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9화 (119/256)

* * *

“작가님. 여기 좀 이상한데요.”

회의 중.

신지혜 배우가 의견을 말한다.

“어디?”

“수영장 신요. 아무리 당황했더라도 다 큰 성인이 수영장 물에 빠지는 건 말이 안 되는 거 같은데.”

“역시 좀 그런가.”

실내 수영장 신.

처음엔 없었다가 갑자기 생겨난 서비스 신이었다.

등장인물은 나, 수아 씨, 승희까지 세 가족에 플러스 지혜 씨.

가족끼리 수영장에서 놀고 있던 황진우는 ‘우연히’ 선아(지혜 선배)와 수영장에서 마주치게 된다.

거기서 황진우는 가족은 안중에도 없이 수영복 차림의 선아에게 혼을 뺏기고 마는데.

딸 수정이(승희)와 물에서 놀아주던 아내 신아영(수아 씨)은 그런 남편을 답답하게 보다 풀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황진우는 아내의 비명에 정신을 차리고 물에 뛰어들어 구해주는 것이다.

구해준 뒤에는 당연히 따라오는 인공호흡 신.

인공호흡 후 겨우 정신을 차린 아내와 걱정으로 우는 딸 수정이를 보며, 황진우는 가족을 돌보지 않은 자신에 대해 자책하며 가족과 선아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안전요원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 물어서는 안 되겠지.

“여기선 차라리 수정이가 빠지는 게 맞지 않아요?”

“그게 말이지, 어린이 안전 문제에는 방통위가 가만히 있질 않아요.”

지혜 씨의 의견에 감독님이 답변했다.

“김 작가도 처음엔 수정이로 하려고 했었어. 규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바꾼 거야.”

그랬었구나.

나는 신아영이 황진우 관심 돌리려고 일부러 빠진 척한 줄 알았는데.

애도 있는데 어린이용 풀이 아니라 성인용 풀에서 노는 것도 좀 이상했단 말이지.

“지혜 씨가 일부러 훼방 놓는 거 아닐까요?”

“그건 아닐걸요.”

훼방이라.

설마 수아 씨는 인공호흡 신 못 하게 지혜 씨가 훼방 놓는다고 생각하나?

설마.

지혜 씨가 수아 씨처럼 순진한 사람도 아니고.

그런 귀여운 생각을 할 리가 없다.

아무리 그래도 작품에는 성실한 사람이니까.

개인감정이 어떻든 작품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하는 말이겠지.

“뭐 어때요? 경고 한 장 받고 말지. 승희도 그게 좋지?”

“네! 저 꼭 할래요! 자신 있어요!”

승희도 눈을 빛내며 지혜 씨의 의견에 찬동했다.

역시 여배우들은 무서워.

“하~. 김 작가. 어떡해?”

“배우들도 원하는데 그렇게 하죠?”

감독님도 그쪽으로 마음이 기운 것 같다.

‘난 아무 말 안 했는데.’

수아 씨가 구시렁거린다.

키스 신(인공호흡이지만)을 뺏겨서 서운한 것 같다.

‘수아 씨. 다음에 집에서 따로 연습하죠.’

‘……네!’

얼마나 좋아.

고작 인공호흡 연습에 이렇게 좋아해 주니까.

사이좋게 속닥대는 우리를 신지혜 배우가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

실내 수영장 신 

실내 수영장 신 촬영이 시작됐다.

수영장을 전세 내서 촬영해야 하니 영업시간이 끝난 밤에나 촬영할 수 있었다.

여기서 주요 등장인물은 4명.

나, 수아 씨, 지혜 씨, 그리고 승희까지.

나머진 전부 엑스트라다. 20명도 넘게 동원됐다.

“오~ 선후 몸 좋은데? 누나 반하겠어.”

누군가 손으로 내 등을 찰싹 친다.

말할 것도 없이 신지혜 배우였다.

신지혜 배우와는 어제 살짝 다툼이 있었지만 하루 지나고 나니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지혜 누나도요.”

“너 진짜 성의 없이 그럴래? 더 할 말 없어?”

‘빨리 더 칭찬해’라는 듯이 내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지혜 누나.

대단하긴 대단하다.

가슴도 있고, 키도 크고, 비율도 좋고.

이번 수영장 신 자체가 사실 신지혜 배우를 위한 컷이라고 봐도 무방하니까.

수영복도 그렇다.

원피스도 아닌 것이, 비키니도 아닌 것이.

일단은 흰색 원피스형 수영복이지만, 배꼽 부분에 다이아 모양으로 파여있고 옆구리와 등도 깊이 파여있었다.

웬만한 비키니보다도 노출이 심했다.

“그런 거 입어도 괜찮아요?”

바로 어제 방통위 얘기가 나왔었는데.

이건 분명히 경고가 날아올 수영복이었다.

“어차피 권고밖에 더 받겠어? 노출로 권고받으면 오히려 마케팅되겠지.”

속도 편하시네.

어차피 혼나는 건 감독님이겠지만.

“근데 넌 그게 뭐야? 애도 아니고.”

“제가 어때서요?”

나는 사각 트렁크를 입고 있었다.

하와이 느낌이 물씬 나는 알록달록한 색상으로.

가족과 함께 수영장에 온 애 딸린 유부남 평균이라고 생각하는데.

“넌 그렇게 자신이 없냐?”

응? 뭐라고?

누가 자신이 없어?

“자신이 없는 게 아니라 TPO를 맞춘 거예요. 동네 수영장에서 지혜 누나처럼 입는 사람이 어딨어요?”

“여긴 동네 수영장이 아니라 드라마야. 애초에 이런 신 넣는 이유가 뭔데? 기사 한 줄이라도 더 나오려고 하는 거잖아?”

으음.

그것도 맞는 말인데.

분명 신지혜 배우는 ‘신지혜, 파격 수영복 노출!’ 이런 식으로 기사가 뜰 거 같다.

하지만 내가 삼각 수영복을 입으면 방통위 권고가 아니라 방송금지 맞는 거 아니야?

“의상팀! 얘 수영복 좀 바꿔줘요! 딱 달라붙는 브리프로!”

신지혜 배우는 멋대로 내 수영복을 바꿔버렸다.

의상팀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호다닥 삼각형 수영복을 가져왔다.

작다. 손바닥만 했다.

이건 뭐지? 마이크로 비키니?

“동네 수영장에서 이런 걸 입는다고?”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노골적인 거 아닐까.

하지만 의상팀 누나들은 눈을 빛내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좀 더 큰 건 없나요?”

혹시라도 모를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

잘못해서 삐져나오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나는 괜찮지만 여기엔 승희도 있고 엑스트라 아역들도 있는데.

의상팀 누나들은 아주 조금 더 큰 수영복을 다시 가져다주었다.

그래도 내 눈엔 작아 보였지만, 자꾸 불평하면 진상 취급받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에 그냥 그거로 갈아입기로 했다.

“오…….”

탈의실에서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촬영팀과 배우들의 시선이 나에게 몰렸다.

특히 내 배꼽 아래쪽으로.

이래서 티 안 나는 트렁크로 입었던 건데.

내가 무슨 노출증 환자도 아니고, 남녀노소 관계없이 이런 시선 받아서 좋을 리가 없다.

“감독님. 이런 거 입어도 돼요?”

“당근이지!”

감독님은 만족한 것 같다.

어차피 책임은 감독님이 지시는 거니까.

난 몰라.

“야. 너 뭐 넣었어? 빨리 빼.”

신지혜 배우가 손등으로 내 거길 툭툭 쳤다.

보고 있던 의상팀 누나들이 꺅꺅거린다.

“아 진짜! 성추행으로 신고합니다!”

“호들갑은. 진짜 안 넣었어?”

“안 넣었다니까요.”

사람이 허물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입장이 반대였으면 구속감이라고.

그나저나 큰일 날 뻔했네.

신지혜 배우는 복장도 저렇고.

조금만 더 건드렸으면 발기할 뻔했다.

까딱 잘못하면 대참사인데.

휴식 시간에 어디 숨어서 한 발 빼고 와야 하나.

“근데 수아 선배는 왜 이렇게 안 나와?”

신지혜 배우 말대로 수아 씨는 수영복 갈아입으러 가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사이에 나는 두 번이나 갈아입고 왔는데.

그리고 딸 역할인 승희도 아직이었다.

“여자니까 갈아입는 데 오래 걸리겠죠.”

“야. 나도 여자거든?”

그랬지 참.

“선후 네가 남편이니까 가서 불러와.”

“제가요? 여자 탈의실에요?”

“밖에서 부르면 되잖아.”

둘러보니 다들 안절부절못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주연이 안 나오니 촬영을 못 한다.

그렇다고 재촉할 수도 없고.

그런 촬영팀의 난감한 감정이 느껴진다.

“누나가 가요.”

“싫어.”

같은 여자 배우인 신지혜 씨가 가는 게 맞겠지만 사이가 좋다곤 할 수 없으니까.

할 수 없이 나는 여자 탈의실 입구 쪽으로 향했다.

“수아 씨? 멀었어요?”

『그, 금방 나가요!』

탈의실 안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너무 재촉하면 미안하니까 나도 가서 기다릴까.

“저, 진선후 배우님.”

그런데 여자 탈의실 앞에서 한 여자분이 쭈뼛쭈뼛 말을 걸어왔다.

내 딸 역할을 맡은 아역배우 나승희의 어머니였다.

“예, 승희 어머니. 말씀하세요.”

“그…… 이런 부탁드려서 죄송한데요,”

설마 여자 탈의실 엿보는 변태로 찍힌 건가?

변태는 맞지만 엿본 건 아닌데.

“승희 나오면 수영복 칭찬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수영복이 너무 어린애 같다고 투정 부려서.”

“아. 예. 물론이죠. 알겠습니다.”

수영복에 신경 쓰는 건 어른만이 아니다.

애들은 잔인하지. 사소한 흠만 잡아도 놀리고.

방송 나가면 학교 친구들도 다 볼 테니까.

오히려 어른보다 애들이 더 신경 쓰일지도 모른다.

내 칭찬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진 모르지만, 없는 것보단 낫겠지.

실컷 칭찬해주자.

“선후 씨. 잠깐만요.”

여자 탈의실에서 수아 씨가 고개만 내밀고 이리 오라며 손짓한다.

수영모자 쓴 얼굴이 귀엽다.

그런데 들어오라고? 여자 탈의실인데?

차마 안에 들어가진 못하고 살짝 들여다보았다.

수아 씨는 사람들 앞에 나오지 못하고 탈의실 입구 그늘에 숨어 있었다.

“그, 저, 이상하지 않아요?”

수아 씨의 수영복은 원피스 계통에 가슴 쪽과 하체 쪽에 커튼 같은 프릴이 달릴 수영복이었다.

신지혜 배우에 비하면 훨씬 노출이 적었다.

그래도 수아 씨는 평소에 노출하는 일이 없다 보니 이런 차림은 어색한 거겠지.

“뭘요. 예뻐요. 예쁜데…….”

수아 씨의 가슴 쪽에 시선을 둔다.

내가 아는 수아 씨와는 조금 다르다.

신지혜 배우 이상으로 부푼 애기맘마통이 거기에 있었다.

“수아 씨……. 패드는 빼죠.”

“……티 나나요?”

새빨개져서 되묻는다.

당연하죠. 실물을 아는데.

“수아 씨는 그런 거 없어도 괜찮아요. 크다고 다 좋은 게 아니니까.”

“……네.”

사실 나는 크면 다 좋지만 수아 씨한테는 그런 말을 해선 안 된다.

“그리고 승희 너도.”

수아 씨 등 뒤에 숨어 있던 승희에게도 말한다.

극 중에서 엄마와 딸인 만큼, 승희도 수아 씨와 비슷한 모양의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문제는 가슴께에 승희 나이에 전혀 맞지 않는 물건이 있었다는 거다. 수아 씨와 마찬가지로.

수영복을 맞춰 입는 건 좋지만 그런 부분까지는 안 따라 해도 될 텐데. 

“……싫어.”

하지만 수아 씨와 달리 승희는 고집을 부렸다.

왠지 그 모습은 어릴 적 미소를 떠올리게 했다.

‘수아 씨. 애한테 뭘 가르치는 거예요? 승희 어머니한테 무슨 소릴 들으려고.’

‘우……. 죄송해요.’

소곤소곤 따지자 순순히 자백했다.

역시 승희가 낀 패드도 수아 씨 거였구나.

수아 씨가 하는 걸 보고 호기심에 따라 할 순 있겠지만, 공중파 드라마에 나오기에는 너무 부적절한 모습이었다.

나는 승희 앞에 쪼그려 앉아 조곤조곤 타일렀다.

“승희야. 승희는 그런 거 없어도 돼. 승희는 있는 그대로도 이렇게 예쁜데 그런 걸 뭐하러 해? 그런 건 자기 자신한테 자신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거야.”

“윽.”

찔리는 게 있는지 수아 씨가 신음했다.

“그러니까 얼른 빼고 오자. 승희는 수영복만 입고 있어도 엄청 귀여우니까. 알았지?”

“……응.”

“수아 씨도 같이 가서 빼고 와요.”

휴. 다행이다.

설득 안 됐으면 승희 어머니 부를 뻔했네.

“……저 왔어요.”

탈의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곧 두 사람이 나왔다.

“거 봐요. 훨씬 낫네.”

부끄러운 듯 손으로 몸을 가리려는 수아 씨.

왠지 옷을 입었을 때보다도 오히려 더 청순해 보였다.

“승희도 잘 뺐어. 훨씬 편하지? 수영복도 너무 예쁘네. 승희한테 너무 잘 어울려.”

승희 어머니의 부탁을 떠올리며 열심히 칭찬해주었다.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던 승희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역시 애들은 애들다워야지.

억지로 어른들 따라 하려 해선 안 된다.

특히 신지혜 배우 같은 나쁜 어른은.

“아빠. 안아줘.”

“응? 응.”

승희를 팔에 안고서 걷는다.

내 옆에는 수아 씨가 나란히 서서 걸었다.

딱 사이좋은 부모와 딸 일가족의 모습이었다.

“오. 그림 좋네. 바로 촬영 들어갈 테니까 준비해.”

그 그림이 감독님 마음에 들었는지, 그대로 촬영에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지시에도 촬영팀은 당황하지 않고 분주하게 준비를 마쳤다.

좋아. 그럼 나도 시작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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