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2화 (122/256)

“승희도 이렇게 말하는데, 안 될까요?”

“엄마 제발~.”

승희와 함께 승희 어머니에게 애절한 눈빛을 보낸다.

“……이번만이야. 자꾸 진선후 배우님 곤란하게 하면 안 돼.”

“응!”

승희 어머니도 못 이기는 척 승낙해주었다.

승희와 마주 보며 승리의 하이파이브를 나눈다.

“감사합니다. 승희 어머니.”

“아니요…… 제가 감사하죠.”

“차 키 주세요. 제가 운전할게요. 집이 어디세요?”

“죄송해서…….”

“저 원래 운전하는 거 좋아해요. 신경 쓰지 마세요.”

“아빠! 해피밀 들렀다 갈 거지?”

“당연하지. 승희네 집 근처로 가자.”

그렇게 해서 나는 승희 모녀와 함께 퇴근하게 되었다.

조수석에는 승희가, 승희 어머니는 뒷좌석에 탔다.

“가는 동안 잠깐 눈이라도 붙이고 계세요. 피곤해 보이시는데.”

아까까지 졸려 보이던 승희는 해피밀이란 미끼에 눈이 초롱초롱해져 있었다.

반면에 승희 어머니는 피로에 지친 퇴근길의 비즈니스 우먼 같은 모습이었다.

눈은 퀭하고 다크서클이 턱 아래까지 내려와 있다.

보는 내가 걱정될 정도로 피곤해 보였다.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도착하면 말씀드릴게요.”

아직 어린 승희도 힘들겠지만, 24시간 승희 뒷바라지하는 어머니도 만만찮게 힘드시겠지.

승희 어머니는 차 시트에 앉자마자 기절하듯이 잠들어 버렸다.

“승희야. 어머니 주무시게 조금만 조용히 이야기할까?”

“응.”

승희는 기분이 좋은지 정체불명의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아빠.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갈 거야?”

“응? 아, 아니. 아빠도 집에 가봐야지.”

“피. 자고 가면 좋은데.”

아무리 그래도 승희 집에서 외박할 수는 없다.

승희 아버지도 깜짝 놀라실 거고.

아. 그러고 보니.

“그런데 승희야. 평소엔 아빠라고 안 불러도 돼. 그냥 오빠나 아저씨라고 부르면 안 될까?”

“아빠는 아빠라고 부르면 싫어?”

“싫은 건 아닌데, 진짜 아빠가 들으면 서운해하시잖아?”

내 말에 승희는 또 시무룩해졌다.

“아빠 없어.”

“……저번에도 그러더니 또 그런다. 그러지 마. 아빠 진짜로 서운해하셔.”

“아빠 집에 잘 안 온단 말이야. 못 본 지 한 달도 더 됐어.”

“어, 정말?”

……진짜로 뭐지.

기러기 아빤가?

“아빠 멀리서 일하시니?”

“나도 잘 몰라. 근데 집에 오면 항상 엄마랑 싸워. 그래서 이혼했대”

윽.

더 파고들면 안 되겠다.

“그랬구나. 그럼 승희가 아빠라고 부르고 싶으면 아빠라고 불러.”

“응…….”

그렇게 대답하는 승희는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

이렇게 예쁜 딸을 두고 이혼하다니.

어른에겐 어른의 사정이 있겠지만, 승희에게 이런 표정을 짓게 만드는 아빠에겐 좋은 감정이 들지 않았다.

“아빠. 엄마랑 사귀어?”

“엄마랑? 아니?”

얘가 큰일 날 소릴.

아무리 내가 아빠라도 너희 엄마랑 사귀면 안 되지.

난 우리 엄마랑 사귀어야 하니까.

음. 왠지 멋진 말을 한 거 같다.

“안 사귀는데 왜 키스했어?”

“키스? 엄마랑?”

“응. 아까 탈의실에서. 수아 엄마랑.”

“어.”

철렁.

오늘 승희 때문에 몇 번 가슴이 철렁하는지 모르겠다.

수아 엄마라니.

그러고 보니 수아 씨도 승희한테 엄마겠구나.

나는 백미러로 승희 어머니의 모습부터 확인했다.

잘 자고 있다. 듣진 못한 거 같다.

“그, 승희야.”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모른 척할 수 있을까?

“그거, 누구한테 들었어?”

“내가 봤어. 탈의실에 있었어.”

오. 신이시여.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내리시나이까.

“그, 그랬구나.”

사실 신을 찾을 것도 없었다.

내가 자초한 일이니까.

문을 잠갔으니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거라 방심한 결과였다.

안에 누가 들어와 있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그나마 더 이상 진도가 안 나갔으니 망정이지…….

어디까지 했더라?

키스에 가슴, 엉덩이 터치?

이건 괜찮은 건가?

“엄마 아빠는 사귀지도 않는데 왜 키스했어?”

“……승희야. 어른들은 그럴 때도 있는 거야. 외로우니까.”

“외로우니까?”

“그래. 사귀는 상대가 없는 사람끼리, 사귀는 척 연인 놀이 하는 거야. 외로우니까.”

이런 말로 얼버무릴 수 있을까?

……안 되겠지?

그래도 제발 그냥 넘어가 줘!

아빠도 변명하기 힘들어!

하지만 내 바람은 승희에게 닿지 않았다.

“아빠. 그럼 나랑도 연인 놀이 해주면 안 돼?”

으악!

승희 어머니! 죄송합니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절 죽여주세요!

“그건 안 돼.”

“왜?”

“승희는 아직 어린이잖아? 이런 건 어른들끼리 하는 거니까.”

점점 대답할 말이 궁색해지고 있었다.

인싸 누나들에게 둘러싸였을 때보다도 더욱 강한 압박감.

나를 여기까지 몰아붙이다니.

역시 여배우들은 무서워.

“그럼 내가 어른 되면 해줄 거야?”

“하, 하하…….”

승희는 어려운 것만 묻는구나.

아빠 그만 집에 가면 안 될까?

“만약 승희가 어른이 돼서도 사귀는 사람 없어서 외로우면 말해줄래? 승희 마음이 변할지도 모르고, 남자들이 줄을 설 테니까 외로울 일도 없겠지만.”

“응. 알았어. 약속.”

승희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한다.

휴. 승희가 순순히 납득해줘서 다행이다.

만약 승희가 떼쓰다 승희 어머니가 깼으면.

그리고 무슨 일이냐고 자초지종을 물었으면.

……공포물이 따로 없네. 상상만 해도 무섭다.

차가 익숙한 패스트 푸드점 주차장에 진입했다.

나는 차를 주차하고서 승희에게 말했다.

“승희야, 엄마 주무시는데 깨우면 미안하니까 해피밀은 차에서 먹을까? 아빠가 사 올게.”

“나도 갈래.”

그렇게 나오시겠지.

눈 떴는데 아무도 없으면 승희 어머니가 걱정하실 텐데.

금방 다녀오면 괜찮으려나?

“그래. 얼른 갔다 오자.”

승희를 설득할 시간에 다녀오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나는 승희와 함께 차에서 내려 가게로 들어섰다.

“그런데 승희야, 아빠랑 엄마랑 키스한 거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부끄러우니까.”

“응. 알아.”

“꼭 비밀 지켜줘야 해. 엄마한테도 말하면 안 돼. 정말로.”

나는 몇 번이나 승희에게 당부했다.

으윽. 어쩌다 이런 일이 됐을까.

다 내 잘못이긴 하지만.

그나마 들킨 게 승희라서 다행일지도 모른다.

앞으론 더 조심해야지.

“승희야!”

햄버거를 사서 가게를 나오는데, 웬 중년 남자가 승희를 불렀다.

나는 반사적으로 승희 앞을 막고 섰다.

승희의 눈이 커졌다.

“아빠……?”

승희는 그 남자를, 아빠라고 불렀다.

아역 배우 나승희2 

“승희야. 기다려.”

“응?”

아빠에게 달려가려는 승희 앞을 막아 세운다.

“승희 아버님 되세요?”

“그런데. 그쪽은?”

“안녕하세요. 승희랑 같은 드라마에 출연 중인 진선후라고 합니다.”

“어, 그래. 우리 승희 돌봐줘서 고마워. 승희 엄마는?”

“저쪽 차에 계시는데. 만나보실래요?”

“아니. 승희는 내가 데려갈게. 가자, 승희야.”

“승희 어머니 먼저 보고 가시죠.”

승희 아버지 얼굴이 짜증으로 구겨졌다.

“이봐. 너 뭐야?”

내가 이렇게 경계하는 이유.

그 남자에게서 익숙한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그건 삶을 포기한 남자의 냄새.

나를 학대했던 친부와 같은 냄새였다.

“나 승희 아빠라고. 아빠가 딸 데려가겠다는데, 네가 뭔데 참견이야?”

“그러니까 어머니한테 말씀은 하고 가시라고요.”

승희도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내 뒤에 숨었다.

승희는 분명 부모님이 이혼했다고 했다.

양육권은 어머니한테 있겠지.

이혼한 이유가 뭔지는 몰라도, 승희 어머니한테 말도 없이 데려가게 둘 순 없었다.

“나승희. 가자.”

그 남자는 억지로라도 데려가려는 것처럼 승희에게 손을 뻗었다.

나는 그 손을 쳐냈다.

“승희한테 손대지 마.”

“이 새끼가!”

남자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교차한다.

내가 맞았을 경우.

내가 때렸을 경우.

내가 맞고 반격했을 경우.

온갖 경우의 수가 떠올랐다 사라진다.

이럴 때 가장 현명한 대처는 뭐지?

“승희야, 가자!”

나는 승희를 훌쩍 안아 들고서 달렸다.

“야! 나승희!”

“꽉 잡아!”

승희가 내 목에 꼭 매달렸다.

나는 달렸다.

승희 어머니가 있는 차를 향해.

살짝 뒤를 돌아본다.

승희 아버지도 헐레벌떡 쫓아오지만, 거리는 줄어들지 않는다.

차까지는 고작 5초도 걸리지 않았다.

“승희 어머니! 일어나세요!”

“엄마!”

차에 도착해 다급히 창문을 두드린다.

승희 어머니가 놀라서 깨어나는 게 보였다.

됐다.

이제 뒷일은 승희 어머니한테 맡기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했지만.

“윽!”

“꺅!”

등 뒤에서 가해진 충격.

그 남자가 달려와 내 등을 발로 찬 것이었다.

그 충격에 앞으로 넘어지면서, 승희가 행여나 다치지 않도록 꽉 끌어안았다.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어 옆으로 넘어졌다.

“크.”

땅에 부딪힌다.

온몸에 전해지는 충격.

아프다.

나 혼자였으면 맞지도 않고 넘어지지도 않았을 텐데.

승희를 안고 있어서 더 피해가 컸다.

제 딸을 안고 있는데도 때릴 줄은.

“아빠! 아빠 괜찮아?!”

“선후 씨!”

승희가 놀라서 나를 부르고, 승희 어머니도 차에서 내려 나에게 달려왔다.

“승희 아빠!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썩을. 딸이 납치되는 걸 보고 그럼 가만히 있을까?”

“누가 누굴 납치해! 당신이 데려가려고 한 거 아냐!”

“이게!”

“악!”

“엄마!”

아프지만, 누워있을 틈도 없었다.

그 남자가 승희 어머니 뺨을 때렸다.

승희 어머니가 바닥에 쓰러지고, 그런 승희 어머니를 남자는 또 때리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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