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105/256)

어쨌든 그런 영상이라도 찍으면 드라마 홍보에 도움이 되겠지.

오히려 할 수 있다면 내가 부탁하고 싶을 정도다.

엄마 백으로 데뷔했단 소리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성공해야 한단 말이지.

나의 실패는 나 혼자만의 실패가 아니니까.

흥행에 도움만 된다면 나로선 무슨 짓이든 하고 싶었다.

아.

먼저 우리 소속사에 말해놔야 하나?

“야, 진선후. 뭐해?”

누군가 내 어깨를 쳤다.

“……지혜, 누나.”

우와. 깜짝이야!

우리 누난 줄 알았잖아!

‘야! 진선후!’

이건 누나가 날 부를 때 항상 쓰는 레퍼토린데.

누나가 촬영장에까지 나타난 줄 알고 놀라버렸다.

……물론 요즘은 누나가 옛날처럼 횡포를 부리진 않지만.

뼛속에 새겨진 공포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단 말이지.

“문자 와서 답장 보내고 있었어요.”

“누구? 여자 친구?”

“그런 거 없다니까요.”

지혜 누나.

드라마에서 내 상대역인 선아 역을 맡은 신지혜 배우다.

이분은 워낙 인싸력이 막강해서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대다.

겉보기에는 단아한 조선 시대 대표 미녀 같은 사람인데, 최신식 인싸다.

억지로 누나라고 부르게 하고.

지금도 아무렇지도 않게 내 휴대폰을 들여다보려 하고 말이지.

나는 얼른 휴대폰을 뒤로 숨겼다.

“같이 좀 보자. 뭐 어때서 그래? 우리 사이에.”

“우리가 무슨 사인데요.”

“첫사랑이잖아.”

“그건 드라마 얘기죠…….”

“나는 맡은 배역에 최선을 다하니까.

드라마에서 사랑하는 사이라면 현실에서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해.”

“예. 존경합니다. 신지혜 선배님.”

“그러니까 너도 날 사랑하라고.”

“불륜이잖아요.”

“실제로는 여자 친구도 없다며.”

“드라마에 몰입한다면서요.”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지.”

부담스러울 정도로 친하게 구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덕분에 촬영은 편했다.

평소에 허물없이 지내다 보니 내 연기도 자연스럽다.

연기에 대한 의견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신지혜 선배는 최고의 파트너였다.

엄마도 그렇고 신지혜 배우도 그렇고 황수아 배우도 그렇고.

나는 동료 복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근데 선후 너, 수아 선배랑 사귀는 거 아냐?”

“아니라니까요?”

“그럼, 저기서 무서운 눈으로 쳐다보는 언니는 누구야?”

누구긴 누구야. 황수아 배우지.

신지혜 선배의 말대로 그분은 무서운 눈으로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수아 선배도 연기에 몰입했나 봐요.”

배역상 나와 수아 씨는 부부고, 신지혜 배우는 불륜 상대니까.

수아 씨는 배역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내가 정말로 바람피운다고 느끼는 걸지도.

“캇뜨! 수아 씨! 연기하다 말고 어디 보는 거야?!”

“……죄송합니다.”

“하~. 수아 씨야. 이거 수아 씨가 다시 찍겠다고 한 거잖아. 그래놓고 집중 안 하면 어떡해?”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할게요.”

감독님과 스태프들에게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는 수아 씨.

수아 씨는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아무리 그래도 연기 중에 딴짓할 사람은 아닌데.

……라는 모른 척은 그만두자.

나랑 신지혜 선배가 친해 보이니까 저러는 거잖아.

수아 씨 마음은 안다.

나를 좋게 봐주는 건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수아 씨를 끌어안지도, 그렇다고 냉정하게 내치지도 못하고 있었다.

우유부단한 인간.

쓰레기라고 욕한 황진우보다 내가 더 쓰레기인 거겠지.

“손이라도 흔들어 줄까? YO~.”

“……지혜 누나, 일부러 그러는 거죠?”

“뭐가?”

지혜 누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수아 씨에게 손을 흔든다.

장난스럽기만 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연기에 대한 진지함만은 진짜였다.

이 사람이야말로 좋은 연기, 좋은 작품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사람이었다.

장난스러운 웃음 아래에 도사리는 광적인 무언가를 느낀다.

솔직히 좀 섬뜩할 정도다.

“일부러 수아 씨 자극하려는 거잖아요. 그러지 마요.”

“내가? 뭘?”

시치미를 떼는 지혜 누나.

아마 이 사람은 나를 향한 수아 씨의 마음을 눈치채고 있다.

그리고 그 수아 씨의 마음을 이용하고 있었다.

더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수아 씨의 연기력을 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질투하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자신의 연기와는 관계없는, 라이벌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배우의 연기력을 끌어내기 위해서.

작품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정말이지 이 바닥은 무서운 세계다.

역시 난 이 일을 너무 쉽게 생각했나 봐.

“여기서 몰래 키스하는 척하면 어떻게 될까?”

“하지 마요. 진짜로.”

이 사람이라면 진짜 할 거 같아서 무서웠다.

그러고 보니 오디션 때도 키스했었지.

지금 생각하면 오싹하다.

그때는 그냥 4차원인 줄 알았는데, 그런 귀여운 게 아니었어…….

“캇뜨! 수아 씨잇!!”

현장에서는 또 수아 씨가 NG를 내고 있었다.

하.

“죄송합니다, 감독님, 10분만 쉴게요. 뭔가 감이 올 거 같아요.”

“하. 내가 진짜. 알았어. 10분간 휴식.”

감독님도 이래저래 불평하면서도 배우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해준다.

그만큼 황수아라는 배우의 실력이 뒷받침되니까 가능한 얘기지만.

“아. 이쪽으로 온다. 난 도망가야지~.”

수아 씨가 이쪽으로 오는 걸 보고 지혜 누나는 도망친다.

그러면서 내 어깨를 손으로 싹 훑고 가는 걸 잊지 않는다.

진짜 여우 같은 여자다.

사슴같이 순진한 수아 씨는 이걸 보고 또 오해하겠지.

“선후 씨.”

봐. 왔잖아.

“예.”

“솔직히 말해줘요. 나예요, 지혜예요?”

세상에.

“수아 씨. 잠깐 조용한 데로 가죠.”

나는 촬영장 한쪽 구석으로 이동했다.

수아 씨는 묵묵히 내 뒤를 따라왔다.

여기면 괜찮을까.

누군가 보려 하면 보일 수는 있겠지만, 듣는 사람은 없으니까.

“수아 씨.”

내가 부르자 수아 씨는 어깨를 움찔했다.

수아 씨 특유의 저돌성을 발휘해서 일단 저질렀지만, 조금 지나고 나니 제정신이 돌아온 것 같다.

나는 한숨을 푹 쉬고 말했다.

“수아 씨. 우리가 무슨 관계예요?”

“……그.”

“애인 관계. 이런 관계라도 괜찮다고 한 건 수아 씨예요. 질릴 때만, 남는 시간에만 상대해줘도 된다고 한 것도 수아 씨고요. 아니에요?”

“……맞아요.”

“내가 지혜 씨랑 사귀든 뭘 하든, 수아 씨가 간섭할 권리 없잖아요.”

“……그, 래도, 눈에 보이니까…….”

“수아 씨. 다른 데 신경 쓰지 말고 연기에 집중해요. 수아 씨가 반응을 해주니까 지혜 씨도 일부러 더 저러는 거잖아요.”

“……네.”

“그럼 가요. 스탭들 다 기다리고 있으니까.”

수아 씨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촬영 장소를 향해 터덜터덜 걸어간다.

나는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그 뒷모습을 배웅했다.

“오~ 선후 최고.”

숨어서 듣고 있던 지혜 누나가 얼굴을 빼꼼히 내민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하.”

나는 깊이 탄식했다.

저 신지혜에게 인정받다니.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더 좋은 작품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건 신지혜 배우만이 아니다.

나도 그렇다.

신지혜와 진선후는 같은 종류의 인간이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작품에서 성과를 내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나 혼자 노력한다고 해서 드라마가 흥행하는 건 아니다.

다른 배우들, 특히 투톱 히로인인 신지혜와 황수아의 좋은 연기는 필수 불가결이었다.

황수아의 연기력을 끌어내기 위해, 질투심과 비참함을 유발한다.

나는 신지혜가 했던 것과 똑같은 짓을 한 것이다.

그리고…….

“캇뜨! 조오아써! 지금 표정 연기 최고야! 수아 씨, 하려면 잘할 수 있잖아! 어?”

황수아 배우도 그렇다.

수아 씨도 알고 있다.

일부러 우리가 수아 씨를 자극하고 있다는 걸.

그리고 수아 씨는 그 사실을 알면서, 일부러 유도당하고 있는 것이다.

더 좋은 연기를 위해.

……사실 우리 중에 제일 무서운 사람은 수아 씨가 아닐까. 

나는…… 배우의 세계를 너무 우습게 본 게 틀림없다.

“우와. 무서워.”

말하는 것과 반대로, 지혜 누나는 생긋생긋 웃으면서 나와 어깨동무를 했다.

수아 선배에게 보여주기 위해.

지혜 누나의 가슴이 내 팔에 눌린다.

음. 이건 60C 정도인가.

수아 씨보다 조금 더 크네.

미소 보다는 조금 작고.

가족의 영향으로 큰 가슴을 좋아하게 된 나.

수아 씨에겐 힘든 싸움이 되겠지.

나는 그런 지혜 누나에게 홀린 것처럼 헤실헤실 웃는다.

남편을 다른 여자에게 빼앗긴 수아 씨는 분한 눈으로 우리를 째려보고 있었다.

더 좋은 연기를 위해. 더 좋은 작품을 위해.

그 슬로건 아래에서 우리 세 사람은 암묵적 연기 동맹을 맺었다.

작품을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하는 인간들끼리.

그것은 연기 속의 연기, 우리들만의 작은 극중극이었다.

할로윈 특집 - 스프링 바니걸스 

“해피 할로윈!”

집에 돌아오니 바니걸이 있었다.

그것도 두 명이나.

어깨끈이 없는 검은색 수영복.

검은색 망사팬티스타킹.

목에는 검은색 나비넥타이가 달린 흰색 옷깃과 양 손목엔 흰색 커프스.

검은색 하이힐과 검은색 토끼 귀, 하얀색 토끼 꼬리까지.

한 명은 익숙한 얼굴이다.

내 동생 미소.

익숙하지 않을 리가 없다.

하지만 다른 한 명은 잘 모르는 얼굴이었다.

“모르는 얼굴이라니! 나야! 수진이!”

“아! 가슴은 납작 만두지만 노래 실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진이잖아?”

스프링의 메인 보컬 진이.

본명 박수진. 20세.

키도 작고 몸매도 빈약하다.

몸무게는 37kg.

작다고 만만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머리를 금색으로 물들였지만, 그것조차 귀여워 보일 뿐이다.

하지만 노래 실력만큼은 최고다. 인정.

작은 거인이라고 불릴 만하다.

“우왕~ 납작 만두래! 미소야, 오빠 혼내줘!”

“푸훗. 납작 만두래.”

진이는 우는 척하며 미소에게 안겼지만, 그 미소 또한 비웃었다.

그리고 하필 안긴 곳은 미소의 가슴.

D컵의 우월한 가슴이었다.

“이씨!”

진이도 귀여운 외모와 뛰어난 보컬로 많은 사랑을 받지만, 그것만으론 슴부격차를 뛰어넘을 수 없다.

‘가슴은 대대익선’이라는 말이 삶의 신조인 내 눈에 진이는 어린애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지금도 진이는 미소와 같은 디자인의 바니걸 옷을 입고 있지만, 가슴 부위가 헐렁하게 벌어져 젖꼭지가 보이고 있었다.

“이건 일부러 내놓은 거거든?! 치명적이잖아!”

치명적.

풋.

모르는 사이에 뜻이 바뀌었나.

명치가 보이긴 하는데.

“그래. 힘내.”

“이!”

웃으면서 놀리자 달려들려는 진이.

활짝 드러나 있는 양쪽 겨드랑이를 잡고 위로 들어올린다.

깜짝 놀랄 정도로 가볍다.

“내려줘!”

어린애 다루듯 머리 위로 들었다 내렸다 하자 내려달라며 파닥거린다.

“오빠. 그래도 오빠 축하해주러 왔는데.”

“축하?”

“그래! 이 배은망덕한 오빠야! 축하해주러 왔는데 놀리기나 하고!”

그러고 보니 데뷔 축하한다고 문자가 왔었지.

거기에 선물도 사서 온다고 적혀 있었다.

바로 삭제하고 잊어버렸는데.

정말로 와버렸구나.

나는 미안한 마음에 진이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고마워. 선물은?”

고마운 건 고마운 거지만, 얼른 선물만 받고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바니걸 복장의 미소를 봤더니 자지가 반응해버렸으니까.

애들은 돌려보내고 어서 어른들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 선물은…… 두구두구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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