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1화 (121/256)

사적인 관계는 어쨌든, 배우로서 수아 씨는 나한테 하늘 같은 연기 선배다.

감히 그 말을 거역할 순 없었다.

나는 단역 누나들에게 간단히 인사하고서 허둥거리며 수아 씨의 뒤를 쫓았다.

“여자 탈의실?”

그런데 하필 도착한 곳이 여자 탈의실 앞이었다.

그 앞에서 나는 걸음을 멈췄다.

“뭐해요. 빨리 들어와요.”

“어.”

수아 씨가 내 손목을 잡고서 탈의실 안쪽으로 끌고 들어갔다.

달칵.

그리고 수아 씨는 탈의실 문을 잠갔다.

“선후 씨. 그렇게 젊은 애들이 좋아요?”

“예?”

설마!

연기 얘기는 그냥 핑계였어?

“그렇게 헤실헤실 웃으면서. 뚫어지게 수영복 쳐다보기나 하고.”

“제가요?”

그건 내 연기가 어떻고 하는 것보다 더 황당한 얘기였다.

내가 얼마나 진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는데.

“그렇게 보였어요?”

“몰라요!”

수아 씨는 토라진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수아 씨.”

그 인싸 누님들을 봐서 그런 걸까?

사사건건 지혜 씨를 견제하려 드는 수아 씨는 귀찮았지만, 오늘따라 그런 수아 씨가 귀엽게 느껴졌다.

“제 눈엔 수아 씨가 훨씬 예뻐 보이는데요?”

“흥. 말로만.”

그래서 나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기로 했다.

탈의실 벽 쪽으로 수아 씨를 밀어붙였다.

수영복 위에 걸친 수아 씨의 점퍼가 탈의실 바닥에 떨어졌다.

수아 씨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 본다.

“수아 씨. 절 이런 데로 데려온 건 그런 뜻이죠?”

나는 수아 씨의 턱을 잡아 올렸다.

“아, 아닌데요?”

눈을 피하면서 부정하는 수아 씨.

입으론 아니라고 하지만, 그 표정에 비치는 기대는 숨길 수 없었다.

나는 그대로 고개를 숙여 수아 씨의 입술에 키스했다.

츄우, 츄웃.

“흐응…… 선후 씨…….”

키스를 하면서 수아 씨의 가슴에 손을 올린다.

빳빳한 수영복의 감촉 아래로 말랑한 가슴의 존재가 느껴졌다.

한 손에 딱 잡히는 크기의 예쁜 가슴이다.

역시 패드 따윈 필요 없다니까.

“수아 씨, 아직 아프죠?”

반대쪽 손으로 엉덩이를 살짝 만져본다.

귀여운 엉덩이가 흠칫 떨렸다.

어디가 아픈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수아 씨는 빨개진 얼굴을 더욱 붉게 물들이며 대답했다.

“조금…… 그래도 할 수 있어요. 아니면 손으로 할까요?”

내가 하자고 하면 수아 씨는 아픈 걸 참고서라도 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굳이 그러고 싶진 않았다.

“다 나으면 해요. 그리고 이런 데서는 위험하니까.”

여긴 일단 여자 탈의실이다.

문은 잠겨있어도 신지혜 배우나 그 패거리들이 언제 올지 몰랐다.

수아 씨는 여자니까 여기가 마음이 놓일지 몰라도, 나는 아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장소에 있는 불안한 기분.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네…….”

조금 실망한 듯한 수아 씨와 한층 더 진한 키스를 나눈다.

“다 나으면, 그땐 실컷 해요.”

“……네.”

실컷 하자는 내 말에 수아 씨는 조금 마음이 풀린 것 같았다.

“그런데 그건 어쩌시게요?”

“아.”

수아 씨는 내 아랫도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작은 삼각 수영복에서 흑염룡이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기세였다.

“역시 한 번 빼고 갈까요? 손으로 금방 할게요.”

수아 씨가 기대를 담은 눈으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위험한 짓은 하고 싶지 않단 말이지.

“수아 씨. 점퍼만 좀 빌려주세요.”

나는 수아 씨의 점퍼를 허리에 감아 앞쪽을 가렸다.

바로 옆이 남자 탈의실이니까, 금방 가서 갈아입으면 되겠지.

“옷만 갈아입고 돌려줄게요.”

“네…….”

수아 씨는 실망한 것 같다.

그렇게 하고 싶었을까.

어떡하지.

“……오늘 마치고 수아 씨 집에 들렀다 가도 돼요?”

“네, 네!”

내 말에 수아 씨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이것도 남자의 중요한 의무니까 말이지.

덜컹.

그대로 우리는 여자 탈의실을 나왔다.

탈의실 밖에는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흠. 아무도 못 봤겠지?

나는 서둘러 남자 탈의실로 들어갔다.

* * *

덜컹.

두 사람이 탈의실을 나가고 난 뒤.

“…….”

탈의실 안쪽에 숨죽이고 있던 작은 그림자가 움직였다.

작은 그림자는 새빨개진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서둘러 탈의실을 빠져나왔다.

아무도 없는 탈의실에는 정적만이 남았다.

아역 배우 나승희 

촬영이 모두 끝나고.

“지금이라면 인기 여배우에 신인 여배우 두 사람이 덤으로──”

신지혜 배우는 오늘도 그런 소리를 하고 있었다.

“죄송한데 선약이 있어서요.”

게다가 둘이나 더 데려가서 어쩌자고.

신지혜 한 사람도 감당이 안 되는데.

“또 누구랑!”

“수아 선배랑요.”

저쪽에서 수아 선배가 수줍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야! 너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올래?”

“죄송해요. 다음에 꼭 살게요.”

“쳇. 두고 볼 거야.”

신지혜 배우는 나를 한껏 째려보고는 자리를 떠났다. 

슬슬 한계일지도 모른다.

다음에 패거리를 더 늘려서 오면 안 되는데.

“아빠.”

“어, 승희야.”

승희가 내 옷 소매를 잡아당겼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졸린 얼굴이었다.

승희는 자신의 가슴께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나 여기가 아픈 거 같아.”

“어, 진짜?!”

가슴이 철렁했다.

그럴 만한 근거가 있었으니까. 인공호흡 신에서.

하지만 그때 흉부 압박은 시늉만 했는데.

당황해서 정말로 힘이 들어가 버렸나?

“승희 어머니, 어떡하죠? 승희야, 병원 갈래?”

“으응.”

승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해피밀.”

“…….”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런 나 대신 승희 어머니가 나섰다.

“승희 너 정말 아픈 거 맞니? 엄마한텐 아프다고 말 안 했잖아.”

“지금 아파졌어.”

“거짓말할래? 아프면 병원에 가야지.”

휴.

거짓말이었나 보다.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승희 요 녀석, 그런 장난을 치고 말이야.

“응? 아빠…….”

“미안해 승희야. 아빠 오늘 약속 있어서. 다음에 같이 가자. 알았지?”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타일렀지만 승희는 내 소매를 놓지 않았다. 

승희는 연기할 땐 어른 뺨치는데, 이럴 땐 또 어린애 같단 말이지.

“죄송해요. 애가 워낙 철이 없어서.”

승희 어머니가 승희를 억지로 안아 올렸다.

“아빠…….”

내 소매는 놓았지만, 시선은 나한테 고정된 채였다.

가슴을 후벼 파는 절절한 눈빛이었다.

큭. 속지 마라, 진선후.

저건 여배우의 연기야.

나승희!

너도 겨우 해피밀을 위해서 연기력을 낭비하지 말라고!

“하아.”

……하지만.

연기라는 걸 알아도 어쩔 수 없었다.

수영장에서 승희와 찍었던 장면이 머릿속에 플래시백 됐다.

거짓말로 아빠의 관심을 끌려 했던 수정이.

그러다 정말로 물에 빠져 위험해졌던 그 장면을.

그걸 생각하면 도저히 그냥 갈 수 없었다.

아무리 승희의 연기라고 알고 있어도.

“저, 수아 씨.”

“알았어요. 다녀오세요.”

수아 씨는 내가 말도 꺼내기 전에 이미 승낙했다.

내 생각 같은 건 이미 다 읽고 있는 것 같았다.

“죄송해요. 보충은 꼭 할게요.”

“전 선후 씨가 저한테 신경 써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갔다 와요.”

수아 씨는 웃으면서 보내주었다.

휴. 수아 씨가 마음이 넓은 사람이라 다행이다.

지혜 씨 같았으면 절대 가만히 안 있었을 텐데.

수아 씨에게 양해를 받고서 승희와 승희 어머니에게로 돌아갔다.

“승희 어머니.”

“아, 진선후 배우님.”

“아빠!”

승희가 내 허리에 매달려왔다.

나는 승희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약속이 갑자기 취소돼서요. 괜찮으시면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려도 될까요? 운전은 제가 할게요.”

“네? 안 그러셔도 되는데…….”

승희 어머니는 몹시도 송구스러워했다.

내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 안 그러셔도 되는데.

혹시 내가 같이 있으면 불편하셔서 그런가?

“낮에 촬영분 생각하니까 도저히 그냥 갈 수 없어서요. 혹시 불편하신 거면.”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

다행히 순수하게 미안해서 그랬던 것 같다.

“아빠! 해피밀! 해피밀!”

“승희야!”

해피밀을 연호하는 승희에게 어머니가 야단친다.

해피밀 도대체 얼마나 좋아하는 거야.

“승희는 해피밀이 좋아? 더 맛있는 것도 사줄 수 있는데.”

“해피밀이 좋아.”

행복하게 웃는 승희를 보면 가게를 통째로라도 사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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