응석 부릴 상대조차 없었다.

천애 고아로 살아온 선하가 느꼈을 외로움은 미소와도 비교가 안 되겠지.

그리고 그런 선하에게 오빠라는 존재는 겨우 찾은 유일한 버팀목이다.

잔인한 이야기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잃고 싶지 않을 것이다.

선하의 속마음이 어떻든, 표면적으로 내 말을 거스르는 일은 없으리라 믿는다.

“오빠…… 나 추워…….”

오늘 날씨는 쌀쌀했다.

하지만 이 방에는 라디에이터가 강하게 돌아가고 있고, 건조함을 느낄지언정 추위를 느낄 리는 없었다.

“응.”

그래도 나는 두말 않고 선하를 안아주었다.

그것이 단지 몸을 녹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외로움을 달래주길 바라는 신호라는 걸, 나는 또 한 명의 동생을 통해 이미 배웠으니까.

“오빠…… 추워…….”

떨리는 작은 몸.

성냥팔이 소녀가 덧없이 작은 성냥불에서 온기를 찾듯이, 선하는 온기를 찾아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선하가 내 어두운 기억 속의 작은 아이와 겹쳐진다.

‘오빠…… 추워…….’

발가벗겨진 채 현관문 밖으로 내쫓겨야 했던.

한겨울 찬 바람 속에서 서로의 체온밖에 의지할 곳이 없었던 아이들.

‘미안해, 선하야.’

더 따뜻하게 해주지 못해서.

작은 몸에 불어닥치는 바람을 다 막아줄 만큼 크질 못해서.

이 지옥에서 널 구해줄 수 없어서, 미안해.

“이제 괜찮아.”

누구도 널 괴롭히게 두지 않을 테니까.

추운 곳에서 떨게 두지 않을 테니까.

“오빠…….”

흐느끼는 선하의 몸에서 떨림이 가라앉을 때까지, 나는 그렇게 선하를 안고 있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선하를 울리지 않겠노라고 조용히 맹세했다.

* * *

“수녀님. 제가 여기 왔던 일은 비밀로 해주세요.”

“센터에 기부한 거 말이니?”

내 기부 액수 자체는 그리 큰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나 개인에게는 나름 큰돈이다. J-up과 소속사 계약할 때 받았던 계약금 전액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네. 그리고 선하에 대한 것도요.”

수녀님은 내가 연예인이라는 걸 이미 알고 계셨다.

내가 선하와 이야기하는 동안 나를 알아본 다른 직원이 말해준 모양이었다.

“선하가 호기심에 노출되길 바라지 않아요.” 

어쩌면 선하와의 일도 ‘진선후 미담’ 중 하나로 꾸며질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선하를 그런 일에 이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데뷔하기 전, 미소가 팬들을 줄줄이 고소하면서까지 나를 지키려 했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살아있는 사람 입에 지퍼를 채울 순 없다지만, 수녀님에겐 가능하면 소문이 나지 않도록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드렸다. 물론 선하 본인과 센터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수녀님. 우리 선하 마지막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수녀님께 진심으로 고개를 숙여 부탁드렸다.

나와 선하의 친족 관계는 내가 엄마에게 입양되는 시점에서 소멸했다.

법적으로 나와 선하는 완전히 남남이다.

따라서 아무리 내가 친오빠라고 주장하더라도, ‘성인 미혼 남성 진선후’가 ‘미성년 여아 김선하’를 공식적으로 데리고 나오는 건 불가능하다고 한다.

변호사를 선임해 복잡한 절차를 거치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그러는 사이에 선하는 성인이 되어 퇴소할 나이가 된다. 내가 뭔가 하는 것 자체가 불필요한 노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선하 본인과 수녀님의 의견을 듣고, 돈과 시간을 들여 선하를 빼내는 대신 센터에 기부금을 내고 선하가 퇴소할 때까지 잘 보살펴달라고 부탁드렸다.

선하가 진학할 대학교 근처에 방을 얻는 것도 센터에서 나서서 도와주기로 했다. 물론 비용은 내가 내지만.

그렇게 선하 일은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다른 걱정거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가족들에게는 선하 일을 어떻게 말할까 하는 것이다.

내가 너무 신경 쓰는 건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가족들은 내가 선하를 만난 걸 이상하게 해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가족이 그리워서 친동생을 찾았다거나, 아니면 친동생한테도 흑심이 있어서 찾았다거나, 친동생을 찾았으니 다음은 친엄마를 찾아 나설 거라거나…….

그런 비관적인 해석이 나올 가능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일단 가족들에게 알리는 건 보류하기로 했다.

다들 정신없는 연말에 괜한 일로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선하 또한 내 가족들과 만나는 걸 내심 껄끄러워해서 내 의견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선하야. 잘 있어. 선생님들 말씀 잘 듣고.”

“응. 오빠도 촬영 열심히 해.”

십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선하와 작별 인사를 나눈다.

작게 손을 흔드는 선하.

괜히 서글퍼 보이는 그 모습에 안아주고 싶은 마음을 겨우 달랜다.

이번엔 영영 이별하는 게 아니니까.

만나고 싶으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

그렇게 나는 선하와 헤어져 센터를 나섰다.

12월,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지는 어느 날이었다.-

여배우 두 사람과 3차 

연말연시.

다양한 모임에서 송년회다 신년회다 하며 모이지만, 나와는 지금까지 인연이 없었다.

만날 친구도, 여자도, 모임도 없는, 그야말로 아싸찐따 그 자체였으니까.

그런 나도 올해는 어느 한 송년회에 참석하고 있다.

바로 드라마 ‘꽃당나’ 관계자 모임이다.

“야! 진선후! 어딜 도망가?”

“켁.”

집에 돌아가기 위해 엄마와 같은 차에 타려던 나는 옷깃을 잡히고 말았다.

술에 잔뜩 취해 휘청거리는 신지혜 선배였다.

촬영팀까지 함께 모인 1차, 연기자끼리만 모인 2차에서 연거푸 퍼마신 지혜 선배는 반쯤 인사불성이었다.

이 사람은 술도 약한 주제에 왜 이렇게 취할 때까지 마시는 걸까?

“도망이라니요? 회식 끝났으니 집에 가야죠.”

“어허! 너 술 안 마셨지? 운전해!”

“예? 저 술 마셨는데요?”

나는 배우진에서 아역인 승희를 제외하면 사실상 막내다.

하늘 같은 선배 배우들이 주는 술을 마다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나마 대배우 임신혜의 아들이라는 후광 덕분에 지혜 선배처럼 맛이 갈 정도로 마시진 않았을 뿐이지.

지금 운전했다간 100% 음주운전으로 걸릴 판이었다.

“선생님! 아들 좀 빌려도 되죠?”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엄마에게 묻는다.

선배의 뒤쪽에서 매니저가 미안하다는 듯이 고개를 꾸벅거리고 있었다.

나는 도움을 바라는 눈빛으로 엄마를 바라봤지만 엄마는 ‘젊은 사람들끼리 알아서 해~’라면서 차를 타고 가버렸다.

아아. 엄마에게 버림받다니.

술기운이 오른 엄마에게 마음껏 엉겨 붙을 셈이었는데.

“선배. 제가 무슨 선배 운전기사예요?”

“수아 선배! 3차 가야죠, 3차!”

살짝 짜증을 섞어 말했지만 여전히 내 말은 듣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 다음으로 만만한 수아 선배도 꼬셨다.

“선후 씨도 가?”

“어…….”

기대로 반짝이는 수아 선배의 눈을 보고도 안 간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갑니다.”

“그럼 나도 갈게.”

“예이~ 그럼 갑시다! 수아 선배 집으로!”

“어? 우리 집?”

집주인한텐 허락도 안 받고 쳐들어가는 거냐고.

하지만 정작 수아 선배 본인도 싫지만은 않아 보였다.

뭘 기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었다.

뭘 기대하는지 모르겠지만…… 으음…….

그렇게 해서 우리 주연 세 사람은 수아 선배 집에서 3차 모임을 하기로 했다.

우리 말고도 끼리끼리 3차를 가는 사람들은 있었다.

이쪽으로 끼려는 사람도 있었지만 지혜 선배가 발로 차서 쫓아내 버렸다.

“잘 부탁드립니다.”

지혜 선배 차 조수석에 타며 인사한다.

운전석에는 지혜 선배의 매니저가 앉아 있었다.

“야! 어딜 은근슬쩍 앞에 타? 건방지게.”

“에? 아야야야.”

그러나 곧 지혜 선배에게 귀를 잡혀 뒷좌석으로 끌려갔다.

어째서? 원래 이럴 땐 막내가 조수석에 타는 거 아니야?

“선배, 선배도 이리 타요.”

“응?”

지혜 선배의 선도로 지혜 선배와 나, 그리고 수아 선배까지 뒷좌석에 나란히 탔다.

어째서 조수석을 비워놓고 세 사람이 좁은 뒷좌석에 타야 하는 걸까.

나는 설명을 요구하듯이 운전석의 매니저를 보았지만 매니저는 모른 척 내 눈을 피했다.

지혜 선배의 술주정에 엮이고 싶지 않은 것 같다.

“이야~ 진선후 출세했네! 옆에 여배우를 둘이나 끼고 마시러 다니고 말이야! 어?”

지혜 선배가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소리친다.

“아, 내 귀야. 거기에 술 냄새.”

얼굴을 찡그리며 저리 좀 떨어지라고 어필했지만 지혜 선배는 오히려 더 들러붙었다.

“요즘 젊은것들은 말이야! 패기가 부족해요 패기가! 나 때는 말이야, 어? 선배랑 술 마시면 안 시켜도 알아서 운전도 하고, 어? 어디서 감히 선배 술 마시는데 나란히 마시고 말이야.”

“그거랑 패기랑 무슨 상관이에요? 그리고 저한테 술 제일 많이 먹인 게 지혜 선배잖아요.”

“이시키! 어디서 선배 말씀하시는데 말대꾸나 하고! 아닌 거 같아도 예예 하고 말아야지. 나 때는 선배랑 말도 못 섞었어! 수아 선배, 안 그래요?”

“그러게~ 으응~ 난 잘 테니까 도착하면 깨워.”

수아 선배는 한껏 기지개를 켜더니 내 어깨에 머리를 얹고서 눈을 감았다.

좀 말려주시지…….

“선후 니는 연기에 영혼이 없다고 영혼이.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나?”

“아니요…….”

“니는 간절함이 읎어. 시청자 눈은 속여도 내 눈은 못 속인데이.”

또 사투리가 나오기 시작했구나.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지혜 선배의 말에 맞장구만 쳐댔다.

“얼굴 믿고 까불지 말란 기다. 선후 니! 내 말 듣고 있나?!”

“아이고…….”

“니는 임마 아직 멀었다. 얼굴만 반반하면 뭐하노? 니만치 생긴 놈 천지삐까린기라.”

“천지 삐……?”

나는 어떻게 좀 해보라는 눈빛으로 매니저를 보았지만 매니저는 로봇처럼 정면만 바라보며 운전하고 있었다.

그래. 안전운전이 중요하긴 하지.

“눈빛은 또 그게 머꼬? 썩은 동태 눈까리 맨치로. 꼬추만 크다고 다가 아니란 기다!”

그러면서 지혜 선배는 내 아랫도리를 덥석 움켜쥐었다.

“아!”

대충 맞장구만 치며 한 귀로 흘리고 있었기 때문에 막을 틈도 없었다.

“아 이 누나가 진짜!”

나는 화가 난 듯 목소리를 높였지만 지혜 선배는 뭐가 웃긴지 깔깔대며 웃었다.

둘만 있을 때라면 몰라도 지금 여기엔 매니저도 있다.

지혜 선배 매니저니까 본인은 괜찮을지도 모르지만 내 입장도 생각해줘야지.

“하~. 매니저님, 이 누나 술 마시면 원래 이래요?”

내 질문에는 ‘원래 이러는 사이가 아니다’, ‘이 사람 술 취해서 이러는 거다’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그리고 ‘모른 척하지 말고 좀 말려라!’라는 뜻도 들어 있었다.

“아니요, 원래 그런 사람은 아닌데…… 진선후 배우님이 편해서 그런 거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매니저가 백미러를 통해 눈짓으로 사과한다.

‘운전하는데 말 걸지 마!’, ‘네가 친한 거 같으니 네가 알아서 해!’라는 강한 의사가 전해졌다.

“마! 큰소리는 와 치노? 만진다고 닳는 것도 아인데. 아나, 니도 만지라.”

“아!!”

이번엔 내 손을 잡고서 본인 가슴에 갖다 누른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떨어졌다.

“누나!!”

내가 소리를 빽 질러도 당사자는 깔깔대며 웃을 뿐.

이 사람, 술 취한 척 날 가지고 노는 게 분명했다.

매니저가 보고 있으니 복수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운전 중인 매니저를 원망스럽게 째려봤지만, 매니저는 이 악물고 못 본 척할 뿐이었다.

“으응~ 선후 씨, 도착했어요오~?”

“……아니요, 아직──”

이번엔 수아 선배였다.

반대편에 앉은 수아 선배는 잠결에 베개라도 끌어안듯이 내 팔을 끌어안고서 가슴을 비벼댔다.

비록 그 존재감은 크지 않았지만 ‘가슴’이라 불릴 만한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받은 거라는 걸 나는 진이를 보며 깨우쳤다.

“……수아 선배.”

“우웅~.”

당신, 그 정도로 안 취했잖아요?

차 탈 때까지 멀쩡했으면서 왜 갑자기 취한 척하는 건데요?

천하의 황수아가 이런 어설픈 연기라니.

내 어깨에 기대고 잠든 척할 때부터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하니 수아 선배한테마저 성희롱을 당할 줄이야.

아마도 지혜 선배가 나랑 꽁냥(?)대는 걸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거겠지.

내가 지혜 선배를 째려보자 킬킬대며 웃는다.

그런가. 지혜 선배는 나만 가지고 노는 게 아니라 수아 선배까지 가지고 놀고 있었구나.

제발 두 사람이 경쟁하는 건 촬영장에서만 해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오늘은 누구야?”

지혜 선배가 내 옆에 바짝 붙으면서 속삭인다.

자연히 뭉클함이 팔에 와 닿는다.

반대쪽에 수아 선배의 가슴이 접촉하고 있어서인지 그 존재감이 괜스레 크게 느껴졌다.

“……뭐가요.”

애써 모른 척하며 묻는다.

지혜 선배는 킥킥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랑 수아 선배, 누구랑 할 거냐고.”

나는 운전 중인 매니저의 눈치를 보았다.

다행히 지혜 선배의 말은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반대쪽에서 내 어깨에 머리를 대고 있던 수아 선배의 귀에는 들어갔겠지.

붙들고 있던 내 팔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으며, 내 손에 깍지를 끼고 잡는다.

놓치지 않겠다는 수아 선배의 의지가 느껴졌다.

“……저 그냥 집에 가면 안 됩니까?”

수아 선배의 너무나도 노골적인 어필에 지혜 누나는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지만, 매니저는 곧 죽어도 운전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 차라리 이쪽은 보지 마.

불룩 튀어나와 있는 내 거기가 백미러로 보여버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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