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5화 (125/256)

* * *

그리고.

살짝 벌어진 문틈 뒤에

작은 그림자가 하나 있었다.

새빨개진 얼굴로, 손으로 입을 막고서,

방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게 누구인지,

언제부터 언제까지 거기 있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김선하 

“얘, 막내야. 저기 좀 봐.”

“네? 아. 황수아다.”

소품 팀 언니가 가리킨 곳에는 배우 황수아가 있었다.

연예인은 얼굴에 빛이 난다고들 하는데, 황수아를 보면 그 말이 진짜라는 걸 알 수가 있다.

고급스러운 옷에 비싸 보이는 액세서리.

하지만 그런 소품들도 황수아의 얼굴보다 빛나진 않았다.

연예인은 연예인이구나. 정말로 무서울 정도로 예쁜 사람이었다.

“아니, 황수아 말고 그 옆에. 키 큰 남자 말이야.”

“아~ 저 사람요? 누군데요?”

누굴까. 모르는 얼굴이었다.

아이돌 출신 배우인가?

“황수아 매니저래.”

“매니저요?”

“그래. 요즘 신인 배우들 말단 매니저부터 시킨다던데 그런 건가 봐. 엄청 멋있지?”

뭐, 언니 말대로 멋있긴 멋있었다.

하지만 너무 잘생긴 사람은 내 취향이 아니다.

저렇게 매일 여자를 간식 고르듯이 바꿔가며 먹어댈 것 같은 남자는.

나는 평범하게 생겼어도 착한 남자가 좋다.

“전 너무 잘생긴 사람은 좀.”

“얘 좀 봐. 배부른 소리 하네. 그럼 넌 누가 좋은데?”

“전 얼굴이 평범해도 착한 사람이 좋아요. 주정환처럼.”

그래. 주정환처럼.

주정환 배우는 누구한테나 친절하고 웃는 얼굴이 선한 사람이다.

저렇게 얼굴만 잘생긴 남자보단 주정환처럼 마음도 예쁜 사람이 훨씬 진국이지.

“주정환? 얘가 뭘 모르네. 네가 주정환 실체를 봐야 알지.”

“주정환 실체가 어떤데요?”

“말 안 해도 촬영 시작되면 알 거야.”

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기분이 상한 건지.

소품 팀 언니는 괜히 주정환 험담을 하고 있었다.

실체는 무슨.

나는 적당히 타이밍을 봐서 소품 팀 언니와 떨어졌다.

나도 일하러 왔으니까 일을 해야지.

오늘 내 일은 세트장 알바다.

촬영이 시작되기 전에 후다닥 물건을 날라 세팅하고, 촬영이 끝나면 다시 해체한다.

일단 촬영이 시작되면 할 일이 없어서 빈둥대지만, 이렇게 촬영 직전과 직후에는 몹시 바쁘다.

나는 몸은 약해도 일은 열심히 하는 편이다.

어느 알바에서나 여고생이라고 하면 열심히 안 한다는 이미지가 있다.

그래서 나는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한다.

‘그럴 줄 알았다’는 소리 안 듣기 위해서.

“우와. 무거워.”

……하지만 객기도 적당히 부렸어야지.

솔선수범한답시고 큰 박스를 들었다가, 시야가 가려져 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휘청휘청하며 박스를 옮기고 있었다.

“주세요. 제가 옮길게요.”

“아.”

갑자기 손이 가벼워지고 시야가 트였다.

“감사합니다?”

내가 낑낑대며 옮기던 큰 박스를 가볍게 드는 그 남자.

아까 소품 팀 언니와 이야기했던 황수아의 매니저였다.

“어디로 옮기면 돼요?”

“……저기요.”

도와주는 척하긴.

그런 식으로 순진한 애들 꼬셔온 거지?

어차피 우리 같은 어린 알바생은 조금만 잘해줘도 금방 넘어온다고 생각하니까.

이런 식으로 친해져서 이야기 좀 하다가 번호 따고 밥이나 한 끼?

그런 거 나한테는 안 통하거든?

나는 마음속으로 철벽을 치며 그 매니저의 대쉬에 대비했다.

“여기 놓으면 되죠?”

“네, 감사…….”

하지만 남자는 내가 고맙단 말을 하기도 전에 부리나케 뛰어갔다.

……괜히 김칫국만 마셨네.

“좋겠다! 나는 왜 안 도와주고!”

“그럼 언니도 무거운 거 들어요.”

그렇게 주먹만 한 것만 옮기면 누가 도와줘.

“됐네! 어차피 왕자님은 너 같은 신데렐라나 도와주지. 난 그냥 독고다이 할 거야.”

하늘은 스스로 돕는 사람을 돕는댔는데.

나도 열심히 해서 하늘이 도와준 걸까?

하지만 정작 그 도와준 남자는 황수아한테 혼나고 있었다.

괜히 나 때문에 혼나는 거 같잖아.

미안하게.

황수아도 얼굴값 하네.

자기 매니저가 잠깐 다른 일 했다고 갈구기나 하고.

하긴, 저렇게 예쁘면 남자들이 떠받들어 모실 테니 멀쩡한 사람도 저렇게 되겠지.

……그에 비해 저 남자는,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때부터 나는 왠지 틈만 나면 그 매니저를 눈으로 좇고 있었다.

별로 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냥 그 사람이 눈에 띄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여자 스탭 대부분이 틈만 나면 그 사람을 훔쳐보고, 말을 걸 건수를 찾고 있었다.

“그 사람 임신혜 배우 아들이래.”

“정말? 어쩐지!”

여자 스탭이 세 명 이상 모인 곳에선 어김없이 그 남자 이야기가 나왔다.

일개 매니저인데 배우들보다 더 인기가 많았다.

거기다 임신혜 아들이라고?

저 얼굴에 금수저라니.

세상 불공평하기도 하지.

누군 부모도 없어서 흙수저도 안 되는데.

저런 사람은 얼마나 세상 살기 편할까?

성격이라도 안 좋았으면 시원하게 욕이나 해줬을 텐데.

“나이는? 나이는 몇 살이래?”

“이제 21살. 대학생이래.”

“그럼 이제 군대 가야 하잖아? 아깝다!”

왠지 학교에서 애들이 모여서 BTS 이야기하는 분위기와 비슷했다.

여자는 나이를 먹어도 변하지 않는구나.

“막내야. 가서 군대 언제 가는지 물어봐.”

“네? 제가요?”

갑자기 이야기가 나한테 넘어왔다.

“그래. 너 친해 보이더구만. 짐도 들어주고.”

“하나도 안 친해요. 그때 저 고맙단 말 한마디도 못 했어요.”

갑자기 그런 말을 어떻게 해? 난 절대 못 해!

“그럼 고맙다고 인사하는 김에 물어봐봐.”

“아예 질문 모아서 갈까?”

“그러자 그러자!”

“저 안 간다니까요?”

왠지 내가 대표로 가서 그 남자의 정보를 캐와야 하는 분위기가 돼버렸다.

어쩌지. 진짜 가야 하나?

이상한 애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그래도, 고맙다고 인사할 기회일지도 모른다.

“아. 저거 봐. 또 주정환이야.”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분위기를 끊어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쪽을 본 언니들이 단체로 인상을 구겼다.

“어휴. 저 진상.”

주정환에 대한 스탭 언니들의 평가는 최악이었다.

스탭을 하인 부리듯이 부리고, 툭하면 성질에 짜증이나 내고.

그야말로 진상이었다.

나도 ‘주정환의 실체’가 어쩌고 하는 말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사람인 줄 몰랐다.

드라마에서는 항상 착한 사람 역할만 맡았었는데.

TV에 나오는 이미지와 실제 이미지가 이렇게나 다를 수 있다니.

“막내야. 봤지? 착하게 생겼다고 착한 게 아니야. 잘생긴 게 착한 거야.”

“맞아 맞아. 잘생긴 남자가 더 착하더라.”

“이제 거기만 착하면 완벽한데~.”

“어머머, 미쳤나 봐.”

언니들은 야한 농담을 하며 까르륵대며 웃지만, 저쪽 분위기는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다.

“뭘 꼬나봐? 구경났어?”

주정환의 진상이 이번에는 그 매니저 오빠에게 튀었다.

주연 배우와 매니저의 다툼.

어느 쪽에 무게가 실릴지는 안 봐도 뻔했다.

일방적으로 주정환이 큰소리를 치고, 매니저 오빠는 그저 굽신거리며 사과했다.

보기만 해도 화가 나는 광경이었다. 

“어머 어머 저거 좀 봐. 미쳤나 봐.”

“어떻게 해?”

“뭘 어떻게 해? 알아서 하겠지.”

“배우들 일에 끼어들어서 좋을 거 없어.”

언니들은 그렇게 말했지만, 주정환의 재수 없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뒤통수라도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막내야. 네가 좀 처리해.”

그건 언니들의 농담이었겠지만, 나에겐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돼요?”

“어어?”

“언니. 이거 좀 빌릴게요.”

나는 한 언니가 막 뽑아 온 믹스 커피를 빌렸다.

“막내야, 그거로 뭐 하게?”

“나서지 마. 그러다 혼나.”

종이컵을 들고 일어서는 나를 언니들이 말린다.

혼날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 매니저를 괴롭히는 주정환을 보고 있자니, 이상할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짤리면 뭐…… 어쩔 수 없지.

방송국 세트장 알바는 편하고 짭짤해서 그만두기 아깝긴 하지만 다른 알바를 찾아볼 수밖에.

근데 변상하라면 어떡하지?

저 옷 비싸겠지?

돈 없는데…….

하지만 내가 고민할 새도 없이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주정환이 어른인 임신혜 배우한테까지 험한 말을 한 것이다.

그것도 아들이 듣는 앞에서.

참고 있던 매니저 오빠도 결국 폭발해 주정환을 금방이라도 때릴 것 같았다.

에라! 어떻게든 되겠지!

나는 주정환의 뒤통수에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가 든 종이컵을 던져버렸다.

“앗 뜨거!”

머리에 커피를 뒤집어쓴 주정환은 펄쩍 뛰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죄송해요! 닦을 거 가져올게요!”

그리고 나는 도망쳤다.

“아하하! 대박! 우리 막내 진짜 대단한 애구나?”

“넌 진짜 커서 뭐가 돼도 되겠다.”

“속이 다 시원하더라 야.”

“여기 숨어 있어. 뒷일은 언니들이 해결해줄게.”

나는 언니들의 도움으로 좁은 소품 창고에 숨었다.

거기서 오들오들 떨면서 폭풍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주정환이 나를 찾아다녔지만, 내가 숨어 있는 동안 언니들이 잘 따돌려주었다.

‘선하는 여기 숨어 있어. 절대 소리 내면 안 돼. 알았지?’

‘오빠…….’

지금은 거의 흐릿해져 버린 어렸을 때의 기억.

오빠는 나를 장롱 안에 밀어 넣고, 문을 굳게 닫았다.

그리고 나는 좁은 장롱 안에서 오들오들 떨며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띄엄띄엄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건, 무서운 고함 소리와, 장롱문의 좁은 틈새로 보이는 삭막한 풍경과, 소리 죽여 흐느끼는 나와.

‘선후 오빠…….’

그리고 선후 오빠라는 이름.

그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좁은 곳에 혼자 숨어 있는 건 무서웠지만.

모든 게 끝나고 나면 오빠가 문을 열어주었고,

나를 꽉 끌어안아 주었다.

그러니까 무서워도 참을 수 있었다.

“오빠…….”

겨우 6살.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에 죽어버린 불쌍한 나의 오빠.

김선후.

세상에 오빠를 기억해줄 사람은 나밖에 없는데, 그런 내 기억마저 희미해지고만 있었다.

얼굴도 목소리도 이미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남은 건 선후라는 이름뿐이었다.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있는 것.

그건 오빠가 나에게 올 폭력을 그 작은 몸으로 막아줬기 때문에.

그리고 오빠가 죽어버린 것도 같은 이유에서라는 걸. 

나는 어린 마음에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외로워도, 아무리 죽고 싶어도 참았다.

나 대신에 죽어버린 오빠를 위해서라도 살아남아야만 했다.

살아남아서, 천국에서 오빠를 만났을 때 ‘오빠 덕분에 행복하게 살았어. 고마워.’라고 말해주지 않으면 안 되니까.

“흑…….”

비록 지금은 하나도 행복하지 않지만…….

언젠간 행복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올까?

“미안해 막내야! 언니들이 깜빡 잊어버렸지 뭐니? 어서 나와! 그 진상 집에 갔대.”

창고 문이 열렸다.

하지만 그 사람은 오빠가 아니라 소품팀 언니였다.

“어머. 너 우니? 늦게 와서 미안해! 울지 마!”

소품 팀 언니는 내가 우는 게 창고 안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탓이라고 생각했는지 어쩔 줄을 몰랐다.

“괜찮, 아요…….”

눈물은 쉽게 마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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