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술이든 밥이든, 밖에서 둘이 먹는 건 위험하다.
그렇게 판단한 우리는 수아 씨 집에서 간단하게 마시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술과 안주를 공수하기 위해 편의점에 들렀다.
수아 씨 술은 전에 식당에서 마셨던 매실주로 하면 되려나?
여자들은 이런 게 마시기 편하겠지?
그럼 나는 캔맥주나 좀 사갈까.
지난번에 취해서 실수한 거 생각하면 강한 술은 마시면 안 될 거 같고.
나는 매실주와 캔맥주, 거기에 전자레인지 돌려서 뚝딱 만들 수 있는 안줏거리를 몇 개 골랐다.
“계산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편의점 알바가 내 목소리에 고개를 든다.
“어? 선하 아냐?”
거기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방송국 세트장에서 알바하던 고3 선하.
내 팬 1호가 되겠다고 한 그 김선하였다.
이런 우연이?
설마 내가 이 편의점에 들를 걸 예상하고 잠복하고 있었던 건 아닐 테고.
그런데, 나보단 선하가 더 놀란 것 같았다.
그것도 반가움에 놀란 표정이 아니었다.
“아, 아닌데요.”
선하는 몹시 당황한 표정으로, 모자를 더 깊이 쓰고선 고개를 숙여버렸다.
어라?
“선하 맞잖아. 요즘 세트장에서 안 보인다 했더니, 아르바이트 바꿨어?”
“아니라고 했잖아요!”
내가 다시 아는 척을 하자 선하는 화를 냈다.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돼버렸다.
“……죄송합니다. 계산해드릴게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선하는 나랑 아는 척하고 싶지 않은 것 같다.
사무적으로 물건들을 계산하고 있었다.
……왠지 상처받는다.
보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뭔가 사정이 있겠지만, 이렇게 원천차단 당해서야 이유를 물어볼 수도 없고.
팬클럽도 만들겠다면서, 절대 갈아타지 않겠다고까지 했었는데…….
“안녕히 가세요.”
“……고맙습니다.”
무뚝뚝한 인사를 받고, 나도 별수 없이 인사한다.
그리고 돌아가기 위해 편의점 문 앞까지 나왔지만, 왠지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뭘까.
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한 걸까.
요즘은 일도 인간관계도 뭐든 잘 풀려서,
안 좋은 일이라면 이렇게 사소한 일도 크게 느껴지는 걸까?
선하에 대해선 좋은 감정은 있지만, 그렇다고 특별한 뭔가가 있는 것도 아니다.
가족도 뭣도 아니고, 일에 관련된 사이도 아니다.
팬과 연예인. 나아가서는 편한 오빠 동생 관계일 뿐.
결국 돌아서면 그뿐인 사이였다.
그런데도 나는 왜 이렇게 신경 쓰는 걸까.
이상하다.
억지로라도 이야기를 들어봐야 할 것 같았다.
“아.”
그렇게 마음먹고 돌아봤지만, 계산대에 선하는 이미 없었다.
가게 안쪽에 있는 스태프 룸으로 들어간 것 같다.
나를 피하려고?
“…….”
나는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선후 씨, 무슨 일 있었어요?”
“예? 아니요?”
차로 돌아와 아파트로 가는 길.
입 다물고 운전하는 나를 이상하게 생각한 수아 씨가 묻는다.
나는 확실히 기분이 다운돼 있었다.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느낄 만큼.
“안 좋은 일 있으면 술 마시고 털어내 버려요!”
“……그럴까요.”
다운된 나와는 반대로 수아 씨는 상당히 업된 상태였다.
이유야 말할 것도 없겠지.
하.
이렇게 좋아해 주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다른 여자 생각이나 하다니.
나도 정말 안 될 인간이다.
선하와 그런 사이는 아니지만…….
아니, 지금은 선하는 잊자.
선하는 나중에라도 만나서 이야기하면 되니까.
“어, 저, 그, 선후 씨.”
“네?”
수아 씨가 머뭇거리며 나를 부른다.
불안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망설이는지.
“그.”
“네.”
“……저번에 그거요.”
“그거?”
“그…… 콘돔이요.”
“…….”
윽.
역시 왔나.
“그거 오늘, 사용하셔도 되는데, 아! 물론 피곤하시면, 안 하셔도 되는데! 꼭 하자는 얘기가 아니라!”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는 수아 씨.
아마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지.
“수아 씨.”
나는 신호 대기에 걸린 걸 기회로 차를 세웠다.
그리고 조수석으로 몸을 기울여,
수아 씨의 입술에 키스했다.
상냥하게, 달콤하게.
초심자인 수아 씨에게 맞춘 키스였다.
“츗…….”
짧은 키스를 마치고, 다시 떨어진다.
수아 씨는 새빨갛게 얼굴을 물들인 채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수아 씨. 오늘 밤 잘 부탁드립니다.”
“네, 네에…….”
수아 씨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손을 뻗어 수아 씨의 가녀린 손을 잡는다.
긴장으로 떨리는 손.
수아 씨의 두근거림까지 나에게 전해지는 것 같았다.
결국 수아 씨는 이렇게 나쁜 남자에게 몸도 마음도 빼앗기고 마는 건가…….
하다못해 수아 씨에게 후회하지 않을 첫 경험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
* * *
나는 일단 집에 한 번 돌아가 샤워를 받고 다시 만나기로 했다.
나도 씻을 겸, 수아 씨에게도 씻을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둘 다 오늘 종일 야외촬영하고 왔으니까.
나야 안 씻고 하는 것도 나름대로 운치 있어서 괜찮지만, 수아 씨는 그렇지도 않겠지.
처음 할 때는 작은 거 하나라도 신경 쓰이니까.
샤워를 마치고 수아 씨 집에 왔다.
편안한 잠옷을 입은 수아 씨는 낮에 보였던 날카로운 느낌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내 앞에서 이렇게 편안하게 있어 주면 나도 고맙다. 그만큼 나한테 마음을 허락했단 뜻이니까.
“건배!”
편의점에서 사 온 술과 안주를 꺼내 상을 차렸다.
수아 씨는 매실주를, 나는 캔맥주를.
단출하지만 이거면 충분했다.
오늘의 메인 메뉴는 따로 있으니까.
“선후 씨, 촬영 수고하셨어요.”
“수아 씨도요.”
“그리고 오디션 합격이랑 데뷔도 축하드려요.”
그러고 보면 수아 씨랑은 제대로 축하를 못 했구나.
오디션 후에는 곧바로 촬영 들어갔었고.
그날 집에서는 가족들과…… 흠흠.
오디션에서는 수아 씨한테 제일 도움 많이 받았었는데.
그 뒤론 너무 바빠서 완전히 잊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수아 씨가 안 도와주셨으면 절대 이렇게 못 했을 거예요.”
“뭘요. 선후 씨 능력이 되니까 된 거죠.”
준비된 자만이 기회를 잡는다고 했던가.
나는 준비는 돼 있었을지 몰라도, 기회를 잡을 생각은 안 하고 있었다.
“그때 수아 씨가 등을 밀어주지 않았다면 아마 그 기회도 그냥 지나치고 말았겠죠”
나는 빈 잔에 술을 따르며 다시 한번 감사를 표했다.
수아 씨는 겸손하게 웃었다.
“저는 오히려 선후 씨한테 더 고마운데요? 선후 씨 아니었으면 이번 작품도 그냥 그렇게 망치고, 저도 그저 그런 배우로 잊혀졌을 테니까.”
“수아 씨야말로 본인 능력이죠. 지금까지는 작품 운이 없었던 것뿐이에요.”
이번에도 그 주정환이라는 인간이 망칠 뻔한 거지, 수아 씨 연기는 100점 만점에 120점짜리였다.
수아 씨뿐만 아니다. 지혜 씨, 엄마, 그리고 나도.
주연뿐만 아니라 조연들의 연기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과연 이 작품은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
고비를 넘기고 나니 이젠 걱정보다 기대가 앞섰다.
“수아 씨. 이번에 꼭 대박 터뜨립시다.”
“네!”
나와 수아 씨는 기분 좋게 술을 나눴다.
적당히 배를 채우고, 적당히 술을 마시고, 적당히 대화를 나눈다.
기본적으로 수아 씨는 바른 사람이고, 연기에 관한 이야기도 잘 통했다.
기분 좋은 술자리였다.
문득 수아 씨가 물었다.
“선후 씨는 근데, 왜 술을 절반밖에 안 따라요?”
“술요?”
그러고 보면 방금 내가 따라준 수아 씨의 술잔에는 술이 절반밖에 안 차 있었다.
“아, 죄송해요.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아니요, 그냥 물어본 거예요. 무슨 의미가 있나 궁금해서.”
“어, 그렇게 대단한 의미는 없는데. 그냥 무의식중에…… 너무 많이 마시면 안 좋으니까?”
수아 씨는 살포시 웃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희 부모님은 연극배우 출신이셨어요. 그쪽 문화가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부모님 세대 땐 돈이 없어도 매일 술판을 벌였대요.”
수아 씨의 부모님이면 꽤 예전 세대겠지.
그땐 놀 거리도 없어서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저희 부모님도 그렇게 술자리에서 처음 친해졌는데, 엄마는 아빠가 술을 항상 반 잔씩만 따라주는 거에 반했대요.”
“예?”
그런 거에 반한다고?
나도 무의식중에 반 잔씩만 따르고 있었지만, 의아한 이야기였다.
“다른 남자들은 어떻게든 한 번 해보려고 억지로라도 많이 먹이려고 드는데, 아빠만 엄마 걱정해서 술을 조금씩만 줬다고요.”
“아.”
그렇게 이유를 들으니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게 주된 이유는 아니었을 거 같은데.
수아 씨를 보면 부모님도 분명 선남선녀였을 테고.
흠.
좋아지게 된 여러 가지 계기 중 하나였던 거겠지.
“엄마가 그랬어요. 술 많이 주는 남자는 조심해라. 그리고 술 적게 주는 남자가 진짜 널 생각해주는 남자다, 라고.”
그런……가?
확실히 나도 수아 씨 생각해서 적게 주긴 했지만.
그렇게 깊이 생각한 건 아니었는데.
“저도 그 말을 성인이 되고 나서야 이해했어요. 일 때문에 술자리를 가지면 남자는 누구 한 사람 빠짐없이 절 취하게 만들려고 하더라고요.”
그 사람들이 전부 수아 씨를 어떻게 해보려는 사람은 아니었겠지만.
수아 씨 본인은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르겠네.
어려서부터 부모님께 그렇게 들었다면 더더욱.
“그랬었는데, 선후 씨는 그때도 절반씩만 줬잖아요.”
“제가요?”
엄마랑 셋이서 처음 만났을 때?
내가 그랬었나?
“그땐, 엄마도 같이 있었으니까…….”
“그래도 불순한 마음은 없었죠?”
“그야. 뭐. 네.”
그때는 수아 씨한테 불순한 마음을 가지고 자시고 할 입장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내 불순한 마음은 엄마한테 쏠려있었으니까.
수아 씨에게 쓸 불순한 마음은 없었다.
수아 씨의 존재는 오히려 방해꾼 같은 느낌이었고…….
‘너무 취하면 집에 데려다주기 힘들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술도 조금씩만 따라주게 됐고.
그런 게 좋은 이미지로 받아들여졌다니, 사람 일이란 건 참 모르겠네.
“선후 씨한테는 그게 당연한 행동이었을지 몰라도, 저는 그런 적이 처음이었어요. 엄마가 왜 아빠한테 반했다는 건지도 그때 이해했어요.”
“수아 씨…….”
“그리고 취해서 돌아온 다음 날 잠에서 깼을 때, ‘아. 이 남자는 무조건 잡아야겠다.’하고 생각했어요. 뭐, 결국 차여버렸지만.”
수아 씨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지만 그 표정에 드러난 쓸쓸함을 다 숨기진 못했다.
으으.
도대체 누구야?
이런 수아 씨를 차다니.
그렇게 잘났어?
“죄송합니다.”
“선후 씨가 왜 죄송해요? 곤란하게 만든 제가 죄송해해야죠.”
턱을 괴고 미소를 뿌리는 수아 씨가, 오늘따라 무척 요염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