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
지금 괜찮다고 했어?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정말? 정말로 괜찮아?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입을 뗐다.
“그럼…… 수업 마치고 남아서 같이 공부할래?”
이 말을 꺼내는 짧은 시간 동안 내가 얼마나 고민했는지 신혜는 알까.
“좋아! 근데 나 공부 못한다고 화내면 안 돼?”
“다, 당연하지.”
신혜는 내가 고민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가볍게 승낙했다.
웃음이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을 참느라 안간힘을 써야 했다.
이 기분을 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짝사랑하는 여자애와 방과 후에 남아서 같이 공부할 수 있다니.
이게 정말 현실일까?
“선후야. 이건 어떻게 풀어?”
방과 후.
내 옆자리의 신혜가 묻는다.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누르고 자연스럽게 신혜에게 몸을 붙였다.
“어, 이거? 그러니까…….”
가까이 다가가자 신혜에게서 샴푸 향이 물씬 풍긴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두근대는 소리가 신혜에게도 들리는 건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이건 이쪽을 이렇게 해서.”
“아~.”
열심히 공부하길 잘했다.
지금 이렇게 신혜 옆에서 함께 공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평생 공부한 걸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누구야? 학교 공부가 쓸데없다고 한 인간은.
“선후는 정말 잘 가르치네. 머릿속에 쏙쏙 들어와. 선생님 해도 되겠어.”
활짝 웃는 신혜를 보고서 나는 무심코 내 가슴을 주먹으로 때렸다.
심장마비가 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내 장래희망이 선생님이거든.”
“정말?”
거짓말이다.
사실은 지금 막 정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이었다니.
이런 일이라면 평생직장으로 삼아도 좋을 것 같았다.
가벼운 남자라 욕해도 상관없다.
아무튼 지금부터 내 장래희망은 선생님이다.
“그럼 어떡해? 미래의 선생님한테 이렇게 공짜로 가르침 받아도 돼?”
“부, 부담 가질 필요 없어. 가르치는 연습이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그래도…….”
“가르치면서 내 공부도 되고. 혼자 복습하는 것보다 가르치면서 하는 게 훨씬 머리에 잘 들어오거든.”
나는 열심히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신혜가 부담감을 느껴서 이제 안 하겠다고 한다면…….
그런 미래는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음~ 그럼 어쩌지? 공짜로 받기만 하는 건 미안한데.”
신혜는 턱을 괴고 고민한다.
나한테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그렇게 신혜가 웃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 그럼 내가 저녁 도시락 싸 올까?”
“도시락?”
학교 수업이 끝나는 시간은 오후 5시.
점심은 학교에서 급식이 나오지만, 저녁은 안 나온다.
학교가 마친 뒤에도 남아서 공부하기 위해 저녁 도시락을 싸 오는 애들도 적지 않았다.
“응. 매일 밖에서 사 먹으면 돈 아깝잖아? 내가 선후 몫까지 싸 올게.”
매일?
그럼 매일 이렇게 남아서 같이 공부하는 거야?
게다가 매일 신혜가 만드는 도시락을 먹을 수 있다고?
“그, 그래도, 그럼 내가 미안해서…….”
“괜찮아. 내 거 만드는 김에 같이 만드는 건데 뭘. 요리 연습도 되고.”
마치 꿈 같은 제안에 나는 우선 사양했다.
신혜는 마치 내가 같이 공부하기 위해 했던 변명을 그대로 돌려주듯이 말했다.
“그리고 나중에 시집가려면 요리도 배워야 하잖아? 신부수업이라고 생각하지 뭐.”
그 말이 결정타였다.
나를 상대로, 신부수업.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혜가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물론 신혜 옆에 서 있는 신랑은 나였다.
“그, 그럼…… 부탁해도 될까?”
“응. 맡겨줘. 대신 맛 없다고 남기기 없기야?”
“아, 응…… 당연하지.”
신혜가 도시락을 싸 준다니.
쌀알 한 톨도 남길 리가 없다.
도시락 가득 모래만 넣어 오더라도 나는 다 퍼먹을 자신이 있었다.
그날부터 나의 꿈 같은 학교생활이 시작되었다.
매일 신혜와 방과 후에 남아서 함께 공부를 하고, 신혜가 싸 온 도시락을 함께 먹고, 폐문 시간이 되면 함께 하교했다.
학교가 이렇게 즐거운 곳이었다니.
10년 넘게 학교를 다니면서도 처음 안 사실이었다.
“어때? 입맛에 맞아?”
“응. 맛있어. 정말로.”
나는 도시락을 허겁지겁 먹으며 말했다.
신혜가 싸 온 도시락은 처음엔 어설펐지만, 갈수록 모양도 잡히고 맛도 좋아졌다.
무엇보다도 점점 내 입맛에 맞게 변해갔다.
마치 신혜가 내 색깔로 물들어가는 듯한 기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한 기분이었다.
신혜를 향한 내 호감도는 이미 천장을 뚫고 있었다.
이보다 더 좋아할 순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일은 또 오늘보다 더 사랑했다.
아아. 좋아서 미칠 것 같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매일 학교에 가는 게 기다려지고, 밤마다 잠을 설치고, 꿈에서도 신혜가 나오고, 온종일 신혜 생각만 하게 됐다.
그런데도 부족했다.
좀 더 신혜와 친해지고 싶었다.
공부 핑계 없이도 만나고, 이야기하고, 손을 잡고 싶었다.
이제는 하루도 미룰 수 없었다.
그래. 고백하자.
나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여고생, 임신혜 2
“좋아해.”
그 말은 예고도 없이, 마음의 준비도 없이.
뇌를 거치지도 않고 내 입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가슴을 가득 찬 마음이 넘쳐 흐르듯이, 그렇게 나왔다.
“응. 알아.”
신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 안다고?”
나 자신이 마음의 준비도 없이 갑자기 고백해버린 것도 당황스러웠지만, 신혜의 담백한 태도는 나를 더욱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좋아’도 ‘싫어’도 아니고 ‘안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당황하는 나를 보며 신혜는 싱긋이 미소지을 뿐이었다.
“그럼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티 났어?”
“당연하지.”
부끄러웠다.
그렇게 감추려고 노력했는데.
사실 이미 다 알고 있었다니.
“너랑 나랑 서로 좋아하는 거 모르는 사람은 우리 반에 선후 너밖에 없을걸?”
“어?”
신혜의 말은 선뜻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너랑 나랑? 서로? 좋아한다고?
“나도. 널. 좋아한다고.”
알아듣지 못하는 나를 위해.
신혜는 한 마디 한 마디 똑똑 끊어서 말했다.
신혜도.
나를.
좋아한다고.
“아.”
나는 멍청하게 그런 소리만 내고 있었다.
기쁜데, 너무 기뻐서, 이성이 감정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중추신경이 마비된 것 같았다.
“선후 너도 날 좋아하고, 나도 널 좋아하니까, 그럼 우리 오늘부터 사귀는 거지?”
“어, 으, 어, 응.”
“하하. 뭐야 그게.”
얼빠진 나를 보며 신혜는 즐거운 듯이 웃었다.
“자. 손.”
마치 키우는 강아지를 대하듯이.
신혜는 내 앞에 손바닥을 내밀었다.
하지만 전혀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진심으로 개가 되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혜가 내민 손 위에 내 손을 올린다.
처음으로 잡은 신혜의 손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너무나 기분이 좋아서. 상냥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와서.
그저 하루종일 이대로 연결되어 있고 싶었다.
불덩이라도 잡고 있는 것처럼 체온이 올라갔다.
온몸이 뜨겁고 땀이 퐁퐁 솟아났다.
쇼크를 너무 크게 받아서 몸이 고장 난 게 아닐까.
다만 내 손에서 난 땀 때문에 신혜가 기분 나쁘지는 않을까, 그것만이 걱정이었다.
“저…… 신혜야. 손에 땀…….”
내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신혜는 깜짝 놀라서 내 손을 놓았다.
그리고 자기 손을 교복 상의에 열심히 문지르는 것이었다.
……그렇게 기분 나빴던 걸까.
“……미, 미안. 기분 나빴어?”
하지만 사과한 건 오히려 신혜였다.
마치 자기 손에서 땀이 나서 내가 기분 나빠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당황해서 손사래를 쳤다.
“아니, 내 손에 땀이 나서 그런 건데…….”
혹시 신혜는 반대로 생각한 걸까.
가볍게 장난치듯 손을 잡도록 유도했지만, 사실 신혜도 나만큼 긴장하고 있었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을 조이던 초조함이 빠져나갔다.
그 대신 행복이 가슴 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신혜는 말했지. 자기도 나를 좋아한다고.
이제야 그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의 현실감이 닥쳐왔다.
신혜가 나를 좋아한다.
내 고백을 받아주었다.
망상이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아아. 이렇게 기쁜 일이 또 있을까.
“신혜야.”
이번엔 내가 먼저 용기를 내 신혜의 손을 잡았다.
작고 부드러운 여자애의 손이었다.
긴장으로 정신없었던 이전과는 달리, 마음이 진정된 지금은 그 손의 감촉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단지 손을 잡고 있을 뿐인데.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행복한 기분이 넘쳐 흘렀다.
신혜는 살짝 저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부끄러워 하는 걸까.
예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거울을 보면 아마 나도 신혜와 비슷하게 빨개져 있겠지.
하지만 나는 부끄러움보다 행복감이 더 컸다.
가슴이 벅차오른다.
행복으로 가득 차 터질 것만 같았다.
“신혜야. 나 지금 너무 행복해.”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멋있는 말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내 입에서 나온 건 그런 뻔한 말뿐이었다.
“……나도.”
신혜는 짧은 대답으로 돌려줬지만, 그것만으로도 내 마음의 등불을 밝히기에는 충분했다.
“좋아해.”
“……나도.”
“첫눈에 반했었어.”
“……나도.”
“사랑해, 신혜야.”
“……나도.”
숨겨왔던 마음을 전부 털어놓는다.
짐짓 무성의하게 들리는 신혜의 대답에서도 나는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화려한 미사여구로 꾸미지 않아도 말에 진심만 담겨 있다면 그 마음은 상대에게 전해진다.
나는 신혜에게서 또 하나 배울 수 있었다.
“……키스, 해도 돼?”
이런 걸 물어보고 하는 남자는 멋 없을까.
하지만 나같이 소심한 인간이 막무가내로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내가 이런 말을 꺼낸 것만으로도 기적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
“……응.”
조용히 허락하는 대답이 돌아오고,
신혜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다.
마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신혜도 나만큼이나 긴장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너무나도 긴장한 탓에 키스하기 전부터 숨을 멈추었다.
눈을 감고, 입술을 덜덜 떨면서,
신혜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내 입술에 닿는 신혜의 입술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말랑하고, 녹아내릴 것처럼 뜨거웠다.
입술이 맞닿은 건 아주 잠시뿐이었지만.
신혜와의 키스는 언제까지고 사라지지 않는 열기를 내 입술에 남겼다.
“…….”
“…….”
첫 키스를 마친 후.
우리는 한참 동안 말없이 손을 잡고 있었다.
마치 온 세상에 우리 두 사람뿐인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