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5화 (145/256)

선하가 좀 더 저항했으면 모를까, 이 정도면 부끄러워서 숨기는 거로밖에 보이지 않겠지.

친구들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나와 선하를 번갈아 보았다.

“빵 사러 왔어요? 제가 살게요. 하나씩 골라봐요.”

“진짜요?”

내 말에 선하 친구들의 태도가 확 달라졌다.

“오빠! 그러실 필요 없어요.”

반면에 선하는 굳은 얼굴로 난감해한다.

나는 여유 있게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내가 사고 싶어서 사는 건데 뭐.”

“그래! 네 남친이 사주고 싶대잖아!”

아이들은 와글와글 떠들며 빵을 고르기 시작했다.

하나씩만 고르라고 했는데, 3개, 4개씩 고르는 건 기본이었다.

그리고 이 파벌의 대장으로 보이는 여자애는 이 빵집에서 제일 큰 케이크를 골랐다.

“……진짜 그거 살 거야? 다 먹을 수 있겠어?”

“다 먹을 수 있어요!”

그것도 빵은 빵이긴 하다만.

당뇨가 두렵지 않은가?

“알았어. 대신 남기면 안 돼.”

“네!”

아이들이 고른 빵을 전부 모아 계산한다.

……빵도 모이니까 의외로 비쌌다.

여자애들이 먹어봐야 얼마나 먹겠냐고 만만하게 봤다가 큰코다칠 뻔했다.

“그럼 우린 마저 데이트하러 가볼게요. 맛있게들 먹어요.”

“네~.”

“재밌게 노세요 오빠~.”

“선하 학교에서 봐~.”

역시 애들은 먹을 거로 낚는 게 제일이구나.

이렇게 보면 괴롭히는 애들도 평범한 아이들이란 말이지.

“우리 선하랑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줘요.”

계산을 마친 후, 보란 듯이 선하와 손을 잡고 가게를 나서자 애들이 꺅꺅 소리를 높인다.

선하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내 손을 빼지는 않았다.

다른 손님들이 시끄럽다고 눈총을 주지만, 내 알 바 아니지.

할 말이 있으면 떠드는 애들한테 직접 이야기해주시길 바란다.

“오빠. 뭐하러 그랬어요. 별로 친한 애들도 아닌데.”

“내가 사주고 싶어서. 그럼 안 됐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차에 타자 선하는 불평했지만, 그러면서도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그리고 남친은 또 뭐예요. 학교에서 애들 만나면 뭐라고 말해요. 벌써 문자 오고 난린데.”

선하의 휴대폰은 메시지 알림음으로 불이 나고 있었다.

“그냥 남사친인데 그 오빠가 미쳐서 그랬다고 해. 아니면 내가 일방적으로 쫓아다닌다고 하든가.”

“으…… 어떻게 그래요…… 걔네가 오빠 이상하게 볼 텐데.”

“나는 상관없어. 어차피 나는 걔들 또 볼 것도 아니고. 선하는 계속 봐야 할 테니까 선하 편한 대로 해.”

“……네. 그럼 진짜 제 맘대로 할게요.”

선하는 입술을 실룩거리며 매서운 속도로 메시지를 보냈다.

“다음은 어디 갈까? 데이트 계속 해야지?”

“어, 그럼 오빠, 영화 같이 볼래요? 수험생은 팝콘 무료로 준다는데.”

“영화 좋지. 아, 차에 빵가루 흘리면 안 돼.”

선하와의 다음 데이트 코스는 영화관이었다.

영화는 평범한 국산 멜로영화를 골랐다.

영화 자체는 그럭저럭 재밌었지만, 나는 왠지 영화 자체에는 집중하질 못했다.

연기를 시작해서 그런지 영화를 보는 내내 배우의 연기가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왜 저런 식으로 연기를 했을까’, ‘여기선 차라리 이렇게 하는 편이’하면서.

영화에서 연기한 배우도 갓 데뷔한 신인이 자길 평가하는 걸 알면 기막혀하겠지.

나는 그렇게 건성으로 영화를 봤지만, 선하는 화면에 빨려 들어갈 것처럼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는 내내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문득 미소와 영화관에서 했던 일을 떠올린다.

그에 비하면 손 정도는 뭐, 애교겠지.

나도 그 어린애처럼 작은 손을 꼭 잡아주었다.

영화를 본 뒤엔 양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선하 정장도 한 벌 사줬다.

선하도 이제 대학생이니까 정장 한 벌은 있어야 할 테니까.

“오빠, 진짜 괜찮다니까요.”

선하는 부담스러운지 자꾸만 사양했다.

이 녀석, 스폰서 운운할 땐 언제고.

대학교 가면 교복도 못 입는다고.

결국 나는 매장 직원과의 협공으로 선하에게 새 옷을 사 입히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라도 써야 돈을 버는 보람이 있지.

“……고맙습니다. 잘 입을게요.”

“다른 건 필요 없어? 한 벌 더 살까?”

“이제 진짜 괜찮아요!”

흠.

대학교 들어가면 돈 들어갈 곳도 많을 텐데.

그냥 돈으로 주고 필요한 게 있으면 알아서 사라고 하는 게 나으려나?

“……선후 오빠. 저, 이제 좀 피곤한데.”

“그래? 그만 집에 갈까?”

“아니요! 그, 어디, 쉬었다 갈 만한 데가…….”

“선하야.”

그 정도는 나도 알아듣는다.

얘는 어디서 이렇게 나쁜 것만 배웠을까.

아까 노래방에서도 그렇고, 이 나라는 애 키우는 환경이 너무 안 좋다니까.

“너, 아까 내 말 못 알아들었니?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지?”

“알아들었어요. 그래도 그냥 받기만 하는 건 싫단 말이에요.”

선하가 뾰로통하게 말했다.

선하 마음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그래선 돈을 주고 사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애들은 그런 거 신경 쓰는 거 아니야. 정 보답하고 싶으면 공부나 열심히 해. 어른이 주는 건 그냥 고맙습니다, 하고 받고.”

“치. 어른은 무슨. 2년도 차이 안 나면서.”

“그런 말은 성인 인증이나 받고 나서 하렴.”

“네에~.”

좀 이르긴 하지만 나도 슬슬 촬영장에 가볼 시간이 됐으니 선하와는 이만 헤어지기로 했다.

“여기 내려주면 돼?”

아침에 선하와 만났던 장소에 차를 세운다.

“네, 오빠, 덕분에 오늘 즐거웠어요.”

쪽.

“어른 되기 전이라도 이 정도는 괜찮죠? 다음에 봐요, 오빠.”

선하는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서 차에서 내렸다.

내 입가에 얇은 온기를 남기고서.

…….

이 정도는 괜찮나?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선 키스 정도는 인사라고 하니까.

나는 창문을 내리고 인사했다.

“조심해서 들어가.”

“오빠도 수고하세요. 촬영 잘하시구요.”

귀엽게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선하.

선하를 배웅하는 나는 왠지 이상한 감상에 젖었다.

저 아이를 내가 잘 키워야 한다는, 그런 의무감 같은 게 솟아났다.

딸 키우는 아버지의 마음이 이런 걸까.

선하를 잘 키우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할 것만 같았다.

……음.

어떤 식으로든 동기 부여가 된다는 건 좋은 일이겠지.

선하를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하자.

나는 마음을 다잡고 촬영장으로 향했다.

황수아 vs 신지혜 

“야! 진선후!”

촬영장에 일찍 도착해 인사를 돌고 있자, 신지혜 누나가 와서 나를 끌고 간다.

“어어. 죄송합니다.”

나이 지긋하신 촬영 감독님은 이해한다는 듯이 웃으며 나를 보내줬다.

지혜 누나는 이 촬영장에서 가장 파워있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인지도와 몸값은 배우들 중 첫번째.

실력도 있고 책임감도 있다.

연기에 대한 열정만큼은 장인정신 수준이다.

믿을 게 얼굴뿐인 요즘 젊은 여배우들과는 비교 대상도 안 된다.

PD가 OK한 컷도 자기 마음에 들 때까지 찍는 건 기본이요, 작은 소품 하나 가지고 한 시간씩 트집을 잡았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다.

작품에 모든 걸 쏟아 붓는 완벽주의자.

상대가 설령 선배라도 쓴소리하길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그 신지혜가 새파란 후배인 진선후를 구석으로 끌고 가더라도 누구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도망치듯이 자리를 피하는 것도 어쩔 수 없으리라.

그러면서 또 신지혜 배우에게 ‘갈굼’ 당하는 신인 배우에게 동정의 시선을 던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론, 당사자인 나는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지만.

“야. 너 어떻게 된 거야?”

“뭐가요?”

“몰라서 물어?”

“말을 해야 알죠.”

뜬구름 잡는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할 뿐이다.

“너, 나한테 무슨 짓 했어?”

“……누나 설마 기억 안 나요?”

설마.

자는 사이에 강간했다거나, 술취했을 때 강간했다거나.

그런 소릴 하려는 건 아니지?

“기억나. 기억은 나는데…… 너 나한테 이상한 짓 했지?”

“이상한 짓이야 했죠.”

“그거 말고! 약 먹였냐고!”

아.

어제도 그런 얘기 했었지.

난 또, 무슨 소리라고.

“약? 누나 그런 거 해요?”

“너 진짜 시치미 뗄래?”

“하…… 누나야말로 진심이에요? 저 그런 거 안 한다니까요. 몰라요. 없어요.”

“진짜야?”

“진짜예요.”

지혜 누나가 입술을 깨문다.

여전히 의심은 버리지 못한 것 같다.

“약도 안 했는데 내가 그렇게…… 그럴 리가 없잖아! 게다가 오늘도…….”

“오늘도?”

“아무튼! 말해 빨리!”

“그런 거 안 한다니까요……. 그냥 궁합이 좋아서 그랬겠죠.”

“궁합 같은 소리 하네. 이게 누굴 바보축구로 아나.”

“축구? 아야.”

로우킥을 먹었다.

멀리서 스태프 누나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아픈 건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용서해줄 테니까 바른대로 말해. 아니면 중독성 있는 건지 없는 건지, 그거라도 말해.”

“이미 늦었어요. 누나는 이미 저의 매력에 중독됐으니까. 아야.”

회심의 개그였는데.

재미 없었나 보다.

“지혜 씨. 또 우리 선후 괴롭히고 있어?”

지혜 누나에게 갈굼 당하고 있자 지원군이 도착했다.

이 촬영장에서 신지혜 배우에 대항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그러면서 엄마 다음으로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

황수아 배우였다.

“‘우리 선후’?”

지혜 누나는 나와 수아 누나의 호칭이 바뀐 걸 민감하게 캐치했다.

재주 좋게 한쪽 눈썹만 위로 올리며 되묻는다.

“수아 누나. 안녕하세요.”

“‘수아 누나’?”

나머지 한쪽 눈썹도 위로 올라갔다.

“우리 말 놓기로 했어. 이상해?”

수아 누나는 왠지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이 누나는 그런 자랑이 통하는 사람이 아닌데.

“야. 너 수아 선배한테까지?”

지혜 누나가 나를 짐승 취급하듯 노려본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그런 거? 그런 게 뭐야?”

“아무것도 아니예요. 저 누나, 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 봐요.”

지혜 누나도 눈치는 있었다.

나랑만 있을 땐 약물 의혹을 꺼냈어도, 수아 누나 앞에서까지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야, 너 죽을래? 수아 선배. 얘랑 가까이 지내지 마세요. 위험한 놈이에요.”

지혜 누나가 나라는 짐승으로부터 수아 누나를 지키듯이 가로막았다.

“우리 선후가 위험한 놈이긴 하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하는 수아 누나.

이 누나가 왜 이래.

‘수아 누나.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미안. 앞으론 조심할게.’

“어처구니없어, 정말.”

소곤소곤 밀담을 나누는 우리를 보고 지혜 누나는 기가 막힌 듯 코웃음 쳤다.

“순진한 수아 선배는 속아 넘겼을지 몰라도 난 안 넘어가. 괜히 이상한 짓 하다가 손가락 잘리지 말고 그만두는 게 좋을걸?”

“아니라니까요 진짜.”

이 누나 끈질기시네.

약물 검사를 받아보라고 할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나의 무고를 증명할 수 있을까.

“순진? 누가 순진해?”

“당연히 수아 선배죠.”

“나? 나도 알 거 다 아는데? 그렇지, 선후야?”

“하, 하하……. 물론이죠.”

그걸 왜 저한테 물으십니까, 수아 선배님.

분위기 더 이상해지잖아요.

“순진한 건 내가 아니라 지혜 씨 아냐? 하긴, 지혜 씨가 당황하는 것도 이해는 해. ‘처음’ 할 땐 누구나 그런 거니까.”

“뭐라구요?”

“자기, 한 번 만에 기절하더라? 어차피 선후랑 했을 때 너무 느껴서 기절한 걸 인정하기 싫어서 그러는 거잖아. 몸은 약한데 자존심만 높아 가지고서는.”

“……선배. 지금 말 다 했어요?”

세상에.

오늘따라 수아 누나가 강하게 나왔다.

평소엔 지혜 누나가 좀 기어올라도 웃어넘겼었는데.

지혜 누나도 선배 예우는 확실하게 하는 사람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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