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야외 촬영장에 도착했다.
피곤해 보이는 감독님과 스태프들에게 힘차게 인사한다.
어젯밤 피로해서 쓰러졌던 게 거짓말처럼 몸에 힘이 넘쳤다.
컨디션 최고조.
오늘 촬영은 더욱 잘 될 거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촬영도 힘내자!
드라마 공식 홍보 영상
“안녕하세요. 아나운서 나주리입니다.”
“안녕하세요. ‘꽃과 당신과 나’에서 ‘황진우’ 역을 맡은 배우 진선후입니다.”
50%의 긴장, 30%의 기대, 20%의 흥분.
나는 그런 신인 연기자를 연기한다.
굳이 특별할 필요는 없다.
평소 하던 대로, ‘평범한 진선후’를 연기하면 된다.
찐따 같지만 진지하고 순수한 진선후를.
나를 믿어라.
“진선후 배우님은 이번이 첫 작품이시라면서요?”
“네. ‘꽃과 당신과 나’가 제 데뷔작입니다.”
“황진우라면 이번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이라고 들었어요. 첫 작품부터 중요한 배역을 맡으셨는데, 부담감은 없으세요?”
“부담감, 당연히 있습니다. 하지만 저를 믿고 중요한 배역을 맡겨주신 만큼 최선의 연기로 보답해 드릴 생각입니다.”
“원래 황진우 역은 주정환 배우가 연기하기로 돼 있었잖아요?”
“아…… 예.”
“이번에 주정환 배우가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하차하고 그 자리에 들어오셨는데, 처음부터 예정된 자리였나요?”
“아니요. 해당 뉴스가 뜬 날에 즉석에서 오디션을 보고 캐스팅됐습니다.”
“즉석에서 캐스팅이요?”
“네. 마침 촬영현장에 있었거든요.”
“그날 촬영현장엔 무슨 일로?”
“사실 저희 어머니께서 촬영 중이셔서요. 같이 오게 됐습니다.”
“어머니? 누구신데요?”
“예. 임신혜 배우님입니다.”
“아! 선후 씨가 임신혜 배우 아들이세요?!”
“예. 그렇습니다.”
“세상에. 그러고 보면 닮으신 거 같아요. 눈이나 입술이나.”
“하하.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번이 첫 작품이라는 말은 그전엔 배우가 아니셨단 거잖아요.”
“예. 그렇죠.”
“그럼 오디션은 어쩌다 보게 되신 거예요?”
“앞서 말씀하신 배우분이 하차하신 뒤에, 바로 새 배우를 구하지 못하면 드라마 자체가 엎어질 위기였습니다.
남자 주인공 분량을 전부 새로 찍어야 했으니까요.
어머니께서 이번 드라마를 열심히 준비하신 걸 봐왔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런 사태만은 막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 오디션을 신청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갑자기 신청한 오디션에서 덜컥 합격하신 거군요?”
“예. 감사하게도 심사해주신 분들이 좋게 봐주신 거 같습니다.”
“만장일치로 합격하셨다고 들었어요. 오디션을 미리 준비했던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사실 오디션 자체는 준비하지 않았지만 ‘꽃당나’의 대본은 다 외우고 있었습니다. 집에서 어머니와 대본 연습을 계속 같이 해왔거든요.”
“대본 연습이요? 어머니면 임신혜 배우랑요?”
“예. 사실 대본 연습은 초등학생 때부터 꾸준히 해왔습니다.”
“그럼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배우의 꿈을 길러오신 거네요?”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처음 대본을 읽기 시작한 건 치료 목적이었거든요.”
“치료요? 무슨 치료요?”
“사실 제가 정신적으로 좀 문제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한 번씩 안 좋아질 때가 있고요.”
“정말요? 전혀 그렇게 안 보이세요.”
“감사합니다. 실은 얼마 전에도 쓰러지는 바람에 어머니께 걱정을 끼친 적이 있었습니다.”
“아! 혹시 진미소?!”
“예. 미소가 바로 제 동생입니다.”
“그랬구나! 맞네! 아이돌 그룹 스프링의 진미소 어머니가 임신혜 배우셨죠! 그럼 진선후 배우랑 미소도 남매구요! 생각도 못 했어요!”
“하하.”
“세상에. 그럼 그때 동영상에 나온 쓰러진 오빠가 진선후 배우란 거잖아요? 저도 그 영상 봤는데.”
“아, 네.”
“그때 많은 분들이 걱정 했었잖아요. 저도 그렇구요. 지금은 괜찮으신 거예요?”
“예. 약도 먹고 치료도 받고 해서 지금은 많이 나아졌습니다.”
“아, 다행이다. 정확히는 어디가 안 좋으신 거예요?”
“PTSD나 공황장애 같은 게 좀…….”
“PTSD? 무슨 일 있으셨어요? 사고라든가?”
“사실 제가 학대 아동 보호센터 출신이라서요.”
“학대 아동요?!”
“예. 6살 때 센터에 맡겨졌다가 지금 어머니, 임신혜 배우께 입양됐습니다.”
“아…….”
“그럼 그. 흠흠. 죄송합니다. 그런 장애 치료를 위해서 대본 연습을 시작하신 거군요?”
“네. 어머니께서 바쁘신 와중에도 제 치료를 위해 같이 대본 연습을 해주셨습니다. 그렇게 시작해서 지금까지 해왔습니다.”
“대본 연습이 치료에 효과가 있었나요?”
“네. 효과가 없었으면 지금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겠죠. 어렸을 땐 말더듬이도 정말 심했거든요. 연극 치료라는 게 있는데, 그거랑 비슷한 거로 보시면 될 거 같습니다.”
“어렸을 땐 막 나가서 놀고 싶고 그랬을 거 같은데, 대본 연습이 힘들진 않았나요?”
“전혀요. 연기가 어렵다고는 생각했어도 괴롭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 없습니다. 전 어머니와 함께 뭘 한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거든요.”
“어머님이랑 정말 사이가 좋으신 거 같아요. 말씀하시는데도 막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데.”
“예. 웬만한 보통 모자지간보다도 더 사이좋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께서 절 친아들 이상으로 잘 대해주셨으니까요.”
“그렇게 어머니께 배운 연기로,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 구해주다니! 정말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이야기예요!”
“아직은 구했다고 말씀드리긴 힘들지만요. 촬영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니까요. 부디 좋은 결과물을 내서 정말로 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감독님이나 다른 배우분들도 칭찬이 자자하세요. 연기가 보통이 아니시라고. 20년은 연기한 베테랑 배우 같대요.”
“저는 어머니께 배운 대로 연기하는 것뿐이라 부끄럽습니다. 신인이라 너그럽게 봐주신 것 같습니다.”
“드라마에서도 임신혜 배우님이 어머님 역할로 자주 나오시잖아요. 실제 어머니와 드라마 속 어머니를 비교하면 어떤가요? 비슷하신가요?”
“저희 어머니, 그러니까 임신혜 배우님이 주로 드라마에서 악역으로 많이 나오시고, 워낙 연기도 잘하시다 보니 실제 성격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많으신데요.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고, 실제로는 애교도 많으시고 정말 상냥한 어머니십니다.”
“집에 가서 혼날까 봐 그렇게 말씀하는 거 아닌가요?”
“하하. 절대 아닙니다.”
“그럼 드라마 이야기를 좀 할게요. 진선후 배우님이 생각하시기에 이 드라마, ‘꽃당나’의 매력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우선은 스토리가 정말 재미있습니다. 그 스토리를 진행해 나가는 배우분들의 연기도 대단하시고요. 주인공인 김선아라는 캐릭터도 멋지죠. 통통 튀는 성격에 진지할 땐 진지하고, 굉장히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생각합니다.”
“본인이 연기하시는 황진우는 어떤 캐릭터인가요?”
“능력 있고 잘생기고 멋있고, 겉은 냉정하지만 속은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남자입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잘 생기고 멋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아니라 황진우가요.”
“하하. 네. 그럼 성격 면에서, 냉정하지만 뜨겁다는 건 어떤 건가요?”
“일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냉정하게 판단하고 추진하는 냉혈남. 하지만 사랑하는 여자에 대해서는 뜨거운 열혈남. 그게 황진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일과 여자가 충돌하면 어떻게 되나요? 오빤 일이 중요해 내가 중요해? 그런 상황?”
“실제 드라마에서도 여주인공인 김선아가 사업 파트너로 나오면서 일적으로 충돌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일의 효율과 사랑하는 여자 사이에서 고민하는데요. 황진우가 어떤 결론을 내릴지는 드라마에서 확인해주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혹시 황진우 연기 짧게 한 번만 보여주실 수 있으신가요?”
“아, 네. 그럼 잠깐 일어나주시겠습니까?”
“어떻게, 이렇게요?”
“예. 드라마에서 황진우와 김선아가 처음 재회하는 장면입니다.”
나는 아나운서를 벽 쪽에 세우고 팔로 벽을 짚었다.
쿵.
“……괜찮아요?”
“아.”
유리문이 닫힐 때 선아를 도와주는 장면을 아나운서 상대로 재연했다.
“와. 짧고 굵은 연기 잘 봤습니다. 깜짝 놀랐어요. 이게 배우구나.”
아나운서가 한숨을 쉬면서 가슴을 쓸어내린다.
“지금 그게 황진우와 김선아가 처음 재회하는 장면이라고 하셨죠? 황진우가 김선아를 구해주는 건가요?”
“그건 방송에서 확인해주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꼭 봐야겠어요. 너무 궁금해요.”
“감사합니다.”
“이번 드라마에서 신지혜와 황수아라는 멋진 여배우 두 분과 함께하시게 됐는데요. 혹시 두 분 중에 어느 쪽이 더 이상형이신가요?”
“음, 굳이 말씀드리자면 제 이상형은 임신혜 배우님입니다.”
“하하. 또 그렇게 빠져나가시고.”
“정말입니다.”
“혹시 여자 친구는 있으세요?”
“아니요. 없습니다.”
“정말이세요? 숨겨놓은 여자 친구 없어요? 정말 없다고 하면 여자 친구분이 실망하실 텐데.”
“정말로 없습니다.”
“그럼 이상형은? 좋아하는 연예인이라든가.”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임신혜 배우님이 이상형이라…….”
“또 그러신다. 그럼 아나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하. 그건 대본에 없는 내용 같은데요.”
“시청자분들이 궁금해하시는 내용을 듣는 게 제 임무니까요.”
“아, 예.”
“그래서. 어떤가요?”
“예? 뭐가요?”
“아나운서요.”
“아……. 특별히 어떻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지금 봤을 때 느낌은 어떠세요?”
“지금은 드라마 촬영에 집중하느라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습니다.”
“성실한 태도까지, 점점 더 멋있어 보이는데요?”
“감사합니다.”
“이번 작품에 임하는 각오 한 말씀 해주세요.”
“‘꽃과 당신과 나’는 저에겐 정말 운명 같은 작품입니다. 저에게 이런 기회를 주신 감독님, 제작진 여러분, 배우님들, 그리고 저에게 연기자의 길을 열어주신 어머니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시청자분들께도 한마디 부탁드릴게요.”
“네. 많은 분들이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까, 기대하셔도 좋을 거 같습니다. ‘꽃당나’가 저에게 운명적인 작품이었던 것처럼, 여러분께도 운명적인 작품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꽃과 당신과 나’.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꽃과 당신과 나’에서 주인공 황진우 역을 맡은 진선후 배우 만나봤습니다. 저는 아나운서 나주리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연기 동맹
지옥 같았던 촬영 첫 6일이 지났다.
나는 살아남았다.
미칠듯한 일정을 소화해내고, 밀려있던 내 분량은 거의 끝낼 수 있었다.
앞으론 정상적인 일정으로 굴러가겠지.
겨우 안심이다.
지금은 여배우 3명이 다시 찍겠다고 주장한 개인 신을 재촬영하고 있다.
덕분에 나는 조금 여유가 있는 상태.
촬영장 한쪽에서 휴대폰을 들여다볼 여유가 있을 정도였다.
『선후 오빠!
배우 데뷔 축하해!
홍보영상 봤어. 엄청 멋있더라.
(꽃가루 뿌리는 이모티콘)
하지만 나만의 선후 오빠가 아니게 되어버려서 슬퍼.
(우는 이모티콘)
다음에 선물 사들고 갈게.
기대하고 있어.
(키스하는 이모티콘)
-오빠의 귀여운 동생 수진이가.』
홍보용으로 찍은 인터뷰가 드디어 올라왔나 보네.
무서워서 나는 못 봤지만, 주위 반응을 봐서는 괜찮았던 거 같다.
그런데, 수진이?
수진이가 누구야?
내 동생은 미소뿐인데.
아.
혹시 스프링의 진이?
진이 본명이 박수진이었지?
짧은 금발 머리와 나보다 납작했던 가슴을 떠올렸다.
신기하네.
연예인한테 축하 문자도 다 받고.
나도 출세했구나.
하지만 누가 보면 오해할 수도 있으니까.
메시지 삭제. 삑.
징징-
어라. 또 왔다.
읽고 그냥 삭제한 거 들켰나?
하지만 이번엔 진이가 아니었다.
세아였다.
『진선후 배우님.
연기자 데뷔 축하드립니다.
미소에게서 이야기는 벌써 들었지만,
개인적으로 연락을 드리는 건 폐가 될 것 같아
홍보영상을 보고 난 후에 이렇게 연락 드립니다.
지난번 SNS 영상 반응이 워낙 좋아서
다음에 또 부탁드릴 계획이었는데
앞으론 힘들어질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날씨가 쌀쌀합니다.
부디 건강에 유의하시고
멋진 연기 보여주시길 멀리서 응원하겠습니다.
-한세아 드림.』
세아한테서 온 응원 메시지잖아!?
와! 진짜냐고!
메시지 저장.
평생 저장해놔야지.
그리고 답장도 보낼까.
『응원 감사합니다.
SNS 영상은 가능하다면 저도 하고 싶습니다.
소속사는 다르지만, 저는 배우이기 이전에 미소의 오빠니까요.
언제든지 연락해주세요.
-진선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