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신혜에게 고백했던 그 날.
신혜와 사귀기 시작해, 손을 잡고, 첫 키스를 하고.
그런 천지가 뒤집히는 듯한 그 날 이후로도 신혜와 내 관계는 그렇게 달라지지 않았다.
매일 학교에서 만나면 인사를 하고, 수업을 마치면 학교에 남아 같이 공부를 한다.
저녁 시간이 되면 도시락을 먹고, 어두워지면 손을 잡고 학교를 나와 집으로 돌아간다.
고백했던 날의 용기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날 이후로 나는 한 걸음도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초조한 마음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나는 현상에 만족하고 있었다.
나에게 건네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표정 하나에서도 신혜가 나를 좋아한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신혜의 태도가 갑자기 바뀐 건 아니다.
지금까지 내가 눈치채지 못했던 것뿐이다.
이렇게나 나를 좋아해 주는데, 그전에는 어째서 눈치채지 못했을까.
나는 바보다.
나와 신혜는 그렇게 한동안 학생다운 건전한 교제를 이어가고 있었다.
뭐니 뭐니 해도 학생의 본분은 공부.
나도 신혜도 서로를 위해서 더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맞이한 기말고사.
우리 두 사람은 모두 굉장히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7등이야! 꺄!”
기말고사 성적표를 받은 신혜가 기쁨의 환성을 지르며 나를 끌어안았다.
중간고사보다 10등이나 올랐다.
그야말로 일취월장이었다.
역시 신혜는 하면 되는구나.
“축하해, 신혜야.”
나는 침착하게 축하의 말을 건넸지만, 정신은 이미 반쯤 나간 상태였다.
나를 끌어안은 신혜의 감촉에 내 영혼이 몸을 탈출해버린 것이다.
내가 뻣뻣하게 굳어있자 신혜도 그제야 깨달았는지 얼른 나에게서 떨어졌다.
내 가슴을 누르던 부드러운 감촉이 사라져버렸다.
아아. 좀 더 붙어있고 싶었는데.
하지만 나에겐 신혜를 안아줄 용기가 없었다.
소심한 인간 같으니라고!
“다 선후가 도와준 덕분이야. 고마워.”
신혜는 뒤늦게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신혜가 열심히 해서 그런 거지 뭘.”
내 영혼은 아직도 돌아오지 못했다.
나는 로봇처럼 뻣뻣하게 대답했다.
신혜는 그런 내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어렵게 말을 꺼냈다.
“……선후야, 오늘 일찍 마쳤으니까 우리 집에 가서 공부할래? 오늘 우리 부모님도 늦게 들어오시고…….”
“신혜네 집에서?”
“응…….”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는 신혜.
빨갛게 달아오른 신혜의 얼굴에, 내 얼굴도 따라서 빨개졌다.
신혜는 명실공히 내 여자친구다.
여자친구가 집에 초대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를 정도로 나도 어리석진 않다.
내 심장은 벌써부터 펄떡거리고 있었다.
“그, 그래. 그러자.”
“으, 응. 그럼 마치고 봐.”
신혜는 작게 손을 흔들더니 도망치듯 서둘러 떠나갔다.
워낙 하얀 피부인 탓에 목 뒤가 빨갛게 물들어있는 것도 확 눈에 띄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 남자가 이끌어나가는 게 정상일 텐데.
내가 너무 소극적이었던 탓에, 신혜가 먼저 움직이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이런 못난 남자친구를 버리지도 않고 이끌어주는 신혜에게 미안하면서도 고마웠다.
고등학생 평균 연애 진도를 생각하면 우린 벌써 끝까지 가고도 남을 시기였다.
남들 페이스에 맞출 필요는 없겠지만, 너무 늦으면 늦는 대로 상대를 불안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신혜와도 좀 더 그런 대화를 해야 했는데.
부끄러운 마음에 발을 내딛지 못했던 내 실책이었다.
그나저나…….
오늘 나는 신혜 집에 가는 건가.
……가서, 어떻게 하지?
진도는 어디까지 나가야 하지?
이런 일이나 저런 일이나?
설마 그런 일까지……?
집에 초대까지 받아 갔는데, 너무 소극적으로 나오면 신혜도 실망할 테고, 반대로 너무 들이대면 신혜와의 관계가 완전히 파탄 날지도 모른다.
분위기를 봐서 임기응변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한 번도 연애다운 연애를 해본 적 없었던 나에게는 너무 어려운 미션이었다.
나는 미로에 떨어진 장님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안한 예감밖에 들지 않지만.
나는 각오를 다졌다.
* * *
방과 후.
나는 신혜 방에 와있다.
“어, 저기…….”
분명 공부하자는 핑계로 왔는데.
어째서인지 나와 신혜는 책상이 아니라 침대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책가방은 아예 열지도 않았다.
“저…… 선후야?”
“어응?!”
잔뜩 긴장한 나는 이름만 불려도 깜짝 놀라고 만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그…… 나, 선후 덕분에 성적도 오르고……. 그래서…… ”
신혜가 무언가 말하고 있지만 너무 긴장한 탓에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 내 손등 위로 신혜의 손이 살금살금 올라왔다.
신혜의 온기가 바짝 얼어붙은 내 손을 녹였다.
“선후한테 보답하고 싶은데…… 학생이라 돈도 없고, 그, 그러니까…… 혹시 나한테 원하는 거 있으면 말해. 내가 할 수 있는 거면…… 최대한 해줄 테니까.”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여자친구와 단둘이, 여자친구의 집에서.
남자가 원하는 건 정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걸 신혜에게 솔직하게 말해도 되는 걸까.
“성적은 신혜가 열심히 해서 오른 건데.”
결코 깨끗하지만은 않은 남자의 욕망.
솔직하게 말해버리면 신혜에게 경멸당할지도 모른다.
그런 불안한 생각에 나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다.
“내가…… 해주고 싶어서 그래.”
내 손등을 꽉 잡는 신혜의 손에서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
신혜는 시선을 떨어뜨리고 자신의 무릎만 보고 있었다.
그 얼굴은 마치 내가 무슨 부탁을 할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신혜는 할 만큼 했다.
이제는 내가 답할 차례였다.
남자잖아? 각오했잖아?
여자친구가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받아먹지 못하면 남자도 아니다.
정신 차려, 진선후!
“그……럼.”
입을 열자 마른 목소리가 나왔다.
“부탁, 해도 돼?”
머릿속에 수많은 선택지가 떠올랐다.
선택지의 수 자체는 많았지만.
그 모든 선택지는 ‘야한 일’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 있었다.
“응…….”
신혜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무슨 부탁을 할지 신혜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내 눈은 아까부터 신혜의 그 커다란 가슴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여고생, 임신혜 3
나는 신혜의 손을 잡고서 한참을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두근두근.
조용한 방 안에 빠르게 뛰는 내 심장 소리만이 들린다.
시선을 돌리자 신혜와 눈이 마주쳤다.
뭔가 무서워하는 듯한.
그러면서 동시에 기대하는 듯한 눈이었다.
“선후야…….”
자그마한 입술이 열리고 내 이름을 부른다.
예쁘다.
갖고 싶다. 신혜의 입술이.
나는 조심스럽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러자 신혜는 살며시 눈을 감고서 고개를 기울였다.
입술이 맞닿는다.
아직은 어색한 키스.
입술과 입술이 마주칠 뿐인 미숙한 키스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
뇌에서 행복 물질이 마구 뿜어져 나왔다.
입술에 닿는 부드러움.
신혜에게서 풍기는 은은한 여자애의 향기.
깜짝 놀랄 만큼 뜨거운 체온.
신혜의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고,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마주쳤던 입술이 떨어진 후에도 신혜는 여전히 입술을 내밀고서 눈을 감고 있었다.
좀 더 키스해도 된다는 의미일까.
쪽, 쪽, 쪽.
나는 반복해서 신혜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신혜는 만족했는지 눈을 뜨고 생긋이 웃었다.
나를 바라보는 신혜와 다시 눈이 마주친다.
반짝거리는 눈동자는 너무나 맑았다.
눈동자 안에 온 우주가 다 들어있는 것 같았다.
예뻐서, 너무 예뻐서.
단지 그렇게 보고만 있어도 좋았다.
이 기분을 어떻게 해야 할까.
좋아서 미칠 것만 같은데.
미숙한 나는 뭘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몰랐다.
안고 싶다.
신혜를 미치도록 끌어안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솔직하게 말해도 될까.
욕망이 이끄는 대로 행동해도 될까.
신혜 앞에선 늘 점잖고 멋진 남자친구로 있고 싶은데.
신혜는 욕망에 솔직해진 나를 보고 실망하지는 않을까.
신혜와 눈을 마주 보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말이 목구멍에서 넘어오질 않았다.
신혜에게 미움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내 발목을 잡았다.
기대와 걱정이 뒤섞여 머리에 펑크가 난 것만 같았다.
그런 나를 보다 못한 신혜가 먼저 내 손을 잡고서 끌어당긴다.
“시, 신혜야?”
신혜가 내 손을 이끈 곳.
바로 자신의 가슴이었다.
교복 위로 크게 부푼 신혜의 가슴에, 내 손을 꽉 눌렀다.
푹신.
내 손에 닿는 그것은 틀림없이 가슴의 감촉이었다.
나는 돌이 되었다.
“……선후 너, 항상 내 가슴만 보고 있잖아.”
신혜는 새빨개진 얼굴로 새침하게 말했다.
그런 거 아니야.
부끄러운 마음에 무심코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하기에는 너무 뻔한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보지 않으려고 해도 저절로 눈이 가는걸!
신혜를 처음 봤을 때도 얼굴이 아니라 가슴부터 눈에 들어왔으니까.
내가 신혜에게 첫눈에 반한 것도 그 가슴 때문이었으니까.
틈만 나면 힐끔힐끔.
당사자인 신혜에게 들키지 않을 리가 없었다.
“……만지고 싶으면 만져도 돼.나는…… 네여자친구잖아?”
부끄러움으로 가득 찬 얼굴로, 신혜는 그렇게 말했다.
신혜의 그 말이 내 모든 망설임을 무너뜨렸다.
남자인 내가 하지 못한 말을, 여자인 신혜가 말했다.
그게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았다.
여자친구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남자친구인 내가 계속 망설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가슴 위에 올려진 손에 힘을 준다.
물컹.
내 손 모양을 따라 가슴의 형태가 변했다.
……이렇게 부드러울 수가.
나는 넋을 놓고 신혜의 가슴을 만져댔다.
언제나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던 신혜의 가슴을.
머릿속으로 상상만 했던 상황이 현실로 이뤄진 것이다.
“읏…….”
신혜가 인상을 찌푸리며 아픈 듯이 신음한다.
나는 깜짝 놀라 손에서 힘을 뺐다.
“미, 미안. 아팠어?”
흥분한 나머지 무심코 손에 힘이 들어갔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손에서 힘을 뺄 뿐, 가슴에서 떨어지진 않았다.
“……응. 조금만…… 살살해줘.”
여자친구를 사귀는 것도, 가슴에 손을 대는 것도 나는 처음이었다.
어떻게 만져야 좋은지도 당연히 몰랐다.
흥분해서 마구 주무르던 나는 찬물이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소중하고 소중한 신혜의 몸인데.
이렇게 함부로 다뤄도 괜찮을 리 없었다.
나는 신혜의 말에 따라 손에 힘을 빼고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마치 보물을 만지듯이.
부드러운 감촉이 내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응…하아…….”
신혜가 얕게 신음했다.
그 얼굴은 편안하고 기분 좋아 보였다.
나는 자신감을 가지고 나머지 한쪽 손도 내밀었다.
두 개의 가슴을 양손으로 동시에.
힘이 들어가지 않게 주의하며 조심조심 조물거린다.
그 안에 느껴지는 브래지어의 무늬 하나하나를 가늠하듯이.
“아…… 잠깐만.”
문득 신혜가 내 양손을 붙잡아 멈추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