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7화 (137/256)

그 뒤로도 지혜 누나의 만담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덕분에 도착할 때까지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술판을 벌였다.

수아 씨 집에서 술 마시는 건 이번이 두 번째지만, 왠지 저번과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지혜 누나의 존재감 때문일까.

인싸라는 거대 항성의 중력에, 우리 같은 아싸 소행성은 속절없이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야. 네가 막내니까 건배사라도 해봐.”

“건배사요?”

“건배사 몰라? 너 대학생 아냐?”

“대학생은 맞는데, 제가 술자리를 잘 안 가서.”

“햐~ 그럼 너 술 게임도 모르겠네?”

“지식으로는 알고 있는데 해본 적은 없어요.”

“진짜? 배스킨~ 라빈~ 써리 원~!”

”1!”

“2!”

수아 씨도 갑작스럽게 시작된 술 게임을 자연스럽게 받았다.

이럴 수가.

나랑 같은 아싸라고 생각했는데. 왠지 배신감이.

“짝.”

“응?”

내가 ‘3’ 대신 박수를 치자 지혜 누나는 깔깔대며 웃었다.

“너 진짜 모르는구나? 이야~ 요즘 세상에 이런 천연기념물이 다 있네!”

아. 3에 박수치는 건 369였나?

“아가. 누나가 가르쳐 줄 테니까 잘 들어? 배스킨라빈스 31이라는 건 말이지~.”

지혜 누나는 음흉하게 웃으며 술 게임의 설명을 해준다.

나는 몰랐다.

그게 술 게임의 탈을 쓴 성추행 게임이라는 것을.

술 게임 

약 30분 후.

나는 팬티 한 장 차림으로 식탁에 앉아 있었다.

“27, 28, 29!”

“……30.”

지혜 누나가 신나서 번호를 외치고, 수아 씨가 조용히 30을 부른다.

나에게 남은 숫자는 마지막 숫자인 31뿐이었다.

“…….”

한 장 남은 팬티마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진선후 당첨! 벗어라! 벗어라!”

“……벗어라. 벗어라.”

‘벗어라’를 연호하는 두 여배우.

배신감에 떨며 수아 씨를 바라보지만, 수아 씨는 내 시선을 회피했다.

황수아 너마저…….

“잠깐만요! 이상하잖아요! 6연패는!”

사실 이상하다는 생각은 그전부터 하고 있었다.

하지만 믿고 싶지 않았다.

수아 씨가 나를 배신했다는 현실을. 

“뭐가 이상해? 네가 못하는 거지. 억울하면 이기시든가~.”

“큭…….”

지혜 누나가 얄밉게 웃으며 놀린다.

아무리 내가 처음이라곤 해도 6판을 연속으로 지다니.

두 사람이 짜고 나만 조지는 거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벗든가 마시든가 빨리 골라!”

벗든가 마시든가.

테이블 가운데에는 큰 컵에 양주와 소주를 5:5로 섞은 폭탄주가 놓여 있었다.

집에서 가족들과 마셨다가 한 방에 인사불성이 됐던 그때와 비슷한 양이었다.

게임에서 지면 그 폭탄주를 한 잔씩 마셔야 했다.

그게 싫으면 옷을 하나 벗든가.

그리고 5판 내리 진 나는 팬티 한 장밖에 남지 않았다.

그때와 같은 참사를 내지 않기 위해 마시는 대신 벗는 걸 선택한 결과였다.

“으으.”

마지막 팬티를 사수하기 위해선 폭탄주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게임이 한 바퀴 돌 때마다 다 같이 소주도 한 잔씩 마셨으니, 이미 소주도 6잔째 마시고 있었다.

거기에 이 폭탄주 한 잔은 상당히 위험한 양이었다.

“잠깐!”

내가 비장한 각오로 잔을 잡는 순간.

내 손을 멈추는 손이 있었다.

신지혜 배우였다.

“너 술 못 마신다며? 내가 대신 마실까?”

“……예?”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는 지혜 누나.

그렇게 마셔라 벗어라 외쳐놓고, 갑자기 그건 무슨 소리야?

“원래 술자리에는 흑기사, 흑장미라는 문화가 있어. 술을 못 마시면 다른 사람이 대신 마셔주는 거야. 선후 네가 정 못 마시겠으면 내가 대신 마실게. 선배잖아?”

내 의문에 답하며 지혜 누나는 빙긋이 웃었다.

그렇게 따뜻한 문화가 있었다니!

평소에는 가볍게만 보이던 지혜 누나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천사로 보였다.

“선배…… 부탁드립니다!”

나는 감동에 떨며 지혜 누나에게 폭탄주 잔을 내밀었다.

지혜 누나는 나 대신 잔을 들더니 망설이지도 않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오오~!”

원샷이었다.

그 남자다운 모습에 나와 수아 씨는 나란히 박수를 쳤다.

“크윽!”

깔끔하게 잔을 비우고 테이블에 내려놓는 지혜 누나.

이 사람한테 이런 면이 있을 줄이야.

의외인 만큼 감동도 컸다.

“후. 그럼 내 소원 들어줄 차례지?”

“소원?”

“그래. 벌주를 대신 마셔주는 대신 소원을 들어주는 건 상식이잖아?”

그런 상식이 있었어?!

도움을 바라며 수아 씨를 바라봤지만, 수아 씨도 어지간히 취기가 올라왔는지 웃으면서 박수를 칠 뿐이었다.

“아가야. 세상에 공짜만큼 비싼 건 없단다. 세상을 배운 수업료라고 생각하렴.”

지혜 누나가 아이를 타이르듯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지혜 누나의 말이 옳았다.

처음부터 이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됐는데.

천사 같은 연기에 그만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무서운 여배우들 같으니.

……어쩔 수 없다.

팬티를 벗는 것보단 낫겠지.

“소원이 뭔데요.”

일단 들어나 보기로 했다.

미리 말하지 않았다든가, 그런 규칙 몰랐다든가, 나도 할 말은 있었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 깨는 소리는 소원을 듣고 나서 해도 늦지 않는다.

지혜 누나는 자신의 아랫입술을 엄지로 문지르며 말했다.

“키스.”

내 시선도 자연히 그쪽으로 향했다.

역시 여배우.

겨우 그 정도 손짓으로 선정적인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주문 자체는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키스? 그게 소원이에요?”

무슨 엄청난 벌칙을 줄까 했더니, 겨우 키스?

애초에 그게 벌칙인가?

“드라마 키스신에서 하는 그런 키스가 아니라, 연인끼리 하는 찐하고 뜨거운 키스야. 제대로 안 하면 마음에 들 때까지 다시 할 거야.”

그렇게 조건을 붙이긴 했지만.

지혜 누나가 얼굴도 보기 싫은 추녀라면 모를까, 그런 건 포상밖에 되질 않는데.

하지만 이 자리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게 어딨어!”

말할 것도 없이 수아 씨였다.

뭐, 결국 그런 게 아닐까 했다.

일부러 수아 씨 집으로 온 것도 그렇고.

어떻게 수아 씨를 구워삶았는지는 몰라도, 둘이 짜고 나만 조진 것도, 모든 게 수아 씨를 부추기기 위한 지혜 누나의 큰 그림이었던 거겠지.

“선배도 다음에 선후 흑장미 해요. 선배가 방해 안 하면 저도 방해 안 할 테니까.”

“…….”

지혜 누나의 제안에 수아 씨는 입을 다물었다.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만약 지금 수아 씨가 이의를 제기하면 수아 씨 차례에도 지혜 누나가 똑같이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하지만 이번 한 번 눈을 감으면 다음엔 수아 씨 차례가 돌아올 것이다.(아마도)

……그런데, 내 의견은 아무도 안 묻는 건가?

“자. 해 봐. 키스.”

지혜 누나가 턱을 들고서 눈을 감는다.

하라고 하면 하겠지만.

진짜 이래도 되는 건가?

수아 씨를 본다.

여전히 고민하는 표정이지만 적극적으로 말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흠.

그럼 괜찮은 건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천천히 입술을 맞댄다.

단아한 생김새에 어울리지 않는 독한 알코올 향이 느껴졌다.

“츄우. 츄웃.”

연인과 하는 찐하고 뜨거운 키스라.

지혜 누나의 기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이것 또한 수아 씨를 부추기기 위한 쇼다.

아마 몇 번은 다시 할 각오를 해야겠지.

그렇다면 굳이 처음부터 찐하게 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다시, 또다시 해야 할 테니까.

나는 외국 멜로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적당히 성의 있는 키스를 했다.

“춥. 츄웁.”

몇 번 입술을 빨아들이고서 천천히 떨어진다.

키스가 끝나자 지혜 누나도 게슴츠레 눈을 뜬다.

취기가 도는지 흐리멍덩한 눈이었다.

“음. 합격.”

“에.”

지혜 누나는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에 합격?

당황해서 수아 씨를 보니 분을 참는 모습이었다.

뭐야.

이 정도만 해도 되는 거였어?

괜히 걱정했네. 몇 번이나 다시 할 각오하고 있었는데.

아쉬운 듯한, 다행인 듯한.

미묘하게 기운 빠지는 결과였다.

“그럼 이번엔 제 차례에요!”

수아 씨는 큰 잔에 기세 좋게 술을 채웠다.

지혜 누나가 마신 것과 같은 폭탄주를 제조했다.

술을 채우고.

수아 씨는 그대로 벌컥벌컥 마셔버렸다.

“어. 저, 술 게임은…….”

“푸하아!”

아니!

아무리 내가 6연패 했다지만, 게임도 하지 않고 마시는 건 안 되는 거잖아!

룰은 지켜야지!

하지만 룰 같은 걸 따지는 사람은 이 자리에 나뿐이었다.

“수아 선배 소원은 뭐예요?”

지혜 누나가 혀 꼬부라진 소리로 묻는다.

눈은 흐리멍덩하고 손은 공중에 휘적거리고 있다.

……엄청 술 센 것처럼 굴더니, 벌써 취한 거야?

“선후 쒸!”

“……예.”

그리고 취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수아 씨는 눈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원래 수아 씨는 술이 그렇게 세진 않았으니까.

그렇게 독한 걸 단번에 마시면 그야 금방 취하겠지.

“앞으로 저도 누나라고 부르세욧!”

“에.”

뭐야.

누나라고 부르라고?

그게 소원?

겨우?

“지혜만 누나라고 불러주고! 나한테는 서먹서먹하게 하면서!”

어지간히 서운했는지, 목소리에 울먹임이 섞여 있었다.

“아니, 그야……. 알겠습니다.”

그런 건 그냥 말해도 들어줄 텐데.

어이가 없어져서 뭔가 말하려던 나는 도중에 단념했다.

주정뱅이 상대로 설명해봐야 소용없을 테니까.

“존댓말 금지! 말 놔!”

“……응. 말 놓을게. 수아 누나.”

“테힛.”

수아 씨는.

아니, 수아 누나는 기분 좋은 듯이 빵실빵실 웃었다.

“……수아 누나. 많이 취했으니까 그만 자자.”

“썬후도 가치 잘꼬야?”

“……응. 같이 잘게. 자장가도 불러줄게. 가자.”

“테히힛.”

순식간에 맛이 가버린 수아 누나를 부축해 일으킨다.

하지만 주정뱅이는 여기 한 명만 있는 게 아니었다.

“어딜 도망가! 내 차롄다!”

“하아.”

지혜 누나는 이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누나도 많이 취했어요. 그만 자요.”

아마 소용없겠지만, 일단 말해보았다.

“내 차례다 안 카나!”

“앙카나?”

웬 사투리?

지혜 누나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폭탄주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손이 비틀비틀하느라 테이블에 흘리는 게 절반이었다.

“스탑. 누나 취했어요. 그만 마셔요.”

일단 수아 씨를 다시 의자에 앉힌 뒤, 지혜 누나의 손을 잡아 멈춘다.

지혜 누나는 흐릿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니가 내 흑기사 해줄 끼가?”

지혜 누나는 취하면 사투리가 나오는 것 같다.

“누나가 제 흑장미인데 제가 누나 흑기사를 하면 어떡해요.”

“와. 하기 싫나? 싫으면 치아라.”

지혜 누나는 내 손을 떨쳐내려는 듯이 손을 휘적거린다.

이 사람, 진짜로 취했네.

더 마시면 큰일 날 것 같았다.

“오케이. 흑기사 할게요. 대신 오늘은 이제 끝.”

나는 지혜 누나가 반 정도 채워놓은 폭탄주를 그대로 훌쩍 마셔버렸다.

으아. 독하다.

나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오~ 잘 마시는구마. 일로 와봐라. 내 키스해주께.”

“아니, 읍!”

지혜 누나가 내 머리끄덩이를 붙들더니 억지로 입술을 포갠다.

“읍읍!”

그리고 빨아들인다.

쭈아압~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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