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6화 (146/256)

오늘따라 두 사람 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뭐, 어차피 어젯밤 나랑 있었던 일 때문이겠지만.

“선배는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혹시 밖에서 엿듣기라도 했어요?”

“…….”

“왜 말을 못 해요? 제가 선후 ‘따먹고’ 있는 동안, 선배는 밖에서 훌쩍훌쩍 울고 있었던 거 아니에요?”

“뭐……!”

지혜 누나는 마치 보고 오기라도 한 것처럼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다행히 들리는 장소에 사람은 없지만, 멀리서 관계자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신인 배우를 갈구는 신지혜 배우와, 그런 신지혜 배우에게 한소리 하는 황수아 배우의 구도로 보일 것이다.

이야길 듣는 사람이 없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자자, 누님들, 저 때문에 싸우지 마세요.”

“선후 씨는 빠져 있어요!”

“넌 빠져! 어디 어른들 말씀하시는데!”

“아, 네.”

나는 괜히 분위기 바꾸려고 나섰다가 양쪽에서 얻어맞고 찌그러졌다.

그나저나 어쩌면 좋지.

둘 다 점점 언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까딱 잘못해서 이상한 이야기가 퍼지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주연 배우들의 험악한 분위기에 많은 사람이 멀리서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누구 하나 나서는 사람은 없었지만.

이 두 사람을 말릴 수 있는 엄마는 하필 오늘 촬영이 쉬는 날이었다.

한 쪽은 21년차 베테랑 여배우.

한 쪽은 현재 제일 잘 나가는 초신성 여배우.

그야말로 용호상박이었다.

누구도 이런 싸움에는 끼어들고 싶지 않겠지.

나를 구해줄 이는 아무도 없단 말인가!

요즘은 세상이 너무 각박해졌어!

하지만 그런 각박한 세상에도 천사는 존재했다.

“오오! 승희야, 어서 와! 오늘도 예쁘네!”

마침 아역배우 나승희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승희는 언제나 예뻤지만, 오늘은 특히 나를 위기에서 구해줄 천사처럼 보였다.

“아빠. 안녕하세요. 황수아 배우님, 신지혜 배우님, 안녕하세요.”

나는 얼른 승희를 안아들었다.

뒤에 있던 승희 어머니와도 눈으로 인사했다.

“자, 승희야, 우리 저쪽 가서 놀까? 아빠랑 소꿉놀이하자.”

“진선후 배우님……. 승희도 그 정도로 어린애는 아닙니다.”

“그, 그런가요?”

승희 어머니는 나에게 안겨 앙앙 울던 때와는 달랐다.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는 사람이었다.

“뭘 은근슬쩍 빠지려고 해요?”

“어딜 도망가?”

“윽.”

승희를 핑계로 도망치려던 내 계획은 원천봉쇄되었다.

나에게 안겨있던 승희는 기묘한 분위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누님들, 이제 진짜 그만하시죠. 승희도 있는데.”

그건 진심이었다.

모범을 보여야 할 선배 여배우들이 사적인 일로 싸워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한참 서로를 노려보다 신지혜 배우가 먼저 말을 꺼냈다.

“……좋아요, 수아 선배. 우리 이렇게 해요.”

“어떻게?”

“오늘 우리 둘 중에 연기 더 잘한 사람이 쟤랑 오늘 하룻밤 같이 보내기로.”

지혜 누나는 폭탄 발언을 떨어뜨렸다.

여기서 지혜 누나가 말하는 ‘쟤’는 말할 것도 없이 나다.

“와! 승희야, 귀 막아.”

하필 승희의 귀를 막았어야 할 내 양손은 승희를 안고 있느라 봉인된 상태였다.

승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지혜 누나는 애 듣는 데서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리고 왜 그런 얘기가 되는 건데!

“재밌겠네. 어디 한번 해 봐.”

수아 누나는 그걸 또 받아주고 있었다.

당신들! 열 살 먹은 애냐고!

애들도 이런 내기는 안 하겠다!

승희 어머니는 멍하니 두 여배우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아아. 다 들려버렸다.

어떻게든 승희 어머니께는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해야…….

“아빠랑 하룻밤? 나도 할래!”

……제발.

여기엔 여배우가 한 명 더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나승희다.

승희도 나이는 어리지만 한 사람의 훌륭한 연기자였다.

승희는 그 나이 때의 나보다도 훨씬 깊이 있는 연기를 하고 있었다.

그 연기를 보고 있으면 무서울 지경이다.

……그렇다고 하필 이런 싸움에 끼어들다니.

햄버거라면 나중에 얼마든지 사줄 테니까 제발 지금은 가만히 있어 줘!

“죄송합니다! 승희야! 어른들 말씀에 끼어들면 안 돼!”

“싫어! 나도 할래!”

“나승희!”

다행히 승희 어머니가 승희를 말리려 끼어들었지만, 승희는 막무가내였다.

보기 드물 정도로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괜찮아요, 승희 어머니. 승희도 같이 하게 해주세요.”

수아 누나는 여유롭게 새로운 챌린저를 받아들였다.

용의 눈엔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래요. 이런 모티베이션은 중요하니까.”

지혜 누나는 드라마에 도움이 된다면 뭐든 괜찮겠지.

호랑이의 눈은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는 눈치였다.

그런데 이거, 판정은 누가 어떻게 하는 거야?

누구 손을 들어줘도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빠. 꼭 이길게.”

게다가 승희도 의욕에 넘치고 있었다.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작은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

……제발 다치지만 말아줘.

저번 같은 사고가 나는 건 싫으니까.

“승희야. 화이팅.”

……왠지 승희 어머니도 승희를 응원하고 있었다.

어머니. 응원을 하지 말고 말려주세요. 제발.

훗날 전설로 남을 두 여배우……아니, 세 여배우 간의 연기 대결이 지금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이 싸움이 끝나면 나, 엄마를 만나러 갈 거야.

나는 오늘 촬영이 무사히 끝나기만을 빌었다.

황수아 vs 신지혜 2 

나는 지금 몹시 불안에 휩싸여 있다.

이유는 말할 것도 없다.

황수아와 신지혜, 두 배우의 신경전 때문이다.

재능있는 두 배우가 서로를 자극하며 절차탁마한다.

그것만 들으면 굉장히 멋진 이야기처럼 들린다.

거기에 남자 문제가 끼어있지 않다면 말이지.

하다못해 그 남자가 내가 아니었으면, 좋은 구경거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사이에 낀 남자가 된 나는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하필 오늘은 두 사람이 맡은 배역이 정면으로 부딪치는 날이다.

황수아 배우가 연기하는 신아영과 신지혜 배우가 연기하는 김선아가 카페에서 독대한다.

두 여자는 오늘, 나라는 한 남자를 두고 피 튀기는 전쟁을 치를 예정인 것이다.

과연 오늘 촬영은 부상자 없이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나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세트장에 시선을 두었다.

* * *

“우리 진우 씨 지금 부인되시죠? 반가워요. 김선아예요.”

신지혜 배우가 연기하는 캐릭터, 김선아.

그녀는 본인이 약속을 잡았으면서 20분이나 늦게 나타났다.

테이블에는 황수아 배우가 연기하는 신아영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 황진우(진선후)의 아내이자 수정이(나승희)의 엄마이기도 하다.

“날 불러낸 이유가 뭐예요?”

신아영은 우아하게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김선아는 단아한 얼굴에 냉정한 비웃음을 띠며 그 맞은편에 앉는다.

“성격 되게 급하시다. 진우 오빠는 그런 거 싫어하지 않아요? 사랑할 때도 느긋하게 하는 걸 좋아하는데.”

거침없는 말투에 신아영의 눈썹이 작게 꿈틀거린다.

“그런 얘기나 하려고 불렀어? 천박한 게 딱 불륜녀 입에 어울리네.”

“불륜? 어느 쪽이 불륜일까? 거짓말 날 떼어놓고, 진우 오빠도 속여서 옆에 매어놓은 게 누군데?”

“난 거짓말한 적 없어.”

“하! 자기 사욕을 위해 진실을 숨기는 건 거짓말이 아니야? 애초에 당신 딸, 정말 진우 오빠 딸 맞아? 당신 유학 갔을 때──”

촥.

김선아의 얼굴에 차가운 생수가 뿌려진다.

“주둥아리 함부로 놀리지 마. 세상 여자가 다 너처럼 몸 함부로 굴리는 걸레로 보여?”

조용히 분노하는 신아영.

언제나 품위를 잃지 않는 신아영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더욱 임팩트 있었다.

“하. 하하. 걸레?”

김선아도 당하고만 있진 않았다.

촤륵.

PPL용으로 가져온 커피를 신아영의 얼굴에 뿌린다.

까만 커피와 딱딱한 각얼음이 신아영의 얼굴에 부딪힌다.

“내가 걸레면 넌 변기 솔이야. 양놈들 좆이나 빨고 똥구멍이나 핥아주는──”

『캇! 캇캇캇!』

* * *

결국 지혜 누나는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다.

대본에도 없는 X이니 X구멍이니, 그런 방송 불가 용어를 마구 뱉어낸 것이다.

“아~ 지혜 씨야! 잘 나가다가 도대체 왜 그래?! 애드립을 쳐도 방송에 나갈 수 있는 애드립을 쳐야지!”

“죄송합니다.”

펄펄 뛰는 감독님과 별로 죄송하지 않아 보이는 지혜 누나.

하지만 나는 그쪽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는 제일 먼저 수아 누나에게 뛰어갔다.

“누나. 괜찮아?”

“서, 선후야…… 나…….”

어지간히 몰입하고 있었는지, 수아 누나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으아. 아까운 황수아의 눈물을 이런 데서 흘리게 하다니.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아닌 거 알아요. 아닌 거 아니까 진정해요. 다 연기예요. 누나한테 하는 말 아니에요.”

“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수아 누나를 위로하려는 나를 지혜 누나가 멈춘다.

그사이 젊은 스태프가 눈치를 보며 황수아 배우의 얼굴에서 떨어지는 커피를 닦아주었다.

“선배! 진짜 왜 그래요? 아무리 그래도 할 게 따로 있지!”

나는 신지혜 배우에게 화를 냈다.

그녀가 이런 짓을 한 이유는 알고 있다.

하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번엔 신지혜와 황수아의 연기 대결 같은 구도가 됐지만, 황수아 배우는 다투는 것처럼 보였어도 진심으로 대결할 생각은 없었다.

나라는 상품을 걸었는데도.

그건 나를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반대로 날 너무 생각해서였다.

수아 누나는 아마 이번 대결의 판정을 나에게 맡기려 했을 것이다.

같이 밤을 보낸 사람을 고르는 선택권을 나에게 준다.

내가 수아 누나 본인을 선택하면 물론 좋겠지만, 지혜 누나의 손을 들어주더라도 아무 불만 없이 받아들였겠지.

자신을 원한다면 자신이 상대하고, 다른 여자를 원한다면 흔쾌히 보내준다.

그게 황수아가 선택한 스탠스였다.

사랑하지만 가질 수 없고, 집착하면 오히려 멀어질 뿐.

그런 나와의 연결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신아영도 그렇다.

극 중 캐릭터에는 연기자의 성격이 어느 정도는 녹아 들어가 있다.

수아 누나가 지혜 누나와 진심으로 싸우려 들지 않는 것처럼, 신아영이란 캐릭터는 김선아라는 캐릭터를 진심으로 미워할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긴 김선아의 마음에 어느 정도 공감한다.

그녀가 자신을 원망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자신 때문에 인생이 불행해진 김선아에 대한 동정심도 있었다.

그러니까 신아영은 김선아가 덤벼들더라도 가능하면 좋게좋게 넘기려 했다.

하지만 지혜 누나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판을 깔아줬는데도 진심을 다하지 않는 수아 선배가.

함께 진흙탕에서 뒹굴려 하지 않고, 우아하게 커피나 마시고 있는 신아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혜 누나는 경고의 메시지를 날렸다.

좋게 넘어가려 한다고 좋게 넘어갈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진심으로 싸우지 않으면 당신이 가늘게라도 유지하려는 그 관계를 파탄시킬 수도 있다고 경고한 것이다. 

“선배. 미안해요. 옷 갈아입고 다시 해요.”

지혜 누나가 수아 누나에게 무성의한 사과를 남기고 돌아섰다.

수아 누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넌 따라와.”

지혜 누나가 대기실로 향하며 나를 지목한다.

저요? 왜요?

그렇게 물을 수도 없는 분위기였다.

할 말이 있는 걸 수도, 단순히 내가 수아 누나를 달래주는 걸 바라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어쨌든 신지혜 배우의 공개적인 명령을, 까마득한 후배인 내가 거부할 수는 없었다.

“수아 선배. 너무 마음에 두지 마요. 일부러 저러는 거니까.”

“진선후! 빨리 오라고!”

나는 얼른 황수아 배우에게 말하고 신지혜 배우를 뒤쫓았다.

황수아 배우는 그런 신지혜 배우를 원망스럽게 노려보고 있었다.

촬영장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상황을 지켜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또 신지혜가 그 특유의 히스테리를 부렸다고 생각할 것이다.

촬영을 핑계로 선배 여배우에게 쌍욕을 퍼부었다는 신지혜의 전설이 또 탄생할 것 같다.

“지혜 누나.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잖아요.”

“닥쳐. 네가 싼 똥 치워주는 거니까.”

“똥이라니…….”

지혜 누나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가는 매니저가 죄송하다는 듯 고개를 꾸벅거린다.

“너 때문에 수아 선배가 물렁해진 걸 내가 두드려주는 거 아냐.”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아야.”

가벼운 로우킥을 맞았다.

닥치라는 의미겠지만, 닥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누나. 전 수아 누나보다 지혜 누나가 걱정이라니까요.”

“네가 날 걱정해? 너 좀 웃길 줄 안다? 네 앞가림이나 잘하세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신지혜의 성격을 아는 몇몇 관계자들밖에 없겠지.

그런 사람들도 그 중간에 내가 끼어있다는 걸 모르는 이상, 정확한 내용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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