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근하다.
교복을 입은 엄마를 안고 있다.
왠지 이상한 기분이었다.
“아.”
그리고 엄마는 뒤늦게 내가 입은 옷을 알아챘다.
“선후 너, 그 옷…….”
나는 웃으면서 엄마 앞에서 교복 차림을 자랑했다.
“엄마, 어때? 나도 입어봤어, 교복.”
“서, 선후야.”
엄마의 반응은 내 기대와는 조금 달랐다.
당황스러운 감정이 앞서는 걸까.
교복을 입은 나를 보는 엄마는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왜? 이상해?”
“아니, 그, 아니, 안 돼.”
“안 돼? 뭐가?”
좀 더 좋아해 줄 줄 알았는데.
엄마는 오히려 당혹스러운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내 교복 차림은 엄마에게 그만큼 충격적이었던 거 같다.
“……이제 됐지? 그만 갈아입자.”
겨우 침착해진 엄마는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물론 나는 이대로 갈아입을 생각이 없었다.
“엄마.”
돌아선 엄마를 이번엔 뒤에서 살포시 끌어안는다.
엄마의 신체가 흠칫 떨리는 게 느껴졌다.
“나, 하나 더 엄마한테 부탁해도 돼?”
“……뭔데?”
“엄마랑 오랜만에 상황극 하고 싶어.”
“상황극?”
내 말에 엄마는 고개를 돌리고 눈을 깜빡였다.
상황극.
대본도 뭣도 없이, 최소한의 배경만 던져주고서 즉흥으로 진행하는 연극이다.
고등학교 진학 후로는 거의 하지 않았지만, 더 어렸을 때는 엄마와 함께 자주 했었다.
그 경험은 내가 성장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됐다.
연기자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지금의 진선후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양한 상황에, 다양한 배역을 맡아서,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 연기한다.
당대 최고의 여배우인 엄마와 그런 연습을 할 수 있었던 건 나에게 크나큰 행운이었다.
그리고 나는 예전 기억을 떠올리며 엄마에게 다시 한번 그때와 같은 상황극을 제안한 것이다.
“아, 안 돼.”
어렸을 적 했던, 연기 연습을 위한 상황극과는 다르다.
엄마도 나도 교복 차림.
그리고 엄마와 나의 관계도 예전과 달라졌다.
엄마와 아들에서 남자와 여자로.
내가 제안한 상황극이 어떻게 진행될지 엄마도 예상한 거겠지.
엄마는 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엄마. 제발. 응?”
나는 엄마를 꼭 끌어안고서 어리광을 부렸다.
교복 또한 부끄러워하면서도 입어준 것처럼, 내가 계속 부탁하면 엄마는 결국 부러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선후야…….”
엄마는 불안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엄마의 얼굴에 떠오른 복잡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아들과 일선을 넘어버렸다는 죄악감, 죄책감.
교복을 입고 있는 내 모습은 엄마의 그런 감정을 일으키는 트리거가 됐는지도 모른다.
교복을 입은 미소나 누나를 보는 내 감정과는 다르겠지.
엄마에게 나는 아들이니까.
교복을 입은 내 모습에 엄마는 순수하게 아들로서 나를 사랑했던 때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학생 시절 엄마를 만나고 싶어. 안 될까?”
엄마와 나 사이에는 20여 년의 시간이 가로막고 있다.
내가 학창 시절 엄마를 만나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물리적으론 불가능할지라도, 연극 안에서는 가능했다.
엄마도 나도 연기자이기에.
충분히 발달한 과학 기술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 했던가.
연기 또한 그렇다.
완벽한 연기는 마법과도 같다.
과학조차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한다.
시간도 공간도 뛰어넘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대배우 임신혜라면 과거의 자신을 연기하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교복 입은 엄마를 봤을 때 느낀 설렘.
나는 그것을 찾고 싶었다.
음울했던 내 학창 시절에 엄마를 동급생으로 만났더라면.
내 회색빛 학창 시절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태어난 시기가 달랐다는 이유만으로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의 엄마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나에겐 너무나 억울하게 느껴졌다.
그 억울함을 풀기 위해, 나는 엄마에게 부탁했다.
‘여고생 임신혜’를 연기해달라고.
“선후야, 그런, 건…… 그런 건 못해. 엄마도 이제 나이가…….”
“배역에 나이 같은 건 중요하지 않잖아?”
당황하는 엄마를 다시 한번 설득한다.
배역이 동물이든 사람이든 상관없다.
성별도 나이도 관계없다.
연기자는 맡은 배역을 연기할 뿐.
나한테 그렇게 가르친 건 엄마였다.
“그래도……. 이 나이에 여고생 연기라니…….”
엄마가 망설이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연기를 요구하면 나라도 싫을 거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보고 싶었다.
여고생을 연기하는 엄마를.
여고생 임신혜를, 만나고 싶었다.
“부탁해, 엄마. 앞으로 내가 배우로서 살아가는 데 분명 큰 도움이 될 거야. 내 연기 공부를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이번만 해줘.”
나는 엄마를 꼭 끌어안고서 다시 한번 부탁했다.
여고생을 연기하는 엄마를 보고 싶다는 개인적인 욕심도 있지만, 그 연기를 통해 내가 얻을 경험치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내가 앞으로도 연기자로서 살아간다면 이 경험은 분명 적지 않게 도움이 되겠지.
나보다 훨씬 오랫동안 이 일에 몸담아온 엄마가 모를 리 없었다.
“…….”
‘아들을 위해서’.
그 말은 엄마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는 마법의 면죄부였다.
“……그럼, 안 어울린다고 비웃기 없기야.”
한참을 고민하던 엄마는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당연하지!”
그 기쁨에 활짝 웃는 나를 보고, 엄마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럼 잠깐만 기다려. 마음의 준비 좀 하게.”
엄마는 그렇게 눈을 감고서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신난다! 여고생 엄마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연기는 엄마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나도 고등학생으로 돌아가야겠지.
나는 지금까지의 기억을 접어 기억의 창고에 넣고 봉인했다.
그리고 기억의 창고에서 고등학생 시절의 나를 불러왔다.
나는 21살 진선후가 아니라, 18살 진선후가 되었다.
“후…….”
엄마가 내 앞에서 천천히 숨을 내쉰다.
그리고 감았던 눈을 떴다.
고등학생이 된 엄마…….
아니.
고등학생 임신혜가 거기에 있었다.
여고생, 임신혜
“얘, 선후야.”
누군가가 내 어깨를 톡 친다.
집중해서 문제를 풀고 있던 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임신혜.
우리 반에서, 아니,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예쁜 아이가 내 뒤에 서 있었다.
“뭐해? 또 공부해?”
“아, 응.”
자연스럽게 묻는 말에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혜는 성격도 밝고 누구에게나 친절해서, 별로 친하지 않은 나한테도 가볍게 말을 걸어왔다.
반면에 나는 여자는커녕 남자와도 대화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거기다 상대는 학교에 제일 예쁜 아이.
내 목소리가 긴장으로 떨리는 것도 어쩔 수 없으리라.
“흠?”
학생이 공부하는 게 신기하기라도 한 건지, 신혜는 고개를 들이밀고서 내가 풀고 있던 문제집을 들여다보았다.
자연스럽게 신혜의 가슴이 내 얼굴 바로 옆으로 다가왔다.
고개만 돌리면 얼굴이 닿아버릴 것만 같은 위치에.
나는 저절로 손에 땀이 나고 얼굴이 빨개지는 걸 느꼈다.
신혜 가슴은 크다. 정말로.
학생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보면 안 된다는 건 안다.
하지만 나도 남자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쪽으로 시선이 가고 만다.
수업 중에도, 쉬는 시간에도, 힐끗힐끗.
나뿐만이 아니다.
신혜와 같은 반이 된 남학생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신혜의 가슴은 시선을 빨아들이는 마성의 가슴이었다.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성격도 좋고 가슴도 크다.
같은 반에 이런 여자애가 있는데, 좋아하지 말라는 게 무리한 요구 아닐까?
그렇게 멀리서 훔쳐보기만 했던 신혜가, 지금은 이렇게 가까이에 있었다.
나는 무심코 넋 놓고 눈앞의 가슴만 쳐다볼 것 같았다.
안 되지. 대놓고 보는 걸 들키면 경멸당할지도 모른다.
나는 최대한 본심을 숨기기 위해 노력했다.
“무슨 공부해?”
“그, 그냥…….”
“그냥 뭐?”
“……수능 공부.”
뭔가 재미있는 대화라도 나누고 싶었지만, 말주변이 없는 데다 긴장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질 않았다.
아아. 이렇게 재미없는 남자, 신혜는 금방 질려서 가버리겠지.
동경하는 아이를 눈앞에 두고도 나는 기운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벌써? 수능 아직 1년도 넘게 남았잖아.”
“응…… 그래도 난 별로 머리 안 좋으니까. 일찍 시작해야지.”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 머리가 좋지 않다는 걸 절실하게 느꼈다.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집안이 좋은 것도 아니다.
성격은 소심하고 자신 있게 친하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 하나 없다.
그런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공부라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됐다.
“그래? 선후 정도면 좋은 거 아닌가?”
“전혀. 신혜도 공부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나보다 더 잘할 수 있을걸?”
말 한마디만 해봐도 이 아이가 머리가 좋은 아인지 나쁜 아인지는 금방 알 수 있다.
신혜는 분명 똑똑한 아이였다.
하지만 이렇게 예쁜 아이는 열심히 공부할 필요도 없겠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위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니까.
어떤 잘난 남자라도 이 아이에게 사랑받을 수만 있다면 모든 걸 바칠 것이다.
“어? 선후 너, 내 이름 아는구나?”
그런데, 신혜는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신혜가 워낙 자연스럽게 내 이름을 불러줘서 나도 똑같이 이름을 불러봤는데.
신혜는 내가 자기 이름을 아는 게 신기했던 모양이다.
우리 학교에 임신혜라는 이름 석자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어, 응. 알지 그럼.”
머뭇거리는 내 말에 신혜는 뭐가 재미있는지 배시시 웃었다.
그 웃는 얼굴에, 나는 심장을 사로잡히고 말았다.
나 따위가 넘볼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신혜를 좋아하게 돼버렸던 것이다.
겨우 몇 마디 말과 웃는 얼굴 한 번에.
나는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 * *
신혜를 좋아하게 된 후, 나는 열심히 공부했다.
열심히. 그야말로 미친 듯이.
좋아하게 돼버린 여자애가 너무 대단해서, 공부라도 미친 듯이 잘하지 않으면 감히 말을 걸 엄두조차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전까진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막연히 공부라도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신혜라는 구체적인 목표가 생김으로써 공부의 효율이 올랐다.
더욱 집중하고, 조금이라도 더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노력했다.
덕분에 5위권에서 머물던 내가 지난 모의고사에서는 반에서 1등을 차지할 수 있었다.
“와! 선후 1등 했어? 진짜? 축하해!”
신혜가 건네는 축하의 말 한마디에 모든 노력이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더더욱 신혜가 좋아진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모쏠아다는 여자가 말 한마디만 걸어줘도 손자 이름까지 생각한다더니.
지금 내 상태가 딱 그랬다.
싫어하는데 이렇게 웃어줄 리가 없다고.
신혜는 혹시 날 좋아하는 게 아닐까, 하고.
하루에 말 한마디 겨우 나누는 정도지만, 내 머릿속에선 첫 아이는 신혜를 닮은 딸이 좋겠다는 생각마저 하고 있었다.
신혜를 닮은 딸이라면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겠지.
그 귀여운 딸이 남자친구랍시고 이상한 놈을 데려오면 어떡하지?
그 남자의 얼굴에 펄펄 끓는 녹차를 부어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혼자 그런 망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선후는 좋겠다, 성적 잘 나와서. 나는 자꾸 떨어져서 걱정인데. 특히 수학. 점점 못 따라가겠어.”
한숨을 푹 쉬며 말하는 신혜.
시무룩한 표정에 내 마음도 따끔거린다.
“수학? 내가 도와줄까?”
내가 말하고서도 아차 싶었다.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에 그만 반사적으로 그런 말을 내뱉고 말았다.
아무리 내가 모쏠아다라도 현실과 망상은 구분한다.
나와 신혜는 하루에 말 한마디 섞을까 말까 한 서먹한 사이다.
그것도 신혜가 워낙 착하니까 외톨이인 나한테도 말을 걸어주는 거지.
아마 신혜는 나를 친구라고조차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 망상과 현실을 착각해서는 안 되는데.
마치 친한 사이처럼, 나는 그런 말을 스스럼 없이 하고 말았다.
펜을 쥔 손에 땀이 잡혔다.
괜한 소릴 해서 신혜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
내가 자기한테 흑심 품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앞으론 지금처럼 가끔 말 걸어주는 것조차 없어지는 건 아닐까?
신혜에게서 대답이 돌아오기 전, 그 짧은 순간에 그런 생각까지 떠올랐다.
가슴이 아플 정도로 조여왔다.
“정말? 나 공부 도와준다고?”
신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내가 걱정했던 냉담한 반응은 아니었다.
나는 겨우 안심할 수 있었다.
“어, 응, 물론, 신혜만 괜찮다면.”
나는 소극적으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만일 신혜가 사양하더라도 상처받지 않도록.
그리고 신혜 눈에 내가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나야 당연히 괜찮지! 1등이 공부 봐준다는데.”
신혜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