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256)

* * *

“캇뜨! 좋아! 야~ 선후 표정 너무 좋고!”

“감사합니다.”

어제는 실내 촬영, 오늘은 첫 야외촬영이다.

내가 찍은 첫 신은 회사 입구에서 김선아와 우연히 마주치는 장면.

첫사랑인 김선아와의 중요한 재회신이자, 커피 PPL이자, 회사 PPL이자, 동시에 까칠한 남주가 사실은 스윗하다는 걸 보여줘야 하는 장면이다.

“선후 오늘 좋은데? 나 막 두근거렸잖아.”

감독님에 이어 신지혜 배우한테도 칭찬받았다.

휴. 괜찮았던 것 같다.

“선배님도요.”

“누나.”

“예. 지혜 누나.”

나한테 누나란 곧 소영 누나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누나란 호칭이 잘 붙지 않는다.

“이거 봐. 여기서 이 표정. 이루지 못한 첫사랑에 대한 달콤쌉싸름함과 함께 곤혹스러우면서도 반가운, 바로 이 표정이라고.”

“가, 감사합니다.”

촬영분을 모니터링 하면서 감독님은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신인 배우를 칭찬으로 키우려는 건지.

감사하긴 하지만 너무 과장돼서 낯간지러웠다.

“자 그럼 바로 다음 신으로 가자고. 빌딩 테라스 신이야.”

우연히 마주친 김선아와 황진우.

두 사람은 테라스에 앉아 회포를 푼다.

벌써 10년도 더 지난 첫사랑.

헤어질 땐 안 좋게 헤어졌지만, 다시 만났을 땐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었다.

진심으로 사랑했었으니까.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시절을 함께 보냈으니까.

그러나 지금 황진우는 대기업 프로젝트팀 실장.

그리고 김선아는 작은 벤처 기업의 영업사원이었다.

“진우 씨가 그 팀의 실장님이라구요?”

놀라는 선아.

그럴 만도 했다.

김선아와는 재벌 2세라는 타이틀을 떼고 만났으니까.

김선아는 황진우가 이 회사 회장 아들이란 걸 모른다.

순수하게 사람 대 사람으로, 남자 대 여자로 사랑했다.

그래서 더더욱 황진우는 김선아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김선아는 대기업 총수의 아들 황진우가 아닌, 인간 황진우 그 자체를 사랑해준 유일한 여자니까.

* * *

“……감독님. 저 단독 신도 다시 찍을래요.”

“뭐? 왜?”

계속 잘 찍고 있던 신지혜 배우가 갑자기 폭탄선언을 했다.

감독님은 당연히 어이없어한다.

“사람이 바뀌었으니까 감정도 바뀌잖아요. 앞에 찍은 거는 주정환 용이었으니까 진선후 용으로 다시 찍을래요.”

“……지혜 씨. 잘하고 싶은 맘은 알겠는데, 그럴 여유가 없어요. 시간 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그래도 다시 찍어줘요.”

“허.”

신지혜 배우도 의외로 고집이 있었다.

안 된다는 감독님과 해달라는 신지혜 배우.

한참을 실랑이하던 두 사람은 결국 타협점을 찾았다.

“전부 다는 안 돼. 중요한 장면 몇 개만 다시 찍을 거야.”

“좋아요.”

신지혜 배우의 판정승이었다.

그리고 감독님의 시련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감독님. 그럴 거면 저도 다시 찍을래요.”

이번엔 엄마였다.

“신혜 씨까지 왜 이래?”

감독님은 울 기세였다.

“나는 아들이 진짜 아들이 됐으니까. 내가 더 잘할 수 있어요.”

“허.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완전 진심이에요.”

“신혜 씨이. 우리 시간 없는 거 알잖아.”

“중국에 먼저 보내줄 거 때문에 그러는 거잖아요? 그럼 앞에 찍은 건 중국용으로 편집해서 보내주고, 새로 찍은 건 국내 방영분으로 새로 편집해요.”

“아이고. 신혜 씨야. 편집팀 죽일 거야? 나도 좀 살려주라.”

나는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엄마나 신지혜 배우가 다시 찍고 싶어 하는 마음도 이해한다.

나도 그러니까.

감독님이 잘했다고 칭찬한 장면도, 내 눈으로 보면 마음에 안 들어서 다시 찍고 싶었다.

으음. 나도 한번 말해 봐?

그래도 신인 배우가 감독님한테 다시 찍자고 하는 건 좀 그렇겠지?

“저, 진선후 배우님. 커피 드세요.”

“아, 네.”

눈앞에 내밀어진 종이컵을 받는다.

“어? 선하잖아? 왜 그래, 서먹하게.”

쭈뼛거리며 커피를 전해준 사람은 고3 알바생인 김선하였다.

바로 어제 오빠동생으로 말도 텄었는데.

하루 사이에 모르는 사이처럼 서먹해져 있었다.

“원래 배우이신 줄도 모르고…… 어젠 죄송했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는 선하.

“뭐가 죄송해? 그땐 매니저였는데.”

“원래 배우 아니셨어요?”

“연기 연습은 꾸준히 했지만 카메라 앞에 찍는 건 이번이 처음이야.”

“그랬구나……. 저는 원래 배우인데 제가 못 알아봐서 그러신 줄 알았어요.”

쑥스러운 듯 배시시 웃는 선하.

“그럼 이번이 데뷔작이신 거네요?”

“응. 완전 처음이야.”

학대 아동으로 뉴스에 나온 건 빼도 되는 거 맞지?

스프링 반주 쳐준 건 배우 진선후로서 한 일이 아니니까 그것도 빼도 될 테고.

“아! 그럼 저 오늘부터 진선후 배우님 팬 할게요! 그럼 제가 팬 1호 맞죠?”

“응. 가족 제외하면 처음일 거야. 아마도.”

“앗싸. 그럼 팬클럽도 만들어야지. 공식 팬클럽이라고 해도 돼요?”

“안 될 거 뭐 있어. 마음대로 해.”

“그럼 기념으로 사인 하나만…….”

“사인? 사인 같은 건 생각도 안 해놨는데.”

“그냥 이름만 적어주셔도 돼요.”

“응~ 종이랑 펜도 없는데.”

“제가 가져올게요!”

선하는 후다닥 달려갔다가 금방 종이와 펜을 가지고 돌아왔다.

내가 사인이라니.

솔직히 부끄러워서 거절하고 싶었지만.

이렇게 종이랑 펜까지 가져와서야 거절할 수도 없었다.

흠. 뭐라고 써야 하지.

진선후

to. 김선하

나의 1호 팬 선하에게

응원 고마워!

일단 무난하게 써본다.

김선하. 왠지 익숙한 이름이란 말이지.

여주인공인 김선아랑 비슷해서 그런가?

“이러면 될까?”

“네! 진짜 고맙습니다! 평생 팬 할게요! 절대 안 옮겨탈게요!”

“하하. 고마워. 나도 선하 생각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게.”

“네!”

첫 팬이 생겨버렸다.

왠지 쑥스럽네.

내 연기를 보고 팬이 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배우가 되어야지.

“어이 학생! 배우님들 방해하면 안 된다니까!”

“아, 괜찮아요. 아는 사이라서요.”

“예! 지금 가요! 선후 오빠, 전 일 하러 가볼게요. 아자. 화이팅 하세요.”

선하는 작게 주먹을 쥐어 보이고는 저쪽으로 달려갔다.

……화이팅 하자.

* * *

오늘 촬영도 힘들었다.

신지혜 배우, 엄마에 이어 황수아 배우까지.

메인 여배우 세 사람이 한꺼번에 다시 찍겠다고 감독님에게 횡포를 부렸다.

하지만 다시 찍는 건 우선도가 낮으니 뒤로 밀리고, 우선 급한 나부터 분량을 채워야 했다.

다시 찍을 분량은, 가능하면 중국 방영분에도 넣는 방향으로.

절대 불가능할 거 같으면 국내 방영분에만 바꿔 넣기로 했다.

결국은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여배우들이 개인 분량을 새로 찍게 되면, 나는 그동안 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 후폭풍은 나한테도 덮쳐왔다.

주어진 시간은 그대론데 찍어야 할 분량은 늘어났으니, 나는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내가 빨리 찍어야 남는 시간에 여배우들도 다시 찍을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실수 없이, 더 빨리 찍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려야 했다.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눈치를 봐야 했다.

정신적 피로도도 배로 늘어났다.

“지쳤다…….”

어제 촬영의 피로, 거기에 술 파티, 거기에 섹스 파티.

그리고 오늘의 스파르타식 촬영까지.

피곤한 것도 당연했다.

연기는 제대로 했는지 걱정이다.

역시 나는 배우 일을 너무 우습게 본 걸까.

온종일 구두 신고 뛰어다녔더니 발바닥이 아플 지경이었다.

매일 이렇게 바쁘면 어떡하지?

집에 가서 엄마를 안아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데.

……나, 이 일 계속할 수 있을까?

오늘 아침에 가족들과 맹세했는데, 벌써 마음이 약해지려 하고 있었다.

1호 팬인 선하와도 화이팅 하기로 했는데.

“선후야, 고생했어.”

오늘도 나는 엄마 차를 타고 퇴근한다.

당분간은 엄마의 매니저 누나가 내 매니저도 겸하기로 했다.

어차피 나는 이쪽 촬영뿐이고.

엄마랑 같이 다닐 수도 있으니 나는 좋았다.

“피곤하지? 잠깐 눈 좀 붙여.”

“응…….”

나는 차 시트에 몸을 눕히고 눈을 감는다…….

“선후야. 다 왔어.”

……눈을 감았다 뜨니 아파트 주차장이었다.

정말로? 몰래카메라 아니야?

세상에. 타임머신이 이미 개발돼있었다니.

나는 비틀비틀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로 올라갔다.

“힘들어도 일주일만 참아. 그럼 촬영도 정상궤도에 올라갈 거야.”

“응…….”

나는 졸린 걸 핑계로 엄마에게 기대듯이 안겼다.

폭신폭신.

살 향기도 좋다.

“엄마 너무 좋아.”

“얘는.”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나는 쭉 엄마를 끌어안고 있었다.

힘들어도 행복했다.

엄마랑 함께 있으니까.

아직 더 노력할 수 있을 거 같았다.

힘내자.

“소영이랑 미소는 벌써 자나? 집에 있는 거 같은데.”

집안은 조용했다.

착한 어린이는 이미 잘 시간이다.

“선후도 오늘은 얼른 자. 내일도 촬영이니까.”

“응. 엄마도 안녕히 주무세요.”

엄마 뺨에 키스하고 헤어진다.

오늘 하루는 쉬자.

지금이라면 내일 아침까지 한 번도 안 깨고 기절해 있을 자신이 있었다.

“…….”

그런 내 자신감은 방문을 열자마자 산산이 부서졌다.

“오. 진선후. 드디어 왔냐?”

“오빠! 살려줘!”

대체 이건 무슨 상황일까.

내 침대에는 미소가 어디서 많이 본 수갑으로 손발이 구속돼 있었다.

알몸으로, 부끄러운 부분을 다 내놓고.

누나는 피아노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그런 미소를 구경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잠이 확 달아나버렸다.

자매○○ 샌드위치 

상황파악이 힘들다.

발가벗겨진 채 구속된 미소.

그리고 그걸 여유롭게 구경하는 누나.

이 상황을 만든 범인은 누나인 거겠지.

자칫 잘못하면 범죄였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누나. 대체…… 이게 뭐 하는 거야.”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거든?”

“어? 누나가 그런 거 아냐?”

“네 방에 와보니 쟤가 저러고 있더라.”

“…….”

그럼 미소가 스스로 손발을 수갑으로 구속했다고?

발가벗은 채로? 내 방에서?

그게 정말이냐고 미소에게 눈짓으로 묻는다.

“에헤.”

난처한 듯이 웃는 미소,

……진짜냐고.

“니들 정말 변태 아냐? 대체 평소에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언니한텐 듣고 싶지 않거든? 그리고 난 이번이 처음이거든?”

“거짓말하지 마. 변태 같은 기집애야.”

“내가 변태면 언니는 개변태야. 어젠 내 보지에 들어갔던 자지도 빨았으면서.”

“너도 빨게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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