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8화 (128/256)

내가 말이 좀 심했을지도.

조금 비꼴 생각이었을 뿐인데.

하지만 오빠한테는 내 말이 더욱 와닿았을지도 모른다.

나랑 같은 처지에서 입양된 거로 인생이 바뀌었으니까.

오빠도 생각하는 바가 있었겠지.

“……알았어. 내가 할게. 그 스폰서.”

“정말요?!”

좀 더 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오빠는 쉽게 승낙했다.

‘남자는 여고생이라면 껌뻑 죽는다니까.’

소품 팀 언니의 그 말이 새삼 떠올랐다.

왠지 기쁘기도 하면서, 슬프기도 했다.

오빠도 역시 똑같은 남자였구나, 하고.

“그래. 먹여주고 재워주고 용돈도 줄게. 대신.”

선후 오빠가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그런 눈으로 보면 두근거리잖아.

대체 여고생한테 뭘 시키려고?

이 변태 같은 오빠야.

“대신, 선하 넌 공부해.”

“……네?? 공부?”

웬 공부?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는 벙쪘다.

“그래. 배운 것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어서 그렇게밖에 못 산다며? 등록금은 내가 내줄 테니까 대학 가. 가서 배우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배워.”

“어…….”

……그건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이게 왜 그런 얘기가 되는 거야?

“너 곧 있으면 수능이지? 알바 그만두고 그때까지 조금이라도 더 공부해. 돈은 내가 줄 테니까.”

“오빠, 그건…….”

스폰이 아니라 장학금이잖아요?

“대신 성매매니 스폰이니, 그런 건 대학 졸업할 때까진 꿈도 꾸지 마. 졸업하고 나서는 네 마음대로 하더라도, 그때까지 네 스폰서는 나니까. 알았어?”

선후 오빠는 왠지 화가 난 것 같았다.

오빠의 엄포에 나는 멍청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비록 그건 내가 원했던 방향은 아니었지만.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다.

오빠가 그런 똑같은 남자가 아니라서, 진심으로 나를 생각해줘서.

그리고 나는.

그런 오빠를 더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빼빼로 데이 기념 - 스프링 스쿨 걸스 

『오빠! 오늘 무슨 날인지 알지?

빨리 들어와야 해!

오늘은 특별 게스트도 와 있으니까!

-진미소』

“지혜 누나. 죄송한데 오늘도 안 되겠는데요.”

“오늘은왜?!”

“가족과 약속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혜 누나는 내 목을 확 잡아챘다.

“야, 진선후! 하늘 같은 선배가 우습지!?”

“아야야야.”

그리고 헤드락을 건다.

빠져나오려고 하면 얼마든지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나는 얌전히 당하고 있었다.

소영 누나의 진심 슬리퍼 홀드에 비하면 아픈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머리가 가슴에 비벼져서 좋았다.

아주 조금만.

“지혜 씨. 보내드려. 가족과의 시간을 방해하면 안 되잖아.”

“칫. 여유 부리긴.”

“호호호. 정실은 나니까. 그렇죠, 선후 씨?”

수아 씨가 왠지 불난 집에 기름을 붓고 있었다.

그리고 웬 정실?

내 마음속 정실은 엄마인데.

“선후 씨, 이거 하나 드세요.”

지혜 누나에게 잡혀있던 내 입에 수아 씨가 막대 과자를 넣어준다.

“재주가 없어서 직접 만들진 못했어요. 근처 제과점에서 사 온 수제 빼빼로에요.”

“아, 감사합니다. 제 거도 하나.”

“그건 다른 사람한테 받은 거잖아요. 전…… 다음에 다른 빼빼로 주세요.”

“아……. 예.”

수아 씨가 얼굴을 붉히며 말한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를 정도로 순진하진 않다.

“나 참. 아예 숨길 생각도 없구만?”

“이미 다 알면서. 숨겨서 뭐 해?”

“억지로 알아낸 지혜 누나가 잘못이죠.”

“아주 둘이 손발이 척척 맞아요.”

그러면서도 지혜 누나는 가방에서 빼빼로를 꺼냈다.

“자. 오다가 주웠어. 먹든가 버리든가.”

“그건 또 언젯적 대사예요?”

“불만이야?! 싫음 먹지 마!”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수아 씨와 지혜 누나에게 받은 빼빼로도 자루에 담는다.

스태프 누나들한테도 잔뜩 받아서 전부 먹지는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모처럼 준비한 걸 안 받을 수는 없지.

그나저나 미소는 왜 일찍 들어오라는 걸까.

손님은 또 누구고?

……누군지 예상은 가지만, 솔직히 너무 뻔하지만, 그래도 막상 보면 놀라는 척은 해줘야겠지?

그런 반응을 기대하고 있을 테니까.

“해피 빼빼로 데이!”

“와.”

집에는 전혀 예상외의 인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아 씨?”

미소와 함께 기다리고 있는 건 스프링의 리더 한세아였다.

두 사람은 나란히 교복 코스튬을 입고 내 방 침대에 앉아있었다.

교복 치마 아래로 시원하게 맨다리를 내놓고 있는 미소.

그리고 검은색 스타킹으로 다리를 가리고 있는 세아.

같은 교복인데도 두 사람은 신기할 만큼 분위기가 달랐다.

미소가 활발한 캐릭터라면 세아 씨는 단정한 모범생 타입으로 보였다.

“안녕하세요. 진선후 님. 데뷔 축하드립니다.”

“아. 예. 고맙습니다.”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는 세아 씨.

나도 뻣뻣하게 마주 고개를 숙였다.

“오빠! 깜짝 놀랐지?”

“어, 응. 깜짝 놀랐어. 정말로.”

솔직히 나는 틀림없이 납작 만두 진이가 왔을 거라고 생각했다.

저번부터 오겠다고 예고했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세아 씨는 전혀 예상 밖이었다.

“어, 웬일이세요?영상 찍으러 오셨어요?”

“아니요. 오늘은 감사드리러 왔어요.”

“감사?”

“오빠 우리 영상 찍은 거 확인 안 해봤지?”

“응. 안 봤는데.”

나는 인터넷에 올라온 글은 최대한 눈에 넣지 않으려고 한다.

지금은 많이 안정되긴 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지금까지 올린 영상 4개 다 백만 뷰 넘겼어!”

“백만 뷰? 많은 거야?”

“많은 거지!”

“특히 이번 미소의 스쿨 러브 영상은 굉장히 화제예요. 워낙 미소가 귀엽게 나와서. 덕분에 이번 신곡도 대박 조짐이고요.”

“조회수엄청 빨리 올라가고 있어. 금방 200만도 넘길 거 같아.”

“우리 미소가 귀엽긴 하지.”

“아잉~♡”

귀엽다 귀여워.

나는 애교를 부리는 미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감사라면 안 하셔도 돼요. 미소는 내 동생이고,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당연히 도와야죠.”

“오빠…….”

미소가 눈을 감고 입술을 내민다.

“응? 지금?”

세아 씨 앞에서?

흠. 뭐, 우리 관계는 이미 아는 사실이고. 상관없나.

미소를 살짝 안고서 상냥하게 입을 맞추었다.

세아 앞에서 너무 진한 건 부끄러우니까.

“하앙…….”

미소는 부족한 것 같았지만, 그게 또 귀여웠다.

마치 발정 난 고양이 같았다. 턱 아래를 만져주자.

“미소는 오빠랑 같이 있으면 정말 더 귀여워지네. 사장 말이 맞을지도 몰라.”

……사장?

“혹시 세아 씨, 그 사장이 시켜서 왔어요?”

“아니요. 오늘은 비밀로 왔어요.”

비밀로?

어째서?

“사장님이 알면 질투할 테니까 말하면 안 돼. 진이한테도.”

그 사장이 질투한다고?

오히려 좋아하는 게 아니고?

세아 씨가 묘하게 눈짓한다.

사장의 그 성향은 비밀이니까 미소도 모르는 건가.

미소야 모르니까 그렇다 쳐도, 세아 씨 본인은 그럴 필요 있을까?

그 변태 사장이 알면 오히려 기뻐할 거 같은데.

“그래서 오늘은 감사 인사차 왔어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아, 네. 고맙습니다.”

교복을 입은 한세아한테 빼빼로를 받는다.

……왠지 묘한 기분이었다.

마치 학창시절 짝사랑하는 여자애한테 빼빼로를 받는 듯한.

“전 미리 준비를 못 했는데. 이거라도 드릴까요?”

어차피 진이가 온다고 생각해서 따로 준비를 못 했지만, 빼빼로라면 나도 많이 있긴 있었다.

촬영장에서 잔뜩 받아왔으니까.

세아가 올 줄 알았으면 뭐라도 사왔을 텐데.

“아니요. 전 괜찮아요.”

“어차피 우리 소속사에 산더미처럼 쌓여있어. 관리 해야 해서 먹지도 못하는데.”

하긴.

얘네는 아이돌이니까 우리 같은 일반인은 상상도 못 할 만큼 받겠지.

나도 촬영장 누님들한테서 한 보따리 받아오긴 했지만, 진짜 아이돌한테는 명함도 못 내민다.

“그래서! 오늘의 특별 서비스는!”

미소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포즈를 잡는다.

“바로바로~ 빼빼로 게임입니다!”

“빼빼로 게임?”

“오빠도 알지? 두 사람이 양쪽 끝에서 먹기 시작해서, 더 짧게 남은 사람이 이기는 거야.”

그야 그게 뭔지는 알고는 있다.

나는 반사적으로 세아 씨를 쳐다보았다.

세아 씨는 쑥스러운 듯이 고개를 숙인다.

그건, 그런 뜻이야?

미소랑도 하고 세아 씨랑도 하고?

나야 좋지만. 잘못하면 세아랑 키스할 수도 있는 거 아냐?

세아는 괜찮은 건가?

“그리고! 그냥 하면 재미없으니까, 지는 사람이 옷 하나씩 벗는 거야. 빼빼로 게임의 하드코어 버전, 일명 스트립 빼빼로 게임입니다!”

“……너네들, 평소에 그런 거 하고 노니?”

“아니거든!? 오빠를 위해 생각해왔다니까! 너무해!”

“그래그래, 고마워. 역시 미소밖에 없어.”

화내는 미소를 달래면서 생각을 정리한다.

그건 미소랑 세아 중에 빼빼로가 더 많이 남은 사람이 벗는단 얘기잖아?

나와 키스하는 데 거부감이 없는 미소는 깨끗이 먹어버릴 테고.

세아가 일방적으로 불리하지 않나?

그럼 세아가 지면 벗는다고?

어라?

그럼 세아도 벗지 않으려면 나랑 키스할 각오로 빼빼로를?

어라?

“세아 씨도 괜찮아요?”

“네. 저도…….”

부끄러운 듯 끄덕이는 세아 씨.

“세아 언니는 괜찮아! 왜냐하면 오늘은 특별히 내가! 오빠를 빌려주기로 했으니까!”

“왜 나를 미소 마음대로 빌려줘.”

오빠는 미소꺼가 아니라 오빠꺼란다.

그런 나에게 미소가 귓속말을 속삭인다.

‘오빠 세아 좋아하는 거 알거든? 얌전히 하라는대로 해.’

흠칫.

미소는 이미 알고 있었어?

내가 세아 팬이라는 거?

어라?

그럼 미소는 그걸 알아서 그렇다 치고.

세아는 왜 미소 말에 따르는 거야? 

사장이 시킨 것도 아닌데.

고마워서? 순수하게 그 때문에?

그리고 앞으로도 협조해달라고?

그래서 남자 앞에서 옷 벗기 게임을 한다고?

그게 말이 돼?

“자, 그럼 시간도 늦었으니까 얼른 시작하자. 오빠, 응~.”

머릿속 생각을 정리할 겨를도 없이, 미소가 입에 빼빼로를 물고 나에게 내밀었다.

음.

모르겠다.

미소가 무슨 생각인지, 세아가 무슨 생각인지.

사실은 사장이 시킨 건지도 모르지. 내가 기분 나빠할까 봐 아닌 척하는 거일 수도 있고.

깊이 생각할 거 뭐 있겠어. 어차피내가 손해 볼 것도 없고. 본인이 하겠다는데.

미소가 입에 문 빼빼로를 갉아먹는다.

똑똑 깨물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살짝, 미소와 입술이 닿을 정도까지.

똑.

1센치 미만으로 남은 빼빼로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아~.”

미소는 그것도 아쉬운 것 같다.

대놓고 키스하고 다 먹어치울 수도 있었겠지만, 처음부터 그러면 재미없잖아?

세아한테도 너무 불리하고.

“다음은 저에요.”

세아는 정말 괜찮은 걸까?

표정은 괜찮은 거 같은데.

억지로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럼, 시작!”

세아가 빼빼로를 입에 물어 내밀고, 미소가 신호를 준다.

으으음.

세아가 입술을 내밀고 있는 걸 보니 왠지 마음이 뒤숭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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