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3화 (143/256)

물론 선하에게도 응원해주는 친구나 어른은 있겠지.

하지만 내가 엄마에게 받은 응원과는 또 다를 것이다.

어쩌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 아래에 울적한 기분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빠가 뭘 알아요? 좋은 집안에 입양돼 부족한 것도 없이 살았으면서.’

지난번 선하가 했던 그 말은 가시처럼 내 가슴에 박혀 있다.

선하가 어떤 기분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나로선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엄마에게 구원받은 것처럼, 나도 어떤 식으로든 선하를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오늘,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선하를 시험장까지 태워주기 위해서.

“선후 오빠! 늦어서 미안해요!”

멀리서 교복을 입은 선하가 헐레벌떡 뛰어온다.

왜 이렇게 늦게 와?

하지만 늦은 본인이 누구보다 빨리 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괜한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하아, 하아, 너무 긴장해서, 어제 잠을 못 자서, 하아, 늦잠 자버렸어요.”

이미 약속한 시각에서 30분 가까이 지났다.

지금 바로 달려도 잘못하면 지각할지도 모르는 시간대였다.

“빨리 타. 가자.”

마침 이 차를 가져와 다행이었다.

검은색 람보르기니, 아벤타도르 S 로드스터.

누나한테 입학 선물로 받은 차였다.

평소엔 몰고 다닐 일이 잘 없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내가 수능 때 가족들로부터 받았던 기운이 선하에게도 전해지길 바라며 끌고 온 차였다.

“우와. 오빠 차 되게 이상하게 생겼다. 문도 세로로 열려.”

……여자애들에겐 람보르기니의 멋은 이해하기 어려운 건지도 모르겠네.

이상하게 생겼다는 취급은 처음이었다.

“오빠, 이 차 벨트 어떻게 매는지 모르겠어요.”

옆자리에 타고서 머뭇거리는 선하의 몸에 벨트를 매준다.

몸을 기울여 얼굴이 가까워지자 선하는 몸을 움츠리고 쑥스럽게 웃었다.

부끄러워할 정신은 있는 거 같아 다행이네.

나는 어떻게 시험을 쳤는지 기억도 못 할 정도로 긴장했었는데.

“출발할게. 남산 여고로 가면 되지?”

부아앙─

액셀을 밟는다.

성난 황소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도로를 달린다.

거리는 평소 서울 시내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한적했다.

1년 중 수능 시험날에만 볼 수 있는 도로 상황.

오늘 이 시간에 달리는 차는 아마 수험생이 탄 차밖에 없을 것이다.

“오왓. 오왓. 오빠, 천천히 가요!”

“뭘 천천히 가? 지각하면 어쩌려고.”

앞서가는 차를 몇 대 추월하자 선하가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오늘 같은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수능 시험날 지각한 수험생을 태우고 달린다.

대한민국에서 이만한 면죄부는 출산 직전의 임산부 외엔 없었다.

시내에서는 절대 내서는 안 되는 속도를 낸다.

과속도 신호 위반도, 사고만 내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있다. 

“선하야, 아침은 먹었어?”

“아니요. 늦잠 자서 못 먹었어요.”

미리 알았으면 김밥이라도 사 오는 건데.

“뒤에 보면 선물 포장된 상자 있지? 초콜릿 있으니까 그거라도 먹어.”

“초콜릿?”

“너 주려고 사 왔어. 밥이라도 먹고 가면 좋겠지만, 지금은 편의점 들를 시간도 없으니까.”

“우와! 고마워요! 선후 오빠! 완전 감동~!”

내 선물에 선하가 어린애처럼 기뻐한다.

우리 누나처럼 대단한 건 사줄 수 없지만, 그래도 기뻐해 주니 다행이다.

“고마우면 시험 잘 쳐. 너무 긴장하지 말고.”

“네. 저 별로 긴장 안 해요.”

“……넌 너무 긴장 안 하는 거 아니야? 수능 포기한 건 아니지?”

“후후~ 글쎄요~?”

왠지 불안한데.

수능 날 아침 고3의 분위기가 아니다.

“아! 오빠! 경찰!”

경찰차가 사이렌을 깜빡이며 뒤따라온다.

아~ 신호 위반 때문인가?

오늘 같은 날에?

아니면 차가 이런 차라서 그런가?

“선하야. 수험표 꺼내.”

나는 갓길에 차를 세우고 창문을 내린다.

경찰이 내 뒤에 차를 대고 내렸다.

“죄송합니다. 수험생이 있어서요.”

선하가 옆에서 수험표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경찰 아저씨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다.

“아~ 죄송합니다. 급하시면 저희가 모실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수고하세요.”

나는 얼른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수험생이 있으니까 경찰도 이해해줄 것이다.

“우와! 깜짝 놀랐어요! 경찰한테 잡혀가는 줄 알고!”

선하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깔깔 웃었다.

……솔직히 나도 깜짝 놀랐다.

딱지 끊기는 줄 알았네. 휴.

그 뒤론 특별한 해프닝도 없이 학교에 도착했다.

학교 안까진 들어갈 수 없어서 선하는 학교 정문이 보이는 길가에 내려주었다.

“선후 오빠. 20분만 여기서 기다려줘요.”

“응? 20분? 왜?”

“불안해서 그래요. 창문으로 보고 있을 테니까, 시험 시작하기 전까진 어디 가지 말고 있어요.”

불안해하는 마음은 이해한다.

내가 잠깐 기다리는 대신 선하의 불안감이 줄어든다면 얼마든지 기다려줄 수 있다.

스케쥴도 오늘은 저녁부터니까.

“알았어. 그럼 시험 시작 벨 울릴 때까진 기다릴 테니까, 선하는 시험 잘 치고 와. 화이팅.”

“네!”

선하는 학교에 들어가면서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나도 선하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선하를 배웅했다.

선하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후, 슬슬 차로 돌아가려 하는데, 한 아주머니가 다가왔다.

“어, 저기, 혹시, 진선후 씨 아니세요?”

“아. 네. 맞는데요.”

수험생 어머니일까.

굉장히 어렵게 말을 걸어왔다.

“엄마야! 진짜래!”

내가 맞다는 걸 알고선 굉장히 기뻐하셨다.

그나저나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니.

나도 연예인이었구나?

엄마나 누나처럼 누구나 다 아는 유명인은 아니지만, 알아보는 사람이 아예 없을 리는 없었다.

“너무 반가워요! 팬이에요!”

“아 네, 안녕하세요.”

아직 방송은 시작도 안 했는데 팬이라고?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어머니 팬과 악수했다.

예전 같았으면 얼른 도망갔겠지만, 연예인으로 살기로 한 이상 그래선 안 되겠지.

지혜 누나가 팬을 대할 때 태도를 떠올린다.

그 누나는 좀 이상한 사람이긴 해도, 일에 있어서는 진짜 프로니까.

나는 지혜 누나의 탈을 썼다.

“선후 씨, 여긴 어쩐 일이세요? 누가 수능 쳐요?”

“동생이 오늘 수능이라서요.”

“그렇구나! 저희 딸도 오늘 여기서 수능 봐요! 웬일이야!”

이 어머니가 호들갑 떠시는 바람에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선후 씨! 사인 좀 해주세요!”

“죄송합니다. 제가 종이를 안 가져와서. 대신 사진이라도 찍으실래요?”

“네!”

어머니가 얼른 휴대폰을 꺼내 함께 셀카를 찍는다.

나는 허리를 낮추고 카메라를 향해 V자를 그렸다.

“어머나 세상에! 사진 잘 나온 것 좀 봐! 얼굴이 주먹만 해요!”

“하하. 고맙습니다.”

“키가 얼마예요? 뭘 먹어서 그렇게 커요?”

“88, 89정도 됩니다. 엄마 밥 먹고 컸어요.”

“오호호호! 엄마 밥이래, 웃겨!”

별말도 안 했는데 어머니는 내 팔을 퍽퍽 치면서 자지러지게 웃으셨다.

그런 소란스러움 덕분에 다른 사람들도 머뭇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저, 혹시 연예인이세요?”

“네. 신인 배우 진선후입니다.”

“와! 저도 사진 찍어도 돼요?”

“그럼요. 이쪽으로 오세요.”

수험생들, 응원하러 온 학생들, 부모님들, 주변 상인들까지.

여러 사람들이 와서 차례차례 나와 사진을 찍었다.

대부분은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사진을 찍었지만, 개중에는 알아보는 사람도 가끔 있었다.

“아! 진미소 오빠다!”

알아본 사람은 대부분이 학생이었다.

다들 나를 미소 오빠로 알고 있었다.

SNS 영상 조회수가 몇백만이 나왔으니, 그렇게 알아보는 사람이 있는 것도 당연했다.

그런데, 어…….

어떡하지?

빠져나갈 타이밍을 못 잡겠다.

사진을 찍어도 찍어도 다음 사람이 계속해서 나타났다.

그건 생각보다 보통 일이 아니었다.

사진을 수십 장을 찍으면서 계속 웃는 얼굴을 유지하느라 안면근육에 경련이 일어날 것 같았다.

은근슬쩍 끌어안거나 내 몸을 만지려는 사람도 있었다.

그 정도는 괜찮다. 선만 넘지 않으면.

연예인 일 해나가려면 이 정도는 웃으면서 넘길 수 있어야겠지.

그렇게 줄줄이 사진을 찍다 보니 시험이 시작할 시간도 훌쩍 넘겨버렸다.

나는 기진맥진 상태였다.

“선후 오빠, 뭐해요?”

“……어?”

내 등을 툭 치며 말을 거는 사람.

방금 수능 치러 들어간 선하였다.

나는 얼이 빠져 되물었다.

“……선하 너 왜 여기 있어? 수능은?”

“훗훗훗.”

설마 1교시에 포기하고 나왔나 했지만,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빠밤! 사실 저는 수시 합격자였습니다!”

선하가 휴대폰에 수시 합격 증서를 띄워 나에게 들이댔다.

나도 입시를 거쳤기 때문에 잘 안다.

그건 수시에 합격하면 수능 칠 필요가 없는 대학교였다.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띵했다.

“……김선하 너, 그럼 그렇다고 말을 했었어야지……!”

“헤헷! 오빠 놀래켜 주려고 그랬죠!”

미안해요~ 하고 애교를 부리는 선하.

나는 화를 낼 기운도 없었다.

기껏 마음 써서 태워주러 왔더니…….

“오빠, 우리 놀러 가요. 오늘 수험생 할인 해주는 가게 엄청 많아요.”

선하는 도장 찍힌 수험장을 자랑스럽게 흔들었다.

“……넌 그거 때문에 수능 시험장에 온 거야?”

“그럼요! 이게 얼마나 귀한 건데요!”

뭘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태도였다.

내가 말을 말지.

“에휴. 타기나 해.”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나 때는 말이지…….

나 때도 이런 애들은 있었구나.

그래 봐야 2년밖에 차이 안 나니까.

“오빠, 여기 가요. 코인 노래방. 수험표 있으면 음료수 무한 리필이래요.”

선하가 휴대폰으로 검색한 화면을 보여주며 말한다.

“그래. 가자 가.”

음료수 정도는 무한 리필 안 해도 배 터지게 사줄 수 있지만.

선하는 이런 이벤트 자체를 즐기고 싶은 거겠지.

수능은 평생에 한 번뿐이니까.

나는 선하와 함께 코인 노래방에 왔다.

노래방에 온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이런 건 인싸들의 전유물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나는 왠지 신기해서 촌놈처럼 두리번거리며 들어갔다.

카운터에서 선하가 수험표를 내밀자 주인아저씨가 수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멀쩡한 수험생이 이 시간에 노래방에 올 리가 없으니까.

나 혼자였다면 말도 못 했을 텐데, 선하는 뻔뻔하게 공짜 음료수를 챙겼다.

“제가 먼저 부를게요!”

“그러시든가요.”

선하는 내가 잘 모르는 가요를 불렀다.

스프링 곡이라면 어느 정도 알지만, 다른 아이돌 노래는 나도 거의 모른다.

선하의 노래 실력은 그럭저럭이었다.

일반인 치곤 잘 부르는 거겠지?

선하가 먼저 2곡을 부른 뒤, 나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오빠도 불러요!”

“난 노래 못 불러.”

부르고 싶은 사람이 실컷 부르면 될 텐데.

하지만 선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뭐예요 그게! 활동하다 보면 노래 부를 일도 있을 텐데, 방송에서도 못 한다고 뺄 거에요?”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요즘은 배우라고 연기만 잘해서 되는 게 아니다.

시키는 일은 뭐든 해내야 했다.

배우한테 노래시키는 예능 프로도 많고, 나도 예능에 나와서 노래할 일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알았어. 나도 부를게.”

솔직히 노래는 별로 자신이 없었다.

이건 겸손이 아니라 진심이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